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황제’ 마우리치오 폴리니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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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정확히는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체르니 류의 연습곡을 넘어 쇼팽의 에튀드를 치게 되고 접한 첫 번째 음반이 폴리니의 쇼팽 연습곡 전집이었다. 당시 중2 학생들의 수준을 압도적으로 제압한 넘사벽이었다. 폴리니의 음반은 인간의 경지가 아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필자뿐만 아니라 90년대에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대부분의 피아노 전공생들은 폴리니를 통해 쇼팽의 에튜드에 입덕하게 되고 그걸 본받아 더욱 열심히 연습에 매진하였다. 필자도 없는 용돈 쪼개서 처음으로 CD를 구매, 닳고 닳도록 들었던 폴리니가 연주했던 쇼팽 에튜드 전집이었다. 그런 그가 3월 23일 향년 82세로 아내 말리사와 음악가인 아들 다니엘레가 지켜보는데 가운데 밀라노의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건축가인 지노 폴리니의 아들로 1942년 밀라노에서 태어난 폴리니는 5세에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고, 1960년 18세의 나이로 세계 최고 권위의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만장일치로 우승하며 세계 클래식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때 심사위원이었던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은 “저 소년이 우리 심사위원들보다 더 잘 친다”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쇼팽 콩쿠르 우승 이후, 콘서트를 거의 하지 않고 약 10년 동안 아르투르 미켈란젤리를 사사하는 등 연찬을 거듭한 후 1971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 3악장 녹음을 발매하며 권토중래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다시 들어도 화려함과 완벽함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1970년 스튜디오 녹음으로 카세트 테이프를 복각한 음원인데 날 거 그대로 생생함이 모니터를 뚫고 나온다. 당시 AI는 분명 없었을텐데 악보와의 싱크로율이 정확해서 기계와 같다. 그래서 너무 완벽하다 보니 사이보그와 같은 차가움이 느껴지는 걸까?

철저히 악상을 지킨 교과서적인 표본으로 유명한 쇼팽 <에튀드>는 완벽하고 깔끔한 테크닉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10-5의 ‘흑건’에 이어 필자에게 절망을 안겨주었던 10-4까지…. 세월의 빛을 발한 이 음반은 쇼팽의 에튜드라면 자연스레 연상될 불멸의 음반이다. 쇼팽 에튜드라고 한다면 폴리니가 떠오르게 만든 폴리니 이후로도 수많은 연주자들이 전곡 녹음을 남겼지만 어느 누구도 폴리니의 벽을 넘지 못한 금자탑이다. 폴리니의 쇼팽 에튜드 음반은 오늘에도 여전히 다시없는 감동이다. 안타이오스가 땅에서 일어날 때 그러듯 필자도 피아니스트들도, 아니 쇼팽의 음악을 듣는 모든 이들이 폴리니를 통해 전신 목욕하면서 새로이 충전되어 다시 삶으로 비상한다. 빌리 슈가 펴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저서 <사색과 기억>(Betrachtungen und Erinnerungen)에서 인용

<연습곡집>이 폴리니의 초인적인 면 때문에 기가 죽는다면 쇼팽의 <전주곡집>은 폴리니의 이성과 감성, 차가움과 따뜻함,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이 공존해 있어 온화하다. 쇼팽의 <연습곡집>이 기교 향상과 연마를 위한 목적에서 시작했다면 <전주곡집>은 착상과 아이디어 전개라는 자유로움에 기반한 작품이니 그런 작품들의 특성이 연주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할 수 있겠다.

28-4에서의 담담함과 28-7의 간결함에 푹 잠겼다가 28-9에서의 늘어지지 않은 담백함이 좋다. 쇼팽의 소나타 2번 4악장을 듣는 듯한 28-14와 롤러코스터와 같은 아찔함이 매력인 28-16 등 폴리니만의 매력을 각각의 전주곡에 담아내면서 독창적이지만 신선하다. 여기서 폴리니와 AI의 궁극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즉 음을 연주하는 것이 아닌 아이디어와 영감이 넘쳐나는 작곡가가 원하는 것을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 그 기록물인 악보를 잘 읽어내는 것, 자신의 실력을 뽐내는 것이 아닌 작곡가의 의도를 찾아내는 능력을 기르는 것, 자신의 기량이란 이러한 충실한 기반 위에 부리는 거라는 가르침이 진실한 피아니스트가 폴리니였기에 그의 화려한 테크닉 또한 더 빛나지 않나 싶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기도 하였는데 그중 17번 <템페스트>, 21번 <발트슈타인> 그리고 26번 <고별>을 수록한 음반은 쇼팽이 아닌 고전음악에도 정통한 폴리니의 면모를 확인 할 수 있는 명반이다.

특히 <템페스트>에서의 극적인 맥락과 스토리텔링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으며 이탈리아적인 분절과 시적 상상력이 풍부한 표현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게 다시금 폴리니만의 음색과 아우러져 있다. 이 음반이 또 특히 기억이 남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역시나 중학생들이 향상음악회나 콩쿠르 또는 입시에서 단골로 연주하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폴리니는 이렇게 한국의 어린 학생들에게 피아니스트로서의 관문이랄 수 있는 곡들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를 보여주는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1막 2장에서 비너스산을 떠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는 탄호이저의 말을 듣고 놀라 외치는 비너스의 유명한 대사.

동향인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친밀하여 함께 많은 콘서트와 녹음을 하였는데 그 중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도 기억에 남는데 5번 <황제>를 들으면 1악장에서의 당당함과 2악장의 서정성 3악장의 생기발랄함이 고전파 정형미를 조화롭게 형성하고 있다. 아래는 음원링크다.

글을 마치며: 2022년 5월, 처음으로 내한해 예술의전당에서 두 차례 공연할 예정이었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2023년 4월로 연기되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재차 취소되었다. 결국 영원히 한국에 오지 못하고 2024년 3월 23일 8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한 번도 실황으로 그의 공연을 접하지 못해 원통하다. 추도사를 쓰는 내내 그가 연주한 쇼팽 소나타 2번의 3악장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이 곡이 지금 폴리니보다 더 자격 있는 사람을 위해 연주된 경우는 드물 것이다. 폴리니의 영면을 기원한다. RIP 마우리치오 폴리니 1942.01.05 ~ 2024.03.23.

글 성용원(작곡가, 월간 리뷰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