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크리스티앙 보뱅 ‘그리움의 정원에서’, 포레 ‘레퀴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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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움 속에서 시들어가고 그 안에서 켜켜이 쌓이는 삶을 깨닫기도 한다.”
– ‘그리움의 정원에서’ 중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크리스티앙 보뱅’(Christian Bobin, 1951-2022)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평생 글만 쓰며 세상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습니다. 1977년 첫 작품인 ‘주홍글씨’(Lettere Pourpre)에 이은 ‘가난한 사람들’(Le tres-Bas)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프랑스가 사랑한 작가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아홉 편의 작품으로 구성된 에세이집 ‘작은 파티 드레스’(Une petite robe de Fete)는 우리나라에서도 그 번역본이 큰 반향을 일으키며 많은 애독자가 생겼습니다. ‘그리움의 정원에서’(La plus que vive), ‘환희의 인간’(L’homme-Joie), 그리고 유작이 된 ‘흰옷을 입은 여인 ’(La dame blanche) 등 50편이 넘는 작품을 남긴 크리스티앙 보뱅은 정적이면서도 섬세한 감정 표현과 인간의 내면을 꿰뚫는 듯한 처연함이 인상적인 작가입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라는 말을 ‘환희의 인간’에 서술하기도 한 보뱅의 모든 작품에는 그가 사랑하던 여인의 죽음을 비롯한 많은 상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세심한 단어 선택으로 죽음을 이야기함으로써 죽음이 주는 고통을 뛰어넘는 영원한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그리움의 정원에서’(La plus que vive)라 할 수 있습니다.

보뱅은 1979년 가을, ‘지슬렌 마리옹’(Ghislaine Marion, 1951-1995)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녀가 1995년 파열성 뇌동맥류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 맞이한 가을과 겨울에 상실감과 그리움, 그리고 죽은 이들이 남겨진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을 것으로 생각되는 말들을 남긴 책이 바로 ‘그리움의 정원에서’입니다.
보뱅의 ‘그리움의 정원에서’는 두 가지 방식의 사랑이 존재합니다. 바로 온전한 삶 그 자체를 사랑한 지슬렌, 그리고 그러한 지슬렌이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대로 지슬렌을 바라보고 사랑하던 보뱅의 사랑입니다. 지슬렌은 보뱅에게 사랑의 순간과 고통,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으며, 그러한 지슬렌이 세상을 떠난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보뱅은 여전히 삶을 사랑하며 변함없이 계속 살아가고, 더 잘 살아가며 떠나간 자들이 남겨진 자들에게 전하고자 하였을 말들을 전하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갑니다.
보뱅이 ‘그리움의 정원에서’ 속에서 물처럼 부드러운 음악이라 표현한 음악이 있습니다. 바로 포레의 ‘레퀴엠’입니다.

죽은 자를 위한 위령미사를 위한 전례음악인 ‘레퀴엠’(Requiem)은 ‘안식’이란 뜻의 라틴어에서 그 이름을 따왔습니다. ‘진혼곡’이란 번역으로도 잘 알려진 레퀴엠은 죽은 이들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청하는 음악인만큼 매우 경건하고 때로는 매우 참담한 분위기의 작품이 대부분입니다.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까지 쓴 ‘레퀴엠’(Requiem in d minor, K.626)이나 베르디의 ‘레퀴엠’(Messa da Requiem), 베를리오즈의 ‘레퀴엠’(Requiem Op.5 ‘Grande Messe des morts’)이 대표적인 레퀴엠이자 이러한 진중한 분위기를 잘 품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실 레퀴엠이라는 작품 자체가 물처럼 부드러운 음악으로 표현되기가 쉽지 않은 음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포레의 레퀴엠은 어떤 작품이기에 보뱅이 물처럼 부드러운 음악이라 표현을 하였을까요?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 (Gabriel Urbain Faure, 1845-1924)

‘가브리엘 위르뱅 포레’(Gabriel Urbain Faure, 1845-1924)는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며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카미유 생상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포레는 모리스 라벨의 스승이자 파리 음악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9개의 전주곡, 13개의 야상곡, 13개의 뱃노래 등 피아노 독주곡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2개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2개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2개의 피아노 사중주와 2개의 피아노 오중주, 1개의 현악사중주와 같은 실내악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포레 레퀴엠

포레의 아버지가 사망하던 1885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2년 뒤인 1887년에 완성된 ‘레퀴엠’ (Requiem in d minor Op. 48)은 7곡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율이 그림처럼 매우 아름답고도 서정적이게 작곡되었습니다. 이 곡은 기존의 레퀴엠의 구성인 ‘입당송’(Introitus)과 ‘자비송’(Kyrie), ‘부속가’(Sequientia), ‘봉헌송’(Offertorium), ‘거룩하시도다’(Sanctus),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 ‘영성체송’(Communio), ‘구원송’(Libera me), ‘천국에서’(In paradisum)를 충실히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레의 레퀴엠은 첫 번째 곡을 입당송과 자비송을 연결하여 하나의 곡 ‘Introit et Kyrie’으로 작곡하였습니다. 두 번째 곡은 ‘봉헌송’(Offertoire)으로 작곡하였으며, ‘상투스/거룩하시도다’가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네 번째 곡인 ‘경건한 예수’(Pie Jesu)는 진노의 날과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가장 절제되고 간결하게 표현되고 있는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영원한 안식과 행복에의 도달을 그리고 있기에 ‘죽음의 자장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섯 번째 곡인 ‘하나님의 어린 양’, 여섯 번째 곡 ‘리베라 메/구원송’, 그리고 마지막 곡인 ‘인 파라디숨/천국에서’까지 포레의 레퀴엠 전체에서 느껴지는 점은 죽은 이들의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남겨진 사람들을 음악으로 위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이 레퀴엠은 베르디의 레퀴엠과는 정반대의 죽음과 영혼에 대한 해석으로 평가되며 포레의 대표작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보뱅은 포레의 레퀴엠에서 ‘불 꺼진 네 얼굴을 쓰다듬는 빛의 손길. 오래도록 이어지는 부드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는 레퀴엠에서 이 음악만을 사랑하였으며 이 음악이 끝난 후, 즉 이 모든 말과 음악이 부서지는 모래와도 같은 침묵을 얻기 위한 글을 썼으며, 그렇게 ‘그리움의 정원’이 완성되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슬픔을 넘어 남은 삶을 사랑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포레의 레퀴엠이 스며든 보뱅의 ‘그리움의 정원’은 우리 모두의 지친 삶을 위로해주며 사랑하며 살아갈 이유를 알려주는 작품들일 것입니다.

글 박소현

– 포레 ‘레퀴엠’ : https://youtu.be/p-uzBqbMUvc?t=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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