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뺑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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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의 전국 공연예술 창·제작·유통지원 공모 사업 발표를 보고 느닷없이 ‘뺑뺑이’가 그리웠다. 중학교 시절의 뺑뺑이, 고등학교 시절의 뺑뺑이… 그 뺑뺑이를 두고 ‘내가 왜 이 학교에 배정되었냐’며 웃통 벗고 항의하는 사람은 없었다. 공연예술계의 공모사업에 차라리 그런 뺑뺑이가 더 나은 심사방법이 아닐까?
명심보감에는 ‘계획이 치밀하지 않으면 뒤탈이 먼저 발생한다’(機不密 禍先發 기불밀 화선발)는 말이 있다. 지난달 27일 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발표한 ‘2024 지역맞춤형 중소규모 콘텐츠 유통공모’의 발표 내용을 보고 뇌리를 스친 구절이다. 이 유통 공모는 지난해까지 한문연이 시행하던 ‘방방곡곡 문화공감 공연지원사업’이 예술경영지원센터으로 이관되면서 새롭게 시작하는 사업이다.
김승국 전 노원문화재단 이사장은 서울문화투데이 기고문에서 이 공모사업의 핵심으로 ‘신청 주체가 민간 공연 예술단체였던 것이 민간 공연예술단체와 문예회관으로 바뀌었다는 점과 민간 공연예술단체가 공모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문예회관 협약서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꼽았다. 하나 덧붙이자면 이전에는 공연의 퀄리티가 높을 경우 여러 군데 문예회관 공연이 가능해 수억에 달하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신청 주체 당 지원금 총액이 1억 원을 초과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김승국 전 이사장은 ‘2024 지역맞춤형 중소규모 콘텐츠 유통 공모’에 응모하기 위해서는 문예회관으로부터 협약서를 받아내야만 응모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 문제점을 지적했다. 연중 문예회관 종사자들을 찾아다니면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공연예술단체 관계자들은 유리할지 모르지만, 대부분 기획자들은 전국을 누비며 문예회관 관계자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 게 솔직한 상황이다.
실제 리음아트앤컴퍼니도 2021년과 22년, 해비치 행사 등지에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숱한 노력을 해왔지만 어쩌다 한두 번 만난 인연으로 공연을 적극 검토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러니 아예 지방 문예회관과 인맥을 형성하지 못하는 여타 공연예술단체가 지역문예회관과 협약서를 받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김승국 전 이사장은 바로 이점을 걱정하고 있다. ‘인간관계를 갖고 있지 못한 대부분의 민간 공연예술단체들은 공연 제안서를 들고 협약서를 받아내기 위해서 전국의 문예회관 공연 담당자들을 만나기 위해 헤매 다녀야 할 것 같은데, 생면부지의 공연 담당자들이 선뜻 만나줄지 의문이라 막막한 심정’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올해부터 새롭게 출발하는 ‘지역맞춤형 중소규모 콘텐츠 유통 공모사업도, 그동안 예경에서 시행해왔던 공연예술 유통 공모도 평소 지역 문예회관과 네트워크가 좋은, 다시 말해 소위 지인찬스를 잘 쓰는 공연예술단체에만 유리한 공모사업’일 뿐이라는 볼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는 점도 언급했다.
그러기에 27일 설명회에 참가한 어느 공연예술단체 관계자가 “지역 문예회관에 협약서를 받으러 간다고 해서 누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제안서를 읽어보기라도 하겠느냐, 만나자고 전화라도 하면 모두 피하기만 할 뿐”이라고 항의했을 때 예경 관계자는 아무런 답을 내놓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협약서를 작성했다고 다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결국 심사위원들이 최종 결정한다. 그렇다면 그 심사위원들의 결정은 공정하고 정확할까? 그렇지 않다는 데 한 표를 던진다. 심사위원이 5명이든 10명이든 결국 본인들이 아는 단체, 보기 좋은 단체를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행동경제학자 댄 애리얼리(Dan Ariely)의 ‘인간은 결코 객관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미끼효과’처럼 그저 두뇌를 자극하는 문구와 출연진, 금액 등만을 고려해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신청한 작품 하나하나마다 그토록 오랫동안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공모에서 선정되기란 정말 어려운 문제다. 그러기에 공모에 지원할 때면 누군가 이런 제안을 하기도 한다. ‘브로커를 활용해. 브로커!’ 그게 가당키나 할까? 인맥도 없는 사람들이 질 좋은 콘텐츠를 준비한다 해도 도대체 선택될 가능성이 희박한 시스템이 바로 대한민국 공모지원사업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심사제도의 허점은 이런 굵직한 공모사업에만 발견되는 게 아니다. 예술의전당 대관 심사제도도 개혁의 대상이다. 누가 심사위원인지도 모르는데 들리는 얘기로는 대관을 신청한 당사자에게 심사위원이 ‘당신 대관신청서를 봤다’는 내용의 전화를 해주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비밀누설에 재미를 부친 심사위원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 전화 내용으로 보아 ‘아는 사람’에게 더 유리한 심사평가 가능성이 있음을 눈치챌 수 있다. 인간이 결정하는 심사제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공정한 평가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 아마 예경에서도 특정 공연예술단체가 독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 통합 1억 원 이하로 제한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전당의 경우 그마저도 제한이 없다. 특정 업체가 예술의전당을 통째로 전세 내듯 공연을 치르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기에 한때는 공연기획사에도 매월 제한을 두자거나, 하루 두 건 이상의 공연을 개최할 수 없도록 하자는 등의 제안을 했었지만, 공염불에 불과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지만 몇몇 공연예술단체 대표들과 고육지책으로 이런 방법도 아이디어를 짜보았다. 차라리 1차 서류 심사에서 ‘이 정도면 공연을 올릴 만하다’ 싶은 작품을 선정한 후, 공개적으로 뺑뺑이를 돌려 배정하면 어떨까? 그게 공정할지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1차 서류를 통과한 공연신청자들의 모든 자료를 AI에 입력해 복잡계의 수학적 공식을 통해 결정하는 방법도 고려해 봄직하다. 모든 공모사업의 심사제도를 아예 없애고 처음부터 다시 구조를 짜는 혁명이 있으면 좋겠다.

글 발행인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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