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여행-15부] 쾨텐(Köthen)으로 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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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은 아이제나흐에서 태어난 바흐가 거쳐간 독일 도시들의 지도를 보여줍니다. 바흐는 학창시절 뤼네부르크 유학기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부 독일인 튀링겐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바흐가 거쳐간 독일 도시들

바흐의 사역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면 초기는 아른슈타트, 뮐하우젠 시절(1703~1708), 중기는 바이마르(1708~1717), 쾨텐 시절(1718~1723), 후기는 라이프치히 시절(1723~)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1714년 콘체르트 마이스터 작위를 부여받은 후 칸타타를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당시 궁정 시인인 살로모 프랑크(Salomo Frank)가 수준 높은 칸타타의 가사들을 제공해 주었기 때문에 뛰어난 많은 칸타타를 작곡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흐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이마르의 생활에 만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통치자인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과 그의 조카이자 직계 상속자인 아우구스트 에른스트 공작의 사이가 너무 좋지 않았습니다. 조카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거주하는 로테성에서 바흐가 자주 연주를 하였는데, 이 이야기가 빌헬름 에른스트 공의 귀에 들어갔고 빌헬름 에른스트는 앞으로는 궁정 소속의 음악가들은 로테성에서 연주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계속해서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거하는 로테성에서 연주했습니다. 이에 빌헬름 아우구스트 공작은 바흐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시점에 바이마르 궁정의 카펠마이스터인 요한 자무엘 드레제(Johann Samuel Drese, 1644~1716)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바흐는 당연히 콘체르트마이스터인 자신이 그 자리를 승계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바이마르의 영주는 텔레만에게 그 자리를 제안했으며, 거절당하자 드레제의 아들 요한 빌헬름 드레제(Johann Whilhelm Drese, 1677~1745)를 임명해버렸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며 영주에게 실망한 바흐는 바이마르를 떠날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바흐는 권력 다툼 없이 음악에 전념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1717년 8월 안할트 쾨텐의 레오폴트 공이 바흐에게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했습니다. 안할트 쾨텐의 레오폴트 대공은 음악 전문가이며 옹호자였습니다. 또한 전반적으로 바이마르 보다 실력 있는 전문 앙상블 연주자들이 많았습니다. 몇 년 전인 1713년 프러시아(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왕에 오르며 기존의 궁정악단을 해체하였는데, 이때 대부분의 실력 있는 음악가들이 쾨텐 궁정악단으로 이직하게 되었고 쾨텐은 단번에 매우 뛰어난 연주자를 보유한 공국이 되어 버립니다. 통치자가 음악을 사랑할 뿐 아니라 최고의 전문 연주자들이 있는 안할트 쾨텐을 바흐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다만 이직하는 과정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흐는 바이마르에서 쾨텐으로 이직하는 시점에 4주 동안 구치소에 감금된 후 불명예 퇴직을 하게 됩니다. 죄목은 ‘너무 귀찮게 자신의 면직을 주장한 것’입니다. 아마 빌헬름 아우구스트 공과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로 이직을 하려는 과정에서 무리한 요청을 하게 되고, 이것이 공작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 같습니다. 이 시간은 바흐의 인생에서 오점과 같은 시간으로 볼 수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평균율 클라비어집’(Das Wohltemperierte Klavier) 1권의 구상과 작곡을 이곳에서 시작하게 되었거든요.
바흐는 지루한 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그의 평균율 클라비어집 1권의 작곡을 감옥에서 시작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는 바흐와 함께 공부했던 하인리히 니콜라우스 게르버(Heinrich Nikolaus Gerber, 1702~1775)의 아들인 에른스트 루드비히 게르버(Ernst Ludwig Gerber, 1746~1819)가 “바흐는 평균율 클라비어집을 악기도 없고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공간에서 작곡했다”라고 라이프치히의 한 기사에 실으면서 알려지게 됩니다.
쾨텐으로 이직한 바흐는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대공의 아래에서 전문적인 앙상블 연주자들을 데리고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 바이마르처럼 정기적으로 칸타타를 작곡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칸타타 작곡을 조금씩 이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134a, 174a 정도를 제외하고는 쾨텐 시절의 모든 교회 칸타타가 유실되어 버렸습니다. 대부분의 총보가 있던 쾨텐 궁정악단 도서관이 불타버린 것이었습니다.

쾨텐에 있는 바흐 동상
쾨텐 Wallstrasse에 있는 바흐가 거주하던 집

하지만 바흐는 괴텐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현재까지도 가장 잘 알려진 많은 기악곡을 작곡했습니다. 탁월한 실력의 악단은 바흐에게 다양한 기악곡을 작곡할 수 있는 창조적인 자극을 주었을 것입니다.
괴텐에서 바흐는 프렐류드(BWV 924-932), 프랑스 모음곡(BWV 812-816),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BWV 846-869), 인벤션과 신포니아(BWV 772-801), 오르간 소곡집(BWV 599-644) 같은 건반 악기 음악을 완성했을 뿐 아니라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6개 파르티타와 소나타(BWV 1001-1006), 무반주 첼로를 위한 6개의 모음곡(BWV 1007-1012), 6개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BWV 1046-1051)을 작곡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괴텐에서 큰일이 있었습니다. 아내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습니다. 바흐가 레오폴트 공과 함께 온천에 휴양을 가 있는 동안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바흐가 복귀했을 때는 이미 장례식까지 끝난 후였습니다. 바흐와 바르바라는 13년 동안 함께 의지해온 사이라 바흐의 상심은 더 컸습니다. 아내의 죽음 후 약 일 년 반 후 바흐는 두 번째 아내를 맞이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직 한참 어린아이들을 어머니 없이 그대로 둘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궁정의 트럼펫 연주자의 딸이며 재능이 뛰어난 소프라노였던 안나 막달레나 였습니다. 새 아내 안나 막달레나는 바흐를 잘 내조했습니다. 남편의 곡을 필사하여 궁정 악단의 연주를 도왔으며 아이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바흐는 새로운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안나 막달레나 바흐를 위한 클라비어 소곡집’을 출간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아내를 얻으며 안정을 찾았고 음악적으로는 자신을 지지하는 후원자가 있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분위기는 괴텐의 영주 레오폴트 공의 결혼 이후 점점 바뀌게 됩니다. 레오폴트 공이 부인으로 맞이한 헨리에타 공주는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음악회에 참석할 때마다 지루해하는 표정을 짓는 부인을 둔 레오폴트 공 역시 음악에 대한 열의가 시들해졌으며, 더 이상 궁정 악사들을 예전처럼 애정을 담아 대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렇게 달라진 환경 가운데 바흐는 인생의 후반기를 새로운 곳에서 보내기로 결정하고 1722년 12월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 교회 칸토르(대성당 음악감독) 자리에 지원하게 됩니다.

괴텐에서 작곡된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자필 악보

글 강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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