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야 라쉬코프스키 피아노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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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5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 첫 곡은 무겁고 둔탁한, 하늘거리는 물의 요정 ‘옹딘'(Undine)이라기보다는 곡괭이로 땅을 파는 힘찬 광부 팔뚝의 힘줄이 눈에 보이는 그놈(Gnome)이나 코볼트( Kobold) 였다. 차라리 ‘교수대’의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라쉬코프스키의 톤과 힘에는 더 잘 맞는 듯했으며 약간 삐거덕거리긴 했지만 거칠고 우악스러우며 저돌적이었던 ‘스카르보’였다.

순수음악적 양식을 추구하는 류재준의 단면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던 <피아노모음곡>은 나중에 프로그램을 읽고 나서야 그 곡의 원전이 <아파트>라는 2인 가극이란 걸 알 수 있었듯이 제목에 크게 좌우되지 않았다. 인벤션, 캐논, 프렐류드 등은 양식을 지칭하며 작곡 기법이다. 곡에 제목을 붙이는 건 가능한 상상력을 제한하는 행위로 음악의 본질적 가치를 상실시키긴 하지만 19세기 이후 음악의 기능적, 보조적 역할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현재 절대음악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마당에 류재준은 장인 정신에 입각한 완벽한 구성력과 견고함을 완고함과 집념으로 풀어내는 낭만파 예술가상을 고수한다. 분열과 분산을 통해 파트 분할로 모토리크(Motorik)를 달성한 캐논, 촘촘한 대위법적 텍스처, 우아한 리듬의 선율이 기저에 갈린 녹턴, 대선율에 비벼지는 차용된 리듬과 모티브들이 곡의 출처와 시나리오와 무방하게 전개되었다. 조성을 근간으로 한 20세기 초의 스크리아빈이나 시마노프스키의 연장선 같았으며 전통을 계승하여 자신만의 방식과 어법으로 재탄생하는 거야말로 진정한 레퍼런스이자 위대한 창조의 어머니라는 걸 류재준을 통해 다시 한번 제시되었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그 안에서 다양한 변화와 가능성을 모색하는 혁신성이라고 류재준 음악을 정의할 수 있다.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연주한 쇼팽의 24개의 연주곡은 다음과 같았다.

1번: 누구나 밀고 들어갈 수 있는 가벼운 싸리문이 아닌 육중한 철문과 같았던 오프닝
2번: 1번보다는 무겁고 음울한 분위기가 1부에서의 <교수대>처럼 라쉬코프스키의 톤과 잘 들어맞는다.
3번: 어쩔 수 없이 들킬 수밖에 없었던 왼손의 뭉개짐
4, 6, 7번: 라쉬코프스키의 음악성으로 커버
8번: 그저 손에 익은 익숙함
9번: 외성의 부각, 내성의 삼연음부는 그저 거들 뿐
11번: 오늘 독주회에서 처음으로 느꼈던 라쉬코프스키의 상냥함
12번: 폭풍 같은 질주, 왼손 4분음표의 견고함에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던 음들의 이탈
14번: 페달은 조금만. 그래서 돋보였던…..
15번: 빗방울이 아니라 천둥 벼락이었다. 중간부에서 화음의 미스터치에 번개를 맞은 듯 화들짝 놀랐다.
18번: 견고한 벽돌.
22번: 사정없이 내리꽂는 왼손은 폭격 그 자체였다.
23번: 끝나가는 마당에 가볍게 살랑거려줘서 고마워요
24번: 마동석과 같았던 강철의 루간스키

평: 성용원(작곡가, 월간 리뷰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