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작품, 새로운 발견의 음악 탐광자 마에스트로 김봉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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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의 음악은 없다, 불변의 노력이 있을 뿐

지구가 타들어 가듯 35도 이상의 푹푹 찌는 날씨. 이런 찜통 같은 날씨에 인터뷰하자고 한 우리가 잘못이지 싶어 후회하고 있는데 장충동 길거리의 이글거리는 지열을 뚫고 마에스트로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다. 양산을 쓸 법도 한데 자외선 크림을 믿는 것일까? 심지어 살포시 미소를 띠며 가뿐하게 오르고 있다. 그 순간, 인터뷰는 하지 않아도 김봉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에스트로 김봉미가 이런 인물이었겠구나. 미국의 심리학자 솔로몬 애쉬의 주장처럼, 단 3초면 첫인상이 결정된다는 이론이 틀린 게 아니다. 김봉미와의 인터뷰는 첫인상을 확인하는 작업에 불과했다.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피아노를 잘 쳐야 한다는 조건은 없지만 피아노 악보를 넓은 시각으로 볼 수 있거나 연주에 능하면 확실히 지휘에서 필요로 하는 소리분석력은 뛰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지휘자를 만날 대면 원래 전공이 무엇인지 묻곤 한다. 피아노를 전공했다면 피아노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악보를 읽고 여러 성부를 조화롭게 어울리게 연주하며, 악보에 충실한 음향을 최대한 재현할 수 있도록 훈련을 쌓는 까닭이다. 피아노를 완벽하게 다루는 기술뿐만 아니라 악기의 특성에 초점을 맞춘 기보방식도 익혀나갈 수 있다. 세계적인 지휘계의 유파 중 한스 스바로프스키가 주도하는 빈 지휘유파의 지휘자들을 보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마리스 얀손스, 주빈 메타 등 세계적인 거장들이 그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피아노에 능하다는 얘기다.

김봉미의 지휘에는 다양한 화성을 직조하는 듯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피아노를 오랫동안 연주한 사람만이 거시적으로 통섭할 수 있는 ‘그룹 단위의 음’을 빈틈없이 축조하는 느낌을 준다. 김봉미의 절도와 절제미 충만한 지휘를 깨닫는 순간, 누구나 김봉미의 마력으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기에 이 뜨거운 지열이 작렬하는 날씨에도 그를 만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서기의 전환기

다시 말하지만 김봉미는 피아노를 전공했다. 그러나 피아노를 열심히 공부하다가 작심한 듯 피아노를 버리고 지휘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맞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피아노에서 지휘로 바꾼 게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부산에서 오랜 시간 지휘를 하셨거든요. 피아노를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휘를 제 생활과 음악의 일부로 생각했어요. ‘늘 함께’라고 생각할 만큼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를 공부한 김봉미에게 지휘는 그저 생활의 일부였을 뿐 오케스트라와 같은 거대한 지휘를 꿈꾸지 않았다. 오직 피아노에 전념하고, 나아가 앙상블,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작곡을 공부하고 싶었다. 그렇게 맹렬하게 피아노를 공부하면서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발생한다.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1994년 대학을 막 입학할 때 음악적 친구이자 동반자였으며 세상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다 막아줄 것 같았던 아버지가 급서, 갑자기 소천하면서 인생의 판도가 바뀌었다.

“아버지가 하늘나라로 떠나시면서 저는 음악적으로 철저히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음악적인 문제뿐만이 아니었어요. 제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용기를 늘 공급해 주셨거든요. 고민을 나눌 상대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거죠. 무엇이든 혼자 결정해야 하는데, 정말 막막했습니다. 이제는 나 혼자의 길을 개척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고 헤매던 중 막연히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습니다. 주변에서는 혹시나‘봉미가 음악을 그만둘까 봐’하는 걱정들도 많이 했죠. 그럴 정도로 방황이 심했습니다. 오죽하면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 친구분들이 제가 음악을 그만두지 못하도록 ‘후원음악회’를 개최해 주셨을까요. 그 후원음악회에 기라성 같은 분들을 초청했는데 그 음악회 일주일 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사실 아버지의 추모음악회가 돼 버린 거예요. 방황은 끝났죠. 아버지가 만약 살아계신다면 딸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할까 생각했죠. 그래서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거예요.”

독립불구(獨立不懼)! 홀로 서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 유학을 선택한 이유

누구나 인생의 전환기에는 템포에 변화를 일으키는 아고긱(Agogik)처럼 자신도 모르는 세계로 이끄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시인 고은은 말하지 않았는가.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가야 하고 여기서부터 희망’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 이어졌다. 당시 러시아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쉬시코가 한국에 왔을 때 그의 추천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혼자 유학을 떠나게 된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게 1991년, 김봉미가 러시아에 갔을 때가 1995년이었으니 개방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그 넓은 땅이 한꺼번에 문을 활짝 열지는 않거든요. 모스크바는 개방되었으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굉장히 폐쇄적이어서 동양인에게는 두려운 세상이었습니다. 무섭기도 했고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연습 끝나고 돌아오는 길 계단에서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갖고 러시아에서 버텼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김봉미에게 러시아음악은 실로 신세계였다. 이전까지는 공산주의 영향권 안에 있던 러시아 음악을 접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티칭, 음악적 배경, 문화 등은 김봉미가 그간 접해왔던 음악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한국에서의 클래식은 독일음악이 지배적이었기에 러시아의 음악 분위기는 쇼크 그 자체였다. 우선 그 광활한 영토만 봐도 가젤의 눈에서 사자의 눈으로 커지는 것 같았다. 김봉미는 그 대지처럼 당차게 변해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답답함 속에서 오히려 자유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왜 러시아에서 음악이 발달했는지 바로 알겠더라고요. 결국 음악도 환경의 영향을 받는데, 시야가 다를 수밖에 없었죠. 제게는 그것이 ‘자유로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이야 많이 변했지만 그 당시 음악교육은 일종의 도제식이었잖아요. 주로 ‘연주가 잘 풀리지 않는 부분’에 천착해 집중적으로 연습합니다. 혼자 씨름하지만 그게 해결이 안 되면 결국 피아노 뚜껑을 닫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달랐다. 안 되는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가진 깊이, 무게, 역사, 자신의 세계 등 연주자가 갖고 있는 음악 세계에 집중하는 교육이었다. 피아노는 각자가 갖고 있는 음악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게 연습하다 보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 순간 그토록 해결이 안 되던 부분이 말끔히 해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봉미는 그때 무릎을 쳤다. 이것이 바로 음악이구나 싶었다. 도제식에 얽매이지 않고 장점을 살리면서 음악의 자유를 느낀 것이다.

“물론 음악 공부와 별개로 러시아 생활에 적응하기는 녹록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교회 반주, 앙상블 반주 등 다방면에서 활동을 많이 했거든요. 반주로 돈도 많이 벌었어요.(웃음) 데이트도 많이 하고 이리저리 사람들과 부대기며 살았는데 러시아에서는 그저 날이면 날마다 연습만 해야 하니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날씨도 좋지 않아 산책도 쉽지 않았다. 한국과 연락하고 싶어도 전화는 불통이요, 편지는 한 달 걸리니 ‘학교와 연습’이 생활의 전부였다. 김봉미는 무척 힘들었지만 4개월이 지나고서는 적응할 만하다 싶었다. 그때 또 한 번 뇌리에 박히는 깨달음이 있었다. ‘음악은 외롭고 고독할 때 찾아오는 친구이기에 때로는 오직 음악과 나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실로 예술은 고독에서부터 탄생한다는 진리를 김봉미는 러시아에서 체험했다. 그 진리를 깨달은 이상 굳이 한국에 돌아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끝까지 학업을 마치려고 했지만 신은 김봉미에게 정착 대신 순례를 요구했다. 1997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린 IMF가 터지자 유학생 70%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처음에 러시아에 끝까지 남을 것을 결단하고 버텼다. 700원 하던 달러가 2,000원이 급등했지만 그래도 그동안 레슨하면서 모은 돈, 후원금 등으로 재정이 넉넉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1998년 금융위기가 러시아를 강타했고 끝내 한계에 봉착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음악에 대한 더 큰 진리를 탐구하자는 열정을 잠시 접고 한국에서 아직 정리하지 못한 졸업연주를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2020년 오페라카르멘 솔오페라단 부산문화회관


여기서 안되면 끝이라는 마음으로 떠난 독일

“러시아에서 귀국하자 지도교수님은 제 연주를 들어보고 ‘러시아에서 음악만 했구나’하고 금세 알아봐 주더군요. 음악이 바뀐 거죠. 한국에서 졸업 연주를 마치고 다시 러시아로 나가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어요.”

한국은 금 모으기 운동 등 국민이 한마음으로 IMF를 이겨내고 있었지만, 러시아의 금융위기는 시베리아보다도 더 살벌한 추위로 다가왔다. 고민하고 있던 차에 지도교수는 김봉미에게 러시아유학 대신 독일유학을 권했고, 다시 한번 모험을 선택했다. 독일어에 능숙한 것도 아니기에 우선 입학을 해야 했다. 두 달 안에 학교 입학을 못 하면 한국에 돌아오겠다는 굳은 각오와 함께 독일유학길에 올랐다.

“스스로에게 두 달이란 시한부를 준 거예요. 한국에서 등산용 코펠 세트와 두 달 치 입을 옷만 들고 갔어요. 두 달 안에 입학하지 못하면 돌아올 작정이었지요. 얼마나 간절했냐 하면 피아노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낮에만 피아노를 치면 안 되겠다 싶어 전자 피아노를 급하게 대여했습니다. 헤드폰을 끼고 밤에도 연습하려고요. 피아니스트는 터치 때문에 리얼 피아노로 연습하는 게 중요한데 전자피아노는 터치가 가벼워요. 그래서 가죽장갑을 샀어요. 꽉 끼는 가죽 장갑 끼면 터치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렇게 30분 정도 연습한 후 장갑을 벗고 다시 연주하면 손이 날아다녀요. 그렇게 연습했습니다.”

김봉미는 하루 중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치로 올려 꾸준히 피아노를 쳤다.

“매일 6시간 이상을 연습했는데요. 6시간을 연습하려면 9시간을 피아노 앞에 붙어있어야 해요. 한번은 11시간을 연습해 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제가 몰입해서 할 수 있는 최대시간이 6~7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매일 9~10시간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었습니다. 매일 연습에 올인한 거죠. 이때 머릿속에는 피아노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김봉미는 마치 파산하려는 백만장자처럼 연습을 아끼지 않았다. 노력한다고 모두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 김봉미의 피나는 노력과 간절한 태도는 장소를 불문했다.

“어느 날 목사님 사택에 간 적이 있는데 거실에 피아노가 있는 거예요. 제 눈에는 그 피아노 밖에 안 보였습니다. 허구한 날 전자피아노로만 연습하다가 진짜 피아노를 보니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웃음) 그 모습을 본 목사님이 피아노 쳐도 된다고 하셔서 가방을 팽개치고 바로 연습했어요. 목사님 가족들이 식사하고 있는 현장에서 말이에요. 돌이켜보면 정말 창피하지만 그만큼 간절했어요.”

드디어 심장이 떨리는 시험일이 다가왔다. 오직 ‘피아노’만 생각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구멍이 없었다. 김봉미는 독일유학 올 때 신발을 두 켤레만 가져왔기 때문에 항상 두꺼운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시험 날도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 웬걸 페달 밟기가 너무 불편했다. 그는 신발을 벗고 연주에 임했다. 독일 사람들에게 신발 벗는 일은 생경한 일이었지만 김봉미에게 그런 시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잘 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노력하는 자 복이 있도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그 학기에 독일 에센국립음대 피아노과에 입학한 사람은 김봉미뿐이었다.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

그는 그렇게 노력했지만 에센국립음대에 합격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지는 못했다. 왠지 불합격될 것 같다는 막연한 허탈감을 안고 시험이 끝나자마자 짐을 바리바리 챙겨 다시 러시아로 떠났다. 금융위기도 지났으니 러시아에서 더 공부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김봉미와 함께 러시아 비행기에 같이 탑승했던 모양이다.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독일 에센국립음대 합격 소식이 멀리 한국에서 전해왔다. 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합격 증서를 가져다준 ‘오빠’가 지금의 남편이다.

“당시에는 남편에게 서류만 받고 별다른 교류는 없었어요. 이후 비자를 발급 받고, 짐을 싸서 독일로 갔죠. 독일에서 집 구하고 그러면서 남편과 친해지고, 방학 때 한국에 들어가서 결혼했죠.”

독일유학 중 결혼과 출산 등 힘든 일들이 많아지면서 인생의 우선순위에 대해 고민이 시작됐다. 일이 중요한 것일까? 가족이 중요한 것일까? 그는 삶의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그런 그에게 하나의 큰 사건이 닥쳐왔다.

“피아노 졸업 연주 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어요. 아이가 생긴 걸 알게 되었죠. 남편은 이제는 아빠가 된다는 생각에 좋아했지만 저는 실감 나지 않을뿐더러 속상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몇 달 뒤, 하혈해서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갔더니 배 속 아이가 뇌수종이라는 진단이 나온 거예요. 2차, 3차 병원까지 전전하는 한 달여는 정말 지옥같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주변에서는 아이를 낳지 말라고 말리기까지 했죠. 그때 제 가치관이나 생각이 크게 바뀌었어요. 가족이라는 것, 살아간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가 살아서 건강하게만 나와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어렵게 해당 분야 수술의 권위자를 찾아갔을 때 전혀 반대의 답변을 들었다. 아이가 ‘완벽하게’ 정상인데 대체 왜 왔냐고 물었다. 그동안 숨 막히게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지만, 건강한 아이라니 세상이 고맙기까지 했다.

“그 이후로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육아가 내 일에 방해된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가진 적이 없답니다. 아이를 낳은 뒤에도 공부를 쉰 적도 없고요. 무슨 일을 하든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습니다. 항상 즐겁게 해주는 남편이 있어서 제 음악도 행복하고요. 그 아들이 이제 곧 제대를 앞두고 있네요.(웃음)”


아버지가 주고 간 선물, ‘경험’

피아니스트로도 주목받던 그가 어떤 계기로 지휘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 걸까? 특별한 계기가 궁금했다. 그 계기를 언급하기 전에 그가 지휘를 처음 배워나갈 때의 유학시절을 술회했다. 피아노를 마치고 지휘 전공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정말 막막했다. 누구에게 따로 배울 생각도 못 했다. 악기는 레슨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지휘는 별도로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던 시절이다. 김봉미는 그저 입시요강만 보고 막연히 혼자서 준비한 후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정말 지휘를 못 하는 초보였을까?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지휘하는 것을 수없이 지켜봤고, 게다가 제가 직접 반주해 왔거든요. 간접적으로 지휘를 공부한 것은 그게 전부였지만 사실은 이런 작은 경험들이 사라진 게 아니었죠. 저의 음악생활에 켜켜이 쌓여갔던 모양입니다. 지휘할 때 어떻게 트레이닝하고,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하는지 등 지휘훈련이 몸에 익어 있었죠. 아버지께서 살아 계실 때 구체적으로 지휘수업을 시키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다 주고 가신 거죠. 그래서 독학으로 지휘과에 합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지휘를 잘해서가 아니라 지휘 가능성을 보고 합격시킨 게 아닌가 싶어요. 테크닉과 오케스트라 지휘는 물론 학교에 입학한 후 본격적으로 배워나갔죠.”

그렇다면 피아노를 접고 지휘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였을까? 그가 지휘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 계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졸업 연주 심사를 앞두고 약지를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팔을 심하게 다친 적이 있었다.

“졸업 연주 심사 이틀 전에 팔을 다쳤어요. 졸업 연주곡이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이었어요. 사실 제가 치기에는 조금 무리한 곡이었으나, 하고 싶어서 했죠. 좀더 아름다운 사운드를 내려고 손을 무리하게 움직이다가 그만 인대가 파열된 거예요. 선생님은 그동안 연습을 많이 해서 최고로 잘할 때니깐 졸업연주를 밀어붙이셨고요. 저는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치려니 얼마나 아팠겠어요. 그래도 강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죠. 지금도 아쉽긴 합니다. 졸업 후에는 남편이 극장에 취업하면서 카셀로 이사하고, 독일 데트몰트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 학사에 정식으로 입학했습니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 삶이 요동친다. 무탈하고 곱게 유학생활을 했을 법한 그에게 이런 천변만화의 고행들이 있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남들은 하나만 하기도 벅찬데 피아노에 이어 지휘까지 공부했으니 말이다.

김봉미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으로 마침내 쟁취해 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그 오기와 열정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끊임없이 공부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저의 할아버지가 초기 영화감독 김영화이십니다. 6.25 때 납북되셨어요. 당시에는 연좌제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아들인 저희 아버지는 유학도 안 되고 모든 것이 막혀 있었어요. 옆에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저도 그 아픔을 느꼈죠. 저 고2 때 연좌제가 풀렸는데, 오죽했으면 고3 때 미국으로 이민을 준비했겠어요. 그렇게 이민을 준비하는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요. 그래서 늘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꿈을 잊을 수가 없어요. 내가 아버지의 꿈을 이뤄야겠다는 열망도 퇴색되지 않고요. 제대로 공부하겠다는 꿈, 대단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제대로 공부하는 꿈… 그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었죠.”

2019년 롯데콘서트홀 4대오페라페스티벌 투란도트 핑,퐁,팡과 공연전 분장실에서 음악체크


언제든 준비된 지휘자 김봉미

‘김봉미’ 하면 음악계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2012년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서 지휘자가 펑크로 내는 바람에 오페라가 취소될 뻔했다. 그날 여유를 갖고 공연을 감상하러 왔던 김봉미에게 오페라 단장은 다짜고짜 무대로 불렀고 지휘봉을 내주었다. 그날 ‘리골레토’ 결과는 어땠을까? 대성공이었다. ‘김봉미는 갑작스럽게 지휘를 부탁해도 가능한, 늘 준비돼있는 마에스트로다’라는 소문은 그때부터 회자되기 시작했다.

“사실이에요. 언론에 나가지 않은 것은 당시에는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공연은 2012년도 예술의전당 오페라축제의 ‘리골레토’였습니다. 축제의 마지막 작품 마지막 공연이었죠. 땡땡이 치마를 입고 가벼운 마음으로 로비에서 관람도 할 겸 지인들과 담소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공연을 시작해야 할 시간인데도 15분여가 지났음에도 시작종이 울리지 않는 거예요.”

이상하다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저만치에서 오페라단 단장이 뛰어왔다.

“단장님이 뛰어오면서 ‘돼요?’하고 다짜고짜 물었습니다. ‘뭐가 된다는 거예요?’하자, ‘리골레토 지휘 되냐고?’ 하면서 가쁜 숨을 내쉬었죠. 순간 위기인가 싶어 엉겁결에 제가 ‘되죠’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악보도 지휘봉도 없다’고 불안스럽게 말하자 다 준비해 놓을 테니 무조건 시작해달라고 주문했어요. 이 무대 못 오르면 오페라단 파산이라는데 어쩌겠어요. 정말 장난이 아니었죠.”

무대에 오르자 이번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사색이 되었다. 처음 본 지휘자가 이 거대한 오페라를 과연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김봉미는 지휘봉에 각을 세워 시작 사인을 알렸다.

“제가 도착하자 본종이 바로 울리고 막이 올랐는데 그제야 지휘봉이 건너오더라고요. 손을 떨면서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지휘자에 집중한 적은 두 번 다신 없을 거예요. 어쨌든 공연은 대성공이었죠.”

김봉미의 생각은 단 하나였다. ‘공연이 엎어지면 큰일 난다.’ 공연 이후에 알고 보니 그날 지휘봉을 잡기로 했던 이탈리아 지휘자는 단잠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봉미는 이날의 일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오페라단에 혹시라도 피해가 갈 수 있기 때문인데 그래도 청중의 입까지 막을 수 없었다. 언론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음악인들이라면 다들 아는 공개 비밀이 된 것이다.


경험은 하나도 버릴 게 없어, 거시적 지휘자의 밑거름

언제나 준비된 지휘자, 김봉미. 수많은 레퍼토리를 연습하고 연주해 왔을 텐데 하루의 리츄얼(ritual)이 궁금했다.

“지휘자는 악기연습처럼 매일 매일 악보를 보죠. ‘매일 하는 공연인데 또 악보를 보고 연습해요?’ 이렇게 질문하는 분들도 있거든요. 지휘자는 한끝의 실수로도 박살이 날 수 있기 때문에 기존에 알고 있는 곡이라도 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휘자도 사람이니 실수가 있겠지만 아주 작은, 세밀한 것이라도 실수가 노출되었을 때, 지휘자에 대한 신뢰는 뚝 떨어집니다. 고전이든 현대곡이든 어떤 악보라도 일단 지휘하려면 완벽히 알고, 완벽하게 소화해야 신뢰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날실 같은 음들을 지휘봉으로 촘촘하게 짜내는 직조력과 웅장한 하모니를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피땀 눈물을 쏟았을지… 매일 연습의 열정을 바늘 삼아 수많은 경험들이 실을 이루어 빈틈없는 천의무봉의 오케스트라 음악이 탄생하는 것이리라.

“그런 경험 중에는 바이올린 경험도 큰 도움을 줍니다. 현을 이해하는 데는 아주 큰 역할을 하죠. 한때 아버지의 권유로 바이올린도 2년 동안 배웠는데 그 공부가 지휘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 재학 때 오케스트라를 하면서 타악기, 첼로 등도 배웠어요. 첼로가 걸어 다닌다 싶으면 저라는 걸 금세 알아챘습니다. 제가 아담하다 보니 첼로에 가려졌거든요. 이런 다양한 활동은 선생님에게는 그저 걱정거리였습니다. 피아노에 집중해야 하는데 이것저것 다양하게 공부하니까 걱정이죠. 이 모든 경험이 지휘에는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배우고 싶은 악기가 있다면 호른입니다. 너무 어려워서 오히려 그 악기를 이해하고 싶다니까요.”

러시아에서의 자유로움과 독일의 음악적 색채, 즉 자유로움과 정통성을 모두 경험한 그는 표현뿐만 아니라 듣는 이에게도 김봉미의 음악을 생각하게 한다.

“러시아 독일 유학을 거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제 음악에 대한 평가가 갈렸어요. 독일을 거치면서 러시아 유학 때의 자유로움이 정리가 되었거든요. 그런 저의 음악에 대해 좋다는 사람과 아쉽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원래 취향이 다르니까 당연한 평가겠죠. 창조적이고 자유로움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초와 베이스를 밑바탕에 둔 정통성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거죠. 저는 지금도 다른 지휘자들의 지휘를 보고 공부합니다. 해석 부분을 참고하기도 하고요. 유튜브가 나오면서 편해졌죠. 예전에는 악보만 가지고 참고했어요. 사실은 악보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지휘를 뽑을 때 반드시 피아노를 치도록 해요. 피아노를 통해 깊이 있는 해석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점에서 피아노를 열심히 공부한 저로서는 피아노야말로 굉장한 자산이 아닐까요?”


할 때 마다 탄성이 나오는 작곡가

수많은 레퍼토리를 쌓아온 그가 꼽는 ‘원픽’ 작곡가가 궁금해졌다. 수없이 연습했던 곡인데도 작품을 할 때마다 탄성을 자아내는 작곡가는 누구냐는 말이다.

“아, 있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푸치니 오페라를 볼 때마다 입을 벌리고 탄성을 지르거든요. 분명 작곡가는 ‘푸치니’인데 그의 작품의 색깔은 작품마다 다 다르거든요. 아이디어의 폭은 측정불가죠. 대부분의 작곡가는 그 작곡가 특유의 특성이 딱 느껴지는데, 푸치니는 작품마다 각기 다른 특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푸치니 곡을 들을 때마다 ‘아, 푸치니는 완전히 돌았어!’하고 신음하게 됩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베르디의 오페라가 칼로 찌르는 것이라면, 푸치니의 작품은 칼로 찔러서 한번 돌리는 것이라고. 그만큼 푸치니의 작품은 가슴을 후벼 파는 무언가가 있다. 차이콥스키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섹시한 맛이 있다. 감각적이고, 감성적인 터치로 음을 훌륭하게 요리할 줄 아는 작곡가, 멜랑꼴리 베이스가 크고 감성적으로 자극하기에 지금도 차이콥스키 작품은 만인의 작품이 아닌가. 반면 독일 계보의 말러는 좀 다르다. 그의 작품도 화려하고, 다양하고, 아이디어도 디테일하지만 원초적인 감성을 건드리는 면에서는 차이콥스키와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어쨌든 이들이 아무리 훌륭한 작곡가라 하더라도 최소한 김봉미에게 푸치니에 비하면 이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성지휘자가 아닌 지휘자로 불리길

김봉미는 대한민국 여성지휘자로 독보적일 뿐 아니라, 세계무대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지휘자로 우뚝 서기가 쉽지 않기에 김봉미가 더욱 돋보이는 면도 있다. 혹여 여성지휘자로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제가 지휘자로서 가졌던 어려움은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가이드가 없어서였습니다. 이 말인즉, 저에게 성별은 그냥 성별일 뿐이라는 거예요. 누군가는 여성 지휘자가 남성을 앞지르지 못하는 이유가 체력 등의 한계로, 일정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이 달라요. 물론 모든 분야에서 남녀의 비중이 고착화되어 있는 부분이 있죠. 관습적으로 그래왔으니까요. 이제는 그 고착화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음악계도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저는 우리나라가 더 빨리 오픈되었다고 생각해요. 시기적으로나 비중이 늘어나는 부분에서도요. 빈필하모닉도 여성 단원을 수용한 지 50년이 채 안 되었습니다. 유럽이 더 보수적인 부분이 있어요. 지휘는 ‘보는 음악’이에요. 하지만 나이 들어 지휘하는 여성지휘자의 롤모델이 없어 아쉽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는 성별의 문제를 떠나 젊은 지휘자들이 설 곳이 없는 것이 더 어려움이라고 생각한다. 성별을 떠나서 신인 지휘자들이 설 곳이 적다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다. 지휘자의 악기는 오케스트라인데, 대학이든 연주단체든 오케스트라를 선뜻 내주지 않기 때문에 지휘공부가 쉽지 않은 점도 문제라면 문제다. 오케스트라는 리더의 책임이 크기 때문에 그 리더가 아닌 타인에게 빌려주기란 쉽지 않기 때문일까?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열리고 있어요. 물론 그래도 지휘자라는 자리는 넓지 않습니다. 지휘할 수 있는 자리는 많습니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서 전국 아마추어 악단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죠. 하지만 수준 이상의 자리는 한정돼 있고, 또 지휘자의 나이 제한이 없다 보니 젊은 사람들이 끼어들 틈이 부족한 것이죠.”

여성 지휘자가 아니라 젊은 지휘자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를 바라는 진심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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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미의 역량은 아직도 개발 중

마에스트로 김봉미는 사실 하는 일이 너무 많다. 베하필하모닉 예술총감독, 유나이티드필하모닉 예술총감독, 부산오페라하우스 시즌예술총감독, 아슬리코국제영아티스트 위원장 등 지휘자 김봉미 혼자서 하고 있다는 것이 놀랄 뿐이다. 그의 행보에 늘 경탄하는 것은 이 모든 활동이 이미 주어진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김봉미의 추진력으로 오는 11월 아슬리코 영오페라싱어콩쿠르 아시아대회를 한국서 만날 수 있게 됐다. 1949년 처음 시작해 이번에 75회를 맞는 아슬리코 오페라 콩쿠르는 까를로 베르곤지, 피에로 카푸칠리, 니콜라 마르티누치 등을 데뷔시킨 세계적 국제 콩쿠르이다. 그가 정해진 길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한번은 한 시향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부지휘자를 뽑았는데요. 그때 최종까지 갔지만 안됐죠. 잘했기에 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때 느낀 자괴감이 컸어요. 세상은 넓고, 실력 있는 지휘자는 많다는 것을 느낀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오히려 잘 되었더라고요. 꼭 그 자리, 그것을 해야만 성공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그때 그곳이 안 되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 기획하고, 창조할 수 있게 되었죠. 민간 오케스트라를 끌어가면서 정형화가 아닌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있어요. 원래 가진 창조적, 자유로움을 만들어 가고 있죠.”

긴 인터뷰가 끝났다. 밖의 날씨는 여전히 찜통 그대로다. 인터뷰 동안 귀를 쫑긋거리느라 스트레스를 받는 기자와 달리 마에스트로는 단 한 번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그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내면을 지휘하고 있었다.

커피숍의 소음과 잡음 때문에 기자의 이맛살이 찌푸려졌지만, 마에스트로 내면의 지휘를 따라가면서 안정을 찾아갔다. 세상에 내일 무너져도 움쩍하지 않은 채 정적(靜寂)과 파적(破寂)을 지휘해 내는 김봉미의 깊이가 느껴지는 시간, 큰 스승을 만나듯 싶다.

글 김종섭

김봉미 프로필

– 독일 Detmold Musik Hochschule(데트몰트 국립음대), 오케스트라 지휘(Kapellmeister Diplom) 졸업
– 독일 Essen Folkwang Hochschule(에센 국립음대) 수석입학 및 졸업
– 헝가리 국제 지휘 콩쿨 여성최초 수상
– 2012년 대한민국 오페라 대상 지휘자상 수상
– 제1회 신진 여성 문화인상 수상(문화관광부)
– 서울필하모닉, 시흥교향악단 상임지휘자, 헤럴드필하모닉, 부산시립청소년교향악단 수석지휘자역임
–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산대학, 단국대 초빙교수 역임
– 현) 베하필하모닉 예술총감독, 유나이티드필하모닉 예술총감독, 아슬리코국제영아티스트 위원장, 부산오페라하우스 시즌예술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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