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가장 큰 무기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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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가요가 나오면 채널을 돌리곤 했던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은 클래식 매니아다. 늘 그랬듯 혼자 운전하던 중 라디오를 켜자마자 나오는 컨트리 음악을 듣고 채널을 바꾸려는 순간, 가사 한 마디가 심금을 울렸다.
여자 친구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받으러 찾아간 젊은 남자의 이야기. 여자 친구 아버지가 자신을 거실에 남겨두고 방에 들어간 사이, 남자는 어릴 적 신데렐라를 연기하는 여자 친구의 사진, 자전거를 타는 사진, 환하게 미소 지으며 스프링클러 사이를 달리고, 아빠를 올려다보며 춤추는 사진을 바라본다는 가사였다.
그 노래가 끝나자 조너선은 차를 갓길에 세우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척 윅스의 ‘신데렐라를 훔치는 남자’를 듣고 조너선은 언제까지나 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일 수는 없다는 사실에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소음에 가까운 음악일지라도 그 내용이 솔깃하면 듣게 되는 게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두 딸을 너무도 사랑했던 조너선 갓셜은 이 노래를 계기로 어떤 경우에 무관심이 갑작스럽게 관심으로 바뀌는지 궁금했다. 척 윅스의 ‘신데렐라를 훔치는 남자’는 멜로디보다 스토리에 힘이 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연구를 시작해 펴낸 책이 바로 ‘스토리텔링 애니멀’(민음사 刊)이다.
인류의 정신이 미숙하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부터 인간은 별과 산과 꿈과 사냥에 대해 서로에게 이야기했다. 그로부터 수만 년이 지났어도 이야기로 소통하던 인류의 유전자는 면면히 흐르고 있다. 종이 위에서, 무대에서,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살인이야기, 섹스이야기, 전쟁이야기, 음모이야기, 진실이야기, 거짓이야기 등 온갖 픽션에 열광한다.


논픽션은 열광하지 않는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논픽션도 픽션처럼 이야기를 전개해야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이 역시 만만의 콩떡이다. 종이가 스크린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미국인들은 애나 어른이나 가릴 것 없이 드라마, 영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스포츠, 픽션물 등 하루 평균 5시간씩 연 1,900시간을 유튜브와 텔레비전 앞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이 이야기물에는 반드시 음악이 따른다. 음악학자이자 신경과학자인 대니얼 레비틴은 현대인은 하루 5시간 이상씩 음악을 듣고 산다고 주장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드라마 음악, CM송, 영화음악, 라디오 음악 등 귓구멍으로 흘러들어오는 음악들을 합산하면 그런 결과가 나올 만도 하지 않은가. 인류는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이야기하는 인간)이 맞다.

갤러리 ‘공간누보’ 송정희 관장이 쓴 ‘매혹하는 미술관’이 베스트셀러인 이유는 바로 이 스토리텔링에 있다. 12명의 여성 화가들의 삶은 그야말로 고행의 길이라는 공통적인 스토리를 깔고 있다. 단순히 작품을 설명한 게 아니라 그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그 작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 피를 토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심지어 인터뷰하는 중에 송정희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썼는지 궁금해서 질문을 던지자 송 작가 역시 한때 억장이 무너지고 뼈를 깎는 고통들이 위대한 여성 작가들의 삶 이상이었음을 깨달았다.
또 이번 호에 만난 도예작가 박선희의 도자기 작품이 뭇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배경에서 남다른 스토리를 발견했다. 제주 4.3사건뿐만 아니라 손자며느리와 시할머니와의 애틋한 관계, 그리고 도자기 이름에 얽힌 특별한 스토리들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했다. 꽃병이 ‘꽃사발’로 명명되고, 마름모꼴 접시가 ‘토라진 접시’로 이름 붙여진 이유에는 남다른 스토리가 있었다. 게다가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 아버지의 양말을 훔쳐 인형을 만들었던 이야기며 한라산에서 만난 온갖 바람 이야기, 남편을 ‘골랐던’ 이야기는 하나의 드라마였다.

이쯤에서 스토리가 음악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하고, 쓸데없는 잡설은 그만하라고 불평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최근 몇 개의 공연을 보면서 이제야 바야흐로 클래식계도 스토리텔링 콘서트 시대가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서론이 길었다.
지난 10월 22일 오후 6시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 열린 ‘제55회 난파음악제’의 공연 부제는 ‘스토리텔링, 혼돈의 시대 음악으로 쓴 치유와 위로의 시(詩)’였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이 공연에서 박영란 작곡의 ‘난파환상곡’과 신현민 편곡의 ‘봉선화’ 등 두 곡을 듣고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이 곡들은 경기음악협회의 오현규 회장의 말마따나 ‘나라 잃은 마음과 애국의 메아리를 선율로 작곡한’ 홍난파의 마음을 스토리 형식으로 풀어낸 곡이기 때문이다. 특히 ‘난파환상곡’은 민족적 선율을 가미해 나라의 혼돈을 광포한 음률로 내던지듯 표현한 후, 가을날 맑은 하늘을 닮은 청아한 음악으로 채색해나갔다.
또 하나의 공연은 지난 10월 13일 오후 8시 서울오페라앙상블이 마포아트센터에서 개최한 M한국가곡시리즈 ‘모던가곡’(풍경화)를 꼽을 수 있다. 가을 분위기의 가곡에 바리톤 장철의 구수한 스토리에 가곡의 또 다른 맛을 선보인 공연으로 이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툴뮤직의 정은현 대표와 오찬을 하면서 주고받았던 댜화내용도 스토리텔링이 주제였다. 창작곡이 어려운 것은 듣는 사람의 욕구와는 관계없이 본인의 예술성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은 지원금을 받아 한번은 공연할 수 있지만 대부분 폐기 처분된다.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고 그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콘서트라는 거시적인 의미에서나, 개별 작품의 미시적인 의미에서나 대중의 귀를 잡아당기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지난 10월 12일 세종문화회관에서 본사가 주관한 홍난파 가곡제 ‘금강에 살어리랏다’에서 가장 호응이 좋았던 곡은 윤준경 작사, 정덕기 작곡의 ‘척’이었다.
‘못생긴 것은 내 인생의 딜레마인데, 나는 어떻게든 척하고 산다. 있는 척, 아는 척, 호박씨 안 까는 척, 금방 탄로가 나더라도 끊임없이 척하고 산다’는 내용이다. 현대인의 마음을 단박에 읽어낸 가사로 청중은 우렁차게 환호하고 떠나갈 듯 박수로 화답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읽고 있는 책 김호연의 ‘망원동 브라더스’에도 ‘척’이 나온다. 주인공의 후배 별명이 삼척동자다. 왜냐면 ‘아는 척, 잘생긴 척, 돈 많은 척’을 3가지 척을 달고 살기 때문이다. 본사가 주최하고 있는 ‘위대한 청춘 70년’도 영상을 통한 스토리가 가득하기에 인기를 얻고 있다.
자! 표가 팔리지 않는다고 땅을 치지 말고 대중의 니즈에 걸맞은 소재와 주제를 찾아 눈물 나게 웃기거나 슬픈 스토리텔링 음악 콘텐츠를 짜내보자.

글 발행인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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