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향해 음악을 나누다, 재미 휴먼피아니스트 권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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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프트를 나누라는 콜링을 깨닫다

‘인생에 소멸이란 없다. 부패도 없다. 암흑은 태양의 보금자리이다. 별이 빛나기 위해서는 어둠이 필요하다.’ 톨스토이는 인생이란 어둠을 뚫고 나올 때에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권수정은 요즘 사는 맛이 아주 달콤하다. 지난 2016년부터 한국과 마이애미 등지에서 ‘나눔콘서트’를 개최해 소소하지만 멈추지 않는 이슬비처럼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나눠주고 있다.
물론 그냥 주어진 게 아니다. 피아노에 대한 애증의 고통이 절정에 달할 즈음,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던 중 그만 통곡한 사건이 있었다. 긴긴 외국생활, 알 수 없는 설움이 바닥을 치고 식도를 막아버렸다. 오랫동안 독일과 미국을 경유하며 오직 피아노를 잘 치기 위해 혼신을 다했건만 그저 빈손임을 느끼는 순간, 끄억끄억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건 그에게 암흑이었다.

그러나… 결코 ‘인생에 소멸은 없다’ 그 암흑의 순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한국에서 온 친구의 전화다.
“왜 울고 있니?”
그러나 핸드폰에 눈물만 주룩주룩 흐를 뿐 입은 먹통이었다.
“수정아, 기도 중에 너에게 전화하라는 응답을 받아서 전화했는데 무슨 일 있는 거니?”
“… 흐헉, 정말?… 무슨 말씀을…”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렇게 전해 달라 했어.”

피아니스트 권수정의 통곡 소리는 매장을 꽉 채웠다. 하지만 그 친구의 음성 속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내가 갖고 있는 재능은 선물인데, 이미 주신 재능을 더 달라고 조르기보다 그 선물을 나눠주기로 하는 순간이었다. 이 고통은 반드시 지나가리라.
러시아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는 것이지, 인생을 준비만 하려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인생 그 자체, 인생의 현상, 인생이 가져다주는 선물은 숨이 막히도록 진지하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권수정은 독일과 미국을 오가며 피아니스트로서의 준비만 했다. 그러기에 자신이 목표하는 피아니스트에 이르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시는 피아노 따위는 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맥도날드 사건 이후 그의 인생관은 180도 달라졌다.


권수정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또 있다. 마이애미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수백 대의 차량이 질주하는 가운데, 갑자기 멈춰 선 앞 차 때문에 핸들 꺾으며 브레이크 밟았더니 270도 회전하는 사고를 당했다.
“그때였어요. 제 몸이 차와 함께 공중에서 270도 회전했는데,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수백 대의 차량이 천천히 눈에 들어왔습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어 어쩌면 그냥 사망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건만, 그는 멀쩡하게 낙하하고 착지했다.
“조금도 다치지 않았거든요. 그때 나를 살리신 목적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맥도날드 사건에 이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더 확실해졌습니다.”

피아니스트 권수정의 세상을 향한 진군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생각을 바꾸자 오랜 기다림 끝, 밀물을 맞이한 배처럼 나눔의 항해를 시작했다. ‘나눔콘서트’는 그렇게 세상을 향했다. 권수정을 만나 나눔콘서트로 열정적인 연주를 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들어보았다.

외로운 어린 시절, 피아노는 곧 친구

피아니스트 권수정은 어떻게 해서 미국사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나눠주게 되었을까? 그는 클래식 분위기가 넘치는 가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신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아버지 덕인지 모르지만 어릴 때부터 다양한 음악을 좋아했다. 최근 재즈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어쩌면 어린 시절 귀에 익은 다양한 음악 덕분인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클래식 분위기에서 성장한 전공자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다. 독일 유학 시절에도 지도교수는 권수정의 연주를 듣고 한국 출신의 다른 학생들과 다른 점이 있음을 금세 포착했다. ‘완벽한 테크닉’ 대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특이한 ‘필’(feel)이 있다고 했던가?
어린 시절 노총각 삼촌이 피아노를 공부하겠다고 할부로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피아노 하면 클래식이 연상되건만 클래식에 관심도 없는 분이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런데 피아노 공부는 커녕 할부금도 내지 못해 쩔쩔맸어요. 아빠가 할부금을 대신 갚고 저에게 선물로 주셨어요. 드레스를 입은 엄마가 피아노 옆에 서 있는 사진을 발견하고 그게 피아노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는데 마침 옆집 언니가 피아노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었어요. 아버지에게 늘 ‘피아노 피아노…’ 하고 졸랐습니다. 결국 삼촌 피아노를 대신 사들인 것인데 그때부터 피아노 칠 운명으로 결정된 것 같아요.”

나눔콘서트

그렇다고 행복한 시절은 아니었다. 피아노를 구입해 주실 즈음 부모님은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어린 권수정의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늘 외로움에 시달렸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피아노가 돼버렸다. 오직 피아노만 치면서 어린 시절을 다 보낸 것 같다.

“아빠가 월 5만 원 피아노학원에 보냈는데 어릴 때부터 악보 보는 재능이 뛰어났던가 봐요. 악보를 보면 초견으로 바로 연주했거든요. 또래들은 숙제로 낸 곡만 겨우 연주했지만 저는 과제곡뿐 아니라 악보책을 통째로 초견으로 연주했답니다.(웃음) 그만하면 재능이 있었던 것 아닌가요? 초견이 다소 쉬운 모차르트는 물론이고 베토벤 곡도 다 연주해 냈어요. 피아노를 빨리 쳐도 집에 가면 심심하니까 밤 9시까지 치고 또 쳤습니다.”

아마도 권수정은 악보집을 한 권의 소설처럼 읽었나 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읽어야 직성이 풀리는 소설책처럼, 다음 곡이 궁금해서 앉은 자리에서 연주해 냈다.

“처음에는 작곡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연주했어요. 작곡가를 안 다음에는 그 작곡가의 곡집을 또 구해 연습하곤 했죠. 중학교 때까지 베토벤 곡집, 쇼팽 곡집 등을 전부 쳤습니다. 밤늦게까지 무언가를 한다면 그건 삼촌에서 받은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산수, 또는 수학문제를 푸는 일이 전부였어요.”


인생은 한쪽 문이 닫히면 언제나 한쪽 문이 열리는 법

중학교 때까지 피아노를 열심히 연주했지만 피아노를 전공한다고 결정할 수 없었다. 부모님이 갈라선 상태에서 아버지가 홀로 생계를 꾸려나갔기 때문에 예술고등학교로 보내 달라고 조를 수 없었다.

“피아노를 전공하려면 보통 어릴 때부터 그랜드 피아노로 레슨받고 연습하지만 저는 서울에 살면서도 고3 때에서야 처음으로 그랜드피아노를 구경했으니까요.”

그만큼 힘들었다. 이혼하신 후 아버지는 늘 직장일 때문에 딸과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 한때 할머니에게 맡겨놓은 딸이 보고 싶어 밤늦게 찾아와 회한에 찬 눈으로 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쓸쓸히 발걸음을 옮기곤 했을 뿐, 세상살이는 딸을 직접 케어할 만큼 아빠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권수정에게 유일한 놀이터요 피난처는 피아노 학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홀로 건사해야 하는 힘든 삶은 권수정을 오히려 단단하게 했다. 선생님의 가르침 반 독학 반으로 권수정은 또래 학생들보다 훨씬 많은 곡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피아노 전공도 결국 홀로 결정했고 입시를 위한 음악회에 참여할 때도 늘 혼자였다. 때론 음반 가게를 어슬렁거리다 욕심나는 음반이 있으면 용돈을 모아 겨우 구입하곤 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어려운 형편은 계속되었다. 대학 입시를 위해서는 입시전문레슨을 받아야 했지만 아빠의 형편은 여전히 녹록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원장님은 대학입시를 앞두고 덜컥 대학교수를 소개해 주었다. 본인으로서는 더 가르칠 게 없으니 교수에게 배워야 한다는 선의였다.

“원장님은 본인에게만 배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만 상당히 서운했어요. 제가 있는 자리에서 교수에게 바로 전화했을 때는 마치 등 떠미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결국 교복을 입고 혼자서 서초동에 있는 그 교수를 찾았어요. 그때 그 교수 집에서 처음으로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를 구경했습니다.”

피아노를 치자, 그 교수는 전공해도 되겠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었지만 전공하려면 그 학원에서 배우면 안 된다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학원은 몇 평인지, 피아노는 몇 대인지, 원장은 어느 대학 출신인지 등을 물어본 뒤, 레슨비는 시간당 20만 원이지만 본인에게 레슨을 받은 후 다시 보조선생인 시동생에게 배우되 1년 재수를 한다면 받아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권수정은 고등학교 3학년 초, 그가 어떻게 결정했을까?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원장님을 무시하는 것 같았고요. 당연히 포기했죠. 그 교수의 조건을 우리 원장님께 말하지도 않았어요. 저에게도 큰 상처였지만 원장님께 솔직히 얘기했으면 원장님도 상처가 컸을 거예요. 돈도 없었지만 단지 그 교수에게 레슨받기 싫다고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리는 법이다. 원장은 수소문 끝에 다른 선생님을 찾아냈다. 피아니스트 박호성이었다. 박호성 선생님은 권수정의 피아노 실력을 금세 파악하고 어디를 지원해도 실기는 무난하다고 평가했다. 문제는 기타과목. 음대진학과 전혀 무관한 수학은 탑이었지만 입시에 매우 중요한 영어실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게다가 가정은 여러모로 힘든 과정에 있었고 결과적으로 레슨도 ‘징검다리식’으로 듬성듬성 받게 된다. 한때는 집을 뛰쳐나와 방황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고단한 나날이었다.

“집을 나왔을 때 그 고마운 친구를 잊을 수 없어요. 단칸방에서 넷이 사는 가정이었는데 친구 어머니는 그 좁은 방에 저를 거두어주셨어요. 미싱 공장에 다니면서 억척으로 일하시던 분인데요. 저보다 일찍 대학에 들어간 친구는 제가 대학 입학 원서비도 없다는 걸 알고,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 50만 원을 저 호주머니에 넣어주었어요. 그 친구 도움 덕분에 대학에 입학했죠.”

나눔 콘서트

권수정의 재능이 발휘된 전공, 보칼레 코레페티치온

권수정이 입학한 학교는 호서대였다. 호서대… 그가 입학할 당시 호서대는 서울대 등 일류대학에 낙방한 학생들이 주로 시험을 치르던 학교였다. 어릴 때부터 전공교수 레슨을 충실히 받은 예고 출신들이 많다는 얘기다. 그러나 예상외였다. 예고 출신들인데도 오히려 아는 곡이 너무 부족한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웬만한 곡은 다 꿰찬 권수정은 실력 면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교수님은 항상 그게 문제라고 말씀하셨어요. 연습하지 않아도 초견이 좋아 시험 때 바짝 연습하면 좋은 성적이 나왔으니까요. 그래도 대학이 좋은 게 있었어요. 피아노 실기보다 음악사, 악식 분석. 화성학 등 이론공부가 굉장히 재미있었거든요. 고만고만한 실력의 호서대보다 다른 학교로 편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고민도 하면서 아예 수업을 다 빠진 적도 있습니다. 덕분에 올 F를 받기도 했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이듬해는 올 A학점으로 장학금을 받는 등 기복이 심했던 학창시절이었죠.”

그런데 세상 모든 일에는 일어나는 이유가 있고, 경험한 일 또는 나중에 쓸모가 있는 법이다. 호서대에서 음악사 등 홀로 공부한 이론은 독일 유학시절에 큰 도움이 됐다.

“2005년에 독일 뒤셀도르프로 떠났어요. 그때 제가 얼마나 피아노 실력이 부족한지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호서대는 우물 안이었습니다. 경쟁하는 친구들은 이미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에 아무리 연습해도 실력 차가 좁혀지지 않았거든요. 다행히 소리의 톤은 좋다는 칭찬은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만난 독일 교수는 바흐의 대가 펠릭스 다이히만(Felix Deichmann). 처음에는 너무 기본기가 없어 그분의 주법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쨌든 펠릭스로부터 난해한 주법을 배우던 중 권수정은 ‘피아노의 재능은 여기까지인가’ 싶어 그만두고도 싶었다. 그때 극적으로 라이프치히(Leipzig) 국립음대의 헬무트 베제(Helmut Weese)를 만났다.

헬무트 베제(Helmut Weese) 교수님과

“헬무트 베제 교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하지만 카라얀 등 세계적인 분들과 같이 작업하던 ‘보칼레 코레페티치온’(vokale korrepetition), 즉 ‘오페라 코치’였어요. 그분은 제가 연주하는 바흐 연주를 보고 정색하며 라이프치히에 묻혀있는 바흐가 벌떡 일어날 것 같다고 칭찬하셨어요. 쇼팽도 바흐처럼 연주한다면 안 된다는 조언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 연주 속에서 보칼레 코레페티치온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어요. 당장 나이 제한과 상관없이 라이프치히 국립음대 특별전형으로 입학했습니다.”

보칼레 코레페티치온은 오페라 코치라고 번역하긴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오페라 코치와는 달리 쉽게 공부할 수 있는 전공이 아니다. 지휘와 피아노, 언어 능력과 성악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졸업이 가능하고 오페라 총보를 보고 바로 피아노로 옮겨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 오페라 텍스트와 발음까지 완벽하게 이해해 출연자들을 지도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한다.

“유니크한 전공이죠. 이 전공의 중요한 포인트는 ‘톤’입니다. 제 소리 톤이 좋다고 했잖아요? 피아노 소리가 오케스트라 사운드처럼 나와야 해요. 게다가 솔로만 공부한 연주자는 콜라보를 잘 못하거든요. 귀가 발달해야 하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도 불러야 합니다. 오페라 리허설때 빠진 음역이 있으면 그 싱어의 역할까지 해줘야 하고요. 공부할 게 엄청 많은데 대학 때 음악사와 화성학, 악식구조 등을 공부한 덕을 톡톡히 보았죠. 나아가 어릴 때 아빠와 삼촌이 듣던 트로트 재즈 팝송도 시각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되었고요.”


독일에서의 번아웃, 미국 진출의 계기 되다

단순히 피아니스트로만 공부했으면 그만인걸… 권수정의 보칼레 코레페티치온은 공부할 게 너무 많아 부담이 되어갔다. 악기반주, 성악반주, 프로베를 통한 코칭 실습 등을 모두 통과해야 졸업이 가능한데 그 일이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연습한 끝에 졸업연주를 하는 날, 하필 교통사고를 당했다. 앰뷸런스에 실려 가던 중에도 돈 걱정을 하며 중간에 하차, 연주회장으로 뛰어가 무사히 마쳤긴 했다. 악바리처럼 공부한 끝에 졸업하기는 했다.

“언젠가 헬무트 교수에게 실력이 그토록 쟁쟁한 학생들이 많은데 왜 저를 선택했는지 물어봤어요. 사실 입학하기에는 이미 나이를 초과했었거든요. 그러자 어떤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봐야 하는지 멋진 답을 주셨어요. ‘수정, 우리는 이미 잘 배웠지만 더 나아지지 않은 학생보다 아직은 완성되지 않지만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는 학생을 선택하는 거야’,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졸업하기 위해 혼신을 다해 공부한 탓인지 완전히 탈진한 것이다. 더 이상 피아노를 못 하겠다고 결정한 권수정은 졸업과 동시에 어머니에게 하소연했다. ‘피아노 때려치우고 김밥 장사’나 하고 싶다고 흐느끼자 슬럼프라고 판단한 어머니는 잠시 피아노를 쉬면서 영어를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어디에 가든 세계무대는 영어가 필수이기 때문에 영어에 능숙해야 한다는 어머니 말씀대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려 했죠. 공교롭게도 때마침 영국에서 정부를 상대로 연일 시위가 벌어져 신변이 위험할 수도 있어 2011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사실 언어공부보다 피아노를 잠시 접고 열심히 놀 생각으로 미국을 선택했습니다.(웃음)”
권수정은 6개월 정도 어학연수를 목표로 떠났지만 1년 반 동안 실컷 놀았다. 피아노는 단 한 번도 치지 않았다. 물리도록 여행을 즐기면서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의대나 치대로 전공을 바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권수정의 인생을 바꾼 위대한 피아니스트를 만났다. 그가 바로 파울 포즈낙 선생님이다.

그즈음 철없는 딸의 생활비를 제공하던 어머니는 더 이상을 뒷바라지가 힘드니 다시 독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박사를 공부하라고 권하던 참이었다. 권수정 역시 이제는 다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에 마지막으로 마이애미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박사공부를 하겠다는 명분을 얻기 위해 마이애미 대학을 검색해, 영상자료를 첨부해 입학지원서를 제출했다.

“어머니에게 보여주기 위해 원서를 대충 넣었는데 포즈낙 선생님이 저를 컨택한 것이에요. 만약 공부를 더 한다면 콜라보레이트 피아노 박사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마침 포즈낙이 콜라보레이트 피아노 교수였거든요. 포즈낙 선생님은 줄리어드 출신에 거쉰의 대가였는데 독일어도 무척 유창하신 분이었습니다. 제가 포즈낙을 컨택한 게 아니라 제 프로필과 영상을 보고 인상적이었던지 저에게 직접 연락해 온 것이죠.”

당시 포즈낙 교수는 음악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학생을 원했다. 연주나 솔로는 물론 반주, 성악발성, 언어능력 등이 뛰어난 학생을 찾고 있었다. 그게 바로 권수정이었다.

포즈낙(Dr. Posnak) 교수님과

포즈낙 교수의 가르침, 대가들은 들어줄 뿐이다

포즈낙 교수는 권수정의 피아노를 직접 듣고 싶다며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마이애미 자택에 갔지만 정작 도착하는 날 본인이 기다릴 수 없어 잠시 외출한다고 밝히고 카펫 밑에 열쇠를 놓았으니 집에 들어가 있으라고 부탁했다. 집에 있는 피아노는 얼마든지 사용해도 된다는 친절함까지 보였다.

“교수님이 사는 동네는 마이애미 최고 부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의 그 ‘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스튜디오 전면이 유리로 돼 있는데 거실에 있는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는 정말 황홀했습니다. 잠시 후 백발의 노인인 포즈낙 교수를 만났는데 키는 작지만 손은 그야말로 거인의 손이었어요.”

포즈낙의 부탁으로 피아노를 치자, 그는 형식상 그랬는지는 몰라도 기다렸다는 듯 ‘피아노를 매우 잘 친다’고 칭찬했다. 그러면 권수정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이애미에 설령 놀러 왔다고 해도 거쉰의 대가에게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권수정은 어떤 면에서는 예의 없고 당돌하게 말했다. ‘교수님 저는 사실 마이애미에 놀러 왔고 피아노를 칠 생각이 없습니다. 교수님을 뵙고 싶어 왔을 뿐이에요.’ 그리고 귀국해 버렸다.

포즈낙으로서는 황당한 일이리라. 그럼에도 포즈낙 교수는 나이스한 태도로 일관했다. 참 멋진 분이다. 며칠 후 메일을 통해 ‘너의 선택을 존중하지만 살다 보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그때에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거나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애정 가득한 글이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도 미국에서도 피아노의 길을 마저 파지 않고 김밥장사나 하겠다고 돌아온 딸을 어머니는 과연 환영했을까? 아니다. 엄마는 ‘어떻게 해서 가르친 딸인데’하고 속이 타들어 갔다. 돌이켜보면 아빠와 엄마가 헤어지는 바람에 엄마와 함께 한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엄마 역시 딸을 자주 보지 못해 말 못하고 눈물 흘리던 일이 참 많았다. 독일에서 한국에 잠시 방문하고 다시 독일로 떠날 때 엄마는 공항으로 향하는 딸을 보지 않고 등을 보이며 울기만 했다. 흐르는 눈물을 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딸이 약해지지 않도록 등만 보이던 엄마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결국 딸에게 다시 한번 부탁했다. 미국에 있는 그 선생님에게 꼭 배워 피아노를 더 공부했으면 좋겠다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포즈낙 교수는 자신에게 다시 돌아올 것을 알고 있었을까? 결국 권수정은 포즈낙 교수를 다시 찾아 열심히 배웠다. 포즈낙 선생님의 최대 장점은 레슨할 때 한 번도 푸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이 있다.

“포즈낙 교수님은 ‘교수들이 진짜 가르치는 게 무엇인지 알아? 너희 학생들의 피아노 실력은 그만하면 된 셈이지, 피아노 가르쳐주는 건 의미가 없어. 사실상 가르치는 것은 심리 상담에 가까운 거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줄리어드에서도 제자들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에요. ‘대가들이 너희들의 얘기를 들어줄 뿐이야.’ 이런 점에서 포즈낙 선생님도 저한테 특별히 테크닉을 가르쳐주신 게 없어요.”

아니, 딱 하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피아노 칠 때마다 숱하게 해왔던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인데 그걸 다시 가르쳐주었다. 권수정은 의아했다. 왜 나한테 이토록 간단한 스케일을 시키는 것이지? 그랬다. 그런데 단 한 번의 스케일 지도로 피아노 소리는 ‘한 큐’에 달라졌다.


피아니스트, 피할 수 없는 운명

그러나 포즈낙의 가르침은 소중했지만 마이애미에서의 생활은 공황장애에 시달릴 만큼 극도의 빈곤상태였다. 미국에 유학을 다시 오긴 했지만 한국에서의 상처가 돌멩이에 부딪친 발부리처럼 점점 부어올랐다. 부모님이 각자의 삶을 살고 있기에 자신의 설 자리가 없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한국도 오랜 외국생활 때문인지 내 나라가 내 나라 같지 않았다.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유랑자 같은 데다 피아노를 치지 않은지 2년여에 이른 탓인지 한 곡을 끝까지 쳐내는 끈기도 사라졌다.

대곡을 완주하는 집중력과 몰입이 안 되면서 삶의 의욕과 열정도 급전직하로 떨어지고 있었다. 작은 좌절은 꼬리를 물고 더 큰 좌절에 이르고 키르케고르의 철학처럼 ‘죽음이 이르는 길’로 내달렸다. 죽고 싶었다.

“굉장히 심각했습니다. 일주일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체중이 40kg도 안 되었고요. 지금은 미국에서 살 만하지만, 그 당시 번듯한 월세방 하나 구하지 못해 컨테이너 한 개를 방 두 개로 쪼개 만든 빈민가에서 흑인 룸메이트와 함께 살았거든요. 흑인은 밤마다 이상한 사람을 데리고 오는데 그때마다 바깥이 무서워서 나가지도 못했고,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 학위를 따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이때 맥도날드 사건을 터트렸다. 깊은 늪에 빠져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햄버거를 먹던 도중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확신에 소름이 돋아 피아노를 다시 치기로 했다. 꿀단지 같은 재능을 주었는데, 나는 쓰지도 않고 피하기만 했던 것이다. 때마침 한인교회 목사님이 부탁해 온 특별 새벽 반주를 승낙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았다.

“하나님이 주신 ‘기프트’라는 걸 새벽 반주에서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들어가자마자 교회 안에 알 수 없는 밝은 빛이 가득했어요. 예사롭지 않았어요. 평소 잠잠했던 새벽기도와는 달리, 제 반주에 교인들 모두 눈물바다를 이루었어요. 이건 분명 제가 한 게 아니었습니다. 너무 종교적인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사실이거든요.”


피아노를 다시 열심히 치기로 했지만 고민은 여전했다. 피아노를 이렇게 친들 과연 미래가 보장될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한국에서도 난다 긴다 하는 친구들이 생활비조차 벌지 못해 고생하는데 피아노에 대한 열정만으로 젊은 날이 낭비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열정으로 차라리 한때 욕심내던 의사가 됐으면 벌써 의사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별의별 자괴감이 밤마다 괴롭혔다. 권수정의 이런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알았을까? 한번은 좌절의 심연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포즈낙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화는 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Don‘t give up… 수정! 요즘 볼 수 없는데…”

권수정은 그만 눈물만 뚝뚝 흘렸다. 마치 가족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던 포즈낙 교수는 어쩌면 권수정이 처한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또한 며칠 전 포즈낙의 자택에서 우연히 만난 피아니스트 다니엘 앱스틴 (Daniel Epstein)도 권수정에게 피아노를 더 공부하라고 당부했다.

“저는 두 분이 아니었으면 피아노를 포기했을지 몰라요. 포즈낙과 달리 다니엘 앱스틴 교수는 다시 피아노를 시작하라고 훨씬 강하게 푸시했습니다. 제가 보낸 비디오 영상을 심사한 뒤 바로 박사학위 합격증을 주었거든요.”

권수정은 피아노를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자신의 ‘콜링’은 결국 피아니스트라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 됐다. 그는 자신이 손열음처럼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도 아니기에 그런 기프트는 사실 사양하고 싶었다. 탑 피아니스트도 아닌데 하루 8시간씩 연습한다 한들 돈을 버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런 고민들이 두꺼운 더께를 이루어 어깨를 짓눌렀지만, 포즈낙과 다니엘 교수와의 만남, 맥도날드 사건, 교회 반주의 감동 등으로 하나씩 벗겨지면서 피아노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전화위복,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

한편, 포즈낙 교수는 권수정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나머지, 가능한 마이애미 대학의 부교수로 채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일인지 학교와의 마찰로 포즈낙이 교수직을 사임하면서 권수정은 다시 한번 방향을 바꿔야 했다. 당장 비자 연장을 위해 2016년 린콘서바토리 Lynn Conservatory 오디션에 참가, 전액 장학생으로 합격하고 ‘Faith, Hope & Love’ 피아노 듀오 콘서트까지 개최했다. 이 연주회는 사실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기프트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아이디어를 준 ‘나눔콘서트’의 단초가 되었다.

Faith Hope _ Love Jan 7, 2023

2016년 잠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금천구 금나래홀에서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연주회를 개최, 본격적인 나눔콘서트의 걸음을 시작했다. ‘시작’이라는 타이틀은 ‘begin’이라는 의미와 ‘시를 작문한다’는 중의적인 제목이다.

“당시 주변에서는 예술의전당과 같은 서울의 유명 공연장에서 공연해야 한다고 권했지만 금천구 금나래홀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금천구에서 자랐고 추억의 대부분은 금천구에 있거든요.”

어쨌든 권수정은 린콘서바토리에서 학교 프로젝트 연주만 하는 전문 연주자 과정을 공부했다. 이곳은 많은 미국 재벌들과 연관 학교로서, 트럼프 등 유명 미국인들의 자선 파티에 초청되어 자주 연주를 개최하곤 했다.

권수정은 전액 장학생으로 학교식당 기숙사 등으로 모두 제공받았기 때문에 앞날이 탄탄대로였지만 ‘동양인 피아니스트’에 대한 학교 교수들의 시샘은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이 질투 때문에 한때는 이 학교도 포기하고 이제는 영영 한국으로 귀국하려고도 했을 만큼 괴로워했을 때 다행히 FAU대학의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코프만 박사는 권수정의 소식을 접하고 직접 연락, FAU대학 TEACHING ASSISTANT로 초청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사실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코프만 박사(Dr. Kofman)는 저에게 티칭의 문을 열어준 고마운 분입니다. 2018년 스폰서를 만나 그랜드피아노와 스튜디오를 제공받고 미국 체류의 모든 것을 스폰받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시작했죠. 그런데 2019 FPC in Coral Springs에서 반주를 시작할 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웃음) 모든 연주가 다 취소되었죠.”

놀랍게도 코로나 시절, 대학에서의 활동은 마음껏 할 수 없었지만 ‘나눔콘서트’는 오히려 미국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유튜브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 독학으로 에디팅을 배우고 연주를 직접 업로딩하자 구독자들은 물론 청중도 지역을 초월에 다양한 곳에서 찾아왔다.

코프만 박사(Dr. Kofman)와 함께

나눔콘서트, 콜링에 더해 티칭의 은사까지

권수정은 맥도날드 사건 때 친구를 통해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후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는 성경 말씀을 받아들이게 된다. ‘새 일’이란 곧 기프트인데 이는 나 개인에게 준 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나누려고 마음만 먹으면 길을 언제든지 열리는 게 미국이었다. 최고가 아니면 연주에 관심이 없는 한국과 다르다. 신기하게도 피아노를 연주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후원하기를 자청한다. 평소 잘 아는 사이가 아닌데도 함께하자는 연주자들이 모이게 되면서 또 다른 연주회를 개최하게 된다.

“거꾸로 제가 다른 연주자들에게 음악을 같이 연주하자고 초청하기도 합니다. 나눔콘서트는 클래식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기회로도 연결됩니다.”

지금이야 즐거운 일이지만 사실 레슨은 권수정이 가장 싫어하는 영역이었다. 처음 독일 유학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도 레슨을 피하고 오로지 연주만 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우연히 코프만 박사로부터 예술학교를 진학하려는 학생 한 명을 소개받은 일이 있었다.

당시 돈이 궁했던 권수정은 시간당 80불 이상을 준다는 말에 현혹되어(?) 결국 학생을 맡았다. 그런데 처음 테스트해 보고 깜짝 놀랐다. 기본적인 음계도 치지 못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기가 찼다. 그래도 돈이 궁했던 권수정은 스스로 마인드를 컨트롤했다. 이보다 더 못 칠 수는 없으니 어쨌든 이보다는 더 잘 치게 할 수는 있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다행히 부모님도 자기 자식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알고 있기에 일단은 부담이 없었다.

“그 레슨을 일주일에 세 번 해달라는 겁니다. 그러면 최소 240달러입니다. 그 돈이면 얹혀살고 있던 친구 집을 나와 제법 근사한 집을 구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당시 친구 집에 더부살이하던 권수정은 월세가 너무 비싸 따로 방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집을 딱 한군데 발견했다. 수영장이 있고 강변이 시원하게 보이는 주택이었다. 그 집을 보고 간절히 기도했다. 한국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실 바에야 집이라도 편히 쉴 수 있는 공간, 바로 이런 집을 구하고 싶으니 책임져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무슨 확신이 들었는지 바로 집 주인과 계약서를 쓰고 사인까지 했다. 당장은 엄마에게 첫 달 치는 부탁한 상태였는데 예상치 못한 레슨비가 생긴 것이다. 레슨은 일주일에 세 번으로 시작했지만 자폐아였던 제자는 일주일에 5번까지 레슨을 해도 따라올 만큼 열정적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도레도레도 치지 못하던 학생은 놀랍게도 6개월 만에 예술학교에 당당히 입학하면서 권수정은 지역사회에서 최고의 선생님으로 알려졌다.


월세가 비싸 방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만난 마음에 든 집. 간절히 기도했고 길이 열려 거주할 수 있었다.
“아이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무대를 두려워하지도 않았고요. 자폐아였기 때문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온전히 피아노 세계로 몰입하거든요. 게다가 공부도 잘해 6개월 만에 합격했는데 예술학교도 3억 원이라는 거금의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습니다. 저도 너무 기뻤어요. 이것 역시 내 재능을 나눠주는 일이기에 더욱 의미가 컸어요.”

물론 전공생만 가르친 게 아니다. 권수정은 아마추어 연주자들도 마친 전공생만큼 잘 치도록 가르친다.

권수정은 이 일을 계기로 음악회 역시 더욱 열정적으로 임했다. 연주회는 나만의 연주회가 아니라 연주기회가 부족한 음악 친구들에 대해 플랫폼을 제공하는 데에도 큰 의미가 있었다. 나눔콘서트는 폭스영화사 창업자 미망인의 초청음악회처럼 규모 있는 콘서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교회에서 이루지는 작은 음악회를 좋아한다. 어쨌든 공연할 때마다 도네이션 행렬은 계속 이어졌고, 때로는 나눔콘서트 로고가 새겨진 굿즈 상품을 런칭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내놓을 만큼 인기가 높다.

권수정은 지난해 마이애미 고속도로에서 당한 대형사고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군데 다치지 않고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며, 여전히 기프트를 나눠주라는 소명을 각성시킨 사건으로 이해하고 더욱 열심히 공연을 펼치고 있다.

“사실 나눔콘서트를 살짝 잊었거든요. 그 사고 때 두려움보다는 기쁨으로 떨렸습니다. 잠시 잊었던 나눔 콘서트를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기대와 희망 때문입니다. 허리케인 때문에 피난갔을 때 살아남았던 것도 떠올랐고요.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걸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죠.”

권수정은 앞으로도 나눔콘서트를 계속 개최할 계획이다. 나아가 클래식을 단순히 나눠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연주회장으로 찾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할 뿐 아니라 클래식 음악을 활성화시키고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후원해 줄 계획이다.

“혹시 제가 걸어온 삶이 클래식전공자들에게 길잡이 될 수도 있기에 그동안 걸어온 길을 책으로도 낼 계획입니다. 물론 김종섭 대표님과 함께해야겠죠. 앞으로 매달 ‘인터넷 월간리뷰’에 하나씩 삶의 편린을 공개할 생각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길을 걷고 있는 클래식 전공자들에게 힘이 될 겁니다. 기대하세요.”

글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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