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와 저항적 기쁨 이어진 한 편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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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40회 대한민국국제음악제
12월 2일 (토)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1919년 저 멀리 유럽에서는 헝가리혁명과 리투아니아 독립전쟁, 에스토니아 독립전쟁, 튀르키예 독립전쟁 등 격동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3.1운동과 제암리학살사건 등 새로운 민중의 저항적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곧 저항과 순종의 반복이라지만 1919년은 그중 기억할만한 변화적 사건들이 그만큼 많다. 그리고 음악적으로 1919년은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가 엘가의 첼로협주곡을 세상에 처음 선보인 날이다.
오늘 제40회 대한민국국제음악회에서 타이페이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문태국의 협연으로 펼쳐진 엘가의 첼로협주곡 85번은 예술의전당의 커다란 공간을 장중과 엄숙, 변화와 저항적 기쁨으로 이어진 한편의 드라마로 이끌었다.
엘가야 국왕의 은덕으로 작위까지 받았던 귀족이기에 역사의식이나 시대정신에 편승한 음악가는 아니겠지만 변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1919년 세상은 그만큼 20세기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을 재촉했던 것이리라.

혁명적 사운드로 신세계 자극한 첼리스트 문태국

타이페이필은 1악장에서 문태국을 장엄한 선율로 내몰더니 노도와 같은 힘으로 거센 파도의 음들을 끌어올렸다. 이어 혁명적 사운드로, 목적적(的) 신세계를 만끽하듯 2악장에서는 경쾌한 보잉을 자극하며 슬픔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만끽하게 했다. 이제 변화된 세상이 찾아왔지만 시절 인연은 일장춘몽처럼 짧기만하다. 아다지오의 3악장에 이어 같은 주제에 격정의 색을 입힌 4악장으로 미완의 혁명은 끝이 났다.
성큼 성큼 그러나 첼로를 들고 조신하게 입장하는 문태국이다. 미세한 떨림까지 정확히 계산된 음인 듯 긴 호흡을 연주하는 품새가 감동을 최대치로 끌어올렸고 지휘자 폴티엔치린과는 마치 오래전부터 깔맞춤인 듯 호흡이 초미세 기어처럼 잘 맞췄다.
서순정 작곡의 ‘단수이 강을 따라서’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가보지 않은 타이페이의 단수이 강의 모습이 그려졌다. 저기 고기 잡는 어부들을 보라는 범중엄의 시만 보아도 농어 먹는 양반네들과 어부들이 떠오르듯, 낭만주의 교향시의 터치로 그려진 배들의 순례가 보이고 유장하게 흐르는 물결이 떠올랐다.
가장 감동적인 작품은 역시 흔한 곡이지만 그 어느 음악회보다 감동적인 화음과 선율을 보여준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 마치 코다이의 손기호와 발레리노의 율동처럼 큰 폭으로 지휘를 하면서도 손 끝에 정확한 비트를 놓치지 않은 지휘자 폴리엔치린의 멋진 포즈 때문에 더욱 볼거리가 풍성했던 신세계로부터였다.

악장 간 박수는 몰입을 방해하는 적

하지만 타이페이필하모닉오케스트라 연주자들에게는 조금 부끄러운 공연이었다. 연주력이 아니라 관객의 태도였다. 관객의 태도를 두고 언급하는 것은 감상평과는 무관하다지만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다. 악장마다 단 한 번도 빠짐없이 박수를 치는 이 ‘일반적인’ 행태에 대해 극장 측이든 주최 측이든 뭔가 조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며칠 전 뉴서울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서는 너무 미리부터 박수를 삼가달라는 방송을 하자 서곡이 끝났을 때에도 박수를 치지 않는 부작용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나라 교향악단이 연주할 때는 악장마다 박수치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외국 오케스트라를 초청했을 때는 박수금지를 적절한 시간에 알려줘야 한다.
박수치는 게 연주하는데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일단 몰입하기 시작한 음악가에게 아직 끝나지 않은 드라마 중에 박수치는 것은 서울의 봄에서 황정민이 연기에 몰입할 때 옆에서 박수치는 일이다. 그것도 아니면 아바타에서 해병대원 제이크가 아바타의 세계에서 한창 싸우고 있을 때 캡슐의 뚜껑을 벗겨버리는 일이다. 춘천문화예술회관처럼 각 악장이 끝날 즈음에 ‘박수를 아껴주세요’하는 전광판이라도 띄우면 어떨까. 쓸데없는 소리 같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는 한, 바뀌지 않을 일이다.

글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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