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유일한 단행본 시집 ‘서동시집’ – 4. ‘가인의 서’ 중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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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나보실 ‘서동 시집’(West-Oesterlicher Divan)은 1814년,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가 남긴 단 한 권의 단행본 시집인 동시에,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노시인의 통찰과 잠언의 결집이라 할 수 있는 역작이죠. 그 네 번째로 다뤄볼 시는 13개의 ‘서’(書) 중 첫 번째 서인 ‘가수/가인(歌人)의 서’에 수록된 ‘현상’(Phänomen)입니다.

서동시집

‘서동 시집’의 첫 번째 ‘서’이자 17개의 시로 구성된 ‘가인의 서’의 아홉 번째 시인 ‘현상’은 ‘기적’이라 번역하는 역자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괴테가 무지개가 피어나는 현상을 직접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이 시는 직역 그대로 ‘현상’이라고 제목을 붙이는 것이 맞습니다. 이 시는 여러 해 동안 해외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노년의 대문호가 고향으로 돌아오며 두근거리는 마음이 담겨있는 아름다운 시입니다.

현상 (Phaenomen)

Wenn zu der Regenwand
Phoebus sich gattet,
Gleich steht ein Bogenrand
Frabig beschattet.

Im Nebel gleichen Kreis
Seh ich gezogen;
Zwar ist der Bogen Weiss,
Doch Himmelsbogen.

So sollst du, muntrer Greis,
Dich nicht betrueben:
Sind gleich die Haare Weiss,
Doch wirst du lieben.

만약 빗줄기
아폴로 신이 짝을 맺으면,
금방 둥그런 띠가
색색으로 물든다.

이러한 둥근 띠의 안개 속에서
떠오르는 모습이 보이네;
그 띠, 뿌옇게 보여도
그래도 하늘의 아치이다.

그러니, 너 즐거운 노인아,
침울해하지 말아라.
머리가 하얗게 세도
그래도 너는 사랑하게 되리라.

이 시는 괴테가 뉴턴이 정의한 ‘빨주노초파남보’의 선명한 무지개를 보고 쓴 것이 아닌, ‘암무지개’라고도 표현하는 색이 뚜렷하지 않은 무지개의 형상을 보고 나이가 들어가지만 저물지 않는 심장의 두근거림을 이 무지개에 대입시켜 쓴 것으로 추정되는 시입니다. 이 시 역시 여러 작곡가가 자신의 가곡의 가사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 대표적인 작곡가가 바로 브람스와 후고 볼프입니다.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지휘자로 낭만주의 시대의 위대한 음악가로 칭송받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가 1852년부터 1874년까지 작곡한 소프라노와 알토를 위한 ‘4개의 듀엣 작품번호 61번’(4 Duets for Soprano, Alto and Piano, Op.61)은 독일의 시인 ‘뫼리케’(Eduard Moerike)를 비롯하여 ‘유스티누스 케르너’ (Justinus Kerner, 1786-1862), ‘요제프 벤치히’(Josef Wenzig, 1807-1876)의 시를 가사로 한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괴테의 ‘현상’은 세 번째 노래로 수록되어 있으며 여성 이중창이 표현할 수 있는 독일 예술 가곡, 즉 ‘리트’(Lied)의 브람스적인 낭만적임을 극대화시킨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오페라나 일반적인 듀엣의 주고받고의 형태가 아닌 이 곡은 주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화음의 진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오랜 시간 이어오던 민요가 가곡의 이상향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브람스의 생각이 드러나는 형식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노래는 차분하고 담백하게 다가옵니다.

오스트리아의 후기 낭만 작곡가인 ‘후고 볼프’(Hugo Wolf, 1860-1903)의 가곡 ‘현상’ 역시 굉장히 정적이면서도 단순한 구성으로 되어 있으나, 음의 진행으로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내는 짧지만 매우 인상적인 가곡입니다.
1875년 경에 작곡되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후고 볼프의 ‘괴테 가곡집’(Goethe-Lieder)은 1889년 초판이 발행된 가곡집으로, 괴테의 시를 가사로 한 51개의 가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서동시집’에 수록된 ‘현상’을 가사로 한 가곡 ‘현상’은 32번째 수록된 작품으로 시가 표현하고자 한 의미나 시구의 특성을 잘 이해하여 음악에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던 후고 볼프의 가곡을 작곡할 때의 사상이 잘 표현된 곡입니다. 괴테의 마음이 세심하면서도 부드럽게 표현된 이 가곡은 브람스와는 같은 가사를 쓰고 있음에도 다른 분위기와 강약을 가지고 있는 매우 흥미로운 작품입니다.
노년의 시인의 마음을 담백하면서도 다르게 해석한 두 작곡가의 비슷한 시기의 같은 제목의 가곡을 비교하면서 들어보면 시가 더욱 가슴 깊이 들어올 것입니다.

글 박소현

– 브람스 ‘현상’ : https://youtu.be/V4BwCBLobFs?si=cEnlsrNY5hlATYr4
– 후고 볼프 ‘현상’ : https://youtu.be/jOEyXOvpjv8?si=Tf5p0gjB9il1th5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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