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믿지 말라’ 대신‘좋은 사람을 만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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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머리 짐승은 거둘 게 아니다?
전화를 했다. 몇 년 전 내 신용으로 수천만 원의 돈을 빌려 간 뒤, 그 돈을 받아내는 데만 족히 4년은 걸렸던 것 같다. 그 친구에게 전화했다. 이번에 음악회를 한다는데 내가 도와줄 게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옆에 전화를 듣던 사람은 깜짝 놀란다. 그 사연을 대략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다 지나간 일인 걸… 그 친구가 돈을 차용해 갔을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알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일이 풀리지 않아 죽을 만큼 힘든 걸 왜 모르겠는가.
보통은 인연을 끊어버리는 게 상책인데 나로서는 그러지 못한다. 성정상 물러터지기도 하지만 속세의 셈법으로는 ‘사람이란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서로 도울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진정으로 그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세상을 살면서 이놈은 이게 싫고 저놈은 저게 싫어서 인연을 끊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나 역시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사람에게 상처를 입다 보면 스스로도 깨닫기도 하지만, 주변인들의 지청구들이 가만 있질 않는다. ‘그러게, 사람이 가장 믿을 게 못 된다’거나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둘 게 아니다’고 한다.

홀로 있으면 건강할 수 없다
오스카 와일드의 삶을 보면 사람을 잘 만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미국 검색대 앞에서 나의 고고한 지성을 빼고는 달리 신고할 게 없다고 큰소리치던 천재였다. 그러나 37세 때 알프레드 더글라스를 만나면서 인생은 급전직하 추락하고 말았다. 남색이었던 알프레드 더글라스 때문에 그의 아버지 퀸즈베리 후작의 가혹한 공격을 받아야 했고, 법정은 2년간 강제노역형에 처했다. 인생이 박살 난 것이다. 그는 ‘심연으로부터’에서 ‘잘못된 만남으로 인해 입은 상처가 맨발로 깨진 유리를 밟는 것처럼 아프다’고 술회했다.
인연 중에는 분명 나쁜 인연은 이처럼 깨진 유리를 밟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 나쁜 인연 때문에 인생 전체를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는 식으로 인연의 가치를 폄훼하기만 한다면 그의 인생에 남는 건 고독뿐이다.
자의적인 평화를 위해 잠시 고독을 힐링의 수단으로 선택하지 않는 한 일생 고독하게 산다는 것은 병든 환자에 불과하다. 속세를 떠나 산속에 사는 도인이라도 사람과의 접촉 없이 도를 닦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과의 부대낌 없이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읽고 선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러기에 ‘득도다조(得道多助)’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홀로 도를 터득하는데도 다른 사람들과의 희로애락을 나누면서 깨달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이치렸다.
어윈 맥매너스 목사는 ‘홀로 있으면 건강할 수 없다.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에만 우리 자신을 찾을 수 있고 공동체 없이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서로 상처를 줌에도 함께하는 게 인간 공동체
‘신년음악회 & 한숙현 저자 출판기념회’가 있기 전, 공연장 가까운 곳에 박봉규 오카리나숲 사무실 이전식이 있어 잠시 들렀다. 이전식이 끝난 후 식당에 들렀을 때 진정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울긋불긋 다채로운 의상과 머리매무시, 얼굴의 주름살과 피부빛, 대화하는 모습은 10년 전과 많이 달랐지만 멤버들의 이름과 ‘사람’은 그대로였다.
식탁에 앉기 전 내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한 마디 신음소리가 식탁에 떨어졌다. ‘삶은 우정의 연속이구나.’ 박봉규 회장은 그 말을 주워 담아 ‘대표님은 어찌 그리 명언을 쉽게 만드냐’며 칭찬하지만, 나로서는 진심이었다. 이들 멤버 안에 어찌 타인으로 인한 상처가 없겠는가. 숱한 질시와 오해, 투쟁과 화해의 역사를 거쳤겠지만 그럼에도 그 상처를 서로 동여매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치유하는 역사를 반복했을 것이 분명하다.
독일의 나치즘으로 인해 수용소에서 죽을 위기에 있으면서도 총부리를 겨누는 독일군 앞에서도 ‘너도 나처럼 결국 나약한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결코 겁 먹지 않았다는 인류학자 ‘에티 힐레즘’처럼 마음으로 상대를 대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세상은 우리 세포안에 있는 핵과 미토콘드리아처럼 전혀 다른 성질의 물질이 함께 살아가는 거대한 세포덩어리에 불과하기에 연합은 피할 수 없다는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핵과 미토콘드리아는 서로 연합해야만 광합성 작용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존재의 유전자 구조는 어느 한 군데도 일치되는 점이 없는 전혀 다른 박테리아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행복한 법
이전식이 끝나고 길 건너 샤론홀에서 신년음악회 & 한숙현 저자 출판기념음악회를 개최했다. 이수연 회장의 고급진 식탁디자인과 임영혜 선생님 이진희 선생님 등의 풍성한 리셉션 차림, 김생기 대표와 하진석 총연출의 일사불란한 진행으로 행사 준비는 원활하게 이뤄졌다.
서로 다른 성격의 사람들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석사를 마치고 10여 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교수로 임용되는가 하면 지난 8주간 베스트셀러 저자가 된 저자를 축하해주는 자리이자, 지인끼리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였다. 사실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이 한해에 얼마나 쏟아지며 교수로 임용되는 사람 또한 좁은 한국에서 얼마나 많겠는가. 베스트셀러라고는 하지만 매일매일 쏟아지는 저자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이런 출판기념음악회를 마련한 것은 저자의 행운을 축복해주는 동시에 우리의 소중히 인연들도 오랜만에 손을 맞잡아보자는 취지였다.
세상이 험할수록 아무도 믿지 말라고 한다. 믿을 놈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랄프 왈도 에머슨의 책제목처럼 ‘세상의 중심에 너 홀로 서라’며 독립불구(獨立不懼)의 정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구호는 ‘정체성과 자존감을 잃지 말라’는 의미일 뿐, 세상을 불신으로 살라는 뜻은 결코 아니리라.
이날 음악회에서 이토록 많은 지인들이 참석한 것은 이번 행사의 주최자인 나래코리아의 김생기 대표와 ‘음악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를 쓴 한숙현 저자야말로 인연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는 감히 말한다. 세상 밖으로 떠나는 여행자에게 ‘세상이 무서우니 누구도 믿지 말고 너 홀로 살아가라’라는 말 대신 ‘세상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을 만나라, 좋은 인연을 쌓으라, 문제를 홀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라, 설령 당신의 어려운 점을 이용하려는 나쁜 손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든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하고 싶다.

글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