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머슨 스트링 콰르텟, 라스트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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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7일 토요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난 3월 목관에서 레 벙 프랑세였다면 현악에서의 에머슨 콰르텟 역시 경건, 경이, 경외의 경지요 감동의 극치였다. 불 꺼진 관객석에 오직 무대만 비추는 조명, 숨죽이면서 소리에만 집중하고 감상하는 정통 클래식 공연의 진수였다. 첫 음을 내는 순간 경탄과 함께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히 이들 연주를 평할 수 있을까? 세계 최고의 현악4중주단의 연주를 이렇게 들을 수 있는 자체가 축복인데 그저 듣고 감복하면 되지 가타부타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음악에서 일가를 이룬 이들의 신념이 고스란히 묻어난 격조 높고 고결한 무대였다. 존경심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강약과 완급조절, 현을 그어 낼 수 있는 절정의 고유 음색, 소리를 통한 대비와 대조의 절대화, 철저한 논리와 구도가 밑받침이 된 형식미, 보잉과 피치카토의 확연한 차이, 안정된 호흡과 밸런스, 현악4중주의 교과서이자 퍼셀로 시작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으로 장식한 고전음악의 정석이었다. 작곡가인 필자는 난생처음으로 연주자들에 의해 연주 그 자체가 작곡이 되고 행동이 아니라 존재에 목적이 되어 그 존재를 드러내가는 경지를 체험한 순간이었다. 에머슨 콰르텟이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 자체라는 걸 실감케 하는 시간이었다.

4중단의 배치는 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첼로-비올라 순으로 소리의 위계보다는 전 음역대의 구성을 더 탄탄히 하였다. 2부의 베토벤에서는 1부의 퍼셀, 하이든, 모차르트에서 퍼스트를 하였던 유진 드러커와 필립 세처가 자리를 바꾸었다. 두 명이 서로 스위치(제대로 된 뉘앙스 전달을 위해선 왠지 꼭 이 영어 단어를 써야 될 거 같아서 그런거니 독자 여러분들은 부디 해량하시길~~) 한 거뿐인데 전혀 못 알아볼 정도로 음색이 변했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라고 여긴 1부에 비해 2부 베토벤의 8번 <라주몹스키>에서는 필자의 귀도 이제 건방지게 어느 정도 적응했어버렸고 그들도 인간이기에 음정도 흔들리고 집중력도 떨어지긴 하였지만 반대로 또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작곡가들은 절대 현악기의 고음을 함부로 쓰지 말지어다. 그건 어느 누구도, 기계가 아닌 바에 완벽하게 음정을 낼 수 없다는 방증이었다. 에머슨이 잘못 낸 게 아니라 베토벤이 잘못 무리하게 쓴 것이라는 말이다.

사생팬도 없고 초대받아 그저 머릿수 채우러 온 어중이떠중이 관객들의 틈바구니가 아닌, 장소와 환경에 억지로 맞춘 게 아닌 그저 편안히 최상급의 음악을 실황으로 감상할 수 있는 천국이었다. 거기엔 분노도, 짜증도, 속세의 번잡함과 시끄러움도, 무뢰한도 없이 유일하게 천상의 음악과 에머슨만 있었다. 흥과 신명의 민족, 트로트의 나라에서 클래식 음악을 가지고 어떻게라도 먹고 사려고 혁신이네, 대중화네 발버둥 치면서 죽은 자식 xx 만지기를 하는 발악이 아닌 진정한 클래식 음악은 이런 것이라는 걸 보여주고 들려주는 그 자체였다.

빈번한 무대 출연, 평단과 학계에서의 인정, 대중들로부터의 갈채와 환호, SNS에서의 관심집중과 폭발하는 조회수와 좋아요, 그래서 얻게 되는 부와 명예를 갈구하면서 청중이 넘치는 페스티벌과 유명한 무대에서 명망 있는 음악가들과 함께 연주하고 스타로서 명성을 누리는 삶, 먹고사는데 함몰되어, 성공에 도취되어, 남보다 우위에서고 싶은 마음에, 대중들의 칭찬에 목말라, 인정을 받고 자기만족에 빠지고 싶고 그걸 또 성공이라 여기는 세간의 인식에 합류하여 얼마나 본질에서 멀어지고 있는가! 요즘 세태에 오직 음악을 사랑하고 열정을 다해 이 세상과 부딪혀 가며 자신의 이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라고 에머슨 콰르텟을 준절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었다. 에머슨 스트링 콰르텟의 라스트 댄스에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가 행운이요 영광이자 다시는 이들의 연주를 듣지 못한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다. 그동안 고마웠고 어디에 있든 항상 건강히 계속 개인적인 활동을 이어가길 기원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또 음악으로 서로 만날 수 있을테니…..

평 성용원(작곡가,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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