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와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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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이자 서거 8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다. 라흐마니노프는 1873년 제정 러시아의 노보고로드에서 태어나 사회주의 혁명을 피해 망명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1943년에 사망하였다.
필자는 이 칼럼에서 지난 4월호, 6월호와 8월호에 각각 ‘라흐마니노프와 샬랴핀’, ‘푸시킨과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그 설레는 만남’,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 그 해학의 동행’이라는 제목으로 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의도치 않게 시리즈가 되었지만 아마도 이번 칼럼이 라흐마니노프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것이지 싶다.

1902년 칸타타 ‘봄’의 작곡을 마친 라흐마니노프는 곧바로 12곡의 가곡 op.21의 작곡에 돌입한다. 이 12곡의 가곡은 라흐마니노프의 성악 작품 중 가사를 다루는 두 가지 주요한 특징에 주목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가볍고 명상적인 풍경과 서정적 스케치로 대부분 매우 짧고 쓰는 방식이 간결하다. 다른 하나는 대조적인 전개와 표현이 자세히 나열되어 강렬한 성악 부분이 확장된 극적인 독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시적 가사의 최고 걸작은 ‘라일락’(E. A. Beketova 작사), ‘여기가 좋아요’ (G. A. Galina 작사)라고 볼 수 있다. 두 작품의 텍스트 모두 대단한 예술적 가치가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이미지는 이러한 로맨스의 기본 구절보다 훨씬 더 넓고 풍부하며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흐마니노프에게 중요한 것은 단어의 직접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 단어의 도움으로 완전히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무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시적인 대사로 읽기보다는 내면의 느낌으로 추측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위의 두 곡 외에도 라흐마니노프의 83곡의 가곡 중에서 이 op.21의 12곡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주옥같은 작품들이 많은 편이다. ‘그들이 대답했네’, ‘멜로디’, ‘나는 선지자가 아니오’, ‘얼마나 아픈지’, 또한 아뿌흐찐의 시에 의해 작곡한 ‘뮈세의 단편에서’ 등은 그의 가곡 중에서 아름다운 선율로 잘 알려진 곡들이다.

라흐마니노프의 가곡 ‘운명’ 악보의 첫 부분

아뿌흐찐 이야기가 나왔으니 op.21의 첫 곡인 ‘운명’을 논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운명’은 12곡 중 다른 작품보다 일찍 작곡하였다. 음악원 재학 시절의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라흐마니노프의 첫 선언적인 가곡이라고 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가곡을 주로 초연하였던 샬랴핀에게 헌정하는 이 작품의 창작은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성악가와 작곡가의 우정과 그의 노래하는 방식에 최대한 가깝고 적합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열망으로 촉발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에서 ‘운명의 모티브’를 기반으로 이를 크게 재고하였다. 원곡의 ‘운명의 모티브’보다 두 배로 느린 템포와 각 사운드에 악센트가 있는 무거운 옥타브의 더블링은 이 모티브에 완전히 다른 색감을 부여하고, 베토벤의 특징인 성급한 리듬 에너지를 배제하였다.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은 무겁고 우울한 행렬의 성격으로 유지되며 강력하고 치명적으로 불가피한 사람에게 접근하는 무언가(아마도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를 불러일으킨다. 성악부의 리듬은 운명에 따르는 행렬의 측정 된 움직임을 다소 독립적인 성가 성격의 구성과 번갈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열정적이며 서정적인 안단테의 ‘그러나 땅에는 행복이 있다!’ 이후의 부분이 눈에 띄며, 특히 Falsetto로 노래하는 ‘사랑하는 친구여! 나와 함께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 부분의 소름 돋는 피아니시모는 이 가곡의 운명적 압권이라 할 수 있겠다.

가곡 ‘운명’ 중 Falsetto로 노래하는 ‘사랑하는 친구여! 나와 함께 마중 나가지 않겠는가?’ 부분

전해지는 이야기로 라흐마니노프는 이 ‘운명’을 작곡하고는, 걸작을 작곡했다는 기쁨에 당대의 거장 례프 톨스토이에게 달려가 들려주었다고 한다. 친구인 샬랴핀의 노래와 작곡자 본인의 반주였음은 두말할 필요 없이.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톨스토이는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무슨 러시아 민요라도 들려주리라 생각했지….”라고 하며….
걸작들이 모여 있는 op.21의 12곡 중에서도 샬랴핀에게 헌정되어 베이스와 저음 가수들에게 하나의 도전 과제가 된 이 7분짜리 대작은 베토벤에게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곡 자체는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운명을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이번 9월 뿌쉬낀문화원에서 주최하여 열리는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 기념 페스티벌’에 참여하여 그 셋째 날인 13일에 러시아 피아니스트 옐례나 아발얀의 반주로 11곡의 라흐마니노프 가곡을 연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콘서트의 첫 번째 곡으로 바로 이 ‘운명’을 노래할 예정이다. 혁명 전야의 러시아에서 태어나 먼 미국에서 죽어간 그의 운명을 추억하면서….

라흐마니노프(좌)와 샬랴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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