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란의 아리아 광란의 감동, 제주 4.3 다룬 오페라 ‘순이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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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4일 (일) 오후 3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반복되고야 마는 학살의 역사, 제주의 그 날

오페라 ‘순이삼촌’(예술총감독·연출·각본 강혜명)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생뚱맞지만 독일이었다. 1968년 독일의 상황 말이다.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독일 역시 나치 청산은 쉽지 않았다. 68년 당시 수상은 나치당원 출신인 키징거였다. 독일은 나치로 인해 망했지만 기묘하게도 나치 당원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 우스꽝스러운 정치 구도는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대한민국은 지금도 이런 비극의 하수구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친일 세력이 다시 인민의 목줄을 잡고 흔드는 군인과 경찰의 지위를 승계해, 이 땅을 계속 지배해오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68혁명’ 이후인 69년. 독일 정권은 기독교민주당에서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었다. 수상은 그 유명한 빌리 브란트. ‘민주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던 빌리 브란트 수상은 유태인들에게 사과하는 걸 꺼리지 않았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를 방문한 적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게토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고 머리를 푹 조아렸다. 그의 눈은 눈물로 망울졌고 죽어간 유대인들에게, 살아남은 후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했다. 빌리 브란트가 누구인가. 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로 망명해 장교로 복무하며 동족 독일인 나치와 싸운 ‘이상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런 그가 전범국가인 독일을 대표해 유대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것이다.
우리에게 4.3사건은 집단학살이라는 점에서 숫자만 다를 뿐 홀로코스트와 차이가 없다. 1947년 3월 1일, 대한민국의 식민(植民)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 스스로 독립을 취하지 못한 데에 제주도민들은 ‘통일 독립 정부’를 수립하자며 시위를 펼쳤다. 당시 일본에 끌려가 갖은 고생 끝에 귀향한 제주도 청년들은 그만큼 의식이 깨어 있었다. 이날 시위는 평화롭게 끝나지 않았다. 경찰이 구경하던 시민에게 발포함으로써 제주도 흑역사의 방아쇠를 당겼다. 제주도민들은 부당한 발포에 대해 파업과 시위로 맞섰고 폭압의 강도는 날로 강해졌다.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산하 유격대 350명은 곧 닥쳐올 5.10 선거의 부당함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며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와 우익단체를 공격했다.
미군정은 이들의 무장봉기 확산을 막기 위해 본토의 응원 경찰을 제주도에 급파하고, 여기에 더해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 극우 세력 500여 명도 파견했다. 이미 ‘제주도민의 90% 이상이 좌익세력’이라고 판단한 미군정은 닥치는 대로 제주도민들을 잡아들였다. 1년 동안 2,500명을 철창에 가둬 넣었다. 오죽했으면 경찰이 스스로 파업을 했겠는가. 무력 진압의 한계를 느낀 미군정은 강온 양면작전의 일환으로 유격대 김달삼 대장과의 평화협정을 주도해 다행히 ‘무장해제’까지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4월 28일 평화협정을 깨는 ‘오라리’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 빨갱이는 평화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모두 도륙해야 할 대상이라는 ‘학살’의 근거를 만들기 위해 서청과 경찰이 미리 짜고 멀쩡한 양민들의 집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베트남전쟁의 ‘통킹만 사건’이나 강화도의 ‘운요호 사건’처럼 공격의 빌미를 만들기 위한 간교한 계책이었다. 유격대 300여 명을 잡기 위해 연대급 군대를 파견하고 가장 잔인한 극우 서청까지 동원한 미군정에 대해 전 제주도민들은 5.10 선거, 6.23 재선거 등에 불투표하는 행동으로 저항했다. 대학살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10월 17일 가장 악랄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이 제주도의 해안선에서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전체, 말하자면 제주도 면적의 80%를 초토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300명을 잡기 위해 1954년까지 무려 6만 명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제주도민들은 처참하게 잔혹하게 죽어 나갔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집단총살 그림인 ‘1883년 5월 3일’이 현실이 되었고 피카소의 ‘게르니카’보다 훨씬 잔인한 동족 살인이 자행되었다. 그 와중에 북촌리 마을 400명도 한날한시에 순이삼촌의 ‘옴팡밭’에서 피를 튀기며 떼죽음을 당했다.
6만 명이 죽은 이 4.3사건에 대해 그동안 김대중, 노무현 양 대통령은 정부의 잘못을 깊이 시인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진짜 원흉은 여전히 말이 없다. 이 모든 학살의 설계자인 미국은 지금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 600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를 대신해 빌리 브란트는 무릎을 꿇었지만, 미국의 태도는 여전히 꼿꼿하다. 오페라 ‘순이삼촌’을 보면서 그 점이 가장 불편했다. 왜 그들은 사죄하지 않는 것일까? 1948년 국제연합에서 본인들이 제안하고 법제화한 집단학살금지조약 즉 ‘제노사이드조약’(genoside 條約)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남한 정부의 꼭두각시들에게 무차별 난사를 지시한 미군정은 70년이 지나는 동안 단 한 차례도 사죄하지 않고 있다는데 분노가 치밀었다.


제주에 새겨진 그 날의 상처, 오페라로 풀어내다

오페라 ‘순이삼촌’은 북촌리의 학살을 재현한 작품이다. 창작 오페라는 지루하고 재미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린 오페라 ‘순이삼촌’은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일반적인 재미와는 다른 감정이다.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 시각과 청각을 압도했다.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의 점진적인 클라이막스에서 김수열 대본 작가의 섬세한 구성력과 필치가 느껴졌다. 집단학살로 들어가는 시간의 터널은 꽤 길었지만 어쩐 일인지 속도감이 느껴졌다. 현기영 작가의 소설 구도를 따라 북촌마을 전체가 제삿날인 현재 상황에서, 과거의 실체적 진실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물론 그 매개체는 순이삼촌(소프라노 강혜명)이다. 그녀가 유독 순경과 경찰을 무서워하는 모습에서 열쇠를 꽂고 트라우마의 원인인 ‘집단학살’의 과거 현장으로 관중을 끌고 가는 구도였다.
영문도 모른 채 북촌초등학교 강제 소집된 마을 주민들 사이에는 순이삼촌과 오누이도 끌려왔다. 군인들은 일주 도로변 4개의 밭에 나뉘어 소개하고 마을은 모두 불태워버렸다. 순이삼촌의 기억은 청중들을 바로 이 살육의 현장으로 끌고 온 것이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의 참극이 벌어졌다. 흉탄의 굉음은 바다와 한라산 천지를 진동했다. 양민들은 바람에 쓸리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고꾸라졌다. 순이삼촌도 쓰러지고 탄피는 오누이의 육신을 갈가리 찢었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순이삼촌은 살아났지만 시체들을 헤집고 땅을 칠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누이만 잃은 게 아니라 그이의 넋은 언어를 망실하고 만다. 강혜명의 ‘광란의 아리아’는 슬픔이 극에 달했을 때 말이 떨어지지 않는 무아의 ‘언어도단’(言語道斷)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라는 모음 하나로 그 많은 슬픔을 담아내는 연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강혜명의 ‘광란의 아리아’는 제주도 ‘역사의 동굴’에 덩그러니 누워있는 이름 없는 빈 비석 ‘백비(白碑)’요, 바다에 수장 학살되거나 제주 비행장에서 총살 암매장되어 나중에는 누구의 시신인지 구분할 수 없어 하나의 매장지로 이름 지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에 다름 아니었다. 스탈린은 한 명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고 말했지만, 여기 백비는 그 통계조차 낼 수 없는 무한대의 슬픔을 기록하고 있다.
오페라의 화자는 순이삼촌과 먼 친척 조카뻘인 ‘상수(김신규)’로 다행히 집단학살 당시 순이삼촌에게 떠밀려 동굴에 피신하는 바람에 살아남은 어린 꼬마였다. 집단학살에서 용케 생존한 마을 주민들은 3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견벽청야의 노예들로 전락해야 했다. 유격대의 먹이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이유로 소와 돼지까지 싸그리 불태워 죽였기에 식량 따위는 구할 수 없었다. 그 아사 직전 상태에서 빨갱이 유격대들이 마을에 내려오지 못하도록 견고한 성을 쌓는 노역에 동원된 것이다. 이 성의 보초병으로 나선 예닐곱의 ‘상수’와 ‘길수’의 노래는 비극 속에서도 누군가는 사랑을 잃지 않는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노래를 어찌나 깜찍하게 부르는지 얼음장 같은 오페라에 잠시나마 훈훈한 아랫목을 떠올리게 했다.


탁월한 연출로 생생하게 전달하는 살아남은 이들의 아픈 기억

옴팡밭에서 혼자 살아남은 순이삼촌에게 ‘학살의 기억’은 평생의 족쇄가 됐다. 30년이 지났지만 ‘학살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에게 ‘이승’이란, 군홧발 소리와 총탄 소리, 아비규환 속 단말마의 절규, 시체를 찾아다니는 까마귀 소리, 오누이가 자신을 부르는 환청 소리, 그리고 30년 전 순이삼촌을 비켜 간 총탄의 유혹뿐이었다. 순이삼촌은 끝내 이승과의 인연을 끊고 자식들을 따라간다. 옴팡밭에서 약을 먹고 절명하는 순간, 광란의 아리아 이상의 인상적인 퍼포먼스로 슬픔의 깊이를 더했다. 휘어 퍼포먼서가 등장해 ‘기메’를 너울너울 휘두르며 혼백을 기리는 모습과 무용가의 진혼춤 위무는 영혼의 떠남을 더욱 애절하게 했다.
4.3사건이 얼마나 참혹했는지는 퍼포먼스만으로 보여준 것은 아니다. 전 출연진들이 기립해 마지막 합창곡 ‘이름 없는 이의 노래’를 부를 때였다. 4살짜리 어린아이들부터 5살, 6살 등 죽은 희생자들의 명부가 거대한 스크린 위로 스크롤 될 때 진정 폭도와 살인자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했다. 저 아이들을 죽인 자, 살인자들이다 !
창작 오페라 ‘순이삼촌’은 전반 90분 후반 50분 총 140분, 리허설 20분까지 포함하면 3시간에 달하는, 호흡이 무척 긴 오페라다. 그러나 길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초연에 비해 불필요한 부분을 줄인 덕도 있지만 무엇보다 비극이 주는 감동의 여울이 끝까지 마르지 않도록 연출한 이상용과 최은숙 협력 연출의 덕분이다. 순이삼촌의 비장미를 살린 건 뛰어난 연기와 노래도 있지만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최정훈 작곡가의 화성과 멜로디는 일품요리와 같았다. 창작 오페라에 대한 오해를 일소하고 군더더기 없는 음악으로 초보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법을 구사했다.
오페라의 상당 부분은 연극적인 요소가 있지만 연극이 아니라 하나의 영화를 보듯 연기를 능숙하게 잘했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고 싶다. 연극은 말 그대로 작위적인 동작과 연출적 냄새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 출연한 극단과 합창단 무용단 모두 그런 연출적 흔적을 탈색하기로 작정한 양, 참으로 자연스럽게 연기했다는 점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김홍식 지휘의 제주도립교향악단의 선전은 오페라 ‘순이삼촌’의 성공에 크게 기여한 출연진으로 손꼽고 싶다. 단원들이 마치 악보를 통째로 외운 양 자신감이 넘쳤고 성악가의 음량을 잘 계산한 듯 음량의 크기 조절에도 능란했기 때문이다.
다만 자막을 넣지 않고 대사를 나눌 때는 음향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1층은 모르되 2층에서는 자막이 없는 연극적 대사를 제대로 인지하기 어려웠기에 다소 안타까웠다. 또 비극을 전달하기 위해 중요도가 낮은 부분은 대사로 처리한 부분이 많았지만 오페라 전체 분량에 비해 아리아가 부족하다는 느낌은 나만의 생각일까?
‘순이삼촌’은 이념 오페라가 아니다. 그 당시는 그 이념 때문에 죄의식 없는 인간 말종의 학살을 자행했지만, 기본적으로 ‘인간 존중’, ‘인권’에 대한 의식이 없기에 벌어진 참극이다.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 양민들을 학살하라는 파병 명령은 받은 제14연대는 “동포를 죽일 수 없다”며 이를 거절했다. 문형순 제주 성산포경찰서장은 1950년 8월 예비 검속자들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글을 쓰고 대량 학살을 거부했다. 인권에 관한 한 한나 아렌트가 언급한 ‘아이히만’ 같은 사람, 제주도민의 학살에 앞장선 9연대 ‘송요찬 연대장’ 같은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1949년 1월 21일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사태 등을 가혹하게 탄압하라”고 명령했다. 히틀러의 집단학살 명령과 똑같은 명령이다. 여전히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이 인간의 정체는 대체 언제나 드러날까 ?

평 김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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