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제2차 세계대전에 영향을 끼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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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음악은 여러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엔 승리를 축하하기보단 전쟁의 비극을 묘사한 작품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나치의 폴란드 침공, 홀로코스트 등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의 참상을 담은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가 있다. 이 작품은 유대인 수용소의 끔찍한 비극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쟁에서 음악이 사용된 사례는 많다. 그렇다면 음악은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특히 20세기 전반에 등장한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음악의 역할에 집중했다. 두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을 통해 대중의 감성을 자극해 자신의 체제에 대한 성공적 지지를 동원하려고 했다. 이번에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음악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집중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당시 음악은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외교적 연합을 이루기도 했으며, 참회의 방법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각각 어떤 음악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정치적인 역할 히틀러의 독일 음악 이용,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이 자국민에게 준 영향

먼저 정치적인 역할을 한 경우로 나치의 독일 음악 사용을 말할 수 있다. 나치즘은 소련의 스탈린주의와 함께 20세기 대중 민주주의의 시대에 태어난 새로운 체제로 지도자가 절대적 지위를 차지한다. 지도자는 국가, 사회, 개인에 대한 전체적 통제를 목표로 한다. 나치 정치에 있어 음악은 독일 민족주의의 핵심 요소로써 작용했다. 히틀러에게 독일 음악가들의 음악은 독일 문화의 지속성과 우수성을 보여주고 나치 하에 국민을 결속시키는 도구로 작용했다. 독일 민족의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 음악은 영토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히틀러는 모차르트, 베토벤, 바그너, 브루크너 등 독일 음악가들의 음악을 이용해 민족의 고유한 독창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과거와의 지속성을 재현해냈다. 하지만 이런 독일 음악 천재들에 대한 숭배는 나치 인종주의의 표현이자 동시에 정당화의 수단이 되었다. 히틀러는 우수한 아리아인의 음악은 영웅적이고 고상하며 철학적인 특성을 가졌다고 치부하는 반면에 비독일적인 음악, 특히 유대인 음악가의 음악은 피상적이며 뿌리가 없다며 탄압했다.

한편 나치에게 음악은 전쟁 의도를 감추려는 위장 도구로서 역할도 있었다. 당시 나치는 외국의 의심을 사지 않고 독일을 대규모로 재무장하려고 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면서 재무장을 하는 것이었다. 나치가 평화를 외치는 방법은 음악 축제, 연극제, 미술전 등 대규모의 화려한 문화 행사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예로 1936년에 거행된 베를린 올림픽은 한편의 화려한 위장 평화 축제였다.

소련의 경우를 살펴보면,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은 전쟁으로 고통받던 소련 국민에게 자부심과 승리의 희망을 가지게 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공습이 심해지던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민들에게 방송으로 알렸다. 심지어 7번 교향곡 초연은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레닌그라드에서 연주되었다. 이 교향곡으로 소련 국민은 자신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전쟁으로 지쳐있던 소련 국민의 사기가 높아졌으며, 자신들의 도시가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됐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나치에 의해 짓밟힌 러시아 문화의 위대함을 일깨워 국민이 하나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외교적인 역할 –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으로 미국과 소련의 연대 강화

나치의 음악은 외교적 역할도 했다. 나치는 모차르트를 억지로라도 민족주의자로 내세우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독립 정신을 꺾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궁극적 합병을 이루는 데 있어 모차르트의 독일성이 유용한 문화적 선전 도구였기 때문이다. 나치는 브루크너를 숭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오스트리아 내의 예술가들로부터 나치 지지를 끌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히틀러는 자신이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브루크너라는 오스트리아 음악가를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하는 과정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독일 문화 통합을 추진했다. 마침내 히틀러는 1937년 오스트리아를 독일과 병합하는 데 성공했다.

쇼스타코비치의 ‘7번 교향곡’은 2차 세계 대전 중 소련과 미국의 연대감을 강화하는 외교적 역할을 했다. 7번 교향곡이 공연과 방송을 통해 미국 전역에 계속해서 울려 퍼지면서 미국의 여론이 바뀌었다. 이 교향곡을 들은 미국인들은 소련 국민이 큰 희생을 치르며 히틀러와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공감했고, 소련을 도와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미국인들은 소련에 대해 함께 손잡고 싸울 가치가 있는 상태로 인식하게 되었다. 마침내 루스벨트 행정부는 스탈린과의 연합 정책을 지지하고 강화했다.

참회의 역할 하르트만의 참회의 음악개념으로부터

이 시기의 음악이 정치적이거나 외교적인 역할만 한 것은 아니다. 칼 아마데우스 하르트만의 음악을 보자. 하르트만은 자신의 모국인 독일이 전쟁에서 행한 반인륜적인 행위로 고통받은 사람들을 추모하고 반성하는 의미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하르트만은 유대인들에 대한 히틀러의 탄압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했고 이런 모습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을 음악에 담았다. 그가 1933년 작곡한 ‘현악 4중주 제1번’에서도 하르트만의 이런 노력을 알 수 있는데, 그는 유대인의 전래 선율을 이용하여 나치에 의해 탄압받던 유대인들에 대한 참회의 심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또한 그는 나치 시대 대중들이 유대인 음악가로 배척하던 멘델스존이나 말러의 작품을 현대음악과 함께 연주함으로써, 대중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으려는 노력도 하였다. 이렇듯 그의 음악은 시대정신과 인간성 회복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고통과 비참함을 반성하고 기억하려는 의도를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이런 사고를 가진 하르트만의 음악은 ‘참회의 음악’이라는 개념으로 불린다.

음악은 시대, 사회, 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가?

이렇게 2차 세계 대전 당시 음악은 자국민을 하나로 결집하는 ‘정치적’, 타국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외교적’, 전쟁 당시 행해진 잔혹한 행위에 대해 반성하는 ‘참회’ 등 다양한 역할을 했다. 수용소에서는 양면적인 역할을 했다. 죽음으로 가는 수용자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주기도 하고, 고문당하는 자의 울부짖는 소리나 총성을 ‘중화’하기도 했다. 이렇듯 음악의 역할은 음악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같은 음악이라도 바라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음악의 역할은 천차만별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시대, 사회, 정치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인가? 나치가 사용한 독일 음악은 작곡가의 신념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치 정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따라서 우리는 어떠한 음악과 음악가에 대해 평가할 때 음악이 만들어진 시대 배경을 고려해야겠지만, 분리하여 그 음악 자체만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고유한 예술성에 한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글 한숙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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