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시킨과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그 설레이는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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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음악을 시기를 중심으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자면 글린카를 선두로 하는 국민악파 5인조의 시기, 차이콥스키와 라흐마니노프를 이어가는 낭만주의 시기,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를 필두로 하는 근·현대 음악의 시기로 나눌 수 있겠다.

한국에서는 어려운 발음과 이데올로기와 정치적인 문제 등의 이유로 러시아의 성악 음악은 그 아름다움에 비해 극히 소수의 성악곡만 연주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푸시킨을 먼저 이해하고 러시아 성악 음악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더 원칙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 있겠다. 오늘 필자는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1840~1893), 라흐마니노프(1873-1943)와의 음악적 만남에 관하여 두 작곡가의 오페라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차이콥스키의 성악곡은 104곡의 가곡과 10편의 오페라가 있다. 10편의 오페라 중 세 작품에서 푸시킨을 만나고 있다. ‘예브게니 오네긴’(Eugene Onegin, 1877~78), ‘마제파’(Mazepa, 1881~1883), ‘스페이드의 여왕’(Queen of spade, 1890)이 그것이다. 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예브게니 오네긴이며 세계에서도 가장 많이 공연되고 한국에서도 한국반주음악 연구소를 통하여 2006년 9월 15일에 러시아어로 초연된 바 있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이 세계적인 오페라에서는 젊은 오네긴을 사모하게 된 순수한 소녀 따찌아나의 편지의 아리아, 그녀의 여동생 올가에게 바치는 순진무구한 청년 롄스키의 젊은 사랑의 아리아, 결투를 앞두고 죽음을 예시하는 롄스키의 무거운 죽음의 아리아, 많은 나이 차를 극복하고 따찌아나와 결혼하여 깊은 사랑에 빠진 그레민 장군이 부르는 묵직한 사랑의 아리아를 듣는 것이 백미라 할 수 있겠다. 그중 여기에서는 순진무구한 청년 롄스키의 젊은 사랑의 아리아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을 사랑하오 올가…’와 그레민 장군이 부르는 묵직한 사랑의 아리아 ‘사랑은 나이를 초월하여…’를 읽어 보기로 하겠다.

서울 명동에 건립된 알렉산드르 푸시킨 동상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오, 올가, 마치 시인의
불타는 영혼만이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드는 것처럼.
내 마음에는 오직 그대만이, 나의 어떤 희망,
변치 않는 그 어떤 갈망,
그리고 그 어떤 괴로움!
번민이 뭔지도 모르는 소년일 때부터
당신에게 빠져있었소,
따뜻한 감정을 가지고 당신이 어렸을 때
노는 것을 지켜보았다오.
과수원의 나뭇가지 아래서
그대와 같이 놀았었소.

아,
그대를 사랑하오,
오직 시인의 마음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으로 그대를 사랑하오.
오직 그대만을 위해 꿈을 꾸고,
오직 그대만을 갈망한다오,
그대는 나의 기쁨이며 고통이오.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오, 영원히, 그 어떤 것도
– 멀리 떨어져 있어도,
헤어져 있는 시간도, 기쁨의 외침도 –
순수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내 마음을 식힐 수가 없을 것이오.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오! 그대를 사랑하오!

롄스키는 젊은 시인으로, 푸시킨의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을 이 젊은 시인에게 투영시키는 듯하다. 그래서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 실제로 푸시킨이 부인 나탈리아 곤차로바로 인한 질투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여 총을 맞고 사망한 것처럼 작품 속에서 롄스키는 약혼녀로 인한 질투심 때문에 결투를 신청하여 친구인 오네긴 손에 죽음을 맞는다. 위의 노래는 살짝 바람기 있는 약혼녀 올가에게 바치는 젊은 시인의 사랑 노래이다. 뽀골뽀골 끓는 찌개 국물처럼 젊고 생동감 넘치는 이 젊은 시인의 사랑 노래와 비교하면 노년의 그레민 공작의 사랑 노래는 역시 연륜 있고 묵직하다.
친구 롄스키를 결투에서 살해하고 괴로워하며 방랑하다 돌아온 30대의 오네긴은 친척인 그레민 장군의 무도회에 초대받고, 그곳에서 지난날 자신에게 사랑의 편지를 보냈던 (그러나 그가 그냥 오빠처럼 사랑하겠다며 거절했던) 따찌아나가 원숙한 여인으로 변하였음을 보고 이제 오히려 그가 사랑에 빠진다. 젊은 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하는 노장 그레민은 그러한 사정을 모른 채 살며시 부끄러워하며 오네긴에게 아래와 같은 사랑의 노래로 자신을 변명한다. 작곡가와 콘스탄틴 실로프스키가 푸시킨의 원문 소설을 거의 유지하여 대본을 쓴 오페라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원문에 등장하지 않는 이 그레민 공작의 아리아는 가장 푸시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예브게니 오네긴 중 그레민 공작의 아리아 장면(볼쇼이 오페라극장)

사랑은 나이를 초월한다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축복이지.
이제 막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도,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백발의 늙은 군인에게도!
오네긴,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네,
따찌아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것을!
그녀가 나타나서는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던
내 인생을 밝게 비추어 주었지,
마치 폭풍이 치던 하늘의 한 줄기 햇살처럼,
그리고 나에게 삶과 젊음을 가져다주었지,
그래, 젊음과 행복을!

약삭빠르고 소심하고,
멍청하고, 버릇없는 젊은이들 속에서,
얼빠지고 지루한 건달들과
따분하고 불평만 하는 재판관들 속에서,
신앙심이 깊은 바람둥이 여인들과
그들을 쫓아다니는 성의 노예들 사이에서,
상냥하며 유행만 따르는 위선자들과
예의 바르고 인자한 배신(背神)자들 사이에서,
잔인한 마음을 가진
속물들의 차가운 비난 속에서,
짜증 나는 공허함, 타산 그리고
남의 험담을 좋아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어두운 밤의 별처럼,
빛나고 있다네, 맑고 깨끗한 하늘 속에서.
그리고 언제나 나에게 보여주고 있지,
밝게 빛나는,
밝게 빛나는 천사의 후광을!

사랑은 나이를 초월한다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축복이지.
이제 막 세상 물정을 알기 시작한
꽃 같은 젊은이들에게도,
사선(死線)을 넘나들던
백발의 늙은 군인에게도!
오네긴, 나는 숨기고 싶지 않다네,
따찌아나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는 것을!
그녀가 나타나서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던
내 인생을 밝게 비추어 주었지,
마치 폭풍이 치던 하늘의 한 줄기 햇살처럼,
그리고 나에게 삶과 젊음을 가져다주었지,
그래, 젊음과 행복을!

차이콥스키를 교향곡 작곡가로 보자면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음악 작곡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차이콥스키는 전 작품을 통하여 심포니(symphony)적인 선율이 흐르고 라흐마니노프의 모든 작품은 피아니즘(Pianism)이 지배한다. 이러한 양상은 그들의 성악곡, 특히 오페라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성악 음악에는 83곡의 가곡과 3편의 오페라가 있다. 세 편의 오페라 ‘알레코’(Aleko, 1892), ‘인색한 기사’(The Miserly Knight, 1904), ‘로마의 프란체스카’( Francesca da Rimini, 1905) 중 로마의 프란체스카는 단테의 ‘신곡’을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대본화하여 작곡하였고 나머지 두 작품은 푸시킨의 산문을 그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중 여기서는 알레코(Aleko)를 읽어 보기로 하겠다.
오페라 알레코(Aleko)는 푸시킨의 산문 ‘집시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데 작곡가 나이 겨우 19세에 모스크바 음악원 졸업 작품으로 작곡하여 금메달을 받았고, 이후 스승이자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차이콥스키로부터 “당신의 알레코를 나의 이올란타와 함께 공연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제안받았을 정도로 훌륭한 작품이다. 두 작품이 모두 공연시간 1시간 남짓 되는 단막 오페라이기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그만큼 당대 최고 작곡가의 마음에 들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오페라 ‘알레코’는 2007년 ‘삶과 꿈 챔버 오페라 싱어즈’를 통하여 국내 초연한 바 있다.

마치 원작자 본인을 투영시킨 듯한 외부인 알레코는 아리따운 집시 여인 젬피라의 손에 이끌려 집시 무리로 들어간다. 그러나 자유로운 사랑을 하는 젬피라에게는 새로운 연인이 등장하고 배신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던 알레코는 결국 사랑하던 여인을 연적과 함께 살해하고 무리로부터 추방당하며 또다시 홀로되었음을 슬퍼한다.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와는 사뭇 다른 사랑이 이 ‘집시들’(알레코)에서 펼쳐지는데, 방랑하는 무리 속에서의 자유로운 사랑과 배신이 바로 그것이다. 질투와 그것으로 인한 살해가 두 작품에서 모두 존재하지만 ‘알레코’에서의 사랑과 질투는 더 뜨겁고 쓰라리다. 이러한 점은 모든 무리가 잠든 밤에 홀로 나와서 연인의 배신을 가슴 아파하며 부르는 알레코의 카바티나를 들어보면 더욱 사실적으로 느끼게 될 것이다.

오페라 ‘알레코’ 중 젬피라와 알레코(푸시킨 오페라 극장)

무리는 잠들어 있고
한밤중 달은 아름답게 빛나네.
그런데 왜 나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는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가?
난 아무 걱정 근심 없는 유랑민이고
교화, 문화의 속박을 경멸하는,
나는 자유로운 사람.
나는 간교하고 맹목적인 운명의 힘을
경멸하지 않고 살았다.
오! 신이여!
나의 순수한 영혼의 욕망이 장난을 치는가!
젬피라… 그녀가 날 얼마나 사랑했는가!

얼마나 부드럽게 내게 순종했는가,
인기척 없는 조용한 밤을 함께 보냈지.
늘 감미롭게 속삭이고 황홀한 입맞춤으로
내 명상을 순식간에 흩어지게 했지.
난 기억한다네.
욕망에 충만한 그녀가 이렇게 속삭였지.
‘당신을 사랑해. 당신 손에 있고, 난 영원히 당신 것이야!’
이 말에 난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의 매혹적인 눈에 입 맞추고
아름다운 그녀의 머리카락, 깜깜한 밤, 젬피라의 입술…
감미로운 애무에 그녀는 욕망으로 가득 차
내게 그렇게 말했지…

그런데, 그런데…
젬피라가 부정한가? 젬피라가 부정해!
나의 젬피라…! 그녀가 차가워졌다네!

시인을 ‘언어의 연금술사’라고 칭한다면 작곡가는 그 만들어진 금을 디자인하는 ‘언어로 만들어진 금의 세공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노래 한 곡을 멋들어지게 불러주는 성악가는 언어로 만들어진 금으로 세공된 보석을 아름답게 펼쳐 보여주는 ‘디스플레이 아티스트’(DISPLAY ARTIST)라고나 할까?

지금으로부터 약 224년 전에 태어나 38세를 살다 간 세기의 대문호는 이후 수많은 작곡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탄생한 아름다운 노래들은 또 숱한 성악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으며, 그래서 불린 노래들은 3세기를 흐르며 청중들의 귀와 마음과 영혼을 즐겁게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벅찬 만남인가?
바라기는 이렇게 탄생하여진 노래들이 이 세대에도 더욱 많이 연주되기를 바라고, 또 21세기에도 이런 설레이는 만남 ‘시인, 작곡가, 성악가’로 인하여 세상이 새록새록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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