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 '긍정의 힘'을 믿으라> 송승환 PMC프로덕션 예술총감독의 경기예술나무포럼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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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배우와 하이틴스타로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탤런트 송승환. 연기자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면서도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를 창작한 천부적 기획자, 또 평창동계올림픽 총감독으로 늘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 엔터테이너 송승환 총감독은 현재 피엠씨프로덕션 예술총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미 많은 언론에서 알려졌듯 황반변성 및 변형된 망막색소변성증을 앓고 있는 시각장애인이기도 하다. 어릴 때부터 극도의 가난 속에서 부모님의 빚을 갚아야 하는 등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온 인생의 승리자이기도 하다. 그가 걸어온 길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끝내 붙잡고 함께해온 동행자는 ‘긍정의 힘’이다.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결코 없다는…
지난 12월 4일 7시 경기아트센터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경기예술나무포럼에서 송승환 총감독은 그가 살아온 모든 길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난타를 성공하기까지, ‘행동하는 평화’를 기치로 삼고 악조건 속에서도 세계적 행사인 동계올림픽의 개폐회식을 환상적으로 성공시키기까지의 길고 긴 뒷이야기를 털어놓았다. (편집자 주)

수동적인 직업에서 능동적인 제작으로

송승환입니다. 지금까지 해왔던 콘텐츠 중 가장 성공한 공연은 난타입니다. 제가 배우였다는 건 잘 아실 거예요. 1965년 KBS 방송프로 중 ‘은방울과 차돌이’에서 차돌이 역할로 데뷔했는데 그 당시 아역배우라는 게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국어책도 또박또박 잘 읽는다면서 선생님이 어린이 동화 구연대회에 내보냈습니다. 거기서 운 좋게 1등을 차지하고 KBS 어린이 시간에 출연까지 했습니다. 담당 PD가 “다음 주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은방울과 차돌이라는 드라마의 ‘차돌이’ 역할을 한번 해볼래?” 하는 거예요. 연기 생활이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후 죽 성장하면서 중고등학교 때는 중고등학생 역할, 대학 시절에는 대학생 역할을 맡았습니다.

너무 어려서부터 활동해서인지 20대 즈음이 되자 배우라는 직업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 좋은데 ‘수동적인’ 직업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선택받아야 하거든요. 감독이나 제작자, 작가가 나를 캐스팅해야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구조가 좀 답답했습니다. 로미오로 캐스팅되는 것도 좋지만, 제 시각으로 새롭게 로미오와 줄리엣을 만들어보고 싶은 거죠. 또 모두가 ‘흥부전’을 한다면 나는 ‘놀부전’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작에 따르는 어려움들

첫 제작은 22살 때 1977년 신촌에 있던 76 소극장에서 제작한 루브라 뮤지컬입니다. 무슨 돈이 있나 싶죠? 방송 출연료 받은 것을 모아서 연극 제작에 사용했습니다. 막상 제작해보니 배우 입장하고는 정말 달랐습니다. 배우는 제 역할만 충실히 하고 개런티 받으면 됩니다. 그러나 제작은 생각할 게 너무 많은 데다 돈을 주는 입장이잖아요. 또 작품을 만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 티켓을 팔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케팅, 홍보, 광고, 티켓 세일즈 등 배우로 활동할 때는 정말 몰랐던 일들입니다.
그때만 해도 연극을 제작해서 수익을 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리 소극장이라 해도 대관료 조명 음향 홍보 배우와 스태프 개런티, 인쇄비 등 비용이 많이 들어갑니다. 공연을 제작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면 표를 사줘야 하는데 다들 ‘초대권’만 달라고 합니다. 친한 친구일수록 초대권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내가 설렁탕 집을 오픈했다고 치자. 그럼 밤낮 공짜로 설렁탕 먹으려고만 하겠니? 그건 아니잖아. 나도 이 공연 굉장히 힘들게 돈 들여서 만든 건데, 왜 밤낮 공짜로 보려고 해.”

언어의 장벽과 자본의 장벽

그때만 해도 문화 콘텐츠를 돈 주고 산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 시장은 너무 작았습니다. 표가 안 팔린다는 얘기는 결국 시장이 작다는 뜻입니다. 70년대 말 80년 초 제가 제작할 때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굉장히 컸습니다. 관객도 20대 초반 여성 외에는 거의 없었고 여러 면에서 열악했죠. 연극 제작으로 빚만 자꾸 늘어났습니다.
다행히 TV 출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작으로 빚지면 또 드라마 개런티로 갚고, 어쩌다 CF 출연으로 목돈 생기면 제작하는 등 그런 과정을 거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결과는 빚만 남았으니까요. 그래서 어떻게든 ‘넓은 시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티켓이 팔리는 시장! 초대권 달라는 게 아니라 돈 주고 티켓을 사는 시장을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뉴욕에 가도, 런던에 가도 수없이 많은 극장은 있을 테니까요. 세계 시장으로 나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자, 그런데 장벽이 많았습니다.
첫 번째 장벽은 언어였어요. 한국말 공연을 세계 어디에 가서 공연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말은 훌륭한 언어입니다. 그러나 미국, 일본, 중국을 가서 한국어로 된 공연을 누가 알아듣겠어요? 두 번째 장벽은 자본이었습니다. 연극만 제작한 것이 아니라 90년대 들어 뮤지컬도 제작했는데 그 작품이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최인호 원작의 뮤지컬 ‘고래 사냥’이었습니다. 김수철이 음악을 맡았죠. 약 4~5억 정도 제작비가 소요되는데 당시 신문 문화면에 ‘국내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뮤지컬 막 오른다’ 이런 기사가 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똑같은 시기에 소위 브로드웨이 공연들의 제작비는 ‘프리 프로덕션’ 제작비만 1백억 이상, 즉 약 천만 달러에 달했습니다. 격차가 너무 큰 거죠. 외국에서는 사전 제작비만 천만 달러에 달하는데 5~6억 들여서 만든 작품이 무슨 경쟁력이 있을까요? 빚지기 싫어서 해외에 투자했다가 오히려 빚만 더 크게 지는 꼴이 되겠죠.

대사없는 넌버벌(Non-verbal) 공연이 나오기까지

그래서 생각한 것이 언어가 불필요한 공연을 생각했습니다. 무대는 언어만 있는 게 아니라 배우의 몸짓, 표정, 무대 미술, 음향, 조명 등 다양한 요소가 필요합니다. 이런 요소들을 잘 활용해 ‘대사 없는 공연’을 만들자, 그래야 미국 영국 일본 등 어디에서든 공연할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본은 어떻게 해결할까? 당시 5~6억 제작비를 조달하기도 너무 힘들었는데 언감생심 50억, 100억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돈은 없지만, 외국 프로듀서보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일까 고심했습니다. 무릎을 쳤습니다. 최고의 미국 프로듀서라도 동양, 한국을 나만큼은 알 수 없겠다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동양적이고 한국적인 독특한 소재로 자본의 한계를 극복해보자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것이 ‘난타’입니다. 사물놀이라는 리듬, 우리 전통 리듬을 기반으로 서구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접목시켜 대사 한마디 없는 그런 공연을 만든 거죠.

1997년 10월입니다. 호암아트홀에서 공연했는데 뜻밖에도 대성공이었습니다. 다음 문제는 어떻게 해외에 진출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호암아트홀 공연이 끝나자마자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묻기 시작했습니다. 국내 공연 끝나면 해외 간다고 했는데 언제 갈 거냐는 것입니다. 사실 아무런 대책이 없었습니다. 이런 공연을 만들면 해외에 갈 수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 선택한 방법은 에이전트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공연을 해외에 판매한 경험이 없다면 그런 경험이 많은 복덕방 에이전시를 통해서 팔아보자는 심산이었죠. 당시 9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들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죠. 대부분 ‘브로드웨이 아시아’라는 미국 회사를 통해 수입했는데 그 회사에 ‘당신들의 작품을 한국에 파는 것도 좋은데, 거꾸로 한국 작품을 해외에 좀 팔아볼 생각이 없느냐’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는 간단한 답변이었습니다.
메일을 또 보냈습니다. ‘관심이 있고 없고는 라이브로 공연을 봐야 하니까, 일단 한국에 와서 난타를 보고 얘기해보는 건 어떤지’ 물었죠. 얼마 후 담당자가 도쿄 출장길에 한 번 들리겠다는 회신이 답지했습니다. 결국 브로드웨이 아시아의 ‘시몬 자넷’이라는 여사장이 98년 봄 난타를 처음 감상하고 ‘가능성이 있다’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해외에 팔기에는 미흡한 점’을 언급했습니다. 한국 관객들은 열광하지만 지명도가 아직 부족하고 서구 관객들도 열광할 것인지 테스트를 해보는 게 어떠냐며 ‘에딘버러 페스티벌’에서 난타 반응을 확인해보자는 겁니다. 지금이야 에딘버러 페스티벌이 유명하지만 1998년에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저도 몰랐습니다.
어쨌든 어렵게 에딘버러 페스티벌을 참가했습니다. 에딘버러는 자비로 참여하는 축제죠. 어셈블리홀에서 한 달 공연할 예산을 계산해보니까 항공료 스태프 체류비, 대관료, 마케팅 등에 최소 3억 정도, 즉 30만 달러가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때 3억은 굉장히 큰 돈이었습니다. 제 파트너가 한 2억을 준비하고 제가 1억을 책임지기로 했는데 쉽게 구해지지 않았어요. 문체부 등 정부 지원을 요청하러 가면 ‘에딘버러가 뭐하는 곳이냐’ ‘거기는 왜 가느냐’는 질문만 받았는데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를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기업 협찬도 쉽지 않았는데 마침 제 친구 중에 난타가 해외에 가면 꼭 성공할 거라고 늘 얘기해 주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침내 꿈의 무대 브로드웨이를 뚫다

ⓒ연합뉴스

그래서 제가 그 친구를 찾아가서 드디어 우리가 에딘버러 페스티벌에 가는데 ‘가면 어떨 것 같냐’고 묻자 ‘꼭 성공할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내가 갔다 오자마자 갚을 테니까 1억만 빌려줘라.”
말도 안되는 부탁을 했는데 평범한 세일즈맨이었던 그 친구는 군소리도 없이 자기 집 담보로 1억을 빌려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전세를 살고 있어서 담보할 게 없었거든요. 제작자는 집 담보로 1억 정도 빌려줄 정도의 친구를 두어야 합니다.(웃음) 어쨌든 그 친구가 1억을 빌려주고 제 파트너가 2억을 준비해서 에딘버러를 갔습니다. 에딘버러에서 한 달 공연했는데 저도 놀랬습니다. 전 회(回) 매진에 매회 기립박수를 받았고 여러 나라로부터 공연 요청을 받았습니다. 결국 난타는 에딘버러부터 시작된 셈입니다. 에딘버러 페스티벌 현장에서 올랜도 디즈니월드의 아메리칸 가든센터와 두 달 공연 계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일본의 프로막사 회사 초청으로 도쿄 오사카 나고야에서 공연을 펼치는 등 지금까지 약 60개국 350개 도시에서 공연을 펼쳤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해외 가는 것도 좋지만 한국에 앉아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도 괜찮겠다 싶었습니다. 90년대 중반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 관광객이 1년에 한 600만 정도였습니다. 지금은 거의 2천만 명에 가깝죠. 그런데 600만이 한국에 와서 낮에는 덕수궁 경복궁 구경가고 밤에는 유일하게 워커힐에서 펼치는 가야금과 한국 전통 무용 공연을 감상하더군요. 의미는 있지만 그렇게 재미있는 쇼는 아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99년 서울 정동에 난타 전용 극장을 처음 만들어 관광객을 대상으로 적극 마케팅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명동, 홍대 앞, 제주도 등 3곳의 전용 극장을 20년째 운영하고 있죠. 코로나 3년 동안 정말 굉장히 고생했는데 다행히 지난해 말부터 다시 오픈해서 이제 흑자로 돌아서고 있습니다.
난타는 해외도 해외지만 특히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마침내 2003년 브로드웨이 공연장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개막하자마자 엄청난 반응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3대 방송인 CBS ABC NBC의 유명 토크쇼에 난타가 모두 소개되는 등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강남 스타일의 싸이가 출연하기 10년 전, 방탄소년단보다 무려 20년 전에 한국 콘텐츠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을 펼치고 미국 3대 메이저에 출연하는 등 ‘한류’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 총감독으로서의 활약

난타 경력 때문이겠죠?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3년 앞둔 2015년, 평창동계올림픽 총감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참 부담스러웠습니다. 제가 일을 선택한 기준은 오직 ‘그 일이 재미있느냐 없느냐’에 있었고 재미있을 때는 무조건 선택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야 잘못돼도 후회가 없으니까요. 동계올림픽 개·폐막식도 재밌을 것 같았습니다. 결국 하겠다고 수락하고 ‘어떤 주제로 할 것이냐’는 문제를 놓고 또 고민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대중문화는 K팝, K드라마 등으로 꽤 알려진 상황이었지만, 한국 전통문화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외국인들은 ‘아시아 문화’라고 하면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중국문화’를 떠올리고, 60년대 이후 일본이 고도 성장함에 따라 일본 전통문화를 떠올립니다. 이에 비해 한국의 전통문화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폐막식의 주제를 한국전통문화로 결정하다

올림픽 개막식은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한국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그리고 한국인의 특성과 역사 등을 ‘짧고 임팩트 있게’ 보여줄 수 있는 일종의 그랜드 쇼입니다. 일본과 중국과는 다른, 한국의 모습을 어떻게 보여줄까? 많은 인문학자 및 감독들과 의논하고 자료도 찾아보았는데 저에게 영감을 준 것은 건축문화였습니다.
중국의 건축문화는 만리장성이나 자금성처럼 자연을 압도할 만큼 거대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이라면, 일본은 일본 정원 ‘축경’처럼 아름답고 디테일하죠. 하지만 굉장히 인공적입니다. 여기에 비해 한국의 건축문화는 주변 자연환경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는 게 특징입니다. 한국의 고대 건축물은 건축물 하나만 봐서는 안됩니다. 주변 산과 강과 냇물, 나무와 숲 등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입니다.
사실 건축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고려청자, 유자 백자 등을 많이 탈취해 갔습니다. 그 중 ‘자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그 자기를 아직도 보물처럼 여기는 가문들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막사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왜 막사발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장 자연스러운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디테일한 도자기 문화는 ‘몇 도에서 몇 시간을 굽고 다시 또 몇 도에서 몇 시간을 굽는’ 등 매뉴얼 대로 따라야 하는 작업인데 이래서는 막사발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도공이 대충 집어넣었다가 낮잠 좀 자고 너무 늦었나 싶으면 끄집어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찌그려 던져놓고 만든 게 막사발이거든요. 어찌 보면 가장 자연스러운 그릇이죠. 한국 전통문화의 특징을 자연과의 조화에서 찾았습니다.

개·폐막식 주제는 조화와 융합

우리의 현대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K콘텐츠가 성공한 근본적인 이유는 ‘융합’에 있습니다.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들을 기막히게 융합했거든요. 난타만 해도 ‘사물놀이’라는 한국의 전통 리듬과 서구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융합한 겁니다. 그래서 현대문화의 특성을 융합으로 잡았습니다.
올림픽 개·폐막식의 주제는 전통문화의 특징인 ‘조화’ 그리고 한국 현대문화의 특징인 ‘융합’을 바탕으로, 한국인의 열정과 평화의 메시지를 보여주자는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에게 설문조사를 하든 한국인의 특성 1위와 2위 중 하나는 ‘열정’입니다. 그 열정으로 산업화도 이루었고 민주화도 달성했습니다.

또 하나는 ‘평화’의 메시지입니다. 물론 올림픽 자체에도 평화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늘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공식 행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단된 국가이기에 막연한 평화로는 부족합니다. 그래서 저희가 정한 평화의 메시지는 ‘피스 인 모션’(Peace in Motion), 즉 ‘행동하는 평화’였습니다. 뜻밖에도 북한이 뒤늦게 참여를 결정하면서 ‘행동하는 평화’의 메시지에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조화와 융합을 바탕으로 해서 한국인의 열정을 보여주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자 뜻입니다.
한편 춤과 노래와 퍼포먼스를 통해 조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숙고하던 끝에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전 세계에 조화를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기막힌 그래픽! 바로 ‘태극기’였습니다. 태극기에는 음양의 조화, 우주 만물의 조화, 천지인의 조화가 다 담겨 있습니다. 올림픽 첫 장면은 춤과 노래와 퍼포먼스로 태극기를 만든 것이죠. 장구와 군무로 태극 문양을 환상적으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퍼포먼스가 전 세계에 방송되고 많은 네티즌이 글을 올렸죠. 그중에 이런 글이 있었어요. 펩시콜라와 코리아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청중 웃음) 춤과 장구 연주로 오프닝을 만든 것은 한국인의 열정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전무용이나 춤은 느리고 슬픈 단조가 많습니다만 장구춤만은 정말 열정적입니다. 난타를 수십 년 해오면서 북소리야말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고 열정을 일깨워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폐막식은 ‘융합’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융합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도록 한국음악과 서양음악, 한국 춤과 서양 춤 등 모든 것들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글로벌한 곡 비발디의 사계를 편곡해 서구 악기 ‘기타’와 그리고 한국 악기 ‘거문고’로 협연하는 공연을 꾸몄습니다. 춤도 한국 춤과 서양 춤을 췄고요.

하늘이 도운 평창 올림픽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애로사항도 많았습니다. 폐막식 마지막 led탑은 강원도 월정사의 9층 석탑을 모티브로 만들었습니다. 제일 큰 난항은 엄청난 추위였습니다. 올림픽 개·폐막식장은 원래 바람이 늘 불어대는 명태 덕장자리를 임시로 사용하는 곳인데 눈이 내리면 불과 1시간 만에 30cm 폭설이 쌓였습니다. 또 어떤 날은 안개가 짙어 제대로 리허설을 할 수 없었습니다. 리허설 도중 배우들이나 출연자들이 소품과 오브제를 들고 나왔다가 거센 바람에 쏠려 등장조차 하지 못할 만큼 강풍도 불었습니다. 폭설이 쏟아지면 리허설을 할 수 없어 군인들을 1시간 동안 눈을 치우긴 했지만, 곧바로 잔설이 얼어 출연자들이 빙판에 미끄러지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9층 석탑을 공중에 매달아 놓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2015년 5월에 총감독을 맡았는데 그 당시에 2018년 2월 15일, 3년 6개월 후의 날씨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바람이 얼마나 불지 눈이 얼마나 올지… 그러니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대로 맞아야 하기 때문에 연출 시나리오를 a안, b안, c안까지 마련했습니다.
시나리오도 바람이 불면, 눈이 오면 각각 어떻게 할 것인가 등 다양한 변수를 생각하면서 작성했습니다. 특히 월정사 탑은 수십 톤의 led 철골로 돼 있는데 지붕이 없으니 매달 데가 없잖아요. 커스텀 타워 4개를 세워서 2개의 와이어를 연결한 다음 그 가운데에 탑을 매달았습니다. 물론 여러 가지 공학적인 계산을 했지만,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이런 기술을 ‘플라잉기술’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가 기술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만약 탑이 추락하면 수백 명이 위험해질 수 있어 런던 올림픽 플라이담당 테크니션들을 데려와 같이 작업했습니다. 타워가 아무리 튼튼해도 풍속 3m 이상이면 위험해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폐회식 전날 마지막 리허설 때 기술 감독이 헐레벌떡 뛰어왔습니다.
“감독님 중단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상부 풍속이 초속 8m라서 당장 중단해야 합니다.”
정말 많이 흔들리더라고요. 출연자를 모두 퇴장시키고 탑을 밑으로 내렸습니다. 이튿날 예상 풍속이 초속 3m라고 해서 다시 올렸지만 너무도 불안했습니다. 평창 지역은 초속 3m라 해도 실제로는 초속 10m인 날들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당일 아침 테크니션이 풍속을 체크한 후 헐레벌떡 또 달려왔습니다.
“감독님, 기적입니다. 초속 0.3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평창 올림픽은 하늘이 도와주신 올림픽이었습니다. 올림픽 리허설 45일 동안 날씨가 좋은 날이 하루도 없었습니다. 그중 딱 이틀만 좋았습니다.
그게 어떤 날인 줄 아세요?
‘개막식’과 ‘폐막식’ 날입니다. 이건 정말 하늘이 도와주지 않고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겠습니까?
스태프들이 깜짝 놀랐어요. 어떤 날은 바람 때문에, 어떤 날은 안개 때문에, 어떤 날은 폭설 때문에 하루도 힘들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개막식과 폐막식 날 온도가 가장 높았고 풍속도 가장 낮았고 눈도 오지 않았습니다. ‘아직 하늘이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으셨구나’ 감동했습니다. 출연자를 비롯해 스태프 모두 치열하게 일했습니다. 약 100여 명의 예술가들과 함께 3년 6개월을 준비했는데요, 100여 명이나 되는, 말 안 듣는 예술가들과 3년 6개월 동안 작업하면서 별의별 일들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이런 악천후 속에서 개막식과 폐막식을 무사히 치렀습니다.

저비용 고감동의 무대 연출 비결

얘기 나온 김에 또 하나의 어려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예산이었습니다. 당시 올림픽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진 나라들을 언론에서 앞다투어 다루고 있는 데다 정부에서는 예산 축소를 요구하는 분위기였습니다. IOC가 평창올림픽이 열리기 2년 전, 아젠다를 하나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올림픽 개막식들이 너무 화려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베이징 하계올림픽 때 무려 6천억을 사용하면서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후 런던 올림픽, 소치 동계올림픽도 3천억 이상을 썼습니다.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나자 IOC가 아마추어 정신에 맞춰 예산을 좀 줄이라는 얘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권고해도 다른 나라는 말을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만은 IOC의 권고를 잘 이행하려는 것인지 계속 예산을 줄이라고 했습니다. 처음 총감독을 맡았을 때 당시 문화부는 천억 정도를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17년에 정권이 바뀌면서 장관과 조직위원장이 몇 번 교체되었는데 그때마다 예산은 점점 줄어들어 결국 600억으로 정해졌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의 10분의 1 수준이죠.
더구나 600억은 하드웨어 설치비용, 예컨대 국기 게양대 제작비용, 커스텀 타워 설치비용까지 포함한 금액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개·폐막식 콘텐츠에 사용한 돈은 300억밖에 안 되었죠. 예산 때문에 정말 힘들었습니다. 날씨와 예산 문제로 골머리가 아픈데 조직위나 문체부 공무원들은 ‘감독님! 저비용 고감동의 올림픽을 만들어 주십시오’라는 주문만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합니다. 사실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그 소리예요. ‘저비용 고감동’ 그거 안 되는 말이죠.
어쨌든 개·폐막식에는 문화뿐만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도 보여줘야 했습니다. 개·폐막식이란 게 실제로는 아주 짧은 시간입니다. 개막식 2시간 중 선수 입장만 1시간이 소요되는데 나머지 1시간만으로 한국의 고대 근현대 미래를 어떻게 다 보여줄 수 있겠어요? 5천 년 역사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고대에서는 ‘고구려’를 모티브로 잡았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엄청난 자료들을 조사했고 아이디어들을 짜냈습니다. 하지만 이걸 다 표현하려면 수천 명의 출연자와 수천 개의 오브제가 필요한데 이 한 개의 장면에 예산을 몽땅 쓸 수는 없잖아요. 결국 제가 택한 방법은 어릴 때 교과서에서 본 고구려의 고분벽화 이미지, 말 타고 활 쏘는 고려인들, 또 땡땡이 무늬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는 고구려 여인들, 그 고구려 무용총 고분 벽화를 모티브로 한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러나 그 벽화가 중국에 있기 때문에 국제간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결국 평양 근처 강서대묘의 이미지로 결정했습니다. 결국은 더 잘 됐어요. 왜냐하면 강서대묘는 무용총 벽화에는 없는 주작 현무 청룡 백호, 그리고 인면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퍼핏으로 다 만들었습니다. 디자인은 우리가 했지만 제작은 라이온 킹의 퍼핏을 만든 회사에 위탁했습니다.

개막식 끝부분을 보면 반딧불이 올라가서 하늘에 별자리를 만듭니다. 이 별자리는 우리 전통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100% 똑같이 하늘에 재현한 별자리입니다. 별자리는 AR 기술을 활용했기 때문에 전 세계 TV 시청자들에게만 보였습니다. 현장에 있는 3만 명의 VIP도 중요하지만 TV로 올림픽 개·폐막식을 지켜보는 전 세계 수억 명이 더 중요했으니까요.

와우포인트 1 비둘기에서 스키어 애니, 그리고 오륜

그다음 한국의 근현대를 또 보여줘야 하는데 우리의 근현대에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아무리 줄이고 줄여도 4개의 키워드가 필요했습니다. 첫째 일제 강점기로부터의 해방에 이르는 근현대, 둘째 6.25 전쟁, 셋째 산업화, 넷째 민주화… 줄이고 줄여도 이 4가지인데 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또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한국의 근현대를 ‘아리랑’ 노래 한 곡으로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지역이 강원도인 만큼 ‘정선 아리랑’을 테마로 수천 명의 출연자 대신 단 7명만 출연시켰습니다. 올림픽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어린이 5명, 그리고 뱃사공, 정선 아리랑 무형문화재 등이 출연해 아리랑을 부르면서 한국 근현대의 비극과 희망을 선보이는 것이죠. 강원도는 메밀꽃이 유명하죠. 수십 대 프로젝트 영상으로 그라운드에 메밀꽃밭을 만들고, 바람에 쓰러졌다가 해가 비치면 다시 일어나는 모습을 통해 김수영 시인의 ‘풀’처럼 우리 민초들이 쓰러지고 일어나는 근현대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근현대 이후에는 올림픽에서 가장 중요한 ‘와우 포인트’를 보여줘야 하는 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와우 포인트’란 드라마의 클라이막스 같은 것으로 올림픽이 끝난다 해도 기억에 남게 됩니다. 88올림픽 때 엄청나게 많은 이벤트를 보여줬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들은 ‘굴렁쇠 소년’만 기억합니다. 성공한 와우 포인트죠.
2018년 평창올림픽을 끝난 20~30년 후, 메밀꽃밭이나 AR 별자리 등을 얼마나 기억하겠습니까? 평창올림픽의 와우 포인트는 ‘오륜’과 ‘성화 점화’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의 역대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의 오륜 장면과 성화 장면만 골라서 감상했는데 다 보고 나니까 다리에 힘이 쭉 빠졌습니다. 아이디어가 너무 출중해서 더 이상 해볼 만한 게 없어 보였습니다. 마지막까지도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어느 날 저한테 문득 ‘드론’이 떠올랐습니다. 올림픽에서 드론을 사용한 적이 있는지 찾아보았는데 어느 올림픽에서도 드론을 쓴 적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밤하늘에 드론으로 오륜을 표현하는 작업을 하게 된 거예요.
먼저 아이들이 비둘기를 날리면 그 순간 3만 객석에 장치해놓은 led등이 비둘기로 바뀌면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1218대의 드론이 스키장으로 날아가서 ‘스키보드를 타는 애니메이션’으로 형상화됩니다. 다음에는 실제 스키어들이 산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면서 불꽃으로 눈판에 오륜을 만들고, 하늘의 스키어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그 드론들은 다시 오륜으로 정렬하는 퍼포먼스를 펼쳤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도 평창올림픽 개·폐막식 때 뭐 했지, 하면 다른 건 다 잊어도 오륜 드론은 기억하지 않을까요? 오륜은 가장 많은 드론을 이용한 군집비행으로 인정받아 기네스북에도 올랐습니다.

와우포인트2 성화 점화

그다음 와우 포인트는 역시 성화입니다. ‘성화 점화’를 두고 별별 아이디어가 많았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개·폐막식 내내 무대 가운데에 슬로프가 있었는데 그 슬로프가 계단식으로 바뀌면서 성화 주자가 뛰어 올라갑니다. 마지막 성화 주자에게 전달하고 꼭대기에는 아이스링크를 깔아놓고 김연아 선수가 춤을 춘 후 성화를 받아 점화하는 아이디어를 만들었죠. 근데 성화 점화를 위해서는 음악 조명과 60대의 3만 안시 고화질 프로젝트 등이 타이밍상 착착 맞아야하기 때문에 반드시 꼼꼼한 리허설이 필요합니다. 리허설은 새벽 3시, 영하 30도의 추위를 뚫고 진행해야 했습니다. 올림픽 스타디움에 들어와서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계단이 가파르고 굉장히 미끄럽습니다. 이런 일에 가장 적합한 역할로 안정환 선수를 선발했습니다. 새벽 3시에 그 가파른 계단을 여러 번 오르락 내리락 뛰었습니다. 엄동설한 새벽 3시, 땀 흘린 사람은 오직 안정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개막식 전날 조직위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계단 올라가는 주자를 바꾸자는 거예요. 안정환이 새벽 3시에 계속 연습했는데 이걸 어떻게 바꾸냐며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 선수가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입장하면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데 이 계단을 남북한 선수가 같이 올라가면 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듣고 보니 좋은 아이디어라서 찬성했습니다.
안정환 선수에게 ‘정말 미안하다. 내가 평생 네가 부탁하는 건 다 들어줄테니, 계단을 올라가지는 말고 그라운드에 들어와 바닥을 돈 뒤 남북한 선수들에게 성화를 넘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새벽마다 그 고생을 했는데도 안 선수는 정말 쿨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걱정이 끝난 건 아닙니다. 리허설은 꼭 해야 되거든요. 음악과 조명에 맞추려면 이 두 선수가 꼭 리허설을 해야 되는데 두 선수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남북 합의가 덜 끝났다는 거예요. 설상가상으로 기술 감독은 또 다른 걱정거리를 주었습니다. ‘감독님, 저 계단은 한 명이 뛰어 올라가도록 설계가 돼 있습니다. 2명이 올라가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두 선수 몸무게와 비슷한 여자 스태프 두 명을 데리고 세이프티 체크 후 새벽 3시에 다시 연습해서 그 동영상을 남북한 선수들에게 전달했습니다. 리허설은 불가능하니까 동영상이라도 참고하라는 뜻입니다.
그날 밤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동영상만으로 이 친구들이 제대로 해낼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두 선수가 당일 저녁에 도착하자마자 동영상대로 할 수 있는 묻자 ‘잘 모르겠다’고 답했습니다. 기술에는 하이테크만 있는 게 아니라 로테크도 있습니다. 결국 두 선수가 완벽하게 임무를 해낼 수 있었던 비밀은 두 선수가 쓰고 있는 모자 안에 있었습니다. 이어폰을 끼워서 컨트롤 룸에서 ‘손 흔드세요. 손 내리세요. 뒤로 도세요. 하나 둘 셋 뛰세요’ 등을 계속 지시했습니다. 다행히 조명 프로젝션에 정확히 계단을 올라 김연아 선수에게 무사히 성화를 전달했습니다.
저예산과 악천후 속에서 평창올림픽 개막식이 무사히 끝났는데 당시 평창올림픽의 각 경기 티켓은 거의 팔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더 힘들어했는데 개막식이 끝나자 각 경기장의 티켓이 날개 돋듯 팔리기 시작했죠. 개막식이 효자 노릇 톡톡히 한 것입니다.

정부가 문화예술에 지원해야 하는 이유

우리 문화예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부분에서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 지원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고 전통적인 콘텐츠들은 꼭 지원해야 합니다. 사물놀이가 없었다면 난타를 못 만들었습니다. 사물놀이가 있었기 때문에 난타 공연을 생각했어요. 이는 사물놀이 전통이 잘 유지되고 계승될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 또 지자체의 지원이 앞으로도 많이 필요합니다.
또 하나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산업용 콘텐츠에 대해서는 산업화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거나 산업화를 도와줘야 합니다. 이런 문화예술 지원이 결국은 국가브랜드를 만들고 국가의 가치를 만듭니다. 대한민국 K콘텐츠가 국가 브랜드의 위상을 얼마나 높여놓았습니까? 예전과 달리 삼성 LG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세계에 수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상표가 자랑스럽게 붙어 있기 때문에 수출에 더 큰 효과를 보고 있습니다.
70년대, LG에서 해외수출 담당 상무 한 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했어요.
“LG가 유럽 진출하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를 어떻게 숨길 것인가, 그게 고민입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를 내세우는 순간 비싼 가격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런던 헤로스 백화점에 LG가 처음 진출할 때 구매 담당자가 ‘그냥 LG라고 팔면 좋겠다’고 했답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보이는 순간 소비자들이 구매를 망설인다는 겁니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싸구려 플라스틱 컵, 싸구려 가발, 싸구려 신발에서 많이 본 브랜드인데 이런 나라가 만든 텔레비전을 사도 될까 하고 갸우뚱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물론 삼성, LG 등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좋은 제품을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K콘텐츠가 코리아라는 국가브랜드를 엄청나게 높여놓았습니다. 최근 명동에서 난타를 다시 시작했는데 3년 전만 해도 중국어밖에 안 들렸습니다. 지금은 영어 불어 독일어 등 다양한 언어가 뒤섞여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유럽 미국 사람들이 한국을 찾고 있습니다. 역시 K콘텐츠의 힘일 겁니다.

올림픽 탑스폰서와 뒷 이야기들

긴 강의가 끝났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본 강의 이상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올림픽의 특성에 대해 비상업적이고 순수한 아마추어들의 경기처럼 보이지만 어찌 보면 엄청난 상업 경기라고 말한다. 올림픽에는 탑스폰서가 있는데 이 스폰서들이 특정 제품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갖고 있다. 올림픽 탑스폰서 중 대한민국 기업은 유일하게 ‘삼성전자’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모든 제품의 권한을 갖는 게 아니라 휴대폰 분야에만 특권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치를 때 현대자동차를 홍보하고 싶어도 자동차 분야는 도요타가 권한을 갖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큰 스타디움에는 4개의 메인 전광판이 있는데 이 역시 LG나 삼성 전광판을 쓸 수 없고 전광판 분야의 탑스폰서인 파나소닉 제품을 사용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탑스폰서의 힘이 크고 올림픽에서는 그걸 지킬 의무가 있다.
송승환 대표는 처음 드론을 생각했지만, 어느 제품을 사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이전에 예산 걱정부터 앞섰다. 드론 최고의 기술 보유회사는 인텔이었는데 다행히 올림픽을 앞두고 인텔이 신기술 분야 탑스폰서로 합류하는 바람에 돈을 들이지 않고 오륜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었다. 물론 디자인은 우리 기술진들이 모두 한 것이지만. 다행스러운 일은 연출부터 모든 소프트웨어 인력들이 유럽사람들로 채워지는 남미 등의 올림픽과는 달리 연출과 음악 조명 등 모든 분야의 디자이너와 테크니션, 창의적인 콘텐츠는 우리 한국인들이 맡았다는 점이다.

송승환 대표가 걸어온 길과 삶의 모토

송승환 대표는 어느 도의원의 말처럼 어릴 때 텔레비전 스타인데다 말도 잘하고 얼굴도 곱상하게 생겨서 사대문 안에 사는 부잣집 아들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미아리 산동네에서 태어나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빚이 많아 중학교 때부터 받은 tv 드라마 출연료까지 부모님 빚 갚는데 모두 사용되었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일을 참 많이 당했다. 그러면 쉽게 좌절할 만도 한데 송승환은 이상하게도 어려울 때마다 오히려 긍정적이었다.
“저는 늘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난타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닙니다. 난타 공연 제작 때문에 빚을 많이 졌거든요. 나중에 빚을 다 갚고 나니까 허무하더라고요. 인생의 목표가 없어지는 것 같고 늘 빚 갚기 위해서 드라마도 열심히 하고 빚 갚기 위해서 영화도 하고, 빚 갚기 위해 뮤지컬도 제작했는데 난타가 잘 되어서 빚을 갚고 나니까 ‘이제 나 뭘 할까’ 하면서 인생이 허무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늘 긍정의 힘을 믿습니다.”
사실 모든 예술가들이 다 그런 어려움을 겪는다. 송 대표는 이럴 때 긍정의 힘을 믿으라고 말한다. ‘세상에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가 눈이 굉장히 나쁘거든요. 여기 있는 분들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느낌으로 여기 누가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누군지는 모릅니다. 저는 시력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 정말 어떻게 사나 걱정도 했어요. 하지만 안 보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금방 찾았습니다. 요즘 휴대폰 들고 다니잖아요. 문자는 안 보이는데 들을 수가 있더라고요. 연기할 때 얼굴은 안 보이지만 검은 머리 부분은 흐릿하게 보입니다. 그 머리 아래에 눈이 있겠지 하고 그곳을 바라보고 연기합니다. 그래서 연기 파트너들은 ‘어떻게 제 눈을 그렇게 똑바로 쳐다 보고 연기를 하세요?’ 하고 묻습니다. 저는 눈은 보이지 않지만 무엇이든 포기하지 않습니다. 긍정의 힘! 긍정의 힘으로 못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시더라도 ‘된다’ 하는 긍정의 마인드를 갖기 권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리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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