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으로 디자인을 끌어안고 디자인에 음악을 입히다

106

경기대 예술체육대학 시각정보디자인 전공 한숙현 교수

디자인학부 내 최초의 음악전공 교수

너무 흔히 들어서 그 신비감이 떨어지는 세계가 있다. 온 세상이 ‘융복합’을 해야만 살아남는다고 주장한지 꽤 오래되었다. 그래서인지 어디서든 융복합이 대세인 듯 착각한다. 기업가 정신을 철저히 무장한 기업 세계라면 부서간의 벽을 허물고 멱살을 잡으며 연합하도록 강제할 수는 있지만, 각자의 연구 영역이 분명한 학문의 세계에서 강철같은 ‘다름’의 벽을 녹여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20년 전의 일이다. 선진 예술교육을 이끌겠다며 한 예고에서 미술반과 음악반 선생님들이 교차수업을 한 적도 있고, 나아가 전공이 다른 학생들이 연례 ‘페스티벌’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을 협업하게 하고 합동 무대를 펼치는 예고도 있었다. 덕원예고와 선화예고, 경기예고 등에서 시행했던 수업과 페스티벌들이다. 지금도 그런 수업이 계속 펼쳐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수업 방식임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교차수업이나 과제 중심으로 수업을 한다고 해서 과연 융복합수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왜 학교에서 융복합 수업으로 인한 결과물이 산업현장으로 파급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수업은 그저 수업일 뿐이다. 선생님들이 특정 목적을 위해 잠시 교차수업을 한다고 해서, 또는 페스티벌을 목적으로 협업수업이나 활동을 한다고 해서 음악전공생들이 미술과의 안목을 갖고, 그 반대로 미술과 학생들이 음악적인 시각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제체시온(Sezession), 즉 기존 예술과의 단절… 여기서는 자기만의 예술만 고집하는 평행선적인 장르와 단절하고 새로운 융복합의 길로 들어서려면 약간의 실험적인 방식만으로는 그 길을 닦을 수 없다. 기존 방식을 끊어야 한다. 19세기에 유럽에서 발생했던 ‘아르 누보’나 ‘유겐트 양식’은 제체시온을 강하게 실천했기에 가능했던 미학 운동이지 않았는가.
사실 더 나은 미학의 진보를 위한 설법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베토벤은 ‘아름답기 위해 비틀지 못할 규칙은 하나도 없다’고 했다. 세계가 융복합을 원한다면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말과 같다.

플루트 공부에 최선을 다했던 대학시절

예술융합 패러다임의 실천적 사례

경기대의 예술체육대학 시각정보디자인 전공은 분명 미술과 계열에 속한다. 그런데 디자인비즈학부 시각정보디자인전공에 이 전공과 전혀 관계없는 교수 한 명이 임용되었다. 교수들 전원이 미술과 디자인을 전공한 교수들이고 학생들 역시 미술 전공생들이지만 이들과 협업하고, 가르쳐야 할 교수 중에 음악을 전공한 교수가 임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플루트를 전공하고 ‘위대한 청춘’ 등 특화된 공연의 음악감독으로 일했고 음원 제작 및 스트리밍과 유통 비즈니스 등 주로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해오던 한숙현 교수가 이번 학기에 조교수로 채용된 것이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석사와 박사를 공부하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해왔거든요. 그러다가 한양대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쯤에는 색상과 음악, 음악과 디자인 분야에 천착해 이와 관련한 논문을 쓰는 등 융복합에 적확한 공부를 했습니다. 아마 그 결과를 경기대에서 인정해 주었던 것 같아요.”
교수가 임용됐다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한숙현 교수에게 포커싱되는 점은 좀 다르다. 미술과 안에 음악 전공 교수를 정식 교원의 자격으로 투입했다는 점에서 경기대로서도 하나의 ‘제체시온’이고, 한숙현 교수 역시 음악을 전공했지만, 그동안 가르쳐왔던 음악 관련 전공생들과는 전혀 다른 미술전공생들과 호흡을 맞춰야 한다는 점에서도 본인의 인생에서 분명 ‘제체시온’이기 때문이다.
디자인비즈학부 내에 타 전공을 지위가 보장된 교수로 임용했다는 점에서 그동안 명품대학을 추진해온 경기대로서는 다른 대학에서 시행하지 못한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제가 정확한 데이터는 갖고 있지 않지만, 미술과 안에 음악을 전공한 교수를 채용한 사례는 처음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고요. 더 많은 논문발표와 연구로 타 대학의 모범이 돼야 하겠죠.”
대학은 물론이고 각종 예술단체나 기관, 심지어 일상생활에서조차 ‘컨버전스(convergence)’ 또는 ‘예술융합’이라는 푯말이 문패처럼 일반화돼 있다. 그러나 그 실천의 겉옷을 벗기고 속살을 살펴보면 그저 구호에 그친 곳이 대부분이다. 여전히 ‘내 장르’라는 프레임에 갇혀 타 전공과의 연합을 긴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의도적인 무시, 냉대, 차별화라는 알몸이 있을 뿐이다. 융합교육이라 해도 미술과 학생들이 교양으로서 음악수업을 듣거나, 음악과 학생들이 역시 미술수업을 받는 정도에 그치는 곳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사실 대학에서 융합교육을 목적으로 지원을 요청하면 더 큰 혜택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성의 교수들이 움직이는 일은 매우 드물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기대학의 이번 임용은 미래 예술융합교육에 커다란 이정표가 될 것 같아요.”

출판기념음악회에서 연주

한숙현 본인의 삶도 제체시온의 길

그런데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타 대학과의 차별화를 위해 음악전공 교수를 임용했을까? 음악 전공 분야에서 아무리 실력이 출중해도 디자인 분야에 대해 몰이해하다면 사실상 미술전공생들과 소통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음악을 전공했지만 미술과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지식, 나아가 디자인비즈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사업적인 안목도 갖춰야 한다. 대학 측에서는 이런 다양한 요소를 겸비한 교원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한숙현 교수는 숙명여대에서 플루트를 전공한 후 어떤 공부를 하면서, 어떤 일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왔기에 경기대의 눈에 깔맞춤되었을까? ‘천년의 내공’에 ‘개미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하니 분수를 모름이 가소롭다’는 말이 있다. 외국유학을 다녀오지 않고 국내 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쳤기에 머나먼 타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도 교수가 되기 힘든 상황에서 한숙현이 교수로 채용되는 일은 어쩌면 당랑거철과 같은 일이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한숙현 교수의 길 자체도 제체시온의 긴 도정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어제까지 걸어왔던 길의 꼬리를 자르고 과감하고 거침없이 다른 일을 시도해 왔기 때문이다. 이어령 선생님이 해석하듯, 한숙현은 안정적인 어느 한 분야의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게 아니라 에덴동산을 스스로 버린 아담과 이브처럼’ 새로운 길을 늘 모색해왔다. 그 경험치들이 모여 음악과 미술에 걸친 수륙양용 전문가가 된 것은 아닐까?
“대학에서는 기악을 전공했지만, 석사과정은 음악교육학을, 박사과정은 교육학을 전공했거든요. 그런데 학위자들이 원논문과 부논문만 준비하는 게 일반적인데, 한양대 내규는 졸업기준이 소논문 3개 원논문 1개여서 그 당시에는 준비하느라 힘들었는데 그 덕분에 지원자격이 갖춰지고, 다행히 박사학위 논문도 음악에만 초점을 맞춘 게 아니라 색채를 주제로 잡았거든요. 이런 점들이 융합예술에 맞아떨어졌던 것 같아요. 게다가 미디어와 음악이 함께하는 영상음악콘서트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던 경험들이 인정받지 않았을까 싶어요. PT의 주제도 영상음악 콘텐츠였습니다. 요즘은 미디어콘텐츠가 대세이기도 하니, 상당히 운이 좋았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호기심으로 들었던 청강 수업들을 전공과 연계해서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 가슴이 뜁니다. 분명 저같이 엉뚱하지만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이 있을 거예요. 이제는 수업을 통해 그런 학생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잖아요. 융복합이라는 키워드로 저도 더 공부할 계획입니다.”

한국공연예술포럼 회원으로 세미나 참석

늦게 시작한 악기, 스스로 잘한다고 착각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한숙현 교수는 음악전공자가 디자인비즈과의 교수가 되었다는 점을 딱히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을 전공하면서도 융합예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자는 부탁을 받아들이면서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만약 한 교수가 음악 일변도의 길만 선택해서 활동해왔다면 융복합의 세계와는 다른 길을 갔을 것이다. 그 역시 처음 음악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대부분 음악전공자들이 꿈꾸듯 최고의 아티스트가 목표였다.
“음악대학을 진학할 때에는 세계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오케스트라 단원처럼 안정적인 아티스트를 꿈꾸기 마련이죠. 처음에는 이은영 선생님과 최광순 선생님을 만나 한 달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고등학교 때 플루트를 시작했어요. 학교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최소 지방대 정도는 무난할 것 같았습니다. 뭐… 솔직히요. 그런데 플루트를 공부하기 시작하자 선생님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다른 아이라면 6개월간 배워야 할 과정을 1개월 만에 습득했거든요. 역시 다른 학생들이라면 2, 3년 동안 공부해야 할 내용을 1년 만에 따라잡았거든요. 저도 신기했습니다.”
당진이라는 곳에서 고2에 들어서야 처음 플루트를 시작했기에 수도권 대학 입학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입시전문가라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천안과 대전을 오가며 더블레슨을 하고 나중에는 서울에 올라와 본격적인 입시공부를 한 끝에 숙명여대에 입학했다. 그것도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그러니 스스로 음악적 재능이 있다고 착각할 만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대유행이던 ‘1만 시간의 법칙’을 굳게 믿었다. 대학 입학까지 플루트로만 1만 시간은 안되었지만, 중학교 때까지 열심히 연습했던 피아노까지 고려하면 1만 시간은 족히 넘었다. 어린 나이에 연습만 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음악은 결국 재능의 여부

대학 1년만에 깨달은 또 다른 사실은 연습과 노력만으로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믿었던 1만 시간의 법칙이 ‘재능’ 앞에서는 쓸모가 없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기에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했다. 실력 향상을 위해 스스로 유명 캠프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연습해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핑거 스킬은 쉽게 따라갈 수 없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가 악기의 차이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저보다 실력이 뛰어난 친구의 악기가 백금악기였거든요. 그래서 저도 백금은 아니지만 좀 더 좋은 악기, 이전보다 더 비싼 악기로 교체했습니다. 그런데 악기를 바꿨다고 근본적으로 실력이 향상되지 않았습니다. 미치겠더라고요. 실력이 악기 차이에 있다는 생각은 정말 착각이었습니다. 사실 스스로 뛰어넘을 수 없었던 그 한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악기 핑계로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악기가 마찬가지겠지만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배운 친구들, 또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아이들은 뛰어넘을 수 없다는 걸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손가락이 이미 굳은 시기에 악기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은 특별한 재능이 없는 한 안되는 것은 안되는구나 했습니다.”

제주해비치아트페스티벌에서 ‘위대한 청춘’공연

아티스트 목표 버리고 대신 새로운 길 모색

본인이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 교수는 1만 시간을 투자했는데 실력이 제자리라면 재능이 없는 게 확실한 만큼 세계적인 아티스트로서의 꿈은 접어야 한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한숙현 역시 진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단 짧은 시간에 제대로 배운 게 없으니 해외에서라도 나가 다른 사람에게 배우고 결정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2001년 어학연수 겸 악기공부를 위해 호주를 선택했다.
“다시 돌아와 복학했을 때는 아티스트로서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젊은 나이에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우기 시작했죠. 데이트? 관심도 없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학과에 충실하기는 했지만 디자인 패션학원에 등록하고 실제 현장 체험을 위해 동대문 의류상가에서 도매로 물건을 떼 소매점에서 옷을 판매하는 알바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호텔 로비 연주는 기본이고 결혼식 이벤트 연주 알바에서 커피숍 알바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청파동은 거의 고행의 거리였다. 서울에 연고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호주 유학 중에도 식당 알바를 했을 정도였다. 호주는 다행히 일찍 문을 닫기 때문에 저녁 내내 연습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졸업 후에는 종각에 있는 제빵학원에 등록해 빵 만드는 기술을 배워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직접 빵을 만들면서 제빵이란 새벽 4시반부터 시작하는 거의 막노동 수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규모 프랜차이즈 빵집은 노동의 강도가 덜하지만 대신 급여가 적었다. 한숙현은 노동의 강도는 줄이면서 고부가 가치를 얻을 수 있는 케이크 디자인 학원에도 등록했다. 음악을 하던 손이었지만 예술에는 같은 손재주가 있는 건지 제과제빵 기능장으로부터 디자인을 인정받았다.
이 모든 경험은 사실 한숙현 본인이 가야할 길을 찾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는지 모른다. 그 이후 계속된 경험들, 예컨대 건설회사에 취직해 직장인으로 활동해보고, 어떻게 하면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까 고민한 끝에 사회복지사와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플루트 레슨을 하다가 이런저런 악기도 가르쳐달라고 하면 곧바로 그 악기연주법을 습득해 또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그러는 도중 ‘청소부 밥’(토드 홉킨스, 레이힐 버트)처럼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이 스스로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수많은 경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바라밀다’(paramita) 수행일 수도 있었다. 다빈치가 비판했던 ‘타인의 지식으로 무장한 채 자만심과 거만함에 취한 사람’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분야에 직접 뛰어든 경험의 제자가 되었다.

음악교육학과 석사와 교육학 박사로 다시 음악의 길 선택

“졸업 후 5년 동안 음악 외적으로 수많은 경험을 했지만 음악을 한번도 떠난 적은 없습니다. 학생 레슨은 계속 이어졌거든요. 대학 다닐 때 스승이 연결해주지 않으면 레슨도 끝인 줄 알았지만 현실은 딴판이었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출장 레슨을 위해 스쿠터를 장만했을 정도로 레슨은 꼬리를 물고 늘어났습니다. 수많은 경험을 한 후에 결국 제가 가장 잘하는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은 음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한숙현은 원래 기초가 탄탄한 입시생들보다 취미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더 힘들었다. 그냥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그는 어떻게 하면 이런 학생들을 좀더 효과적으로 가르칠까 고민한 끝에 졸업 후 5년 만에 음악교육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기로 했다.
“대학을 졸업하는데 6년이 걸려 2004년에 졸업했는데 2009년에 입학했으니 5년 동안 길을 찾아왔던 것 같아요. 음악교육협회장으로 재직중이던 스승을 찾아 성신여대 석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교육이 학생들 레슨에 도움이 되었을까? 물론이다. 교육방법론이나 교수법 등 기술적인 학문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음악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이런 과정이야말로 대학교 악기교육을 제일 지상주의로 가르치는 학부 과정에서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할 정도로 음악전공생들에게 꼭 필요한 교육임을 깨달았다.
“아티스트로 진출할 생각이 아니라면 학부생들도 서양음악에 대한 일반적 지식과 교육방법론을 공부하는 게 훨씬 좋겠죠. 악기만 공부할 때는 답답한 면이 있었지만,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저의 삶이 이전보다 훨씬 풍성했거든요.”
석사과정 역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성신우수사범인상을 수상했다. 교육대학원에서 음악교육을 전공하면 중등 교원 2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사립학교에 교사로 진출할 수 있었지만, 그 세계에 진출하려면 또 다른 조건이 충족돼야 했다. 신붓감 1순위인 사립학교 음악선생님은 아이들 잘 가르치고 실력있다고 채용해주는 학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요구와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기보다 더 큰 시각을 갖기 위해 교육학 박사과정을 밟기로 결정했다.

한숙현 교수는 전주에 소재한 청년창업사관학교를
1년 동안 오가며 사업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공부하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로 했다

돌고돌아 10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청년창업사관학교를 만나다

“재미있죠?(웃음) 인생은 정말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강물 같아요. 박사 수료하고 논문을 쓸 때쯤이었어요. 박사 공부하기 전까지는 닥치는 대로 일했지만 이제는 음악관련 사업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퍼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원격학습지 푸르넷과 같은 음악학습지 사업을 하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사업자 등록을 하고 막 사업에 착수할 때쯤 ‘청년창업사관학교’라는 제도를 발견했습니다.”
인생이 다시 한번 용틀임하기 시작했다. 늘 새로운 일에 심장이 두근거렸던 그는 이번에는 알바나 취직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내 사업을 해보자는 생각에 설레였다. 한숙현 교수는 전주에 소재한 청년창업사관학교를 1년 동안 오가며 사업에 대한 알파와 오메가를 공부하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사관학교에서 창업과 경영을 익힌 후 서초문화재단의 공모사업에도 선정되어 뮤직크리에이터로서 노인치매 예방을 위한 음악교재, 뮤직비타민 등을 직접 출간해 현장을 찾아다니며 노인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중 핵심사업 중 하나가 바로 음원개발사업이다.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공부할 때 치매 예방을 위한 앱 개발 제안서를 제출했는데 그게 채택이 된 것이다.
“학부 시절 강의받았던 음악치료와 예술경영 수업을 토대로 사업 아이템을 구상했는데 그게 바로 치매예방 앱이었습니다. 2018년 당시 정부가 치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그 분야에 지원금이 많이 배정되었잖아요. 그런 분위기 덕분에 제 사업제안서가 지원사업으로 선정된 거죠. 물론 이 앱을 처음부터 생각해낸 것은 아닙니다. 이 역시 경험을 토대로 고안한 것이에요. 음악이론을 어르신들에게 가르치면 치매 예방에 효과가 있을 것 같아 큼지막한 글씨와 이미지, 옛 가요 등을 소재로 음악교재를 출판했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어르신들의 눈이 침침한데 종이책을 풀면서 음악을 공부한다는 게 넌센스였죠. 나이든 분들도 이 정도 글자 크기와 재미있는 노래 소재라면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 게 큰 착각이었습니다. 허탈했습니다.(웃음)”

제주국제관악제에서 참가자와 인터뷰 중인 한숙현 교수

음원사업에 눈을 돌리다

시 ‘봄날’에서 정호승은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고 했다. 한숙현은 다른 방법을 압출했다. 종이 교재 대신 어르신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고 건강과 힐링은 물론 치매예방에도 좋은 듣는 음악을 개발하자는 생각이다. 바로 음원사업이다. 종이교재보다 훨씬 심플한 사업이었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흘러간 가요와 가곡을 편곡해서 들려주려고 했다. 한숙현은 가곡 작곡가나 옛가요 작곡가들을 수소문해 하루에도 수십통씩 전화했다. 저작권협회에 등록된 곡이라도 편곡은 다른 문제였다. 노인 치매라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개발한 사업이니 저작권을 허용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들에게 복지니 뭐니 하는 것은 관심의 대상이 없었다. 그저 돈을 내라는 것이었고 편곡은 안된다는 작곡가들이 많아 결국 그 일도 포기했다.
화가 난 한숙현은 아예 모든 곡을 새롭게 만들기로 결정하고 힐링음악을 카테고리별로 나누어 매일 작곡 작품에 매달렸다. 범위도 치매예방을 위한 음악에서 대중을 대상으로 한 힐링음악으로 확대했다. 연구원 서너 명을 고용해 결국 1,500곡에 달하는 힐링음악을 창작, 모두 음원화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 역시 지원사업의 일환이었죠. 힐링음원을 만들었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은 아니잖아요, 이번에는 그 제품을 들고 데이케어센터 등을 찾아 마케팅작업을 펼쳤습니다. 아리아케어, 이드웨어 등이 대표적인 회사죠. 나중에는 KT&G와 KT, 로완 슈퍼브레인, 삼성전자의 스마트케어 등 굵직한 회사에서부터 일선 초중등학교에까지 음원패키지를 판매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제주국제관악제 이상철 위원장과 함께

위대한 청춘 등 음악감독으로 활동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인생이기에 인생은 불확정성의 원리에서 크게 벗어날 수가 없다. 음원사업은 아이템은 좋았지만 조직적인 영업사원을 두지 않고는 마케팅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음원 만들기도 바쁜데 유통까지 직접 뛰기에는 시간상으로, 또 육체적으로 버거웠다. 시간이 갈수록 지쳤다. 박사학위를 마쳐야 하는데 일에 공부에 레슨에 맘놓고 쉴 수 있는 날이 없었다.
한숙현은 드라이브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따라 서너살 때부터 늘 차를 타고 다닌 덕분에 옛 가요와 가곡부터 최근 음악까지 멜로디는 물론 대부분의 가사를 기억할 만큼 가사 기억력이 탁월하다. 여기에 더해 석사과정에서 배웠던 서양음악사와 음악교육방법론, 음원개발 사업, 다양한 서비스업 경험과 몸으로 뛰었던 마케팅 경험 등을 한꺼번에 활동할 기회를 만나게 된다. 2019년 리음아트앤컴퍼니 초청으로 상주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위대한 청춘’ ‘시실내악’ ‘오페라 봄봄’ 등의 음악 작업을 도맡는 한편, 이 공연을 유통하기 위해 전국 지방문화재단을 찾아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리음아트앤컴퍼니의 기획공연은 모두 영상과 미디어를 활동하는 공연이라는 점에서 미디어를 새롭게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스피커 수천 개를 전시하면서 소리를 빛으로 표현하는 한원석 작가의 미디어 작품을 감독하는 등 음악감독의 영역도 점차 넓혀갔다.
그러면서도 어렸을 때부터 들었던 가요와 가곡에 대한 기억과 대학의 알바 경험, 석사과정의 공부, 청년사관학교에서의 교육, 사업체 운영 경험 등 지금까지 겪어온 실패와 성공 모두가 음악감독을 수행하는데 자양분이 되었다.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실연하는 과정에는 구상과 디자인, 제작, 마케팅, 유통 등 다양한 과정이 필요한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경험했던 것들이 적재적소에 해답을 제시해주었다.
“리음아트앤컴퍼니에서 그동안 일했던 것들이 사실은 모두 소중한 제 자산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제는 후배들에게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습니다. 마침 기회가 닿아 상명대 강단에서 리음아트앤컴퍼니와 4년 동안 일하면서 쌓은 미디어 실력과 공연에 대한 경험을 가르치는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죠.”


지원사업 접고 박사논문에 집중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버리는 법. 리음아트앤컴퍼니의 음악감독을 하면서 그간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시작했던 지원사업은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소진하기 때문에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무엇보다 지원사업은 고용창출에는 도움이 되지만 개인의 성장에는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민 끝에 또 한번의 제체시온, 즉 지원사업을 과감히 접었다.
“대신 음악감독과 상명대 강사에만 전념하면서 그간 미뤄두었던 박사논문을 완성하기로 했습니다. 틈틈이 소논문 3개를 작성하긴 했지만 원논문은 계속 미뤄왔거든요. 2023년 말에 허리띠를 졸라매고 ‘통합교육이 중학생의 흥미도와 공감각적 표현에 미치는 효과: 대중음악과 색채 이미지활용’ 논문을 제출하고 마침내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논문의 논점은 음악과 입장에서는 특이한 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교육하면 으레 클래식을 대상으로 삼는데 비해 이 논문은 대중음악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대중음악으로 색상의 온도차와 급우들의 공감대 형성, 학습효과 증대 등 공감각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중학생들과의 실험을 통해 입증한 것이거든요.”
돌고 돌아 파랑새와 같은 음악의 집에 돌아온 한숙현 교수. 그러나 떠날 때의 단칸방은 이제 음악과 미술이라는 두칸짜리 소통의 집에 도착했다. 물론 두칸 짜리지만 주인은 한 사람, 한숙현 교수다. 음악방과 미술방에서 각각 재료를 꺼내 거실에서 예술융합을 기획하는 게 그의 일이다.
“디자인학과에서 음악전공자를 교수로 채용했으니 명품 경기대에 걸맞은 창발적인 아이디어를 창안해야겠죠. 아마 같은 과에 서로 다른 예술 교수들이 협동하는 대학은 경기대가 최초의 모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조사는 해보지 않았지만…”

한숙현 교수의 저서
공연을 유통하기 위해 전국문예회관, 공연단체를 방문하기도 했다

음악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출간

한숙현 교수는 교수임용을 발표하는 날, 롤러코스터와 같은 음악 청춘 시절부터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며 틈틈이 써놓은 원고를 한데 모아 ‘음악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보다 행복하다’(리음북스 출간)을 출간했다. 유혹하는 음악, 인간관계의 윤활유로서의 음악, 치유에 영향을 미치는 음악, 정치권력과 음악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담고 있는데 출간하자마자 무려 세 달 동안 예술 분야 베스트셀러로 판매될 만큼 인기가 꽤 많았다.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졌습니다. 기업과 음악인, 예술인들과의 협업, 지속 가능한 상생 모델을 만들기 위해 구상하고 있는 게 있답니다. 그동안은 주로 기업이 예술을 후원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늘 예술인들이 ‘을’의 입장이었거든요. 그러나 그래서는 한계가 있습니다. 서로 돕는 동등한 입장이 돼야 합니다. 제 파트너와 함께 음악협회 측과 논의 중인데 그 상생 모델이 실현되면 예술기업들과 예술인들의 공연 활동 판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21세기 모든 예술의 목표는 ‘환경’으로 귀착될 것으로 전망하는 한숙현 교수는 비록 갓 임용되었지만 ESG관련 예술활동에도 적극 앞장 서고, 학문적 결과가 도출되면 이를 학교 내 논문창고에만 보관하지 않고 기업과 정부가 그 내용을 실행할 수 있도록 뛰어볼 요량이라며 수줍게 포부를 밝힌다.

글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