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와 접점을 이룬 음악가들의 향연 <2024 교향악축제_부산시립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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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부터 에너지를 쏟아냈다. 직설적이고, 저돌적이었다. 에너지 레벨은 첫 곡부터 마지막 앙코르까지 전혀 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열기와 윤기가 더해갔다. 연주회 후반부에도 이렇게 에너지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2024 교향악축제 열일곱 번째 참가 악단인 부산시립교향악단(지휘 키릴 카라비츠)의 이야기다.

포문은 리스트의 <마제파>가 열었다.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pa)는 10흐리우냐 지폐에 그의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우크라나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동향의 지휘자 카라비츠에게 이 곡이 갖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시작부터 역동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내는 현의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빠르게 질주하는 가운데서도 소리가 전혀 뭉개지지 않았으며, 구조적으로도 얽힘 없이 매끈한 진행을 선보였다. 카라비츠는 마제파의 추락과 그를 발견한 코사크, 나아가 영웅으로 올라서는 음악적 내러티브를 드라마틱하게 펼쳐내 순식간에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2번>연주를 위해 무대에 오른 첼리스트 문태국은 상당히 입체적인 음악을 들려줬다. 1악장에선 낮고 어두운 음색으로 신음하듯 연주를 시작했으나 춤곡풍의 중반부에 접어들며 음색도 연주도 밝고 활기찬 느낌을 전달했다.

2악장엔 카라비츠가 문태국과 함께 이 작품을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이유가 숨어있는 듯하다. 우크라이나 오데사의 민요 <부블리키(빵의 이름)를 사주세요>(Bubliki, kupitye, bubliki)가 행진곡풍으로 변주돼 있는 것이다. 작곡가가 실제로 어린 시절 생계를 위해 빵을 팔며 부르던 노래다. 여기서 문태국은 쇼스타코비치 특유의 뒤틀린 뉘앙스를 수준급으로 표현해냈다. 카라비츠의 지휘 역시 자신이 우크라이나 출신의 지휘자란 것을 드러내듯 자신감 있게 문태국과 합을 이뤘다. 3악장에 이르러 문태국과 카라비츠의 풍자와 해학은 한층 더 신랄해졌다. 음악적 정서의 농도도 더욱 짙어졌다. 지휘자와 협연자가 서로를 신뢰하며 보여 준 음악적 교류 덕분일까. 이번 연주엔 쉽게 보기 힘든 오리지널리티와 생동감으로 가득했다.

메인 프로그램인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에서도 우크라이나와의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는 키이우 오페라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베이스 가수로 활약했으며, 그의 어머니는 키이우 태생인 것이다.

카라비츠는 이번 연주를 위해 1947년 개정판을 꺼내들었다. 피아노의 역할이 커졌으며, 관현악의 일부가 다소 축소된 버전이다. 카라비츠는 이번에도 돌아가거나 돌려 말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직선적이고 저돌적으로 몰아쳤다. 이러한 해석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에 담긴 원초적인 느낌과도 잘 어울렸다.

우리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그중에서도 3대 발레곡을 접할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복잡하다’일 것이다. 스코어를 펼쳐보면 악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음표와 각종 지시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음악을 들으면 그 복잡함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하지만 카라비츠는 복잡한 음악을 명쾌하게 정리하고 또한 악단으로부터 에너지를 끌어내며 드라마를 펼쳐나갔다. 특히 음악적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무어인의 등장장면에서 연출한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효과적이었다. 음악적 내러티브라는 큰 줄기를 꼭 붙잡고 연주를 이끌어갔기에 복잡한 음악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비교적 편안하게 이야기를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카라비츠는 앙코르로 우크라이나계 정부 탄광 공학자 아버지를 둔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선택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 중 왈츠였다. 이제까지 저돌적으로 음악을 이끌어 온 카라비츠는 앙코르에서 낭만적이고 달콤한 연주로 반전을 이뤘다. 특히 <페트루슈카> 연주를 마친 후임에도 현들이 들려준 매끈한 음색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한편, 카라비츠는 이날 연주에 앞서 가진 프리렉처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란 상황 가운데 우크라인나인으로서 러시아의 음악을 연주하는 이유에 대해 “오늘 연주할 음악들은 우크라이나와 접점을 가지고 있기에 큰 시각으로 우크라이나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며 “이들의 음악은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답변했다.

평 권고든(음악평론가)

2024 교향악축제_부산시립관현악단
일시·장소: 4월 22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키릴 카라비츠
협연: 첼로 문태국
연주: 부산시립교향악단

프로그램
리스트: 교향시 6번 “마제파” S. 100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2번 G장조 op. 126
바흐: 사라방드 – 무반주 첼로 모음곡 2번 D단조 BWV 1008 중에서 (첼로 앙코르)
바흐: 프렐류드 –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G장조 BWV 1007 중에서 (첼로 앙코르)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차이콥스키: 왈츠 – 잠자는 숲 속의 미녀 op. 66 중에서 (오케스트라 앙코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