이 생명 다하도록 음악으로 행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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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위대한 스승을 만나다
2022 성정예술인상 수상, 영원한 첼리스트 나덕성

모차르트홀에 거장 세 분이 모였다.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바이올리니스트 김민… 그러나 우리가 주목했던 건 바로 첼리스트 나덕성이다. 지난 12월 16일 모차르트홀에서는 이 세 분이 연주자로 나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과 피아노 트리오 Op.97 ‘대공’을 각각 연주했다. 음악가로 활동한지 어언 반세기 이상, 아니 거의 한 세기에 가까운 세월 동안 무대를 지켜온 분들이다. 청중들은 조용했지만 연주 내내 응원의 박수와 넘치는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이날 연주회는 불세출의 영웅 피아니스트 빌헬름 캠프(Wilhelm Kempff)와 당시 베를린필 악장 바이올리니스트 토마스 브란디스(Thomas Brandis) 그리고 초대 독일문화원장 한스 잘먼(Hans Sallmann) 등에게 헌정하는 음악회였다. 지금은 모두 천국에 가 있는 이들이 한국 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이날 프로그램에는 첼리스트 나덕성이 20대에 토마스 브란디스, 그리고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함께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를 연주했을 때의 사진이 낡은 필름처럼 실려있었다. 어찌 감회가 새롭지 않겠는가.
첼리스트 나덕성은 우리에게 보배와 같은 위대한 스승이다. 최근 그 점을 높이 평가해 한 문화재단에서 큰 상을 수여했기에 더욱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음악 발전은 홀로 이룩하게 아닙니다. 초창기 황무지 같은 이 땅에 독일에 있는 음악가들이 참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아니 봉사한 것이죠. 이번 음악회는 그 감사함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연주회 제목도 ‘위대한 영웅(베토벤)의 음악으로 은인을 기리며’로 정했고요. 특히 세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베토벤이 나오기까지 루돌프 대공이라는 위대한 후원자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처럼, 대한민국의 음악이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은인들이 있다는 것을 꼭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2022년 제5회 성정예술인상에 첼리스트 나덕성이 선정됐다. 성정예술인상은 재단법인 성정문화재단이 대한민국을 빛낸 문화예술인과 문화예술 발전에 공헌한 예술인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2018년에 제정한 상이다.
첼리스트 나덕성은 대한민국 클래식 실내악 문화를 개척한 선구자로서 한국첼로협회를 창설한 1세대 첼리스트이다. 국내외 수많은 연주활동은 물론 교육자로 음악에 대한 열정과 꿈을 가진 후학 양성에 이바지했다.
1941년 전주에서 태어난 그는, 전주고등학교 시절 음악선생님을 통해 첼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1974년 서양음악의 본고장인 독일의 쾰른국립음대를 졸업하였고, 그해 동아일보 주최로 열린 귀국 독주회를 시작으로 본격적 음악인생을 시작하였다. 서울시향, KBS교향악단 등 국내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교향악단들과 숱한 협연을 펼쳐왔다.
나아가 그는 독주회, 듀오 콘서트, 실내악, 첼로오케스트라 연주회 등을 개최하여 첼로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전방위적 연주 활동으로 주목받아왔다. 1977년 아시아 청소년음악협회(AYMA) 창설 멤버로 아시아 각국을 순회하며 지도 활동을 펼치는가 하면, 같은 해에는 국내 최초로 김남윤 교수와 함께 음악캠프를 시작, 젊은 음악영재 발굴의 길을 열어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불러왔다.
1978년에는‘서울무지카트리오’를 창단, 한국음악계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등 실내악 운동의 개척자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1988년 서울첼리스텐앙상블을 조직해 서울국제음악제를 비롯한 일본 무대에서의 교환 연주와 2000년부터 100인의 대규모 첼로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지휘했던 장대한 연주는 그의 개척과 실험정신을 평가받는 기획으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성정문화재단 예술인상 수상 소감 부탁드립니다.
원로들한테 이런 상을 주는 이유는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고 기린다는 의미입니다. 역사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발전적이죠. 이런 상을 받게 되어 자랑스럽고 무엇보다도 감사합니다. 스스로 귀하다 여기게 되었고, 내 몸을 쉽게 허투루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활동했던 당시 음악계는 지금과 같지 않았습니다. 기획사나 매니지먼트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한국일보나 동아일보 등 신문사에서 하는 신인음악회 정도가 기획음악회의 전부였죠. 그래서 서양 음악을 공부해서 가져오더라도 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어렵고, 당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는 이유입니다. 현제명 작곡의 오페라 춘향(대 오페라 춘향전) 원전 악보가 남아 있는 게 없습니다. 당시 한국 음악을 위해 노력했던 분들이 아무런 기록 없이 그냥 돌아가신 경우가 많아요. 또 당시 살기가 어렵다 보니깐 오케스트라 생활을 해도 고용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먹고살기 위한 직장인처럼요. 이래저래 대한민국 음악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기록도 없고 악보도 없죠. 이렇게 말이라도 안 하고 죽으면 이것도 소멸되겠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도, 성정문화재단처럼 원로들을 생각해 주는 것도 참 감사하죠.
성정문화재단이 40년 됐다고 하더라고요. 더 발전되기를 희망합니다. 좋은 분이 뜻이 있고 열의와 헌신으로 투명하게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언뜻 보면 크게 빛나는 사업이 아니라고요. 콩쿠르도 보면 나와서 입상한 사람이 빛나는 행사죠. 그러니까 뜻이 없으면 못 합니다.

음악인은 사회적으로도 영향력 줘야

2019까지 대한민국예술원 회장을 역임하셨습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국가기관으로서 1952년에 법안이 성사되고 54년에 설립되었습니다. 저는 38대 회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원로 예술인으로서 후배 예술인들에게 새로운 장을 마련해 줘야 한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음악인으로는 지난 1991년에 작곡가 김성태 선생이 회장직에 선출된 이후 아마 두 번째일 겁니다. 김성태 선생님 이후 30년 만에 음악인이 회장을 역임한 셈이죠.
음악가들은 많이 있었지만 회장을 대표하는 회장직에는 선출되지 않았어요. 유명한 음악인들이 많이 있었지만 예술원은 음악 분야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분야에 영향을 끼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음악인으로 회장이 된 것은 한국 음악계가 그만큼 발전했다는 것이고,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많은 선후배분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후배 음악인들도 대한민국 음악계에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위대한 영웅의 음악으로 은인을 기리며

올해 82세이신데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십니다. 지난 12월에도 연주회를 개최하셨습니다.
지난 12월 16일 서울 서초동 모차르트홀에서 바이올린 김민 선생님, 피아노 신수정 선생님과 함께 연주했습니다. 이번 연주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신 빌헬름 캠프(Wilhelm Kempff), 바이올리니스트 토마스 브란디스(Thomas Brandis), 초대 독일문화원장 한스 잘먼(Hans Sallmann) 등 이제는 천국에 계시지만, 살아생전 한국 음악 발전을 위해 헌신한 세 분께 바치는 거예요. ‘초창기 황무지 같은 대한민국 땅에 이런 분들이 와서 봉사를 해줬다’ 이걸 기리고자 한 거죠. 그래서 연주회 제목도 ‘위대한 영웅(베토벤)의 음악으로 은인을 기리며’로 정했어요.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기여한 세 분을 잊지 않기 위해서요.
프로그램은 베토벤이 후원자인 루돌프 대공에게 바친 곡인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번과 피아노 트리오 Op.97 ‘대공’으로 구성했습니다. 베토벤이라는 위대한 영웅이 나오기까지 루돌프 대공이라는 후원자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음악이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많은 은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여기 있는 사진들은 다 전설적인 사진들이에요.(프로그램 사진 참조) 첫 번째 사진은 1968년 초대 독일문화원장 한스 잘먼과 김민 선생님이 함께 연주한 사진입니다. 이 분은 베토벤, 브람스, 슈만, 모차르트, 바흐 등 전통 음악의 인쇄 악보를 무상으로 많이 기증하셨어요. 정말 눈이 편했습니다. 사보 된 악보는 잘못된 부분들이 많거든요.
두 번째 사진은 베토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서 1970년에 연주했던 사진입니다. 같이 연주한 토마스 브란디스는 당시 베를린필하모닉 악장이었습니다. 일본 와서 연주하는 일정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 잠깐 오셔서 같이 연주한 거예요. 그때도 저와 신수정 피아니스트가 함께 했습니다. 맨 아래 사진은 빌헬름 캠프의 친필이 담긴 악보예요. 피아니스트 대가가 지도해 준 당시를 기리는 것이죠. 이 사진은 74년도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우리의 증명사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십 수년 전에 이런 일을 했다면 믿기 어려울 거예요. 요즘 사람들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이니까. 이 사진 내놓으면 이건 진짜잖아요.
이번 연주는 사진 여러 장 설명하면서, 이런 분들이 우리 도와줘서 우리나라 음악이 발전했다는 걸 보여줬어요. 당시 김민 선생님이나 나나 우리가 뭐 돈이 있나요. 그때 독일 정부에서 장학금을 줘서 유학도 갔다 올 수 있었습니다.

음악가에게 연주란

지금도 활발하게 연주하시는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연주는 즐거움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좋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모차르트홀에서도 연주했잖아요. 거기 온 분들이 다 좋아하더라고요. 우선 나이가 많아 불가능해 보이는 노음악가들이 연주했잖아요. 우리보다 10년 20년 어린 친구들도 무대 나오기도 하지만 우선 신체가 예전 같지 않습니다. 현악 연주자는 팔이 ‘덜덜덜’, 뜻대로 되지 않고요. 이게 습관이 안 되면 손가락 감각도 떨어지고, 아무리 마음이 요구해도 뜻대로 신체가 따르지 않습니다.

네 그렇겠죠. 그래서 옛 명연주자인 파블로 카잘스는 매일 아침마다 법 먹듯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전곡을 연주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고 해요. 대단한 열정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연습을 꾸준히 했기 때문에 90이 넘는 나이에도 연주력이 젊은 사람 못지않았다고 해요.
맞습니다. 저 역시도 지금까지 이렇게 연주 활동을 왕성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매일매일 연습하기 때문이에요. 연주 일정이 잡히면 거기 일정에 맞춰서 사는 거예요. 그 일정이 끝날 때까지는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안 나요. 그 연주가 가장 화려한 시간이 되도록, 장작불을 그 시간에 가장 활활 태우기 위해서 모든 포커스를 맞춥니다. 그 시간 지나면 재가 되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연주를 위해 몸을 항상 확인하는 거죠. 그날을 위해 조금씩 더 채워 갑니다. 세월이 흐르면 내 신체가 마음대로 잘 안되기 때문에 뭔가 기능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요. 이를 보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지요. 그것을 계속 체크하면서 연습하고 채웁니다. 이것은 다른 누가 해 줄 수 없어요. 오로지 나만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거니깐. 그렇게 연습을 채워나갑니다.
교수할 때도 2년에 한 번씩 꼭 독주회를 일부러 했습니다. 교수를 하면 연주할 시간을 많이 뺏겨요. 교수라는 직업은 사실상 음악 활동에는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까요. 그래서 독주회를 계속한 겁니다. 어떤 때는 학교 일 끝나고 새벽 2시에 와서 다시 연습하기도 했답니다. 연주를 놓치지 않고, 연습을 계속하려고요.

첼리스트 1세대로 살아온 이야기

독일 유학은 참 어렵던 시절입니다. 그 어렵던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독일은 대학에 입학금이 없으니깐 장학금을 월급같이 줘요. 당시 생활비, 항공료까지 줬습니다. 부인도 데려가면 부인까지 생활비를 줘요. 앞에 말했던 독일 분들이 이렇게 우리가 유학할 수 있도록 도운 거예요. 저는 독일 유학 전에 월드오케스트라(세계교향악연주회)에 한국 대표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간 김에 거기서 주저앉으려고 그랬어요. 그때는 나가면 안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당시 우리나라 국민 소득이 57불밖에 안 됐을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갈 길도 없고, 나가기도 어려우니까 한번 나가면 안 들어 왔어요. 여권이 잡히면 100불이랑 바꿨던 시절입니다. 이후 장학금을 받고 독일을 가는 거였어도, 100불을 챙겨 갔어요. 독일 가서는 장학금을 절약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아낄 게 뭐가 있겠습니까. 먹을 것 계속 줄이는 거지. 라면 참 많이 먹었습니다. 그렇게 돈 모아서 오스트리아에서 열리는 코스 배우러 가고 그렇게 공부했습니다.

악화된 건강에도 의연할 수 있었던 이유

많은 병고에도 불구하고 건강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래 보이나요? 이래 봬도 큰 수술을 네 번이나 했어요. 신장도 하나 떼어냈고, 암도 전이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암이 처음 발견된 것은 2005년였어요. 다 놀랐습니다. 전에도 좋지 않은 데가 많았는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곧 있으면 일본에서 국제 첼로 대회가 열리고 그곳에서 연주하기로 돼있었습니다. 그런데 암 선고를 받은 거예요. 처음에는 갔다 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몸이 하루아침에 악화되는 건 아니니까요. 아내와 지인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론을 딱 정립했습니다.
그때가 대학교 정년 퇴임하기 1~2년 남았을 때라, 이제 은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연주자로, 교수로, 성가대 지휘자로 바쁘게 살아왔잖아요. 세상에서 할 일을 다한 셈이기 때문에 이런 일은 ‘신의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받아들인 거죠.

그동안의 삶이 내가 열심히 뭐 이런저런 것 다 했지만, 모든 작용이 내 힘보다는 신의 뜻이라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아픈 것이 ‘이제 내 잔이 넘쳤다’라는 것이죠.
‘너는 이제 거기까지이다, 더 이상 날고 뛰는 건 그만해라. 이제 그걸 받아들여라’라는 신호 같았습니다. 그냥 받아들인 거예요. 처음에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 섭리를 깨달은 이후에는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암이라는 게 이미 흔한 질병이다 보니 걱정하지 않았어요. 딱 내 이론을 정립한 다음에는 아무 두려움이 없었다고요. 그다음에 뭘 하든지 간에 기쁜 마음으로, 그냥 봉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뛰었습니다.

4개의 트랙에서 뛰는 선수처럼…

그렇군요. 수술을 네 차례나 했을 만큼 힘든 일이 많았는데도 그동안 활발하게 활동해 오셨습니다. 하나만 하기도 힘드셨을 텐데요.
육상 선수는 여러 개의 트랙 중 하나를 선택해 뛰지 않습니까? 인생은 누구나 그 트랙을 뛰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는 한 개의 트랙만 선택해서 뛰는가 하면 어떤 선수는 4개를 오고 가며 뛰어가곤 합니다. 저 역시 트랙을 열심히 뛰었습니다. 1번 나덕성, 2번 나덕성, 3번 나덕성, 4번 나덕성이 네 명이서 간판 달고 달렸습니다. 각 역할에 맞게 최선을 다해 달렸죠.
하나는 연주자 나덕성입니다. 독단적인 제 개성을 발휘하며 연주하는 게 1번이지요. 2번 트랙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나덕성입니다. 예원학교에서도 가르쳤으니, 60년대부터 가르쳤습니다. 지금 그 애들이 70대가 되어 은퇴한 애들도 많습니다. 그래도 지금 연주한다고 모이라면 100~200명 이렇게 모입니다. 함께 연주하고 공부한 그 기억은 평생 가는 것이지요. 3번 트랙은 직장인 나덕성입니다. 대학에서는 후학 양성뿐만 아니라, 행정적인 업무도 많습니다. 직장이 대학교일 뿐이지, 직장인처럼 처리해야 하는 것이 많습니다. 학장도 하고, 직장에서 주어진 직책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또 사회 활동도 더 많이 하게 되고 그런 거죠.
마지막 트랙은 성가대 지휘자로서 나덕성입니다. 저희 집안은 기독교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성가대 지휘자를 좀 구해달라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지휘자 구할 때까지 잠깐, 4개월 정도만 맡아달라고 했는데 그게 30년이 되었습니다. 성가대원들은 대부분 비전공자들입니다. 그냥 악보 읽으면서 노래하는 거죠. 노래는 감동적으로,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시작할 때는 얼굴이 하얗다가 은혜받으면 나중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이 기쁨을 느껴야 되는데, 그게 없더라고요.
그 성가대원들에게 음악을 아무리 넣어줘도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려고 했는데 나중에는 회개했습니다. 내가 너무 교만했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자기 생업에 바쁘게 살고 교회에서 위로받으려고 오는 거지, 구박받으려고 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걸 아는 순간 불평할 수 없는 거였죠. 그들이 어떻게든 깨우쳐서 감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제 역할이었습니다. 그렇게 깨닫고 나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진정한 선생님은 사랑을 주는 것

많은 후배들이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흔히 성공한 제자들은 스승을 언급할 때 모든 스승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분만을 꼽는 경우가 있거든요. 왜 모든 분들을 스승이라고 자랑스럽게 언급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거론되지 않는 스승은 굉장히 서운해하곤 합니다.
그렇죠. 사실은 제자가 먼저 ‘저분은 제 선생님입니다’라고 얘기를 해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나서서 ‘저 음악가는 내 제자’라고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선생님을 기억하며 계속 언급해요. ‘나는 누구에게 배웠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가만 생각해 보면 제자가 언급하는 선생님이 진짜 선생님인 것 같아요. 기술을 알려주는 건 거기서 거기일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사랑을 얼마나 주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깐 제자가 나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기 전에 내가 사랑을 주었느냐를 먼저 뒤돌아봐야 합니다.
선생님이란 가르치는 직업이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기술을 가르치는 건 잠깐이에요.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음악 속에 잠재해 있는 큰 덩어리는 자기가 캐 먹어야죠. 그걸 캐 먹을 수 있도록 사랑을 주는 게 선생이라고 봅니다.

음악가에게 필요한 마음가짐

원로 음악가로서,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시대가 많이 변해서 제가 후배들에게 따로 조언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동안 느꼈던 것이라면, 자기 할 일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잘하면 그게 성공이에요.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열정이 제일 중요해요. 음악도 열정을 빼면 아무것도 없어요. 열정이 있어야지 음악이 잘 되는 거예요. 저보다 더 열심히 했던 음악가들도 수없이 많지만, 도중에 다 없어지는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열정이 식어요. 그다음에 자만해서, 자기계발을 멈추는 것입니다.
일례로, 열정을 태워서 유학까지 갔다 와서 대학교수가 된다고 칩시다. 교수가 되면 행정에 바쁘지만 솔직히 편한 시간도 많잖아요. 그러면 그 시간에 더 열심히 해야 하는데, 낭비하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아무래도 권위도 있으니까 간섭도 받지 않잖아요. 그 시간에 연주력 향상에 힘쓰기 보다 다른 걸 하더라고요. 그러면 시간을 뺏기잖아요. 본인이 어떻게 하든 정년까지는 보장이 되니까 남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그런데 퇴직하면 그 시간부터 절벽이에요. 참다운 제2의 인생은 정년 후부터 시작되는데 말입니다.
제가 열정을 계속 불살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뭔가를 향해서 간다는 동기부여가 지속적으로 있었기 때문이에요. 자기 목표의식과, 그것을 이루는 과정의 자기만족입니다. 연주 유무와는 다른 차원입니다. 이 음악이라는 건요, 죽기 직전까지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저는 죽기 직전까지 행복을 주는 음악을 해야겠다는 목표의식과 오늘도 음악과 함께한다는 자기만족이 있었기 때문에, 열정이 식거나 편함에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의 음악 역사

한국 음악 발전사와 함께 걸어오신 만큼, 해 주실 말씀도 많을 것 같습니다.
음악가의 길에서 제가 유명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지나오다 보니 ‘나덕성이네’ 이랬지, 내가 어디 딛고 올라서려고 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저보다 더 잘난 사람도 많고, 더 공부 많이 한 사람도 많았어요.
우리 이전은 일제강점기 시대입니다. 흐름을 잠깐 되짚어 보면,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통해 흘러온 것과 선교사들이 가져온 음악이 있었어요. 그때 엘리트는 일본 유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일본 유학 프로필을 쓰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하다못해 어디 학교, 아니면 무슨 학원 같은 데서 공부했다고 쓰고 그랬어요. 그런데 모든 음악가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음악을 뿌리내리기 위한 처절히 노력한 사람들이 있어요. 물론 그분들이 모두 기억할 만한 음악가로 남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그 당시의 피나는 노력으로 오늘날 우리 음악 시대가 열리고, 빛을 보는 것이죠. 그때는 정말 황무지였습니다.
6.25 전쟁 이후, 방송국에서 우리나라 음악인들이 방송에 많이 출연하면서 우리나라 음악이 많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저도 kbs관현악단에 단원이었을 때 다양한 프로젝트로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녹음 방송하곤 했어요. 당시 지휘자가 김희조 선생님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시향 소속도 있고, kbs교향악단에 소속도 있었죠.
영화 음악도 참 많이 녹음했습니다. 옛날 60년대에는 추석 때 영화 보는 게 큰 행사였죠. 그래서 영화 음악이 대세였습니다. 그때 함께 연주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10년에서 20년 윗선배들이 많았습니다. 제가 막내이다 보니 대타를 많이 뛰었습니다. 대타 연주를 하면 ‘저 놈 연주 잘한다’며 여기저기서 또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 추석 때만 되면 바빠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루에 영화 네 편을 연주한 적도 있는데 그때는 꼬박 밤새워 연주했습니다. 추석이 대목이니까 대박을 터트리기 위해서는 영화음악이 급하게 필요했거든요. 나중에 연주할 때는 지치죠. 눈이 빨개지고 그랬습니다. 그다음 날 녹초가 되어 KBS교향악단에 출근하지 못한 날도 있었고요. 그러면 지휘자 임원식 선생님은 첼로 소리가 왜 이렇게 약하냐고 물어보시고, 안 왔다고 하면 영원히 놓으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현장에서 거의 살았어요. 20대는 정말 소용돌이의 시대였죠. 나라도 굉장히 시끄럽고, 나도 교향악단, 시향, 영화 음악 등 계속 현장에 있으니 갈등도 많고 그랬죠. 7~80년대에는 정치에 음악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같이 음악 했던 절친들 중에 연루된 사람도 많이 있었습니다. 불러내는 경우가 많았어요. 내가 거기에 휩쓸리지 않는 것도 정말 감사한 거죠.

연주자로서의 삶에는 인연들도 많아

음악을 하시면서 많은 인연들을 만나셨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들려주세요.
음악은 죽을 때까지도 행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죽을 때도 무슨 곡을 들을까 고민할 정도입니다. 이건 하나의 에피소드인데 2015년 정도일 거예요. 한 9년 만에 다시 수술을 해야 했을 때입니다. 꼭두새벽에 1번으로 수술대에 들어가는 순서였습니다. 그 이른 시간에 간호사가 휠체어를 밀고 수술실로 들어가는데 내가 노래를 했어요. 그런데 노래를 하니까 간호사가 깜짝 놀라는 거예요. “선생님 성악가세요?” 그러더라고요. 성악가가 아니고 첼로 하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그러고 수술대에 올라갔습니다. 딱 들어갔더니 첫 팀이니까 수술대 라이트 점검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수선스럼이 싫어서 눈을 감았는데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프렐류드’가 흘러나왔습니다. 첼로 한다니까 그 간호사가 스마트폰으로 찾아서 틀어준 거예요.
깜짝 놀랐지요. ‘아~ 무반주 1번이 흘러나오는구나’ 하고 뇌세포가 꿈틀거렸습니다. 수술실에 음악을 들을 때, 마취약을 넣었는지 그 음악을 들으면서 한 2~3분 동안 듣다가 스르르 잠들었어요. 7~8시간 죽었다 깨어난 거지요.
너무 고마워서 그 간호사가 누구인지 병원에 물어서 카톡을 했어요. 음악회 열면 초청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연주회에 오기도 했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어요. 대부분 연주 끝나면 연주자랑 만나기 쉽지 않으니깐요. 그러다 어느 날, 연주 끝나서 악기 정리하고 나왔는데 누가 ‘제가 아무개예요.’ 이러는 거예요. 깜짝 놀랐지. 처음 본 거예요. 자기 딸이 초등학생인데 음악하고 있다고 해요. 또 간호일 끝나고 첼로를 배우고 있다고 합니다. 자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에게 나 선생님 이야기를 했더니 깜짝 놀랐다는 거예요. 자기도 놀랐답니다.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 줄 몰랐다고요. 이렇게 음악을 통해서 귀한 인연들도 만났답니다.



음악인은 홀로 성장하지 않는 법, 아내의 내조가 있기에 가능

선생님의 인생에서 가장 귀한 보물을 꼽는다면 무엇을 선택하실까요?
사실 오늘날까지 이렇게 감사하게 잘 지낼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밝힐 수밖에 없겠네요. 저희 안사람이 내조를 잘해 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이었습니다. 결정적인 대답할 때도 마지막에 그걸 꼭 밝혔다고요.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아내가 헌신 결과입니다.
우리 가정을 위해서 아이들도 기르고, 모든 걸 한곳으로 모아준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죠. 내가 혼자 날고뛰다 보면 뭐가 되겠어요. 교회에서 30년 동안 지휘할 수 있었던 것도 안사람이 내조를 다 해줬기 때문이에요. 선곡하고 악보 찾아주고 이런 걸 다 했어요. 저는 악보는 금방 보니깐 지휘에 집중할 수 있었죠. 집사람은 원만한 삶이었고 나는 소위 개혁적이고 처절하게 개척하면서 앞으로 나가는 삶이었어요. 이런 두 사람이 만나서 조화를 이룬 거죠. 지금도 아내에게 참 고맙습니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위대하지만 가까이하기에는 먼 존재로서의 음악가가 아니라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음악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음악은 죽을 때까지도 행복을 주는 것이라는 말씀에는 모든 음악가들에게 귀중한 경구(驚句)로 삼아야 할 것 같았다. 제자가 나를 언급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기 전에 내가 사랑을 주었느냐를 먼저 뒤돌아봐야 한다는 이 시대의 진정한, 위대한 선생님이다. 앞으로도 후배 음악가들을 위해 더 많은 활동을 기대해 본다.

글 김종섭, 허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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