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곤 전 장관의 경기예술나무포럼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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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의 벽, 갈등의 벽을 넘어서야 할 시대

김명곤 전 문화부 장관은 지난 11월 6일 오후 7시30분 경기문화재단이 주최한 ‘경기예술나무포럼’에서 문화예술인들이 모인 가운데 문화예술인들이 세상의 변화를 읽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나아가 문화예술인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행정가들이 문화예술의 거시적인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언과 고언을 담아 귀한 강의를 펼쳤다.
지금은 베짱이들의 역할이 국가경제를 좌우할 만큼 지대해지고 있으며 이 일에 종사하려는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에 이제 베짱이들은 자부심을 갖되 논어의 지지자(知之者)에 덧붙인‘낙지자불여광지자’(樂之者不如狂之者)처럼 ‘자기 예술에 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강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았다. (편집자 주)

어쩌다 들어선 예술세계

안녕하세요. 김명곤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다가 3학년 때에는 판소리를 알게 되었고. 연극반에서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독문학을 전공했으니 독일어 교사를 하거나 유학을 다녀와 교수 또는 문학가가 되는 꿈을 꾸었을 텐데 그만 완전히 연극에 빠져 진로를 바꿨습니다. 졸업 후 ‘뿌리 깊은 나무’에서 기자생활 1년, 배화여고 독일어 교사 1년을 거쳐 모든 걸 ‘때려치우고’ 연극만 했습니다. 이후로 연극하면 떠오르는 단어 ‘가난’과 완전히 밀착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친구 중 누군가는 사법고시에 패스하고,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직하는 등 사회적으로 동경하는 길을 잘 찾아 나갔죠. 반면 저는 연극 관객을 끌어모아야 했습니다. 결국 잘 나가는 친구들을 찾아갔습니다.
“나 연극하는데 표 좀 사주라”
“지금도 연극하냐, 진짜 멋있다. 내 끝나고 한 턱 쏠게. 느그 배우들 다 모이라고 해.”
그러면서 소주에 삼겹살 사주면서 티켓 3여장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근 1년 만에 다시 찾아갑니다. 삼겹살에 소주 얘기는 싹 사라집니다.
“내가 티켓 10장은 사줄게.”
다시 1년 뒤에 찾아갑니다.
“내가 지금 차장으로 승진했는데 새벽부터 밤까지 정말 정신이 없다. 토요일 일요일도 없어. 정말 바빠 연극 볼 시간이 없다.”
정중히 거절하면서 한마디 덧붙입니다.
“그런데 너 시방도 그것 하냐?”

그 말을 듣고 떠오른 그림이 있었습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말입니다. 친구들은 개미처럼 열심히 아침부터 밤까지 땀 흘리며 일해서 돈을 벌어 월급 받아 식구들을 먹여 살리는데, 나는 연극한다, 판소리한다며 베짱이처럼 노는 것 같더라고요. 친구들에게 표 좀 사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은 겨울에 먹을거리가 없어 개미를 찾아 구걸하는 베짱이와 다를 게 뭐가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나는 이 사회에 쓸모없는 배짱이가 아닐까 자괴감이 들기까지도 했죠. 그 당시에는 저뿐만 아니라 시 쓰고 노래하고 연극하고 무용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의 변화와 문화의 변화

당시 문화예술 종사자들은 우리 사회의 베짱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취미로 활동하거나 고생을 무릅쓴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대학 나온 엘리트라면 좋은 직장에 입사해 산업역군으로서 경제활동을 해야 인정받았죠. 우리 같은 예술가들은 그저 베짱이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개미가 좋은 것일까요? 80년대에 일본판 ‘베짱이와 개미’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베짱이가 한겨울에 개미에게 먹을 것을 구하러 갔는데,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개미가 나오지 않았죠. 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니 개미가 죽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죽었을까요? ‘과로사’로 죽었다는 조사결과가 나왔습니다. 90년대 중반에는 소련판도 나왔습니다. 베짱이가 문을 두드리자 개미가 문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프롤레타리아 형제여, 우리 모두 함께 나눠 먹어야지”하면서 둘이 사이 좋게 나눠 먹지만 결국 식량이 모자라 이듬해 봄에 함께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러시아판은 동구권 공산주의가 몰락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뒤에는 미국판이 나옵니다. 베짱이가 문을 두드리니까 개미가 안에서 소리치죠.
“야! 내가 여름에 땀 흘려서 벌어들인 곡식을 왜 너하고 나눠 먹어야 하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네 밥벌이는 스스로가 해야 하는 것이야. 꺼져!”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결국 집에 돌아온 베짱이는 생각할수록 자기 신세가 슬펐습니다. 너무나 슬퍼서 그날로 악기를 배운 후 한탄스런 마음을 가사를 넣어 노래 한 곡을 슬프게 불렀습니다. 마침 음반 기획자가 지나가다가 너무 노래가 좋아 음반을 내주었는데요. 그게 글쎄 대박이 났습니다.

다양한 버전의 개미와 베짱이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쓴 ‘젊음의 탄생’ 첫머리에 소개되는 에피소드입니다. 하지만 위에 열거한 에피소드는 모두 20세기판입니다. 지금은 이보다 더한 21세기 ‘개미와 베짱이’로 변하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어릴 때 들었던 초창기 개미와 베짱이와 우화에 종속돼 있습니다. 이것을 빨리 바꿔야 합니다.

그러면 21세기 개미와 베짱이는 무엇일까요. 베짱이는 취미 활동으로 놀기만 하고, 개미한테 얻어먹는 존재인 줄만 알았는데, 사실은 베짱이들이 최첨단 경제활동이 가능한, 새로운 창조 능력을 발휘하는 존재로 21세기 문명을 변화시키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나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들은 엄청난 베짱이들입니다.

우리나라에 ‘문화산업’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건 90년 중반쯤입니다. 김영삼 정부 때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화 ‘쥬라기 공원’ 한편으로 1년에 벌어들인 수익이 현대자동차 1년 순수익보다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체부에 문화산업국이 신설되었습니다. 문화산업을 위해서는 문화예술인들을 지원, 육성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은 것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는 해리포터를 쓴 조앤 롤링이 1년 동안 벌어들인 순수익이 삼성전자 1년 순수익보다 많다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겁니다. 영화를 만드는 베짱이가 어떻게 우리나라 자동차 사업보다 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으며 동화를 쓴 베짱이가 어떻게 삼성전자 매출보다 많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콘텐츠산업’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문화예술가들이 만들어 내는 상품과 콘텐츠들이 어마어마한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에 정부는 지원을 대폭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콘텐츠산업은 박근혜 정부 들어 창조 문화, 창조 경제 등 창조산업을 전문적으로 육성하자는 취지로 미래창조과학부라는 부처까지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부처 장관이 국회만 가면 국회의원들한테 매일같이 두들겨 맞았습니다. 도대체 창조산업이 뭐하는 곳이며 실적이 뭐가 있냐고 따지는 것이죠. 점점 ‘창조’라는 말이 퇴색하고 망가지더니 박근혜 정부가 끝나면서 창조산업이라는 말이 싹 사라졌습니다.

호모 루덴스의 본능과 ‘노는 놈’에 대한 인식

박근혜 정부에서 창조산업을 꺼낸 배경은 아주 훌륭합니다. 이 말은 호주에서 먼저 시작했다가 영국의 토니 블레어가 수상이 되면서 가장 먼저 내건 카드가 바로 ‘창조산업 육성’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영국의 예술문화와 영상을 연결해 할리우드 못지않은 영국의 문화산업을 일으키자는 것입니다. 장관급 부처까지 신설해 집중적으로 창조산업을 육성한 결과 20년 만에 영국이 세계 문화산업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우리도 그걸 추구하려고 했지만 창조산업을 이끌었던 주인공들이 비창조적인 관료들이었습니다.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4차산업혁명시대가 도래했습니다.전 세계 산업구조가 4차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재는 ‘창의융합 인재’입니다. 문제는 이런 인재를 어떻게 길러낼 것이냐 하는 겁니다.

공자의 논어에 ‘지지자불여호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호지자불여낙지자’(好之者不如樂之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보다 못하다는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즐기는 사람인 ‘낙지자’(樂之者)를 우리말로 표현하면 ‘노는 놈’이 됩니다.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논다, 놀다, 노는 놈’ 하면 아주 부정적인 이미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유럽이나 영국 미국 등에서 영어의 ‘논다’(play)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호감을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릅니다. 아이들이 ‘엄마 놀 거야’ 하면 주로 ‘안 돼, 공부해’라는 답을 듣고 자랐습니다. 엄마의 머릿속에는 ‘논다’라는 개념은 ‘공부하다’의 반댓말일 뿐입니다. 직장에서도 ‘과장님 놀다 올게요.’ 하면 ‘안 돼. 업무가 태산인데…’라고 합니다. 과장의 머릿속에 ‘놀다’는 ‘일하다’의 반대말로 입력돼 있으니까요.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노는 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이 책은 김 박사가 독일에서 노는 것만 10년 이상 공부한 뒤 귀국해서 펴낸 책입니다. 심지어 명지대학교에서는 한국대학 역사상 전례 없는 레저 심리학 관련 전공인 ‘여가경영학과’를 개설하기도 했습니다. ‘인간은 왜 노는가’ 이런 공부를 하는 학문입니다.

또 예술하는 사람, 사회학하는 사람, 교육학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고 알아야 할 책이 있습니다.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입니다. 인간을 ‘호모 루덴스’라고 하는데 ‘인간은 노는 놈’이라는 뜻입니다. 루덴스 즉 인간은 ‘유희하는 동물’이라는 뜻으로 ‘인간은 놀이의 본능을 타고 났으며, 이 놀이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류의 문명이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의 핵심은 예술 철학 법률 문화예술뿐만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놀고자 하는 창조정신으로 발전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놀이가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방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여 이 창조정신을 다시 건강한 놀이 정신으로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서양에서는 이미 교육 또는 예술학, 사회학 분야를 막론하고 ‘인간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놀게 만들 것인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유치원 교육 프로그램까지도 이러한 이론 근거에 의해 구성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활동을 돋우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놀이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배우고 있습니다.

보헤미안 지수가 높을수록 경제 발전 도움

또 도시와 창조계급(창조도시 시대의 도시발전 전략, 리처드 플로리다)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이 책은 창조적인 교육이 경제활동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연구한 내용입니다. 저자는 미국의 대표적인 도시 30여 개를 선정하고 약 30년간의 그 도시의 경제 지표와 그 도시에서 활동하는 보헤미안들(문화예술인과 체육인 등)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보헤미안 지수를 발표했습니다.

‘보헤미안 지수’란 그 도시에 거주하는 보헤미안들의 숫자와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정도와 도시의 경제 성장과의 관계를 숫자로 표시한 것입니다. 그 지수를 조사한 결과 보헤미안들이 많이 거주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면 할수록 그 도시는 경제적으로도 성장한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용광로 지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용광로는 미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 다양한 인종들이 얼마나 잘 어우러져서 활동하고 있느냐를 수치로 나타내 그 수치가 높을수록 도시 경제 역시 발전한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도 이런 지수를 연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역사회에 이런 지수를 대입해 연구하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서울뿐만 아니라 각 시도별 문화재단들이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예술가들의 예술활동과 지역 경제 성장과의 상관관계를 연구한다면 예술가들의 활동 장려를 위한 이론적 근거가 될 것입니다. 각 지역 의회에 문화예술 예산을 증액해달라고 하면 대부분 의원들은 이런 상관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문화예술에 왜 그렇게 돈을 쏟아붓냐’ ‘예술해서 뭐가 나오냐’ 하는 핀잔을 듣는 겁니다.

어쨌든 놀이는 창조력과 소통력을 기르는 중요한 도구였기 때문에 정책상 ‘노는 놈’을 많이 길러내야 합니다. 노는 놈에는 ‘자발적 노는 놈’과 ‘비자발적 노는 놈’ 등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비자발적 노는 놈들이 많으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데 다행히 지금은 자발적으로 노는 놈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가수 오디션을 하면 전국에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몰려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연예인이나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중학생이 되어도 50%는 여전히 연예인을 꼽고, 고등학생이 되면 나름 정신을 차려서인지 한 30% 정도가 문화예술계나 엔터테인먼트, 연예계 등을 희망합니다. 10명 중 3명이 지원한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입니다.
우리 학창시절의 장래희망은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교사를 쭉 선택했고, 그중 겨우 한두 명이 미술, 음악, 영화배우 아니면 날라리로 여겼던 연예인를 골랐습니다. 지금은 특수고교가 아닌 일반 인문계 고둥학교에서도 10명 중에 3명, 한 반에 최소 15명 정도가 문화예술계를 지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선 학교에서는 이런 아이들의 진로를 제대로 가이드해 줄 만한 진로 선생님들이 없습니다. 학생이 모델이 되고 싶다고 해도 모델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법대를 지망한다면 아주 열정적으로 지도합니다. 노는 놈들은 급증하고 있는데 노는 놈을 제대로 가르치고 안내할 수 있는 컨설팅은 준비가 전혀 안 된 것이죠.

미쳐야 성공하는 낙지자불여광지자

그런데 이쯤에서 노는 놈들은 급증하는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어떤 놈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까요? 노는 놈이 많으면 노는 것만으로는 안 되겠죠. 그래서 제가 논어의 말씀에 한 가지를 덧붙였습니다. ‘지지자불여낙지자, 낙지자불여호지자낙지자’로 끝나는데 나는 여기에 ‘낙지자불여광지자’를 만들었습니다. 즐기는 사람은 미친 사람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놀아도 미친 듯이 노는 놈이 돼야 합니다. 미치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이 있듯이 미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
정약용 선생의 말씀 중에 과골삼천(踝骨三穿)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골은 복사뼈를 뜻합니다. 오랫동안 책 읽고 글을 쓰다 보니 복사뼈가 짓무르고 염증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정약용 선생은 그만큼 학문에 미친 분입니다. 미치지 않고서 어떻게 그런 위대한 업적을 쌓겠습니까? 어느 분야든 미친 듯이 몰두해야 개인의 성공은 물론 나라에도 큰 보탬이 됩니다.
이 드라마에 미쳤기에 한류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고 케이팝이 생긴 것입니다. 배우들이나 가수만 미쳤겠습니까? 그 뒤에서 일하는 프로듀서, 연출, 시나리오 작가에서부터 조명, 촬영 등 온갖 스텝진들도 다들 미친 사람들입니다.

노래에 미친 세계적인 아이콘으로는 BTS, 블랙핑크가 있습니다. 재미교포 청년이 만든 영화 ‘미나리’가 느닷없이 영화 아카데미상 받기도 했습니다. 재미교포 청년이 한국인의 스토리에 완전히 미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각 분야마다 젊은 세대들의 재능과 문화적 역량, 예술적 역량은 기성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성장해 있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우리 때와는 달리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 자리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때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 분야에 관심이 없어 경쟁도 심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배우가 된 것도 어쩌면 경쟁이 없었던 탓도 있습니다. 그냥 하다 보니까 배우가 된 것입니다. 지금은 한예종 연극과나 중앙대 연극과는 서울 법대 수준에 뒤지지 않습니다. 이론과 실기면에서 엄청난 탤런트를 가진 애들이 몰려옵니다.

급변하는 세상 속, 문화예술계 역할 역시 바뀌어야

지금 우리가 주시해야 할 세계적인 현상 중 하나는 메타버스입니다. 메타버스는 가상의 현실과 현존하는 현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하나의 예로 어린아이들이 좋아하는 ‘로블록스’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의 게임 플랫폼인데 이것으로 이 회사는 한마디로 대박을 맞았습니다. 국경을 초월해 전세계 아이들 수억 명이 이 플랫폼에 매일같이 5천 개 이상의 게임을 만들어 올립니다. 그중 인기 있는 게임은 개발자에게 수익금을 주는데 3년여 전 미국의 16세 소년이 만든 게임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수익을 창출했습니다. 일약 백만장자가 된 이 소년을 하버드대는 공학과에 특채로 선발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대부분 15세 이하의 수억 명의 어린이들이 제페토 등 가상 세계가 들어가 창조적인 아이디어 게임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비단 어린이뿐만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순천향대학교는 메타버스로 아바타를 각각 만들어 신입생 환영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캠퍼스와 강의실도 모두 가상으로 만들어 신입생들이 자신의 강의실로 들어가 교수와 인사하고 총장도 가상세계로 들어가 학생들에게 입학 축하 인사를 전했습니다. 심지어 대학 축제도 가상세계로 펼쳤습니다. 이 모든 가상활동이 가능한 것은 기술도 기술이지만 바로 문화예술이 가상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이버 가수 아담

사이버 가수 ‘아담’은 90년대 초에 등장했습니다. 발라드를 곧잘 부르던 아담이 어찌 된 일인지 곧 사라졌습니다. 미남인데다 노래도 잘 부르던 그에게 소녀들은 발라드만 노래하지 말고 댄스곡이나 록도 노래해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첫 곡으로 록을 발표했지만 곧 실망스런 수준으로 드러나면서 회사가 망해버렸습니다. 그때까지는 그만한 기술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지금은 이세돌 즉 2세대 아이돌이 탄생해서 젊은이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이세돌의 존재는 머지않아 개봉할 영화 ‘동편제’를 작업하면서 만난 젊은이들 때문에 알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들이 가상 가수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동편제 영화 투자자들과 대화 중에 2세대 아이돌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2세대 아이돌이라고 답하자 깜짝 놀라워했습니다. 어떻게 선생님처럼 나이 드신 분이 이세돌을 아느냐는 겁니다. 이세돌하면 대부분 바둑 기사만 알고 있는데 요새는 자기들은 이세돌을 ‘바둑기사’로 아는 세대와 ‘2세대 아이돌’로 하는 세대로 구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요즘은 모델, 가수 앵커 등을 망라해서 AI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제작자에게도 경비 절감차원에서도 환영받고 있습니다. 기술력이 뒷받침해주면서 cf모델은 실제 모델 비용보다 10분 1로 줄었습니다. 실제 인물과 거의 비슷한 정도에 이르렀는데 실제 배우들이 위협받고 있는 수준입니다. ‘도아’라는 AI배우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짤막한 실험 영화도 있는데 연기력이 뛰어납니다.

챗gpt도 놀라운 기술이지만 아직은 초보 수준입니다. 제가 동편제를 제작하기 위해 ‘한국의 판소리’에 대해 질문을 던졌더니 엉뚱하게 답변했습니다. ‘서편제’와 ‘동편제’라는 판소리의 맥이 있는데 그것도 모를 뿐더러 서편제를 감독한 ‘임권택 감독’에 대해 질문해도 역시 엉뚱한 답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건 챗gpt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예술계, 특히 전통 관련 문화예술계에서 챗gpt에 우리 문화정보를 속히 입력해야 합니다. 이건 정부가 막강한 자금을 투입해야 가능한 일인데 지금 손 놓고 있으면 우리 후손들도 우리 전통문화를 모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 세대 이후에는 챗gpt에 의존해서 공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 문화예술계 해야 할 역할 역시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제언

오늘 경기예술나무포럼에서 꼭 하고 싶은 제언이 있습니다. 이는 비단 경기도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전반적인 문화예술계를 훑어보고 탐색하면서 느낀 내용으로 개선하면 좋겠습니다.

첫째, 우리 문화예술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진보와 보수의 갈등입니다.

이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탄생한 것이고 남북한의 역사적인 분단 비극과 함께 악화된 것입니다. 다른 분야도 갈등의 상처로 괴롭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문화예술계도 그 갈등의 뿌리가 매우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런 빈목과 질시를 치유하고 갈등을 긍정적이고 창조적, 예술적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핵심 과제라고 봅니다.

둘째, 장르의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저는 연극을 하다가 영화배우와 연출, 판소리, 작가, 성악 등을 두루두루 공부하고 활동했습니다. 저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를요. 우리 머릿속에는 배우는 배우만 하고 연극은 연극, 연출은 연출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당사자들도 그럽니다. 왜 자꾸 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넘나드냐는 것입니다.

평생 살아오면서 그것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대놓고 얘기는 하지 않지만 내가 다른 영역으로 진출하면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벽을 느낍니다. 다 늙어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때 성악가들도 ‘아니 서편제(판소리)가 왜?’ 하는 눈치였습니다. 이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국악은 성악과 만날 일이 없는 장르라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이지요. 성악계는 그 장벽이 실로 어마어마했습니다. 작고하신 박인수 선생이 1989년 당시 국립오페라 주역가수였고 차기 단장감이었는데도, 단지 가수 이동원과 정지용 시에 김희갑이 작곡한 ‘향수’를 같이 노래했다고 해고당했습니다. 대중가요를 노래로 안 보는데 박인수 교수가 그 노래를 부르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팬텀싱어를 보세요. 다들 독일 유학파들이고 오페라단에서 활동했던 청년들입니다. 그 친구들이 대중가요를 하고 뮤지컬을 하잖아요. 게다가 판소리 하는 친구와 콜라보도 하고요. 난리가 났습니다. 지금은 장르의 벽이 마구 무너져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장르의 벽에 갇힌 올드한 옛날 예술가들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테너 박인수

공연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도서관 음악회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술관, 박물관 할 것 없이 다양한 장소에서 춤추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노래하고 춤추면 안돼! 박물관에서 춤추면 안돼! 하고 금지했던 영역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남양주에 있는 ‘이석영뉴미디어도서관’은 그런 시대 변화를 반영한 도서관입니다. 이 도서관의 모토는 어린이들이 즐겁게 와서 책과 놀 수 있는 공간을 추구합니다. 아이들이 도서관의 동그란 의자에 누워서 책을 볼 수 있도록 하고 음악회 등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행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을 지을 때부터 그런 개념으로 설계했다고 합니다.

도서관의 개념이 장르를 초월해 과거의 틀을 깨고 있습니다. 도서관하면 소리 없이 침묵해야 하는 고리타분한 이미지가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은 이러면 숨 막혀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박물관도 마찬가지예요. 전통적인 박물관은 전시만 해놓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데다 설명문도 어려워 대체 무슨 말인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죽은 유물의 박물관이 아니라 살아있는 박물관, 즐거운 박물관, 놀 수 있는 박물관을 조성해야 애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박물관을 찾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문화예술의 기존 개념이 완전히 끊어지고 망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문화예술인들도 마인드를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치, 알을 깨려는 창조적인 예술 인정해야 성장

셋째 예술과 정치의 관계 설정을 잘해야 합니다.

제가 국립극장장으로 재임했을 때 트레버 넌이라는 영국의 로열셰익스피어극단의 연출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분도 당시 40대로서 영국의 국립극장장이 되었는데 영국은 신사의 나라인 만큼 극장 역시 정장 차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트레버 넌은 장발에 청바지를 입고 근무했습니다. 이건 개혁의 상징입니다. 극장이란 올드한 노인들만 오는 장소로 만들면 안 된다, 젊은 청년들이 많이 오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게 취지였습니다. 연출가들도 신선한 청년들로 배치해서 굉장히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친구가 극장장을 그만둔 뒤 한 인터뷰에서 ‘예술가가 경영을 해보니 어땠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트레버는 ‘예술하고 경영은 양립할 수 없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절벽 사이의 줄과 같다’고 했습니다. 극장장이란 이 거대한 절벽 양쪽에 매달려 있는 줄을 걷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떨어져 죽게 됩니다. 그만큼 균형 잡기가 힘들고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예술과 정치도 외줄 타기만큼 어려운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정치가와 예술가가 양립하기 힘듭니다. 김대중정치학교에서 김대중 정권의 문화 정책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첫머리로 ‘정치가는 예술가를 싫어하고 예술가는 정치가를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가는 권력을 유지하고 통지하려는 속성이 있는 반면 예술가는 기존의 체제를 파괴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새가 알을 까고 나오는 일입니다. 알을 깨뜨려야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듯 예술가의 창조는 기존의 껍질, 즉 기존의 관습, 관행, 사회적 가치관, 편견 등 이런 모든 것을 깨야하기 때문에 어쨌든 정치 권력과 양립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권력에 순종하고, 권력에 길들여진 예술은 이미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권력의 홍보 매체일 뿐이다.

하지만 뛰어난 정치인 중에는 이런 파괴적인 예술가를 인정하고 대우하고 키운 예술 정치가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서양에서는 문화가 발전하고 르네상스가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발전하려면 정치가가 절대 권력으로 예술가를 제압하거나, 문화예술인들을 길들이는 하나의 방편으로 ‘문화예술 지원’을 사용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렇기에 김대중 정부가 문화 정책의 핵심 근간으로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운 것입니다. 지원해놓고 간섭하는 게 자유롭다면 권력자는 예쁜 놈에게 떡을 더 주고 미운 놈은 떡을 아예 주지 않기도 하고 아예 블랙리스트 같은 걸 만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디지로그 시대의 문화예술인들의 역할

넷째 가장 심각한 것으로 세대 간 문화 갈등을 해소해야 합니다.

지금 엄청난 초고령 사회로 변하면서 고령화 세대와 어린 세대 간의 문화 갈등과 격차,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종교계의 원로들 이상으로 문화예술계에서도 예술계의 권력을 쥐고 있습니다. 우리만해도 아날로그 세대이죠. 그러나 이제는 예술계의 새로운 권력은 디지털 세대로부터 나올 것입니다. 이럴 경우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서로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이어령 선생은 옛날부터 아주 탁월한 혜안으로 ‘디지로그’라는 용어를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여전히 아날로그 세대는 디지털 세대를 모르고 디지털 세대 또한 아날로그를 진정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동편제를 작업에 참여한 20대 디지털 세대 청년들과 깜짝 놀랄 만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AI 가설을 만들어 낸 경험이 있는 전문가들인데 200년 전 동편제 시나리오를 읽고 너무 재밌다면 본인들이 먼저 제안을 한 게 있습니다. 판소리를 공부해서 디지털콘텐츠로 만들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상하잖아요? 힙합이나 bts 같은 연예인들을 추구하는 게 상식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bts를 따라가는 것보다 판소리를 디지털콘텐츠로 만드는 일이 오히려 음악계의 새로운 도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디지로그란 이런 것 아닐까요?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는 서로 만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낼 가능성은 무궁무진합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만나 정말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문화갈등의 극복 가능성은 높습니다. 어떻게 실천하는가는 바로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네 가지 사항을 문화 정책 입안과 결정에 참고한다면 훨씬 대중에게 다가가는 문화예술이 되리라 믿습니다.

정리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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