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음악과 함께한 진정한 예술가 홍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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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이자 ‘홍난파의 집’ 이사를 역임하고 있는 정희준 회장의 글로써 홍난파의 생에 전반을 담았다. 그는 홍난파의 생애를 누구보다 오랫동안 천착한 분으로 친일시비에 휘말렸을 때도 홍난파가 어떤 상황에서 그런 오해를 받았는지에 대해 사실을 근거로 5가지 사항에 반론을 정립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음악평론가 이상만은 정 회장에 대해 ‘홍난파 선생을 사망에서 부활시킨 분’이라고 칭하는가 하면 음악평론가협회에 초청해 이상만 평론가와 1시간 토론하기도 했다.
정 회장이 조사한 홍난파의 모든 것을 두 번에 걸쳐 연재한다. 홍난파를 이해하는데 쉽도록 홍난파의 일생을 7개의 카테고리 ①가족사(家族史) ②교육 ③음악 활동과 업적 ④미국 유학 ⑤귀국 후 활동 ⑥연주 ⑦ 친일시비 등으로 기술했다. 이번 호에는 지난 호에 이어 ‘귀국 후 활동’부터 ‘친일시비’까지 담았다.

귀국 후 활동

1)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33년 2월 11일 귀국) 그에게는 유학이, 그에 대한 평가와 대우를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된듯하다. 귀국 직후, 각계의 환영회와 환영 음악회가 열렸으며, 국내 최초로 소개한 그의 실내악 연주는 많은 언론과 당대 명사(名士)들 입에 회자(膽)하기도 하였다. 1933년 5월, ‘조선가요 작곡집’ 제1집을 출간하고 (이은상 작시),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50곡 수록)을 발행하였다. 많은 연주회 활동과 언론에 기고문을 게재하는 등, 귀국 후 바쁜 시간을 보내는 중에도 그의 어린이 사랑의 또 다른 단면이라 할, 어린이 잡지에 시리즈물을 연재한 일을 들을 수 있겠다. ‘악성(樂聖)의 소년시대’가 그것이다. 월별로 모차르트, 쇼팽, 바흐, 하이든 등을 어린이 눈높이로 소개한 글 들이다. (후에 ‘세계의 악성(世界의 樂聖)’ 단행본으로 나왔다.)

‘세계의 악성’ 단행본 표지

귀국 이후, 경성보육학교 음악주임, 빅터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 등을 맡게 되었다. 빅터축음기회사 경성지점 음악주임을 역임하게 되면서 1934년 이후 신민요, 영화음악, 유행가도 작곡하였는데, 신민요로 압록강(강승한 작사, 이난영 노래) 외 4곡, 영화음악으로 ‘애련송’(서항석 작사, 1938년) 외, 1935년의 ‘그리운 광한루’ 주제곡, 유행가 ‘날라리 바람’, 유치원생이 부르는 원유가(園遊歌) ‘조흔날’, ‘과학의 노래’ 등이 있다.


재즈도 소개한 바 있고, (1929년 코리안 재즈밴드 조직, 연주한 바 있음) 또한 칼럼으로, 잡지 ‘신가정’에 ‘재즈나 유행곡이 일반 가정에 끼치는 영향’, 매일신보에 ‘조선영화와 음악’ 등을 게재하면서 새로운 사조에 대한 평가와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 1926년 6월 김상운과 사별한 지 8년 만인, 1934년 12월 27일 그는 이대형과 재혼하고 다음 해에 현 ‘홍난파 가옥’(홍파동 2-16번지)에서 살림을 차리게 됐다. 이대형은 황해도 출신으로,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성보육전문학교 졸업반이었고, 홍난파는 음악과 주임교수였다. 그가 많은 산문(散文)과 칼럼을 게재했던 잡지 ‘조광(朝光)’에 실린 ‘목먼산하(木覓山下) 고토(故土)에서 내 일생을 보내리라’를 소개하면서, 다음 호에 실을 그에 대한 친일시비(親日是非)에 앞서 그의 조국애와 신념의 일단을 조명하겠다.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90호
홍난파 결혼식 (이대형과 재혼)

“나를 낳고 나를 길러준 내 땅을 버리고 어디 가서 살겠단 말씀입니까? 지상낙원이라고 하는 하와이에를 가 봐도 내 땅만은 못했고 사시(四時)를 통하여 백화(百花)가 경염(競艶)하는 로스앤젤레스에를 가 봐도 내 땅만은 못했고,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대도시 시카고에 오래 있어 보았으나 자고 깨면 생각이 고향뿐이었고, 지금은 세계적 대도시가 된 동경에도 전후 10여 년을 지내보았지만, 또한 내 땅만은 못하더이다 …중략… 그러면 고토(故土)안에서는 어디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이냐는 말씀이지요? 같은 서울 안에서는 일생을 동동(同洞) 동번지(同番地) 동문(同門) 안에서만 살지는 못하는 이상 어딘들 싫다 하오리까마는 그래도 원산지(原産地)만은 떠나고 싶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목멱산(木覓山)이 내 집 앞산이요 한강(漢江)이 내 집 앞 물일 새 이 집이 산이 강을 떠메고 가지 못할 바엔 나는 서울서 화토(化土)하고 말겠습니다.”

홍난파와 음악가들
도미 송별음악회
난파트리오
성서트리오 (홍난파, 김태연, 이흥렬, 하대응)

연주(演奏)

참고용으로 난파의 음악연주 횟수와 연주장소를 살펴보기로 한다. 의미도 없고, 극히 불확실한 통계임을 밝혀둔다. 16세부터 작고하기 2년 전인 42세까지, 신문기사에 보도되었던 연주 활동만 100여 회에 이른다. 물론 신문에 게재되지 않았던 연주회가 훨씬 많았으리라 추측된다. 당시 연주회장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롯데콘서트홀에 해당하는 3대 연주장이 있었다.
1) 장곡천정(長谷川町) 공회당 : 지금의 조선호텔 서쪽 건너편 코너, 옛 공화당 당사 자리
2) 중앙기독교청년회관 : 현 종로2가 YMCA
3) 경성부민관 대강당 : 현 서울시의회 건물
이 이외에도 음악회 개최 또는 신춘콩쿠르를 자주 주최했던 조선일보사 대강당, 정동모리스홀, 이화여전 강당 등이 있었다.

친일시비(親日是非)

1) 폭풍전야(暴風前夜)

일본은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 후부터, 식민통치를 위해 총독부를 두고 조선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조선을 안정적으로 지배한 이후, 1931년부터 대륙침략(중국)의 마각을 드러내 오다가, 1937년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을 계기로 전면전을 치르게 되고, 1941년까지 중국 동북부의 중요지역을 장악하게 된다. 당시 조선총독부에는 제7대 총독인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부임하여, 중일전쟁을 치르기 위한 전쟁에 대처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때로는 강압으로, 때로는 유화적으로 정책을 펴면서 전쟁에 자발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한 ‘황민화 교육’을 실시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조선 민족의식을 말살시키고 일본화를 꾀하면서 ‘국민총력운동’을 전개한다. 이 중일전쟁은 1941년 하와이 공격 후 세계 제2차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2)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

3·1운동 이후 지식인 사이에서는 국민계몽과 후학양성을 위한 인식이 확대되고, 이를 위한 지역적 조직이 태동하였다. 1922년 2월, 서울에서는 이광수 등에 의해 수양동맹회, 1922년 7월에는 평양에서 김동원 등에 의해 동우구락부가 발족하여 은밀하게 민족운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단체는 사실상 흥사단의 국내 조직이라 할 수 있다. 두 단체는 1926년 통합하여 수양동우회라 하였고, 그 구성원은 변호사, 의사, 교육자, 목사 등 당대의 지식인들로 홍난파 이외에 도산 안창호, 이광수, 김동원, 조병옥, 주요한 등 우리가 알만한 당대 민족주의자인 지도자들이었다. 이들은 암암리에 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고, 1937년에 이 단체의 비밀을 알게 된 일본 경찰은 서울을 위시해 각 지역에서 181명을 검거하였다. 홍난파도 이때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어 1937년 6월 11일부터 동년 8월 21일까지 72일간,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 후 친일행적이 있게 되고, 이로 인하여 2002년 이후 친일파의 오명을 쓰고 시달리게 되었다. 구금되어있는 동안에 그의 생활 방편이었던 직장 세 군데, 즉 이화여전, 빅타축음기회사, 경성보육학교를 차례로 잃게 되었다.

3) 친일행적(親日行蹟)

석방의 조건이었으며, 그들이 미리 준비한 ‘사상전향서’를 경성지방법원 검사정(檢事正) 앞으로 제출했다.(서식에 나와 있는 그대로) 경찰서 내에서 가혹한 고문이 계속되자, 회장인 이광수 선생을 필두로 회의를 거듭한 결과 아무도 모르게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 후일을 도모하기로 하고, 함께 날인하여 대부분이 동참했고 함께 석방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무릇 사상 방면의 운동은 그 내용 및 종류 여하와 관계없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대상과 민중의 마음에 어긋나는 운동은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그것에 상응하는 해독을 일으켜서 사회 및 국가의 안녕질서를 어지럽힐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중략 금후는 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국가에 대해 충성을 꾀하며… 맹세하는 바이다.”
안창호 선생을 비롯한 십 수명은 버티다가 기소되었고, 안창호 선생은 다음 해 재판 도중 3월에 간경화로 사망하였고, 전술한 바 있듯이 고문으로 인해 최윤세, 이기윤 선생은 옥사하고, 김성업 선생은 불구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홍난파 선생의 미망인 이대형 여사는 음악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면회를 갈 때마다. 피투성이로 꾸덕꾸덕해진 옷을 바꿔 입혔다고 증언하여, 고문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알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그가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고, 그로 인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출옥 후 경성중앙방송국 방송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임명되고, 많은 행사에서 친일 음악을 지휘하였다. 석방 다음 달인 9월 30일, ‘정의의 개가(正義凱歌)’, ‘공군의 가(歌)’를 발표하고, ‘희망의 아침’이라는 친일가요를 작곡하였는데, 그의 친일행적이라는 친일군가 작곡은 방면 후 한 달 내(1개월 내)에 작곡되었는데, 당시에도 연주된 흔적이 없고 1곡은 실전(失傳)된 듯하다. 그의 가곡 모두가 명곡이어서 지금까지 국민애창곡인 데 비하면, 의도적으로 수준 이하의 엉터리 작곡을 하였다고 짐작된다. ‘지나사변과 음악’이라는 친일 논설을 신문에 게재했다. 이후 친일단체인 대동민우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음악협회 등 단체에 가입했다. 그가 친일단체에 가입했다는 것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것만이 증거물이다. 자기의 자유의사가 아니라고 본다. 이상 등이 그의 친일 행적이다.

4) 친일파 색출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법률은 우리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제헌국회에서 제정했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있었고 이 법에 의거 하여 조직된, 조사단체인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조사결과에서는 예술인은 해당하지 않았다. 이 법에서는 주로,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작위를 받은 자, 독립운동가를 악의적으로 살상 박해한 자, 군경관리로서 악질적 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자, 관공리로 민족에게 해를 가한 악질적 죄적이 현저한 자 등을 반민족 행위자로 지적했는데 문화 예술인에게 해당되는 조항으로는 ‘법 제4조10항 : 일본 국책을 추진시킬 목적으로 설립된 각 단체본부의 수뇌 간부로서 악질적인 지도적 행동을 한 자, 법 제4조11항 : 종교, 사회, 문화, 경제 기타 각 부문에 있어서 민족적인 정신과 신념을 배반하고 일본침략주의와 그 시책을 수행하는데 협력하기 위하여 악질적인 반민족적인 언론, 저작과 기타 방법으로써 지도자’라는 조항이 있다.
이 법에 의해 해방 후 많은 혐의자가 조사를 받았으나, 그 이후 처벌에 관해서는 한국전쟁 발발로 진행이 되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 이 조사결과를 다시 심사하여 2002년 2월경 김대중 대통령 시절 ‘광복회’(회장 윤경빈)에서 ‘692명의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을 책으로 발간하였는데, 홍난파는 해당자가 아니었다. 광복회에서는 친일파 명단을 발간할 당시 “홍난파는 총독부 감시 속에서 끌려다녔다고 본다. 따라서 친일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당시 심사위원의 증언이 있었다. 광복회의 이 명단이 발표된 이후(노무현 대통령 시절), 신기O, 김희O, 김근O 의원이 친일과 색출이 미흡하다며 주장, 주도하여 두 번째 입법이 되었으니 2004년의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다. (위 의원 중 두 사람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일제 때 사복형사, 만주에서 일본 헌병이었음이 드러났다. 일제 때 친일행적이 없는 사람은 없었다.)
이 법은 해방 후 1차 특별법과 비슷한 듯하지만, 친일의 개념이 훨씬 광범위하게 제정되었다.
10조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박정희 전 대통령, 백선엽 장군을 목표로 한듯하다.)
11조의 지원병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12조의 일본군을 위안할 목적으로
14조의 대통령이 정하는 규모 이상의 금품을 헌납한 행위
20조의 민족문화의 파괴, 말살과 문화유산의 훼손, 반출에 적극 협력한 행위 등
이 법에 따라 홍난파는 친일 반민족 진상규명 조사 대상자로 그 유족에게 통보되었고, 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아,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이 되었고 다시 이의를 제기하였으나 최종 결정되어, 소송하게 되었다.

5) 친일파가 아니라는 주장과 소송

(1) 홍난파는 전 생애를 통하여 그의 사상과 이념이 담긴 글을 많이 남겼다.
애국애족의 계몽적인 글이었다. 이미 지난 회에서 소개한 바 있어 생략하기로 한다. 두 차례의 특별법에서 보면, 친일파는 반민족행위에 적극 가담한 자로서 그 죄질이 심각한 자를 대게 규정하고 있다. 홍난파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큰 범주 안에서 그는 애국자였고, 일제에 의해 탄압을 받고, 그들의 고문의 결과로 사망에 이른 큰 피해자였다.

(2) 앞서 ‘3) 친일행적’ 부분에서 보여줬던 모든 행위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72일간 고문을 받은 이후에 있었던 일로 중일전쟁의 공포 분위기와 겹치는 시기였으며, 그의 친일행적은 자기의 자유로운 의사가 아니었다고 보며, 대부분 총독부의 강요에 의한 행위였다. 강요에 의한 행위에 대하여 우리나라 법에서는 ‘무효’로 판단하고 있다. 형법 제12조 ‘강요된 행위’ 및 민법 제104조 ‘불공정한 법률행위’에 해당한다고 본다. 또한, 친일단체의 가입에 관한 증거는 모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게재된 것일 뿐이다. 사상전향서만 하더라도 그 글을 제출하는 조건으로, 방면되었다는 것은, 그가 친일파가 아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는 그 탄압 시기에 모든 직업을 잃어, 생계의 위협도 느끼게 되었었다. (‘2) 수양동우회 사건’ 말미 참조) 모든 친일 음악 활동은 강요에 의한 활동이 대부분이었지만, 음악가로서의 단순한 음악 활동,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대일본제국의 위상을 세계만방에 떨치게 했던 손기정 선생의 올림픽 우승은, 체육인의 체육활동이며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준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그도 그렇게 평가해야 한다. 조선음악협회의 평의원이라는 친일조직의 활동을 예로 든다면, 총독부의 일방적 발표였다. 조선음악협회 결성식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시점이 1941년 1월 25일이었다. 그해 8월 30일 사망하였고, 1937년 6월 11일 종로경찰서에 수감, 고문당한 이후, 병원을 전전하며 투병 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직책이 그의 음악계의 위치로 보아서, 회장, 고문, 전무이사, 이사, 간사 등의 아래인 평의원이, 간부라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홍난파는 이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잔혹한 일제에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는 72일간의 잔인한 고문을 받아보지 않은 사람들이, 총독부의 철저한 감시 속에서 살아 보지 않은 사람들이, 지금의 잣대로 편하게 친일파 소리를 쉽게 해대고 있다.
필자는 ‘이의서(異議書)에서 예술가로서 친일행위자인 최승희(무용가)가 어떻게 혐의에서 벗어났는가’란 질문을 낸 바 있다. 그들은, “외국의 새로운 무용을 도입하고 드물게 조선문화를 세계에 알린 점”이라는 대답을 해왔다.
홍난파야말로 최승희와 비교하여 더 큰 공이 있다 할 것이다. 최승희가 무혼(武魂)이란 창작무용극으로, 황군 위문공연을 다니고 70,000원이 넘는 거액의 국방헌금을 한 사실이 있는데도 이를 제외한 것은 월북함으로써 일찍이 친북의 원조이기 때문이라 필자는 믿고 있다. 또한 주도적으로 친일파 색출한 시민단체들은 모두 특정 이념을 가졌고, 거물 정치인들이 배후에 있었음을 필자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후 친일파 색출의 광풍은, 정치적 의도에 의한 것이라 믿고 있다. 국민들을 반일감정으로 몰아가기 위한 정치적 술책이었다.

(3) 친일시비에 관해서 필자는 당시에 조선에 살았던 이천만 동포는 크든 작든 모두 친일행적이 있다고 본다. 대부분의 지도급 인사는 강요에 의해서, 일반 백성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어린 학생들도 동방요배(東方遙拜)를 하였고, 선생님들에 이끌려 신사참배도 했다. 애국 가요도 불렀다. 일반 백성과 농민들도 싫어도 그들에게 순종할 수밖에 없었고, 자의적인 군수물자(쌀, 쇠붙이, 놋그릇 등) 등을 공출로 내놓았다. 이들을 친일파라 할 수 있겠는가?


(4) 음악가는 음악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권력을 가질 수 없는 연약한 음악가들이 왕이나, 제후, 사제 등 권력자들의 선전용, 과시용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이들을 정치적 잣대로 평가하거나 욕(辱)보인 적은 없다.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이다. 나치한테 협력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나 카라얀을 서방세계에서 어찌 대우했는가? 스탈린 치하에서 활동했던 프로코피예프, 쇼스타코비치가 어찌 평가되고 있는지, 다들 알고 있다. 모두 위대한 음악가로 대우받고 있다.


(5) 해방 직후, 친일파를 색출하자는 열기가 대단하였던 때도 홍난파는 매도된 적 없이 대한민국 정부에서 문화훈장도 추서됐고, ‘이달의 문화 인물’로 기리기도 하였고, 음악 교과서에서 그의 노래가 수록되고 기려오던 음악가였다. (예술의전당 조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홍난파의 곡은 국민애창곡 40곡 내에 5곡이 들어 있으며, 1위에 올라와 있다.) 또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이 연주되었음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북한에서도 그에 대한 평가는 ‘민족의 정서를 잘 나타낸 진보적 음악가’라 하였다.(북한의 2002년 조선예술 12월호 참조)
그가 서거한 종로구에서는 종로구 예산지원으로 ‘홍난파 기념음악회’를 매년 개최해왔다. (문재인 정부하에서도, 민주당 출신 구청장하에서도)

– 1965년 10월 ‘문화훈장 대통령장’ 수훈 (대한민국 정부)
– 1992년 8월 ‘이달의 문화인물(홍난파)’ 선정 (문화체육관광부)
– 2004년 9월 ‘홍파동 홍난파 가옥’ 등록문화재 90호 [근대문화유산] 지정 (문화재청)
– 2011년 5월 한국의 인물 100일 ‘홍난파기념주화’ 발행 (한국조폐공사)
– 2011년 10월 홍난파동요 악보 원판(조선동요백곡집 상편) 등록문화재 479호 지정 (문화재청)


(6) 이승만 대통령의 “조선 땅에서 살아남은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자발적이고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만 조사하라는 반민특위에 조사 방침을 밝혔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고 옳은 말씀이라 생각한다. 해방 후 나운영, 윤이상 등은 매년 홍난파 추모 모임을 가졌었는데, 그때마다 홍난파에 대한 찬사뿐 아니라 “총독부의 탄압 때문에 총독부를 제일 싫어했다”는 증언을 나운영은 그의 일기에 남겨놓았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1006명의 친일 반민족행위 보고서를 제출하고 이를 책으로 발간, 국가중요기관에 배포하였다. 홍난파는 2009년 11월 27일 서울행정법원의 효력 정지 결정에 따라 극적으로 인쇄 전 제외되었으며, 본안 소송은 양측(원 피고간)에서 이미 명단이 발표된 뒤에 실익이 없다 하여 합의 하에 취하되었다.

(7) 그가 고문 후 석방되고 나서부터 사망에 이르는 4년간의 친일행적이 있으나, 그를 ‘친일파’가 아니라는 주장은 다음에 근거한다. ‘친일파 : 1948년 제정 특별법에서 친일파로 지적한 자, 2004년 제정 특별법에서 친일파로 지적한 자’, ‘친일행적 있는 자 : 일제 38년간 조선 땅에 거주했던 2,000만 동포 모두’
친일파가 아니라 주장할 법조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 위 2개의 특별법에서 친일파로 규정한 어느 조항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둘째 : 형법 제12조 (강요된 행위) 저항할 수 없는 폭력이나 자기 또는 친족의 생명 신체에 위해를 방어할 방법이 없는 협박에 의하여 강요된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민법 제104조(불공정한 법률행위) 당사자의 궁박, 경솔 또는 무경험으로 인하여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는 무효로 한다. 셋째 : 해방 직후 조사 결과 2002년 광복회 발간 친일파 명단과 2009년 1,006명 친일파 명단 등에서 제외된 점.
친일파를 조사할 자격은 위 2번의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와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만 있을 뿐이고 이의가 있을 때 대한민국 법원만이 최종 판단할 수 있다 하겠고, 치명적 불명예인 ‘친일파’로 단죄하는 일은 아주 신중하고 엄격한 판단을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며, 그 외의 시민단체와 사회단체가 자의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홍난파 선생의 음악의 선구자로서의 업적, 문필가로서의 업적에 대해서는 추후 기회가 있다면 게재하도록 하고, 이번 연재에는 생략했음을 밝힌다.

글 정희준(송호지학장학재단 이사장, 홍난파의집 이사)
사진 홍난파의 집, 아르코 예술자료원(나운영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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