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섦과 익숙함, 그 공유와 공존의 장 ‘불가리아 프로쉬 현악사중주단 초청 음악회’

20

11월 4일 (토) 오후 4시 30분 푸르지오 아트홀

교류의 의미, 2023 동서악회 & 소피아 뮤직위크 국제교류

서유럽을 중심에 둔 서양 클래식 음악은 오랫동안 다른 문화권과 접촉하면서 그 역사를 이어갔다. 가까이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동유럽부터 러시아, 아랍, 그리고 멀리는 중국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이를 ‘교류’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대부분 자국의 문화를 전파하는 권력적 속성을 지니거나, 호기심 어린 이국주의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타문화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그 한계를 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 되어서였다. 산업혁명으로 교통과 통신이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벨 에포크’, 이 시기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에서는 산업 발달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비유럽권의 문화예술 행사와 전시도 함께 이루어져 그 정확한 실체를 확인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른 문화와의 접점의 폭도 넓어졌고, 대중의 취향도 빠르게 변해갔다. 문화의 공급자였던 유럽의 예술가들이 문화의 수용자가 되었고, 심지어 타국의 음악 언어를 자신의 주요 음악 언어로써 사용하는 작곡가도 있었다. 진정한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서유럽은 문화의 중심에 있다. 혹은 그렇게 간주되고 있다. 독일에서 한 한국인 유학생이 받은 질문, 너희 나라에도 음악이 있을 텐데 왜 음악을 배우러 이렇게 먼 나라로 유학을 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분명 시사점이 있다. 왜 그 지역이 인류문화의 중심이 되었는가? 다른 지역은 문화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 글은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서유럽과 무관하게 문화의 다양성과 그 예술적 가치가 충분히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점에서 동서악회가 불가리아에서 열리는 소피아 뮤직위크와 국제교류를 갖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혹시 불가리아에도 음악이 있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할 사람이 있을까? 우리에게 낯설다면 이것이 교류할 이유이고, 우리에게 익숙하다면 보편성의 공유를 위해 교류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소개하고 배우는 지향성이 아닌,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무지향성 교류도 기대되었다.

한국 작곡가의 작품

작년에 이어 열린 동서악회와 소피아 뮤직위크의 교류는 먼저 불가리아에서 한국의 연주자들과 현지 연주자들이 앙상블을 이루어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였으며, 서울에서는 여러 한국 연주자들의 한국 작곡가 작품 연주와 함께 불가리아 프로쉬(Frosch) 현악사중주단이 불가리아 작곡가들의 현악사중주 작품을 연주했다.
본 공연에 앞서, 소피아 국립음악원 교수이자 소피아 뮤직위크 재단 대표인 몸칠 게오르기에프(Momchil Georgiev)의 세미나(김수미 선생 통역)로 시작되었다. 그는 여러 불가리아 작곡가와 음악을 소개했으며, 연주 녹음도 함께 들려주어 관객들이 더욱 빠르게 이해하도록 도왔다. 20세기 초 동구권의 음악 경향을 담은 작품부터 민속적인 선율을 클래식 음악의 구조에 담은 작품까지, 게오르기에프 교수는 낯섦과 익숙함이 공존하는 또 하나의 세계와의 만남을 이끌었다.
음악회의 전반부는 세 명의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선보였다. 프로그램은 서정성과 현대성, 그리고 전통악기 연주 등 오늘날 음악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첫 곡으로 류경선 작곡가(*1972)의 피아노 모음곡 ‘스페인의 향수’(피아노: 윤혜성)가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2018년 여름에 스페인에서 보았던 물과 햇빛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인상주의 회화를 보는 듯한 환상을 펼쳐놓았다. 시간 관계상 제1곡은 연주되지 못했지만, 제2곡 ‘물의 표면에서 반짝이는 햇빛’은 고음역의 롤링와 저음역의 아르페지오의 병치로 빛과 물이라는 두 세계의 만남을 감각적으로 들려주었고, 제3곡 ‘물의 파장’은 진지한 분위기에 주술적인 그늘이 그리워져 있다. 제4곡 ‘물의 전쟁’은 앞의 두 곡과 다른 극적인 긴장감으로 시각적인 자극을 불러일으켰으며, 제5곡 ‘작열하는 햇빛’은 빠른 제스처와 침묵 속에서 여운의 연결로 한 발짝도 내딛기 힘들게 하는 강렬한 햇빛을 상상하게 했다.
이어지는 곡은 김종균 작곡가(*1972)의 플루트와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를 위한 사중주곡 ‘리좀 1번’(Rhizome I)(플룻: 김유경, 바이올린: 장새봄, 첼로: 어철민, 피아노: 노애리)이 세계초연되었다. 이 곡은 들뢰즈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서, 음악을 감상하면서 그 의미와 연결하는 것은 분명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유기적인 연결과 교차를 통해 여러 악기들이 다성부적으로 얽히며 발전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었으며, 단일한 아이디어로 14분을 이끌어가는 생명력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간혹 얼굴을 내미는 전통음악적인 리듬은 우리에게는 친근함을, 불가리아인들에게는 새로움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전반부 마지막 곡은 최영아 작곡가(*1967)의 대아쟁 이중주곡 ‘영관’(대아쟁1: 이화연, 대아쟁2: 이신애)이었다. 본래 ‘영관’은 종묘제례악의 일부로서, 최영아의 ‘영관’은 이 곡을 포함하면서 여섯 개의 변주적 에피소드를 연결했다. 그렇기에 아악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한껏 표현하면서, 뒤이어 여러 변주에서 전통음악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과 함께, 전통악기인 대아쟁의 연주 가능성과 그 확장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전통적인 연주 스타일과 서양 음률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에 대한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불가리아 작곡가의 작품

후반부는 불가리아 작곡가들의 현악사중주곡으로서 네 곡의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연주를 위해 내한한 프로쉬 현악사중주단은 불가리아를 대표하는 정상급 앙상블로, 고국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을 무대로 탁월한 성과를 얻고 있다. 그들은 강렬한 에너지로 포효하는 듯한 음향을 들려주며, 음악회장을 소리로 가득 메우는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녔다.
첫 곡으로 판초 블라디게로프(Pancho Vladigerov: 1899~1978)의 ‘세 개의 수채화’가 연주되었다. 블라디게로프는 국내에서도 종종 연주되어 익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서유럽의 세련된 표현과 슬라브의 감성이 어우러져 있어, 스메타나와 야나체크 등을 계승한 듯한 이미지도 엿보인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분명한 또다른 세계를 그리고 있으며, 그것이 곧 불가리아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1악장 ‘작은 전주곡’은 민속적인 선율에 율동적인 리듬으로 생기를 불어넣은 후, 2악장 ‘멜랑콜리’는 슬픔의 범위에 있는 다양한 정서들을 들려주었다. 3악장 ‘춤’에서는 격렬하지만 과장하지 않고 ‘좋은 소리’를 위해 정제된 치밀함을 보여주었다.
이어서 마린 골레미노프(Marin Goleminov: 1908~2000)의 <현악사중주 4번 ‘미소사중주’>가 연주되었다. 이 곡은 제목처럼 짧은 길이에 간결하고 집중된 표현을 들려주었다. 1악장은 절도 있고 공격적인 제스처로 단번에 좌중을 압도했으며, 2악장은 슬픔의 정서에 열정과 섬세함을 더했다. 특히 첼로의 피치카토-글리산도의 효과는 효과적이었다. 3악장은 네 악기가 서로 다른 특징적인 제스처를 연주하면서도 한 몸인 듯 일치하는 호흡을 보여주었으며, 4악장은 이완 없는 에너지로 곡이 마치는 순간까지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브링카 타바코바(Dobrinka Tabakova: *1980)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해변에서’는 박자를 가늠하기 힘든 특징적인 제스처로 악기들이 수다스럽게 대화했다. 이러한 경우는 네 연주자의 완벽한 호흡이 요구되는데, 프로쉬 사중주단은 오히려 자신감 넘치는 보잉으로 거침없이 경쾌하게 표현하며 환상적인 앙상블을 보여주었다. 이 곡의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인상적인 연주였다.
마지막 프로그램은 게오르기 안드레에프(*1969)의 <현악사중주 1번 ‘쇼프스키’>였다. 1악장은 저음 악기의 정박 리듬 위에서 자유롭게 연주하는 선율이 매우 흥미로웠으며, 잦아드는 부분조차도 강렬함을 유지했다. 극음악 작곡가로서 리듬의 병치로 극적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생명력을 끓어오르게 하는 남다른 솜씨가 엿보였다. 2악장은 마치 서로 다른 새들이 지저귀는 듯 자유분방하지만, 밀도 있는 음향으로 하나의 목적을 바라보는 유대관계를 갖고 있다. 3악장은 기계적인 추진력으로 돌진하며, 프로쉬 사중주단의 에너지가 이 마지막 순간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의미 있는 교류의 장

이번 동서악회와 소피아 뮤직위크의 교류 연주회는 서로 다른 문화권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서로 잘 알지 못한 음악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었다. 음악회의 프로그래밍도 소개와 수용의 관점이 아닌, 낯선 이질성과 익숙한 보편성의 공유와 공존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양국의 음악가들에게, 그리고 애호가들에게도 각자의 시각에서 흥미를 끄는 지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작곡가의 음악은 동시대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반면에, 불가리아는 역사적인 흐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음악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음악의 역사성 부재와 불가리아 음악의 다양성 부재로도 읽힐 수 있다. 이 관점을 맞췄다면 더욱 또렷한 시사점을 주었을 것이다.
이제 두 해 동안 양국의 작곡가와 연주자들이 합동 공연을 가짐으로써 교류를 실행했다. 이제는 세미나와 공연을 넘어, 교류의 시간 이외에도 각자의 나라에서 양국의 작품이 레퍼토리로 정착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교류의 이유이고, 또한 그것이 교류의 최종 결과물이다. 다음 교류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에 대한 방법도 함께 찾기를 기대한다.

評 송주호 (음악칼럼니스트)

Loa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