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러시아 및 국제 정세를 둘러싼 시사적 조명과 해석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Boris Godoun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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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Théâtre des Champs-Elysées

프랑스 오페라 연출과 무대 구상의 쌍두마차 올리비에 삐와 삐에르-앙드레 바이츠 팀의 기획작 보리스 고두노프는 뚤루즈 국립 관현악단 공연으로 개막된 지난 11월부터 폭발적인 관심과 반향을 일으키며 올해 초 파리 샹젤리제 극장까지 진출했다. 전체적으로 흑과 백을 주 배경으로 하고 황금색을 도드라지게 한 시각적 이미지로 강렬한 통일감을 지향함으로써 미니멀 미장센의 극치를 보여주었고 현 정치상황과 연관된 시사적 조명과 해석으로 주목 받았다.

문학과 음악으로 그려진 러시아 역사
러시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작품을 하나만 꼽으라고 한다면 주저 않고 « 보리스 고두노프 »를 언급하게 된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원작 희곡을 토대로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가 직접 대본과 음악을 쓴 오페라 « 보리스 고두노프 »는 1868년부터 1869년 경에 쓰인 작곡가 초판본을 비롯 1872년 작곡가 개정본이 있었고, 1896년과 1908년 두 차례에 개정된 림스키-코르사코프 판 두 가지, 1940년 쇼스타코비치 판 등… 창작 시점부터 수차례에 이르는 개작 이력만으로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지니는 작품이다. 게다가 작곡가 초판 당시에는 여성 등장인물과 러브 스토리의 부재와 더불어 황제의 존재를 무대에 올렸다는 점을 이유로 공연 금지령을 당하기도 했다.

복잡한 개정 사유와 배경이 어떠하든 간에, 권력에 사로잡혀 그의 노예가 되어버린 인간의 비통한 모습과 외로움이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 내용이라는 점은 어떤 개정본인지를 막론하고 변함이 없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러시아를 지배했던 실존인물 보리스 고두노프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짜르(러시아 황제) 의 자리에 야심을 품은 고두노프가 황제 계승 후계자 드미트리를 살해하고 그 망령에 시달리고 고통 받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비극 스토리이다.

이번 올리비에 삐가 연출한 프로덕션은 1868년 초판본을 기본으로 했는데, 어둡고 육중한 오케스트레이션이 창출하는 분위기가 극적 압박과 긴장감을 한층 돋구어 주는 가운데 극중 인물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에누리 없이 그대로 표현해 주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를 통해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진실이다. 극 중의 음악이 극의 내용을 충실하고 진실되게 전달하기를 바란다 – 무소르그스키

저음역대 성악가들이 전반적 분위기 조성
육중한 저음으로 특징 지어지는 러시아 성악의 백미는 « 보리스 고두노프 »를 관람하는 묘미라 하겠다. 작곡가인 무소르그스키 역시 저음역대로 노래를 즐겨 부르던 베이스였던 만큼 본인 작품 내 주요 역할을 저음역의 성악가들에게 맡긴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인지 극 중 보리스, 피멘, 바를람, 세 인물의 음역대가 모두 베이스인 점에 각별히 주목하게 된다. 원래 캐스팅인 마티아스 괴르네 대신 보리스 역을 맡은 알렉산더 로스라베츠의 활약이 유난히 돋보였다. 그는 벨라뤼스 출신으로 성 페르스부르그에서 정통 러시아 창법을 익힌 성악가인데 그의 출연은 괴르네가 남긴 실망스런 빈자리를 넉넉히 채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절절한 내면의 연기로 기대 이상의 감동을 주었다.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과 뚤루즈 오페라단 합창단은 안드리스 포가의 지휘봉을 믿고 두텁고 믿음직한 사운드로 드라마틱한 나레이션을 이끌어 갔다. 무소르그스키가 구현한 러시아 정교 종소리는 그들의 연주를 통해 아포칼립스Apocalypse에 대한 두려운 집착이 가득한 긴장의 박동 소리로 전달되었다.

정치 상황 인식과 반영 – 연출가의 말
올리비에 삐의 이번 연출의 핵심은 한 마디로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숙고와 성찰’로 요약할 수 있다. 이 포인트에 대한 연출가의 말도 흥미롭다.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다루고 있는 러시아 내 권력 이야기와 오늘날 러시아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이 어떠한 맥락에서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보리스 고두노프의 이야기는 너무나 공교롭게도 오늘날의 러시아 및 블라디미르 푸틴의 과도한 폭정 상황을 떠올린다. 권력의 유혹 앞에서 합법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그가 저지른 일이 얼마만큼 심각한지에 대한 깨달음 없이 스스로 자초한 죄의 망령 속에 갇혀버렸다. 푸틴 역시 그가 자초한 전쟁과 폭력이 어떤 상황인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보리스 고두노프라는 인물을 통해 고두노프에서 스탈린 그리고 푸틴으로 이어지는 폭정 러시아의 권력자들을 상징해보고 싶었다.”

글 음악 칼럼니스트 박마린
사진 TCE © Mirco Magliocca


원 작 Alexandre Pouchkine
대본&음악 Modeste Moussorgsky
음악감독 Andris Poga
연 출 Olivier Py
무대 장식 및 의상 Pierre-André Weitz
조 명 Bertrand Killy
출 연 자 Alexander Roslavets(Boris Godounov), Victoire Bunel(Fiodor), Lila Dufy(Xenia)
프랑스 국립 관현악단, 뚤루즈 오페라 합창단, 오 드 센 어린이 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