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 그 해학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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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차이로 러시아에서 태어난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는 공통점이 적지 않다. 우선 사진에서 보이는 우울하고 어두운 눈빛이 그렇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라는 점이 그렇다. 다른 점이라 하면 라흐마니노프는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혁명을 겪었고 (결국은 망명의 길을 택했지만), 쇼스타코비치는 혁명을 코앞에 둔 1906년에 태어나 평생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만 살다 갔다.
흔히들 세르게이(라흐마니노프의 이름)를 피아노 작곡가로, 드미트리(쇼스타코비치의 이름)를 교향곡 작곡가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둘 다 적지 않은 성악곡을 작곡한 성악곡 작곡가이기도 하다. 세르게이는 19세에 작곡한 ‘알레코’를 비롯하여 ‘인색한 기사’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등 3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고, 드미트리도 미완성인 ‘겜블러’를 비롯하여 ‘코’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 등 3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또한 세르게이는 83곡의 가곡을, 드미트리는 95곡의 가곡을 작곡하였다. 라흐마니노프에게는 살리아핀이, 쇼스타코비치의 곁에는 네스체렌코가 있었던 것이 이들의 성악곡 작곡에 적지 않은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라흐마니노프는 아뿌흐찐의 시 ’운명‘을 읽고는 베토벤 5번 교향곡의 모티브를 인용해 가곡 ’운명‘을 작곡한 것을 비롯해 5곡의 가곡을 친구 살리아핀에게 헌정하였다. 쇼스타코비치는 마지막 작품이자 인생의 역작인 ’미켈란젤로의 시에 의한 모음곡‘을 작곡하여 에브게니 네스체렌코를 통하여 초연하였다.

라흐마니노프 초상, 1923년(위키피디아)
쇼스타코비치 초상, 1942년(위키피디아)

이들의 음악은 해학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는 사회주의를 피하여 미국으로 망명하였지만, 제정 러시아 말기의 어둡고 음울했던 체제적인 감성은 그의 영감을 끊임없이 침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사회주의 러시아에서 평생을 살았던 쇼스타코비치는 그의 작품 곳곳에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천재 작곡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해학은 사뭇 다르지만 러시아적인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라흐마니노프 ’딸꾹질 했나요, 나타샤?‘ 악보 마지막 부분- 상단 우측에 ‘딸꾹질 하듯이’ 노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1899년 26세의 젊은 세르게이가 작곡한 ‘딸꾹질 했나요, 나타샤?’는 원래 무대에서의 연주를 위해 작곡한 노래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귀가 가려울 때 ‘누가 내 흉 보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러시아인들은 딸꾹질을 하면 ‘누가 내 생각을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미래의 아내가 될 나타샤를 생각하고 있던 젊은 세르게이는 지금 자신이 그녀를 생각하고 있기에 분명 딸꾹질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러 뱌젬스키(Vyazemsky)의 시를 떠올린다. 그 시는 Vyazemsky가 샴페인과 와인 저장고로 유명한 프랑스의 도시 에페르네에 머무는 동안 샴페인 한 병을 들고 그의 친구 다비도프(Davydov)에게 헌정한 시이다.

Davydov, 당신 딸꾹질 했나요?
내가 여러 가지 맛과 특성과,
여러 가지 종류와 빈티지의
샴페인을 마셨을 때.
보로네즈의 저장실에서
시인인 Davydov, 당신을 사랑하며
샴페인을 사랑하며
당신을 무수히 되새겼을 때 말이오.
여기엔 작은 물줄기로 시인을 먹이는
카스탈리의 샘이 솟아오른다오.
시란 여기에서 길들여지기 마련,
5프랑만 내면! 술도 마시고, 시도 쓰고!

이 시에서 헌정 대상인 Davydov를 나타샤로, 시인을 여류 시인으로 바꾸어 라흐마니노프는 그녀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다. 스스로도 뿌듯하여 악보 상단에 ‘아니오! 나의 뮤즈는 죽지 않았소, 사랑하는 나타샤, 당신에게 나의 새 노래를 헌정하오.’ 라고 헌정사까지 기재하여서. 그 중에 ‘술도 마시고! 시도 쓰고!’ 부분에서는 ‘딸꾹질 하는 것처럼’이라는 지문을 넣은 장5도 짧은 하행 음정으로 곡을 마무리한다. 세상에! 가곡에 딸꾹질이라니.

1965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발행된 풍자 잡지 ‘악어’에서 ‘독자들의 소식’란을 읽던 쇼스타코비치는 기가 막힌 음악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그 중 5개의 메모를 택하여 노래로 작곡하기로 한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연가곡이라 하면 시인의 사랑, 물방앗간의 아가씨처럼 아름다움을 노래하던가, 혹은 죽음의 노래와 춤처럼 죽음을 이야기하던가 할 터인데 이 음울한 시대의 천재 작곡가가 택한 것은 무엇인가 하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잡지 ’악어‘에서의 가사에 의한 5곡의 연가곡’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한 이 노래는 진실한 고백,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 사리분별, 이리나와 양치기, 지나친 환희, 총 5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잡지를 읽은 그다음 달인 9월에 바로 착수하여 1달 만에 완성하였고, 1966년 5월 28일 레닌그라드에서 초연하였다. 베이스를 위하여 작곡한 이 연가곡 초연은 앞서 언급했던 에브게니 네스체렌코가 노래하였고 피아노는 작곡가인 자신이 직접 연주하였다.

그중 두 번째 곡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을 노래하다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어느 청년의 구혼광고에서 가져온 이 노래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세상에! 구혼광고를 가사로 한 가곡이라니.

나는 총각입니다.
나는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내가 돈 걱정을 하지 않게 해줄
아내를 찾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정말 간절히 원합니다.
만약 모스크바에
나를 먹여주고, 마시게 해주고,
나에게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
이런 여인이 있다면
빨리 저에게 보내주세요.
나에게 그녀의 주소를 알려 주세요.
제발..
제발..

쇼스타코비치 ‘이루어지기 어려운 소망’ 악보의 마지막 부분

황제 시절의 러시아에서 태어나 혁명을 피해 망명의 길을 택한 라흐마니노프, 평생을 사회주의 소비에트의 러시아에서 살다 간 쇼스타코비치. 이 두 천재의 삶의 궤적은 조금 달랐을지라도 품고 있던 해학의 방향과 깊이는 어느 정도 닮은꼴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가지 사건과 사고로 복잡하고 어지러운 요즘, 이러한 해학과 풍자의 음악으로 조금의 여유를 갖는 것이 이 어지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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