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와 표도르 샬리아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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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리아핀과의 교제는 내 인생에서 가장 강력하고 깊고 미묘한 경험 중 하나입니다.”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라흐마니노프가 피아노에 앉아 반주할 때 ‘나는 노래한다’가 아니라 ‘우리는 노래한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 표도르 샬리아핀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4월 1일 제정 러시아의 노보고라드주 스따로루스끼에서 태어났다. 그는 3남 3녀 중 4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부친은 오랜 전통을 가진 지역 귀족이었고 모친은 부유한 러시아군 장교의 딸로 결혼할 때 상당한 지참금을 가져왔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대체로 유복한 편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자, 공산화를 피해 러시아를 떠나 노르웨이로 향했다가 1918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소련 정부와의 관계는 대체로 나빴지만 그래도 조국이라고 생각하여 독소전쟁이 터지자 소련군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열어 그 수익금을 소련에 기부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 당국의 요청으로 귀국을 고려하였던 듯하나, 결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1943년 3월 28일에 미국 베버리힐스에서 흑색종으로 사망하였다.

젊은 날의 라흐마니노프, 1901년

베이스 오페라 가수인 표도르 샬리아핀은 1873년 2월 13일 제정 러시아의 카잔 주의 카잔 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샬리야핀은 스스로 1889년 세레브랴꼬프의 극단에 준단원으로 입단한 것을 예술가로서의 첫 커리어로 여겼다. 그는 1890년 3월 29일 카잔 예술 애호가 소사이어티가 주최하여 열린 차이콥스키의 ‘에브게니 오네긴’에서 자례츠끼 역을 노래하였고, 1890년 5월에서 6월 초까지 세레브랴꼬프의 극단에서 합창단원으로 일하였다. 이후 우파(Ufa)로 자리를 옮겼고 이곳에서 테너 드미트리 우사토프를 만나 진지하게 성악을 공부하게 되었다. 우사토프는 샬리아핀의 목소리를 인정해 물질적으로 가난한 그에게 무료로 수업을 해줬을 뿐 아니라 그의 삶 자체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그는 모스크바를 거쳐 뻬쩨르부르크의 마린스키 오페라 극장에서 구노의 파우스트 중 메피스토펠레를 노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라흐마니노프와는 달리 비참한 유년시절을 보내서인지, 샬리아핀은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에 동조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레닌의 권고를 받아들여 유럽과 러시아를 왕래하는 스케줄을 포기하고 1918년부터 마린스키 오페라 극장의 예술 감독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절대군주 시대보다 더한 강권통치에 환멸을 느껴 3년 만에 그 자리를 떠난다. 그는 1922년부터 파리에 정착했고 1934년까지는 활발한 연주와 녹음 활동을 계속했다. 마지막 공연은 1937년 몬테카를로 가극장의 ‘보리스 고두노프’이었으며 이듬해 파리에서 65세를 일기로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메피스토펠레스 분장의 샬리아핀

라흐마니노프와 샬리아핀의 우정은 ‘은빛 세기’라고 일컫는 199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1873년 같은 해에 2달 차이로 태어난 이 위대한 두 예술가의 우정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참으로 서로 다른 성향이었다.
샬리아핀은 어느 모임에서나 잘 어울리고 흥겨운 성격이었으나, 라흐마니노프는 군중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샬리아핀은 누구하고든 잘 어울리는 자유분방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과만 어울리는 점잖은 러시아 지식인의 피를 가진 사람이었다. 샬리아핀은 큰 몸동작과 함께 말을 많이 하였고, 라흐마니노프는 조용히 웃으며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 위대한 두 위인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그 시작만큼이나 달랐다. 예술가로서 샬리아핀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고, 부모는 그 길을 지원하지도 않고 오히려 날카롭게 반대하였다.
그에 비해 라흐마니노프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첫 번째 스승은 어머니였다. 가정교사에게 피아노를 배우기도 했다. 9세에 상트뻬쩨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으나 곧 모스크바로 옮겨 음악에 재능 있는 친구들과 함께 하숙하며 악기를 배울 수 있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뿌쉬낀의 ‘집시들’을 대본으로 단막 오페라 ‘알레코’를 작곡하여 금메달을 수상하며 졸업하였다. 당시 이 오페라를 심사한 차이콥스키 교수는 라흐마니노프에게 “혹시 나의 단막 오페라인 ‘이올란타’와 자네의 ‘알레코’를 함께 공연하면 어떻겠나?” 하고 제안했고 이듬해 볼쇼이 극장에서 이 역사적인 두 단막 오페라의 공연이 이루어졌다. 알레코를 가장 잘 노래한 성악가는 그의 친구 표도르 샬리아핀이었다. 원작자인 알렉산드르 뿌쉬낀을 기념하여 열린 공연에서 샬리아핀은 뿌쉬낀으로 분장하여 알레코를 노래하기도 하였다.
라흐마니노프는 총 83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는데 그중 5곡을 샬리아핀에게 헌정하였다. 그중 베토벤의 5번 교향곡을 테마로 아뿌흐찐(러시아의 시인, 1840~1893)의 시에 의해 가곡 ‘운명’을 작곡하고는 샬리아핀과 함께 대문호 톨스토이를 찾아가 들려주었다. 칭찬을 받을 것으로 내심 기대했으나 톨스토이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08년 드레스덴에 있었던 라흐마니노프는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연출한 ‘파랑새’ 10주년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없게 되어 ‘스타니슬라브스키에게 보내는 라흐마니노프의 편지’라는 긴 제목의 노래를 작곡하여 당시 모스크바에 있었던 친구 샬리아핀에게 전달하여 노래로 축하하기를 부탁하였다. 가곡으로 작곡한 곡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의 83곡의 가곡 중 한곡으로 가곡집에 작품 번호 없이 포함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우)와 샬리아핀(좌)

이 두 위대한 예술가의 우정은 참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감사하기도 하다. 이들의 우정으로 태어난 아름다운 작품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은 같은 해에 태어난 두 사람의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여러 공연이 한국에서 열리지만, 그중에서도 ‘삶과 꿈 챔버 오페라 싱어즈’에서 기획하고 있는 오페라 콘서트 ‘알레코’가 유독 기대되는 것은,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샬리아핀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쉬고 있는 ‘샬리아핀’의 묘에 서 있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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