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본다는 것’의 의미, 제4회 서울 국제댄스페스티벌 인 탱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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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본다는 것’의 의미

제4회 서울 국제댄스페스티벌 인 탱크

7월 6일(화)~11일(일) 문화비축기지

우리는 흔히 공연을 보러 간다고 말한다. 보고 듣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무용도 ‘무용 공연 보러 간다’고 한다. 심지어 듣는 감각이 더 우세한 음악회도 ‘음악회 보러 간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보는 감각이 듣는 감각보다 더 강력한 것 같다. 오스만트루크제국 시절 세밀화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 저자 오르한 파묵은 보는 것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안다는 것은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이며,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춤을 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대중 친화적인 댄스 축제를 통해

지난 7월 초에 열렸던 서울 국제댄스페스티벌 인 탱크(이하 SIDFIT)는 올해로 4회째 개최되고 있는 글로벌 융복합 댄스 축제다. 처음 데뷔하려는 안무자서부터 오랜 경력을 지닌 안무자까지 다양한 발표 무대가 마련되어 있으며, 음악·무용·디지털 분야의 국내외 예술가들이 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해설이 있는 K-Dance(전통무용), 해외워크숍 등 SIDFIT가 보유하고 있는 콘텐츠는 매우 풍성하고 다채롭다.

이번 축제는 문화비축기지에서의 라이브 공연과 온라인에서의 댄스 필름이 동시에 기획되어 비대면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공간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담은 ‘비욘드 더 스페이스’라는 주제가 한층 더 돋보였다.

SIDFIT는 대중 친화적이고 능동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자연과 문화 공간이 잘 어우러진 문화비축기지를 오고 가는 지역 시민들의 일상으로 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모든 공연을 무료로 개방해 왔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작년에는 온라인 공연으로 전환해 개최했고, 올해는 현장의 모든 공연을 예약제로 시행하다 보니 SIDFIT 고유의 취지가 흐려져서 아쉬움을 남겼다. 하지만 50여 편의 라이브 공연과 20여 편의 댄스 필름이 올려지면서 작년보다 축제의 내용은 한층 더 풍요로워졌다. 여러 무용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아 두고 보니 ‘춤에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숙고하게 한다.

자신의 몸에 기억되는 일

무용 예술 가운데 특히 현대 무용은 이해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클래식 음악이나 발레보다도 현대 무용을 즐기는 대중의 수는 많지 않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음악은 오랫동안 지켜온 형식과 규칙이 있으며, 음들은 일정한 질서 체계 안에서 움직인다. 이전 시대의 것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는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면서 음악의 역사는 오랜 기간 잘 보존되고 향유되어 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기록할 수 있는 ‘악보’가 있기 때문이다.

가사가 있다는 점도 무용보다 음악이 대중화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텍스트로 전달되는 이야기가 있으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있다. 발레가 현대 무용보다 먼저 대중화가 되고 있는 것은 기억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용에도 무보(舞譜)가 있지만 쉽게 기록하고 읽어내기 어려워 잘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무용수의 움직임을 보고―무용 작품에 대부분 음악(소리)이 수반되지만 음악이 없는 것도 있다―작품의 의미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음악은 음악의 여러 장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음악 언어가 있지만 무용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감상자는 안무자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하다고 느낀다.

이러한 까닭에 현대 무용은 안무자에게도 감상자에게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예술이다. 안무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해야 하고, 감상자는 이것을 자신의 시간과 경험 안에서 내면화해야 한다. 이때 안무자와 감상자가 연결되기 위해서는 안무자의 상상력이 객관성을 수반해야 한다. 안무자가 말하려는 언어가 고유함을 지녀야 하지만 동시에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객관성이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좋은 안무작이란 안무자의 예술적 창의성이 발휘됨과 동시에 감상자에게로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통로를 지나 감상자의 감각을 열고 다름 아닌 그들의 ‘몸’에 기억되게 할 것이다.

몸에 기록되고 각인될 수 있는 예술이 또 어디 있을까. 음악은 오선지에 적고, 미술은 캔버스와 도화지에 그린다. 어떠한 매체나 도구가 필요 없는, 누구나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몸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느낀다. 어떠한 형식과 질서의 틀 안에서 분석해야 하는 수고 없이 자신의 생각대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예술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 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기에 충분하다.

무용학자 김말복은 저서 ‘춤과 몸’에서 ‘무용은 최상의 예술’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용은 신체가 그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재나 삶, 그리고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와 자연스럽게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SIDFIT는 우리에게 춤에서 볼 것을 제공하고, 무한대의 상상력을 허락하며, 기억하지 않아도 각자의 몸에 기억될 수 있는 감각과 자유를 선물하고 있다.

評 이소연(음악-춤 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출강)
사진 제공 SIDFIT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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