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는 진보적인 예술가, 더 이상의 오해 없기를… 등록문화재 ‘홍난파의 집’ 정희준 회장

52

1012일 세종문화회관 홍난파음악제 개최

“저에게 주어진 남은 인생 동안 해야 할 일 중 가장 큰 사업은‘장학사업’이에요. 매년 수입 중 일정 부분을 이공학계열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수여합니다. 올해는 사업이 잘돼서 많지 않지만 장학금을 좀 증액했습니다.(웃음) 제가 하는 사업 중 두 번째 중요한 일은 음악가들 돕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일종의 문화생활입니다. 음악을 즐기고 운동하거나 여행을 다니고 때로는 아픈 친구들을 찾아 위로하지요. 늙은이가 할 게 뭐가 있나요.(웃음)”

그러면서 주름골을 드러내며 파안대소를 짓는다. 본인이 직접 설계한 아파트 단지의 문화센터에서 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이자 홍난파의집 이사를 맡고 있는 정희준 회장을 만났다. 오는 10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는‘홍난파가곡제’를 앞두고 정희준 준비위원장과 홍난파와의 인연이 궁금했던 까닭이다. 팔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홍난파 가곡제라면 여전히 두 팔을 걷어붙이고 뜻있는 지인들에게 후원을 당부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발로 뛰면서 후원을 요청하기보다는 홍난파 선생의 유산을 보존하고 기릴 만한, 아직은 밝힐 수는 없지만 그런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재들을 키우기 위한 비밀조직, 수양동우회를 조직한 홍난파

한때 친일 시비로 친일파 오해를 받았던 홍난파. 오는 10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되는 홍난파가곡제를 앞두고 정희준 준비위원장은 왜 그토록 홍난파 선생님을 사랑하는지 궁금했다.

“난파 선생님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수양동우회 사건부터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직했던 흥사단은 다들 아실 거예요. 수양동우회는 일종의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고 보면 됩니다. 안창호 단장이 상해에 있을 때 춘원 이광수에게 국내에서도 후학을 기르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답니다. 비밀조직‘수양동우회’는 그렇게 탄생한 겁니다. 평양과 서울을 중심으로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해서 장래 독립할 때 필요한 인재들을 키우자는 애국적인 견지에서 조직한 겁니다.”

회원들은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엘리트 지식인들로 직업도 다양했다. 의사, 변호사, 목사, 언론인 등 그 수가 180명까지 불어났다. 그렇게 비밀교육을 시키던 중 그만 경찰에 탄로 나고 말았다. 종로경찰서는 이들을 즉각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장장 3개월에 걸쳐 분명한 죄목도 없이 180명을 잡아들였다.

“시대 상황을 정확히 알 필요가 있습니다. 수양동우회를 잡아들일 당시, 일본은 중국을 공격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노구교 사건’을 일부러 만들어요. 노구교 사건 후인 1937년 중일전쟁(지나사변)을 일으키는데 이때 일본은, 일본과 한국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주장하며 조선인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전쟁에 내보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우리나라 엘리트들은 중일전쟁에 뛰어드는 것을 반대하고 나섭니다. 그러니 일본으로서는 우리 지식인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이들을 잡아 내선일체 사상교육을 시킨 후 오히려 선전용으로 역이용하려 했건 겁니다.”

일본 경찰은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검거하고, 아무런 죄목도 없이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매질했다. 홍난파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중에 부인인 이대형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닷새에 한 번씩 옷을 갈아입히러 가면 온몸이 피투성이가 돼 있고, 옷을 벗기면 피가 말라붙어 옷가지를 잡을 때마다 꼬도독 꼬도독 소리가 났을 정도였다. 그렇게 72일간을 매일 피가 터지도록 매만 맞은 후 결국 경찰서 측이 미리 작성한‘사상전향서’를 내밀고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했다. 이렇게 본인의 뜻이 아니라 강요에 의한 서명은 명백히 친일파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데도 도장을 찍었다는 행위 자체만 따지는 일부 주장 때문에 친일파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홍난파가 친일파라는 것은 정치적 마녀사냥 성격 강해

“절대 본인이 쓴 게 아니에요. 180명 중 도장 찍고 나온 사람이 120명 정도인데 서류가 다 똑같은 폼이에요. 그러니까 일본 경찰들이 미리 인쇄해 온 전향서 서류에 강제로 도장을 찍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가혹했으면, 고문 후 옥중에서 2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홍난파의 도장만 보고 자발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면 해방 직후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관한 법’에 따라 광복회에서 최초로 발간한 친일파 명단에는 예술가들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이들 명단을 공식적으로 발표하려는 차에 6.25전쟁이 발발하는 통에 공개되지 않다가 김대중 대통령 시절 광복회는 6.25 이전 자료를 토대로 692명의 친일파 명단을 작성했다.

“거기에는 분명 예술가나 음악가들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해방 70주년을 맞이해 특별법이 또 만들어지면서 갑자기 반일 드라이브가 시작되고, 김대중 대통령 때는 없었던 친일파 명단이 새롭게 등장했던 거예요. 692명에서 1천 명 이상으로 거의 두 배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군인의 경우 일본군인 소위 이상으로 그 기준이 낮아지면서 6.25 전쟁 영웅들도 모두 친일파로 분류되었습니다. 당시 친일파 인물을 30만 명까지 색출한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때 수많은 예술인들도 친일파로 들어가게 된 겁니다.”

정희준 회장은 대대적으로 치욕스러운 용어인‘친일파’라는 덫이 씌워지자 모든 언론들이 홍난파를 친일파라고 부른 것에 대해 마녀사냥과 같은 행태라고 말한다. 나치에 협력했던 카라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도 이와 비견되지만 이들을 정치적으로 전범 취급하지는 않았다. 카라얀은 나치에 입당한 전적도 있지만 나중에 자유 진영에서 그를 최고의 지휘자로 예우해 주었다.

“서양에서는 예술가를 정치적으로 때려잡은 적이 없습니다. 예술가들을 선전도구로 이용한 정치인들이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음악가로만 인정했습니다. 그런데도 당시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월남한 음악가들도 모두 친일파로 분류했잖아요. 완전히 정치적인 잣대로 모든 예술인들을 판단하는데 이게 큰 문제입니다. 형법 12조에‘저항할 수 없는 폭력에 대한 자기 또는 친척의 생명 신체의 위해를 당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또한 민법 제104조(불공장한 법률행위)‘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한다’라고 돼있습니다. 형법, 민법 모든 면에서 홍난파는 이 조항에 해당되기 때문에 친일파라고 할 수 없습니다.”


홍난파가 친일파라는 근거 법률적으로 모두 격파

친일파의 범위는 분명하다. 친일파란 1948년 제정된 특별법인 ‘반민족행위처벌법’에서 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자, 또 2004년 노무현 정권 때 제정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 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한 자만 해당된다. 그러나 이 법과는 무관하게 시민단체들이 자의적으로 친일파라고 정한 뒤 마구잡이로 포함시키는 일은 참으로 무책임하고 사악한 행동이다.
그래도 이들이 홍난파를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사실 때문이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홍난파는 일본 총독부가 작성한 지지성명서에 다른 18명의 인사들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서명하고, 친일군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창작곡이란 게 군가였어요. 그게 자의적인 곡이겠어요? 매 맞고 나와서 한 달 만에 세곡을 작곡했는데 연주되지도 않았습니다. 홍난파 작품이 연주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만큼 대충 작곡했다는 말입니다. 홍난파 가곡 16곡 중 14곡이 모두 인기곡일 정도로 곡을 잘 쓰는 사람이 왜 일본 측의 강요로 작곡한 군가는 불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면 답은 나옵니다. 난파 선생은 일부러 졸작을 쓴 거예요.”

홍난파 친일시비 중 세 번째 이유로 일본음악단체‘조선음악협회’에 가입했다는 점을 문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에서 발표한 음악단체 명단에 올려졌을 때 난파 선생은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그것도 가장 말단 회원으로 이름이 올려져 있었다. 당시의 조선 음악가 중 최고 수장이라는 이유로 피가 터지도록 매질해 놓고 조선음악협회의 가장 끄트머리에 평의원이라는 이름을 살짝 걸쳐 놓은 것이다. 음악단체 결성 때 참석하지도 않았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난파 선생님의 따님인 홍정임 씨로부터 위임받아 행정소송을 제기했는데 준비서면에 밝힌 분명한 논리적 근거가 받아들여져서 다행히 효력 정지 결정을 받았죠. 홍난파는 일제가 지나사변 선전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을 뿐 자의적인 게 전혀 없다는 걸 받아들인 거예요. 물론 다른 친일파 명단 관련자들도 소송을 제기했는데 모두 기각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홍난파 선생님만 결정받은 겁니다.”

정희준 회장은 친일파 근거로 내세운 5가지 사항에 대한 반론을 정립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음악평론가 이상만은 정 회장에 대해‘홍난파 선생을 사망에서 부활시킨 분’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음악평론가협회에 초청해 이상만 평론가와 1시간 토론하기도 했다.


홍난파와의 인연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희준 회장은 송호지학장학재단을 이끄는 재단 이사장이자 홍난파의집 이사로서 음악가는 아니다. 그럼에도 홍난파의 일이라면 하던 일을 작파하고 뛰어들 만큼 열렬한 홍난파 매니아다.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토록 활발하게 활동할까?
공정한 세상을 목표로 정치활동을 펼치던 정희준 회장은 그러나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키는 바람에 수원으로 내려가는 일이 있었다. 수원에 낙향한 후 무엇을 해야 가치 있는 일일까를 궁리하던 중 수원성과 관계있는 정조대왕을 연구하기로 결정하고, 실제 고향인 화성에서는 무엇을 연구할까 또 고민하던 차 난파합창단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1965년에 창단한 난파합창단이 있었는데 경기도에서 가장 오래된 합창단으로, 한때 남양 홍씨 종친회에서 난파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운영했어요. 그런데 자금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다가 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저에게 운영을 맡긴 거예요. 기왕지사 사단법인으로 조직해 4년 동안 이끌었는데 예산도 아주 크게 잡았습니다. 예산을 연 1억 2천만 원으로 잡았어요. 6천만 원은 내가 직접 담당하고 나머지는 발품을 팔아 기업 후원으로 채웠죠. 당시 지휘자는 바리톤 전평화였어요.”

정 회장은 자석이 끌리는 것처럼 홍난파의 일에 점점 다가가기 시작했다. 가만 돌이켜보니 홍난파와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 우선 같은 고향인‘남양읍’출신이라는 점이다. 정 회장의 부친은 생전에 서울 서대문에서 홍난파 선생을 두 번을 만났다는 사실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만리동에서 경복중을 다니던 부친은 정동과 당주동 골목으로 거쳐 청와대 방향으로 올라가곤 했는데 이때 바이올린을 끼고 가는 홍난파를 두 번이나 만났다는 것이다. 학교 졸업 후에는 남양에 귀향해 양조장을 경영하다가 해방 후에는 초대 면장직을 맡았다. 부친은 면장 재임 시, 공회당을 짓고‘난파회관’으로 명명했다. 부친이 난파선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부친은 비록 면장이었지만 당시 남봉진 경기도 지사나 이범석 국무총리 이런 분들하고 친하게 지내셨어요. 그런데 남봉진 지사가 난파 음악을 좋아해서 다양한 고증을 거친 후 난파 생가를 건립하게 된 거예요. 그러니 난파합창단을 맡은 게 우연이 아니라는 겁니다.(웃음)”


6.25 시절 위로가 되어준 홍난파의 노래

일제 강점기 당시 1914년까지 남양읍은 3개 면으로 나뉘어 있었다. 난파 선생은 그중 둔지곶면, 지금의 활초리에서 탄생했다. 당시 둔지곶면에서 행사가 열렸을 때 홍난파 선생 부자(父子)가 기부한 사실도 있었다. 홍난파 일가가 남양읍 출신이라는 사실은 새문안교회 100년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새문안교회가 두 번째로 건립되었을 때 총감독을 맡았던 사람은 홍정후 집사인데 홍난파 부친‘홍준’의 조카였다. 홍정후는 남양읍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와 언더우드 선교사의 일을 돕던 중 홍난파의 부친을 서울로 모신 것 같다. 부친은 황실 운영 통역학교를 다녔고, 언더우드 일을 도왔다. 부친이 산 곳은 정동 14번지였고 언더우드는 그 옆집 13번지에 살았다.
그러니 난파 부친이 언더우드와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 알 수 있다. 정희준 회장의 부친이 경복중에 다니던 중 정동 부근에서 홍난파 선생을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희준 회장 역시 홍난파와 많은 관련이 있다. 정 회장은 어린 시절부터 웅변대회와 동화구연대회 등에서 1등을 차지하는 등 예능 분야에 소질이 있어 학예회 때마다 홍난파, 현제명 노래를 부르곤 했다. 특히 6.25 전쟁 후 대구 피난시절 남자단원으로는 유일하게 육군 위문단에 입단해 여자 11명과 함께 육군병원 순회연주회를 펼치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팔다리 잘린 사람들이 가득한 병원이었어요. 하루 1천 명씩 입원하는데 살 썩는 냄새가 진동해요. 그래도 합창단원들은 내색하면 안 된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늘 방글방글 웃곤 했어요. 군인들이 볼을 비비는 등 아주 예뻐해 줬죠. 싫지만 어떻게 하겠어요. 껴안아 주면 참아야죠. 대구 금호강에서 총소리가 울리는데도 우리는 노래를 불렀어요. 그때 홍난파 선생님의 노래를 참 많이 불렀죠. 그때가 초등학교 6학년인데 주말마다 위문공연 다니느라 공부도 별로 못했는데 운 좋게 경기중학교에 입학했어요.”

홍난파, 더 이상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돼

그랬다. 부친도 홍난파와 인연이 있고 정 회장 본인 또한 고향이 같은 데다 학예회 때마다 홍난파 노래도 곧잘 부르지 않았던가. 난파합창단을 맡고 보니 보통 인연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 회장은 난파합창단을 맡으면서 난파기념사업회 故 송태옥 이사장의 권유로 이사로 활동했다. 이즈음 미국에 살고 있던 난파 선생의 따님 홍정임 여사는 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로부터 ‘친일 시비에 관해 이의가 있으면 신청하라’는 한 통의 공문을 받고, 서울대 법대 출신인 정희준 회장에게 난파 선생의 친일시비에 관한 모든 업무를 위임하였다. 이에 따라 후배 변호사들과 함께 본안 소송에서 결론을 낼 때까지 친일파 명단에 등재하는 것을 보류하는 가처분 신청 법원결정문을 받아냈다.

“이렇게 결정이 났는데도 친일파 시비는 끊이지 않고 있어요. 말이 안 되는 문제예요. 특히 특정 정권이 반일감정을 부추기면서 불매운동 등을 펼쳤을 때 꼭 친일파 문제가 불거지고, 그때마다 홍난파 선생을 자꾸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러면 안 되죠. 우리 가곡의 단군 할아버지인데 이제는 예술가로 온전히 인정해야 합니다. 몇 해 전 예술의전당에서 조사한, 우리 국민 애창곡 40선이 있는데 그중 봄처녀, 봉숭아, 옛 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사랑 등 무려 5곡이 홍난파가 작곡한 곡이었습니다. 가장 많아요. 그 다음 작곡가가 김동진 선생으로 4곡이었고요. 실제로 이렇게 홍난파 작품을 좋아해요.‘일제청산을 다했다’는 북한에서도 홍난파는 민족음악가로 널리 사랑받고 지금도 가장 많이 불리고 있어요. 2002년 북한의 조선예술 12월호에도 홍난파는‘진보적인 민족음악가’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홍난파 선생을 더 이상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정 회장은 홍난파에 대해 북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중국에서 운영하는 북한음식점을 찾아 확인까지 했다. 국가 훈장 수여에,‘이달의 인물’로 선정되고 그가 살던 집 ‘홍난파의 집’은 등록 문화재가 되었을 만큼 사랑받은 홍난파의 노래는 교과서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동요로 인정받곤 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때부터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2004년 7월 ‘고향의 봄 꽃동산 조성사업’을 위해 갤럽여론조사를 실시했을 때 한창 친일파 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난파 선생의 음악적 업적을 기르는데 88.5%가 찬성했다.


가곡의 선구자, 홍난파를 온전히 느끼는 시간 되길

근대음악가 하면 왜 홍난파를 효시로 볼까? 사실 그 이전에도 서양음악을 공부한 음악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네 명이나 존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프로 음악가라고 하기에는 그 수준이나 작곡기법이 초보 수준이었다. 독학한 정도였고 작곡 작품도‘창가’수준이었다. 그러나 홍난파는 달랐다. 그의 작품은 단순한 창가와는 다른 가곡, 그래서 그를‘가곡의 선구자’라고 한다.
오는 10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정희준 준비위원장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니 우리가 사랑하는 홍난파의 가곡들을 만날 수 있다. 국악인 오정해의 특별출연으로 더욱 빛을 발할 이번 공연은 2000년대 이후 그토록 시비를 걸었던 친일파문제를 말끔히 걷어버리는 공연이 되었으면 좋겠다.

“참 오랫동안 친일문제로 시달렸습니다. 이제는 그런 편견과 오해를 완전히 잊고서 온전히 음악가로서의 홍난파를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 척박한 시대, 진정 민족적인 음악가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글 김종섭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