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에 제주의 자연과 이야기를 담다 ‘흙 속의 삶, 삶 속의 흙’ 도예가 박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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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애를 쓴들 깨지면 말짱 ‘꽝’인 결과지상주의 예술, 도예

제주섬은 ‘바다가 만든 그릇’이다. 그 그릇 안에는 숲, 바람, 하늘과 바다가 오롯이 담겨 있다. 신은 왜 바다 가운데 제주라는 섬을 만들었을까? 무슨 의미일까? 수필가 최민자는 시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에서 ‘길은 애초 바다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제주의 섬을 볼라치면 제주라는 ‘그릇’이야말로 바다에서 태어났다. 사면이 망망대해인 바다가 빚은 작품.
오리도 태어날 때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제 어미를 따르듯 한다는데 반평생 제주라는 그릇 안에서 살아온 제주사람이 그 많은 예술 활동 중, 하필 제주를 닮은 그릇을 창조한다면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이유 없는 창조활동은 없을 진데… 아마도 제주의 아름다움을 도자기 그릇에 담아 언제나 제주를 사랑하라는 신의 표징일 것이다.


제주도의 제1세대 도예가 박선희는 지난 30여년 간 제주의 바람, 숲, 바다, 하늘을 도자기에 담아왔다. 또한 절반의 제주흙과 절반의 육지흙을 배합해 ‘서로 사랑하라’는 끈끈한 마음까지도 담았으며 계절마다 변하는 자연의 색, 예컨대 숲과 하늘과 바다의 색상에 천착해 타투잉처럼 정성스럽게 작업해왔다. 대학을 졸업하고 최초로 펼쳤던 개인전 ‘바람을 담은 그릇’ 이후 일곱 번째로 마련한 전시회를 찾았다.
도자기에 대해 생경한 기자에게 그는 그릇의 성격부터 설명해준다. 비어있으면 오브제지만 채워지면 그릇이 되는 오묘한 도자기는 그래서 ‘조형그릇’이라고도 한단다. 초보자에게 설명하듯 그릇을 만드는 과정까지도 친절하게 풀어주는 박 작가. 흙이 건조되는 과정에서 두께가 다르면 트러블이 생겨 깨지기 때문에 두께가 매우 중요하다는 기초지식부터 흙반죽은 또 얼마나 정교해야 하는지도 귀띔해준다. 초벌과 유약의 과정을 너끈히 버티려면 반죽 사이에 공기가 있으면 안 된다. 흙이 마르는 건조 단계도 일정해야 한다. 도자기 하나가 나오기까지 깨질 수 있는 요인은 수백 가지다. 그걸 다 통과하고 1000도가 넣는 불을 견디는 작품만이 살아남는다는 엄혹한 시련 끝 결과물! 그게 도예의 세계다. 마지막 검증까지 견디지 못하고 깨지고 갈라지면 그 과정에서 아무리 애를 써도 말짱 ‘꽝’인 결과지상주의의 예술이다.
“작품 한 개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그릇이 다 깨집니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아마 흙 1톤 트럭은 버렸을 거예요.”
도자기 무늬도 우연성에 맡기는 게 아니라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이미지 전부를 세세히 새겨 넣는다. 지금이야 익숙한 손놀림으로 시간을 단축하지만 숙련하기까지는 온종일 시간을 먹어 치우곤 했다. 고난을 뚫고 탄생한 작품들이기에, 그런 창조물 앞에 서 있으면 유려하고 빛깔과 도드라진 콘트라스트, 그 환상적인 색감에 시선은 얼음이 된다.
알았다! 인간도 이럴 것이다. 뜨거운 연단을 거친 존재는 우리의 영혼을 꼼짝 못하게 하는 아우라가 있다는 걸…

11그릇, 세상 모든 게 어느날 갑자기 되는 건 없어


지금 박선희 작가의 전시회가 한창이다. 오는 11월 12일까지 제주 한경면 저지리 제주공예박물관에서 ‘제주의 자연에서… 흙 속의 삶, 삶속의 흙’이라는 주제 아래 제주의 자연을 손으로 빚는다. 음유시인이 출판한 한권의 시집 같은 작품 수백 종이 각기 독특한 빛으로 유약의 힘을 빌어 광채를 발한다.
‘바람 따라 구름이 흐르다 멈춰선 이미지’를 닮은 돌항과 ‘주상절리에서 돌을 쪼개놓은 듯한’ 다각형 접시, ‘바람을 담아 쉬게 하는’ 그릇, ‘차귀도의 붉은 노을을 담은’ 그릇, ‘귤꽃 향기 사방에 넘실대는’ 접시, ‘동백꽃 필 무렵 성마른 꽃잎들의 안달을 닮은’ 두툼접시, ‘한여름 붉고 푸른 정원을 옮겨놓거나 새미오름 분화구를 표현한’ 그릇, ‘오래된 제국의 보물처럼 빛바랜 황금색을 연모하는’ 항아리 울담, ‘꽃병을 조형한’ 꽃사발과 그리고 10월의 바다 그릇… 이 모든 작품을 이곳 공예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 모든 작품은 상상을 손으로 옮겨놓은 게 아니다. 박 작가에게는 삶과 작품이 하나다. 그러기에 기자는 인터뷰에 앞서 정일근의 시 ‘어머니의 그륵’을 낭송했다.

어머니는 그륵이라 쓰고 읽으신다.
그릇이 아니라 그릇이 바른 말이지만
어머니에게 그릇은 그릇이다.
물을 담아오신 어머니의 그릇을 앞에 두고
그륵 그륵 중얼거려 보면 그릇에 담긴 물이
편안한 수평을 찾고 어머니의 그릇에 담겨졌던
모든 것들이 사람의 체온처럼
따스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학교에서 그릇이라 배웠지만
어머니는 인생을 통해 그륵이라 배웠다.
그래서 내가 담은 한 그릇의 물과
어머니가 담은 한 그륵의 물은 다르다.
말 하나가 살아남아 빛나기 위해서는
말과 하나가 되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말을 만드셨고
나는 사전을 통해 쉽게 말을 찾았다.
……(중략)


시인 정일근은 억지로 짜맞추는 시를 쓸 뿐이지만 어머니의 ‘그륵’에는 본인이 살아온 삶이 녹아 있기 때문에 훨씬 더 정감어리고 살아 움직이는 시어가 된다는 의미다. 박선희 작가는 사전적인 의미의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걸까? 본인의 생애를 덩어리로 작품을 만드는 것일까? 그러자 단답형이 아니라 긴 이야기 실타래로 풀어낸다.
“아라동이라는 그 마을에서 살았어요. 70, 80년대까지만 해도 야생의 모습 그대로를 담고 있는 한라산 중턱의 마을이었답니다. 초등학교 시절, 매일 한라산을 겨끔내면서 하교할 땐 북풍, 마파람, 하늬바람 등 색색의 바람을 맞으며 6년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남달랐나 봐요. 한라산의 변화무쌍한 계절의 느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채록해두며 데이터를 축적했어요. 그 어린 시절의 데이터들이 나중에는 도예가의 길에 들어 설 때 엄청난 영감을 주었습니다.”
박선희의 자연에 대한 유별한 감각도 감각이지만 그에게는 남다른 손재주가 있었다. 명절이면 고사리손으로도 송편을 야물딱지게 빚어내는 작은 일부터, 옷감을 손에 잡으면 자르고 기워서 인형이나 남들은 흉내 낼 수 없는 이러저러한 수공예 품을 만들었다. 특히 아버지 양말은 창작의 일상 재료였다. 목을 잘라 뭐든 공작질을 해댔다. 지금도 아버지의 양말이 보이지 않으면 ‘선희가 또 양말을 조잘냈구나’ 하고 의심할 정도다.
“그런 재주가 있어서 지금까지 근 30년 동안 도예가의 길을 걷게 된 것 같아요.”
그러나 그의 30년이란 설겅설겅하게 작업한 도예가들과는 시간 효율성 면에서 차이가 있다. 세 자녀를 낳아 키우는 동안에도 자신이 세운 ‘1일1그릇’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갓난아이의 요람을 흔들고 물레를 돌리며 도자기를 빚어왔기 때문이다. 박선희 작가는 그런 예술가다. 어린 시절부터 떠오르는 영감을 채록하고 반평생 동안 도자기 물레를 돌리며 손에 흙이 마르지 않은 사람. 그러니 그의 작품이 사전적 의미의 도자기가 될 수 없다. 정일근 어머니의 ‘그륵’과 같은 작품들이다.
“일용할 양식을 무시로 떠먹듯 하루에 한 작품씩 이렇게 뽑아내지 않으면 안 돼요. 어느 날 갑자기 ‘이제 해야지’ 하는 것은 이미 감성에서 멀어진 상태거든요. 세상 모든 게 어느 날 갑자기 되는 일은 없습니다. 데이터가 쌓이고 디테일한 작업이 차곡차곡 모아져야 원하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것 같아요.”
그의 내공은 현저히 낮아진 파손율에서 입증된다. 한 개의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 습작처럼 그릇을 수없이 버려야 하지만 이제는 박 작가의 손은 온갖 기능에 젖어 있고 악력은 웬만한 피아니스트를 능가하며, 손은 크고 두툼하게 변해 그릇을 깨트릴 일이 없다.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한 가지에만 정통한 게 아니라 본인의 의지에 따라 원하는 분야에서 얼마든 최고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박 작가는 다른 분야는 뒤로 한채 왜 도자기에 올인했을까? 회화나 조각 분야에서도 특출한 재능이 있을진데…
“도자기가 재미있기도 하지만 재료비도 가장 쌌습니다. 재료비를 선택 기준으로 하는 게 말이 안 될듯 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는 재료비가 매우 중요해요. 게다가 제가 어렸을 때부터 바느질 말고도 오만 가지를 다 했는데요, 같이 사는 남편이 ‘정신 어지럽다’며 도자기 한 가지만 선택하라는 무언의 압박도 있었습니다.(웃음)”

도자기 이름에 담긴 사연들과 시할머니 위한 천명


박선희 작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메모광이다. 알라딘의 지니를 호라병이 빨아들이듯 떠오르는 문장과 단어, 느낌이 떠오르면 쪽지의 낚시질로 훅 낚아챈다. 이번 전시회의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제목 또한 그렇다. ‘흙속의 삶, 삶속의 흙…’ 정일근의 ‘그륵’이다.
“전시회 제목은 물론 도자기에도 형이상학적인 제목을 달면 좀 답답하고 몸이 오글거리는 느낌이에요. 제가 정한 제목은 작업하는 동안 순간순간 떠오르는 이름들입니다. ‘어머니한테 혼난 날’ 뭐 이런 제목도 있어요.”
재미있는 제목 표현이 가능한 이유는 그가 생활 속 도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자기 이름에는 깊은 사연들도 있다. 시할머니를 25년 동안 모셨던 박 작가의 작품에는 할머니의 그림자가 진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는 시할머니의 삶을 알고 난 이후, 할머니의 아픔을 풀어주고 생을 편안하게 마치도록 도와주는 일이 본인의 본분이자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제주 4.3사건 당시 남편과 시부모 등을 모두 잃고 상상하기도 힘든 세월을 헤쳐 온 분이다.
“당시 갓 돌 지난 아들만 살아남았는데 그 아들의 아들이 제 남편이죠. 남편이 정치가로 성공하자 할머니의 모든 아픔은 다 치유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시집올 때까지 4.3에 대한 고통을 가슴 속에 묻고 입을 봉인한 채 본인이 살던 제주 남원읍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않으시고 살아오신 거예요. 제가 시집와서 할머님과 대화하면서 여전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가슴이 아팠던 그는 세월이 지나 자녀들이 장성한 즈음에 공방을 아예 할머니 곁으로 옮기기로 했다. ‘엄마! 이제 엄마의 천명을 찾아 떠나세요. 저희는 더 큰 어른이 돼서 돌아올게요’, 엄마의 결정에 자녀들은 이런 편지를 남겼다.
“처음에는 아이들도 다 컸으니 이제 신바람 나게 도예를 해야지 좋아했는데, 저의 천명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당시 할머님 연세가 95세였는데, 할머님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이 세상을 떠나시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저의 천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공방을 할머님 곁으로 옮긴 거예요.”
이후 할머니는 5년 동안 매일 공방에 마실을 나와 박 작가의 말벗이 되어 주기도, 공방 한쪽에 마련된 할머니만 공간에 온종일 앉아 박 작가에게 많은 영감을 주곤 했다. 그리하여 할머니의 별명이 ‘공방의 요정’이 되었다. 흙 범벅의 손자며느리를 보면 ‘그것으로 밥 먹고 살 수 있겠냐.’ ‘밀감 과수원 하는게 낫지.’ 그런 지적 끝에는 고추에 고추장을 찍어먹듯 구수한 욕이 뒤따르기도 했다. 그러면 박 작가는 그 욕설마저 신기해 또 적어놓는다.
“화병을 만들 때 그게 무어냐고 물으셔서 화병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할머니는 그 화병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4.3때처럼 해코지 당할까 봐 구십 평생 제주 남원읍을 떠나본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 일상 언어가 굉장히 한정적이었어요. 화병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시니 ‘꽃을 꽂는 그릇’이라고 설명해드렸죠. 대뜸 ‘아~ 꽃사발’ 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작품 이름을 ‘꽃사발’이라고 했습니다.”
할머니는 자신만의 언어를 꺼내 박 작가의 교과서적인 작품 이름을 바꾸게 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갤러리 공간누보의 송정희 관장은 할머니의 언어가 너무 신기해 할머니의 언어로 명명한 작품을 따로 전시하는 컨셉 전시회를 기획한 적도 있다.
“할머니의 언어에는 박 작가님이 담고자 하는 자연 이상의 제주의 역사가 녹아 있어서 언젠가는 전시회를 마련해 그 언어를 풀어보려고 해요. 여기 보세요. 네 귀가 반듯해서 우리는 흔히 ‘마름모꼴’이라고 하잖아요. 헐머님은 이 그릇을 ‘토라진 접시’라고 했어요. 이름이 사물을 더욱 빛나게 하는 거예요.”

어려운 일 만나면 늘 ‘의미부여’로 돌파


어느 날 한 단체전에서 박선희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고 무작정 찾아갔다. 도자기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데, 그날 박 작가의 그릇을 보고 도예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찾아가 보니 한 정치인의 아내였고 자녀가 세 명이나 되며 시할머니까지 모시는 분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남편에게 내조에 집중하면 자녀 한 명도 쩔쩔 맬 텐데 무려 세 명이나 건사시키다니 놀랄 수밖에. 게다가 띄엄띄엄 작품하는 게 아니라 1일 1그릇을 원칙을 지켰고, 누에가 실을 잣듯 작품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본 박 작가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놀란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편의 선거 기간이 보통 3~6개월인데 이 기간에는 개인 작업을 아예 접는다. 예술가에게 작업을 멈춘다는 건 굉장한 결단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내려놓고 오로지 정치인의 아내에 올인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박 작가는 본인의 일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스스로 명분을 만든다.
“내가 원하지 않은 일을 만났을 때 의미 부여를 빨리하면 그만큼 쉽게 자유로워지고 스트레스도 덜 받거든요. 선거 기간에는 저 역시 선거전을 치릅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1일1그릇을 하다보면 온몸이 쑤시고 아파서 고장나기 일보 직전이 돼요. 그런데 선거 기간 동안 작업을 안 하면 신기하게도 몸이 회복이 됩니다. 선거 기간이 안식 주간이 되는 거예요. 사람은 어차피 한 번씩 쉬어야 하니까요. 이 기간은 작업을 못하는 기간이 아니라 몸이 회복하는 기간이에요. 도예 못 한다고 억울할 게 없습니다.”
보통 정치인 아내들의 선거 운동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동네 목욕탕을 들락거리며 서민형 이미지를 구축하거나 크고 작은 행사장에 신발이 닳도록 다닌다. 박 작가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 대신 공방을 개방해 일일 접시만들기 체험교실을 열거나 장애인단체를 찾아 접시를 같이 만들기도 한다. 그에게 정치와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선거 기간에는 오히려 많은 분들이 공방을 찾습니다. 본인이 직접 접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여성들의 로망이거든요. 단체로 몰려오면 각자 접시를 만들게 해드리고 제가 잘 마무리를 하죠.(웃음) 그러면서 ‘접시 잘 만드는 저는 기억하지 마시고 남편을 기억해달라’고 합니다.”

제주 도예 1세대지만 원하는 만큼 개인전 열 수 없어

박 작가는 제주도 도예 1세대다. 대학 88학번으로 당시 도예가 붐이 일어났지만 제주도는 도예를 깊게 배울 수 있는 인프라나 서적 자료들이 매우 부족했다. 재학 중에는 육지로 나와 숙명여대 친구의 학생증을 빌려 도예에 관한 책을 읽고 가슴 졸이며 복사하곤 했다. 그에게는 도예에 관한 전공 서적이 그만큼 간절했다. 참고할 만한 서적도 멘토도 없었다. 물론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학교 교수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박 작가의 학구열과 탐구심을 채우기에는 부족했음을 고백한다. 결혼 후에도 도예의 수준을 스스로 높이는 게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밖에 나가는 게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부여’를 잘하는 박 작가는 그런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날씨가 좋든 나쁘든 1일1그릇을 실천하는 뜻으로 해석했을 것이고, 동네 어귀 이외에는 어디에도 외출을 하지 않은 할머니를 ‘가장 아름다운 비평가이자 조언자’로 보내주셨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박 작가는 지금도 한계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다. 할머니가 겪은 4.3의 아픔 때문에 정치를 시작한 남편이 ‘이름하여’ 높은 자리에 오르자 마음껏 개인전을 개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 사업에도 눈치를 봐야 하고 정당하게 공공시설을 대관하려고 해도 특혜시비를 우려해 자기검열을 하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차별로 느껴졌다. 그러나 어쩌랴. 도민들의 시선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을.


기획자의 입장에서 박 작가를 보니 한편으로 안타까웠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법이다. 박 작가의 작품은 제주 그 자체의 모든 걸 담고 있는 세계적인 작품이다.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을 본 해외 갤러리안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일반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제주를 담은 그의 작품에 외국인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고, 실제 판매로까지 이뤄졌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판매에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단지 정치인의 아내라는 이유로.
지금 개최하고 있는 개인전은 2019년 이후 가장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단체전은 수없이 해왔다. 하지만 개인전은 다르다. 자신의 도예를 온전히 보여줄 수 있는 전시회는 개인전이건만 지금까지 여섯 차례밖에 열 수 없었다. 이번은 그 일곱 번째 개인전이다. 정치인의 아내로서 기획하면 마치 ‘당신들 내 전시회에 오지 않으면 안 돼’ 하는 강요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 또 앞서 지적한 것처럼 특혜를 받아서 개최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피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그동안 개인전을 마음 놓고 펼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한 번은 임팩트있게 선보이고 싶었다는 박 작가. 앞으로 어떤 전시회를 또 기획할까? 아직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방향은 정해졌다.
“4.3을 알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전에 사진작가와도 했지만 이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스토리를 담은 전시회를 하고 싶답니다. 특히 할머니의 언어로 매겨진 그릇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이야기거든요. 그런 기획전을 제대로 할 때가 왔으면 좋겠어요.”

융복합시대,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이 도예

시대정신에 입각한 작품이든 개인적인 철학, 자연 등을 표현한 작품이든 도예로 표현하려면 우선 도예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도예가로 나서는 이들이 줄어들고 있어 도예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가장 인간 친화적인 재료로 펼치는 예술행위이기에 그 맛을 알면 타 장르보다 인기있는 학과가 도예과가 될 텐데 왜 점점 관심 밖으로 밀려날까?
“요새는 힘들다는 이유로 선택을 안 하고 있어요. 그 말도 틀리지는 않아요. 과거 도공들이 모두 남자인 이유는 그만큼 힘든 노동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요즘은 도예과가 전국적으로… 그것도 순식간에 없어지고 있습니다. 대학이 구조 조정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예술입니다. 수도권은 이미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하고요. 물론 도예과만 문제가 아니죠. 인구 절벽시대에 서양화만 빼고 미술과 전체가 존폐기로에 서 있어요.”
그러나 박 작가는 도예야말로 경계를 넘나드는 영역이라며 그 가치를 설명한다. 순수미술쪽에서는 도예가 순수미술에 가깝지 않는다고 배척하는 한편, 디자인 쪽에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도예야말로 융복합시대에 공예와 예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분야이기에 그 어떤 장르보다 더 실용적인 예술이다.


박선희 작가는 인터뷰 중 꺾어준 갈대를 쥐고 있었다. 크게 웃을 때, 또 접시에 놓인 감을 가리킬 때, 감을 권할 때 갈대를 움직였다. 박 작가는 그런 갈대 같은 작가라는 생각이다.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내성의 작가. 손님에게 감을 먹이자 그 접시는 금세 오브제가 되어 막 떨어지는 제주의 햇살을 담아냈다. 아마도 그가 지금까지 창조한 도자기는 실용과 예술을 넘어 우주를 담은 그릇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시할머님의 살아 생전 트라우마를 치유할 4.3의 ‘비유와 상징’이 담길 다음 전시회가 진정 기다려진다.

글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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