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벽의 묵상, 기도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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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겠습니다.’
편지를 쓴 후 귀결 문장에 흔히 ‘빌게, 바랄 게’라는 정겨운 문장으로 끝을 맺곤 한다. 또는 축사를 쓰거나 격려사 등을 작성할 때에도 ‘기원한다’거나 ‘기도드리겠다’는 말로 여운을 남긴다. 의당 꼭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돌이켜보면 이런 맺음의 글들은 형식적인 인사말에 불과하다. 기원한다지만 기원에 버금가는 구체적인 행동을 실천하는 분들은 많지 않다. 진심으로 기원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나, 당신을 위해 기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추운 날이다. 너무 일찍 일어나는 바람에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란다 문을 살며시 열었다. 하늘이 수십 년간 저온 냉동시킨 후 한꺼번에 쏟아 놓은 듯한 차가운 공기에 안면이 굳어버릴 것 같았다. 산을 태울 듯 붉은 혀를 내밀며 일시에 천하를 비추는 처녀 햇살처럼, ‘아! 기도하고 싶다’는 붉은 생각이 쓰윽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은 캄캄한 밤, 전등 대신 촛불 두 개를 켰다. 줄이 촘촘히 그려진 하얀 노트도 펼쳤다. 믿음이 좋다는 분들이야 늘 하는 기도겠지만, 어쩌다 하려니 스스로도 장중한 느낌이 든다. 몇 년 전만해도 아침 기도를 꽤 자주했지만 부끄럽게도 세상사에 바쁘다는 핑계 아래 습관처럼 제쳐놓곤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얀 종이의 눈밭에 꿩 발자국처럼 기도문을 적어 갔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랑이 밀려왔다. 생각만으로 그친 게 아니라 기도하고픈 분들의 이름을 한 분씩 열거하며 기도 내용을 문자화하자 진정 그 분들을 손으로 만지는 느낌이랄까? 기원한다는 말은 립서비스로 끝날 게 아니라 기도라도 해야겠구나, 기도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사람마다 믿는 신들은 다를지언정 어떤 종교라도 ‘기도’는 존재한다. 신을 믿지 않는 분들도 화급한 일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기도라는 행위를 하지 않을까?
기도(祈禱)의 ‘기’(祈)는 신을 의미하는 ‘시’(示)와 도끼를 의미하는 ‘근’(斤)의 합성어로 인간이 살아가매 꼭 필요한 도구와 재료, 즉 물질을 풍성하게 채워달라는 뜻이겠고 ‘도’(禱)는 ‘시’(示)와 목숨 ‘수’(壽)의 합자어로 병들지 않고 오래 살도록 해달라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결국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에게 물질과 생명을 비는 행위가 바로 기도다.
두 개의 촛불이 타들어가는 동안 하얀 종이에 새겨지는 이름도 막힘없이 늘어갔다.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친척, 처갓집, 직원들, 거래처… 이름마다 사랑의 열정도 뜨겁게 타들어갔다. 도대체 우리에게 기도란 무엇일까?

첫째, 기도는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까지를 포함한다. 사랑한다는 생각만으로 끝나면 미완성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현시적(現示的)으로 실천하는 행위가 따를 때 비로소 사랑의 표현은 완성된다. 눈앞에 당장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를 위해 두 손을 모으는 구체적 행동 밖에는 없다. 멀리 캐나다에 있는 동료를 위해, 파주에 사는 직원을 위해, 애증의 시소를 왕래하는 인쇄소 대표를 위해 내 작은 몸뚱이가 할 수 있는 사랑의 최대치란 오직 기도뿐이다.
기도란 ‘나와 타인을 위한’ 일방통행의 독백에서 그치지 않는다. 무소부재의 하나님께 ‘내 사랑을 기꺼이 전해달라’는 도발적인 의탁이다. 신은 이역만리 떨어진 사람에게라도 그 사랑을 기어이 전해주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니까.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같은 발견은 어찌 보면 하찮은, 그러나 위대한 발견이다.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에는 서커스 소녀 ‘미뇽’이 노래한 한편의 시가 있다. 차이코프스키는 그 시를 읽고 감동에 겨워 ‘다만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라는 가곡으로 승화했다. 그 시의 주인공 ‘미뇽’이 상대방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한 것처럼, 진정 사랑을 아는 자라면 두 손을 절로 붙잡고 기도로 표현하는 법이다.

둘째, 기도는 실체적인 만남

기도는 누군가를 목 놓아 부르든, 나직이 입술 사이에 머금든 그 이름을 발설하는 순간, 그 사람과의 만남이 ‘벼락처럼’ 이뤄진다. 고통에 당할 때 ‘하나님’이라 부르는 순간, 탄식의 타악기가 슬픈 선율로 바뀌면서 하소연의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만남은 존재와 존재의 교감(交感)없이 이뤄질 수 없는 법이다. ‘작가와 고양이’(윤이형 외)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온다. ‘존재의 교감이란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모여 강물을 이루는 이슬비가 아니라 어느 찰나의 순간에 허옇게 의식에 새겨지는 벼락!’ 이처럼 기도는 벼락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피조물에게 공동체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전 4장 9~10) 기도는 곁에서 항상 함께 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최고의 영적 공간이다.

셋째, 기도는 영혼을 샤워하는 기회

기도를 하면서 그 형제자매를 진정 미워할 수 있을까? 정결하고 무오(無誤)한 신과 죄투성이 인간이 서로 만나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조건은 기도하는 순간만이라도 신을 닮으려는 자세가 아닐까 싶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같이’(이사야 66장 20) 성경에 기록된 바 예물을 바치는 자가 먼저 깨끗한 그릇으로 만들 때에야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수 있다고 했다고 하지 않는가.
간혹 허물없이 지낸다 해서, 또는 본인은 뒤끝이 없다면서 사정없이 영혼에 고춧가루를 뿌리는 사람들을 만난다. ‘당신 그런 식으로 사업하면 망해’ 하며 조악한 악담으로 칼을 꽂고 피를 뿌리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어찌 미워하는 마음을 갖고 기도에 임하겠는가. 그저 ‘용서하시옵소서, 다 제 부덕 탓입니다’ 하고 회개와 용서의 마음이 몽둥이로 얻어터진 후 멍자욱이 물드는 것처럼 절로 나온다.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사하여 주시리라’(마11장 25)

해원상생과 희망을 기원하는 기도를

지난 11월 17일 오후 7시반 세종체임버홀에서 본사 ‘리음아트&컴퍼니’가 주관하고, 글로벌오페라단(단장 김수정)이 주최한 콘서트 ‘기도’가 무사히 끝났다.
올해 77세의 테너 임정근 선생님의 말마따나 ‘노래가 얼마나 힘든지 아는 자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걸음걸음이 은혜임을 알게 해준 음악회였다. 메조소프라노 김수정을 비롯, 테너 이동명, 바리톤 김인휘와 유재언, 소프라노 이한나와 한세미 등이 피아니스트 정미애와 오정은, 그리고 신디연주자 유혜영의 반주 아래 감동의 무대를 꾸몄다. 한국입양아어린이합창단이 함께 한 ‘넬라 판타지아’(Nella fantasia)와 ‘파니스 앤젤리쿠스’(Panis angelicus)와 ‘은혜’를 들으면서 예전에 쓴 글로 기도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이제 2024년을 앞두고 있다. 2023년에 묶여둔 미움들이 있거들랑 해원상생(解冤相生)의 마음으로 기도하고, 또한 더 아름다운 2024년을 위해 기도해봄은 어떤지…

글 발행인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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