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애가(哀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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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20일 필자는 좀 특별한 음악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김포에 거주하는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들을 위로하는 음악회였다. 300여 명의 김포 거주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들이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음악회에서 울며 웃으며 환호하고 기뻐하였다. 역시 영주귀국 동포로 현재 안산 고향 마을에 거주하는 백수경 전 사할린 한인회 회장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 음악회에서 필자는 감사장을 수여 받았다. 그동안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들을 위한 음악회에 30여 회 출연한 것을 감사해서 수여하는 감사장이었다. 현재 22개 도시에 대략 2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들의 역사는 1992년부터 시작되었고 2020년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점에 이르렀다.

김포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를 위한 음악회에서 감사장을 받는 필자

우리는 흔히 구소련권 국가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를 통틀어 고려인이라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사할린 동포와 고려인은 역사적으로 그 결이 사뭇 다르다. 고려인은 19세기부터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 기원이다. 1860년, 2차 아편전쟁이 청의 패배로 끝나고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시아는 외만주 및 연해주를 할양받았다. 1869~1874년 조선 북부에서 대흉년이 발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월경하여 그 이북에 아예 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기 시작한, 어느 정도 자발적인 이주의 역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청에서는 봉금령 조치가 이완되고 러시아는 인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들의 국경 침범을 묵인하고 있었기에 조선인들의 이주는 지속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후 만주사변을 비롯해 일본의 중국 침공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던 소련 정부는 고려인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나는 고려인들이 지속해서 자치권을 요구하는 것에도 부담을 느꼈다. 1937년 8월 21일, 스탈린이 고려인 강제 이주령을 승인한 뒤, 이주 작업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 당국은 3~7일 전에 이주를 통보해 한인 사회가 제대로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았고 수많은 한인이 무기력하게 기차에 실려 아시아 정반대 쪽의 중앙아시아로 끌려갔다. 강제 이주의 결과, 고려인 172,481명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당하고(우즈베키스탄: 76,526명, 카자흐스탄 : 95,256명), 1938년까지 40,000명이 사망했다.
사할린은 한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그리고 이곳의 한인 이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당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종전 이후에 사할린이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방치된 것이다. 즉, 사할린의 한인들은 일제하 전시체제기에 시행된 강제동원정책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아주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재일 한국인과 비슷했으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그들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나무위키 참고) 2차대전에서 패한 일본군은 강제 징집했던 한인들을 사할린 땅에 그대로 버려두고 귀환하였다.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의 망향인들을 기리는 위령비
위령비의 비문

필자와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들과의 인연은 2007년에 시작되었다. 사할린 유일의 한국어 방송국인 ‘우리말 방송’이 재정난으로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시민들이 뜻을 모아 성금을 마련했고, 이를 전달하며 섬의 동남쪽 ‘코르사코프’ 항구에 돌아오지 못한 망향민들을 위한 위령비를 세우기로 하였다. 모금과 위령비 건립은 ‘한강포럼’에서 주도하였고, 대우건설에서 제공한 파이프를 소재로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이었던 최인수 교수가 비를 제작하였다. 위령비 제막식에서는 김문환 교수가 쓴 ‘탑을 세우는 뜻은’이라는 제목의 추모 시를 신갑순 여사가 낭송하였고, 필자가 추모가로 ‘백학’을 노래한 것이 사할린 동포들과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배를 세운 형상과 기도하는 손 모양으로 제작된 위령비는 일본군들이 버리고 떠난 바다 쪽을 향하게 하여 고향을 향한 애절함을 담았다. 아래는 김문환 교수가 헌정한 추모 시 ‘배를 세우는 뜻은’이다.

배를 세우는 뜻은

1945년 8월 15일 애타게 그리던 광복을 맞아
동토 사할린에서 강제 노역하던 1만여 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 코르사코프 항구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제는 일본 국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분들을 내버린 채 떠나가 버렸습니다.
소련 당국도
혼란 상태에 있던 조국도
이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짧은 여름이 지나 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이분들은 굶주림을 견디며
고국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혹은 굶어 죽고,
혹은 얼어 죽고,
혹은 미쳐 죽는 이들이 언덕을 메우건만
배는 오지 않아
하리없이 빈손 들고
민들레 꽃씨마냥 흩날려
그 후손들은 오늘까지 이 땅에서
삶을 가꾸고 있습니다.
조국이 해방되었어도
돌아갈 길이 없어
아직도 서성이는 희생 동포들의 넋을
조국으로, 세계로 자유롭게
모시려는 뜻을 모아
이 ‘망향의 언덕’에
단절을 끝낼 파이프 배를
하늘 높이 세웁니다.

김포 거주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를 위한 음악회를 마친 후 (앞줄 우측으로부터 두 번째가 백수경 회장)

앞서 언급한 사할린 영주귀국 동포 백수경 회장은 필자에게 자신과 함께 전국의 사할린 동포들이 거주하는 도시를 다니며 음악회를 열어주자고 ‘유랑극단’의 제의를 해왔다. 이를 위해 이미 음향장비까지 구입하고, 전국 유랑을 위한 승합차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이다. 평생을 이국땅 사할린에서 살다가 자신들의 부모가 태어난 고향에 돌아온 영주귀국인들에게 한국은 아직 낯선 고향이다. 지난 10월 20일 김포에서 공연을 보고 나가는 이분들은 하나같이 필자의 손을 꼭 잡으며 애처로운 눈물을 훔치시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셨다. 그리운 고향에 와서, 평생을 살았던 고향의 노래를 듣는다고 감격스러워 하셨다. 이들의 애가(哀歌)는 슬픈 노래가 아니다. 그리움의 노래이다. 두 고향을 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애처로워하는 애가이다.
이들의 아픔과 눈물과 그리움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는 것도 이 땅의 음악인들이 누려야 할 사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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