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토록 쉽게 헤어지는가 서로를 이해한다면 둥글게 살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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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컴퓨터를 켜면 첫 화면에는 원하지도 않는 다양한 기사가 뜬다. 마이크로소프트 스타트가 편집한 기사스트리밍 서비스 같은데 연예와 관련된 기사 중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불륜과 성격 차이 등을 이유로 결별, 이혼, 법정 다툼 중이라는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왜 그토록 쉽게 사랑하고 잘도 헤어지는지 모른다. 살다 보니 사랑은 모르거니와 헤어지는 게 상당히 귀찮은 일인데도 말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헤어짐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풀지 못할 불구대천지원수의 원인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누차 강조하지만 대체로 상대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려는 자세가 부족한 데 있다. 물론 개중에는 인간 자체가 악마와 같은 존재가 있지만,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치밀 때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고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이해될 때는 자신의 옹졸함을 깨닫거나 상대방을 ‘용서’하는 여유도 갖는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그렇게 둥글게 둥글게 살아가는 편이다.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면 ‘화’가 자신의 폐 속으로 들어가 결국 손해보는 것은 자신일 뿐이다. 그래서 ‘용서’는 타인을 위해서 하는 아량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베푸는 은혜라는 말이 맞다. 칼루 린포체는 ‘용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해방시켜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한 원망과 분노와 증오에서 나 자신을 해방시켜주는 일’이라고 한다. 참으로 과학적인 말이다. 성경에도 ‘노하기를 더디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하지 않았던가.(잠언 19장 11절)

상대의 영혼을 인정하면 갈등은 없어

그러나 이렇게 문자로 아는 것은 이론에 불과하며 이론과 실제 행동은 다를 수 있다. 아니 많이 다르다. 인디언 연설문집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에는 왐파노그 족 추장인 ‘느린 거북(슬로우 터틀)’의 연설문이 있다.
열네 살 때 인디언 이름을 받는 의식을 거치면서 그는 부족 어른들로부터 ‘느린 거북’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이는 ‘느린 거북’이 사람들과 대화할 때 반응이 느리고, 동작 또한 굼뜨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작이 굼뜨기 때문에 다른 청년들보다 덜떨어진다는 의미는 없었다. 오히려 부족 어른들은 거북이는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항상 목을 빼어 사주경계를 확실히 하기에 그만큼 긍정적이며 신중한 면을 더 사랑했다. 인디언 세계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기에 모든 이름을 신성시했으며 동시에 그 성격을 모두 존중해주었다.
돌이켜보면 늘 다혈질로 살아왔던 시절이 후회스럽기만 하다. 인디언 이름처럼 그 성격을 그대로 인정해주었다며 더 좋은 추억을 만들었을 텐데 그렇게 살지 못했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로 출발하는 시간이 하염없이 흐를 때 매일 꾸지람을 주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아들이 빠릿빠릿하기를 바라는 것은 그저 바람뿐이었다. 지금도 느리고 앞으로도 느릴 것이지만 뭔가를 하나 붙잡으면 신중하게 처리하는 장점은 있었다. 직원들에게도 왜 대답을 바로바로 하지 않은지 큰소리쳤던 일들 또한 부끄럽기는 마찬가지다. 그 직원은 내성적이고 자기표현에 서툴렀을 뿐인데 조금도 기다려줄 줄 몰랐다. 결국 상대방의 영혼을, 아니 상대방의 입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용서는 분쟁의 윤활유가 되어 관계가 매끈하게 회복되지 않을까?

용서는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도 존재

‘용서’는 산자뿐만이 아니라 죽은 자와도 화해할 수 있는 천사의 끈이다. 영화 ‘3일의 휴가’(육상효 감독)에서 딸 진주(신민아)는 미국 UCLA수학과 교수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성장시절부터 엄마를 지독히 원망하며 한국에서 임종할 때에도 지켜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깊이 후회한다. 그 마음에 병이 심해 결국 귀국한 후 엄마가 평생 운영하던 김천의 백반가게를 운영하며 뒤늦게 참회의 길을 택한다는 내용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딸을 두고 먼저 저승으로 떠난 엄마 복자(김해숙)는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지상에 내려온다. 미국 대학 교수를 생각하고 지상에 내려온 엄마는 딸이 자신의 백반집을 운영한다는 것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왜 그랬을까? 그 잘나가던 우리 딸이 왜 그랬을까? 진주는 김천의 백반집을 운영하며 엄마가 했던 요리들을 스스로 해보며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외삼촌댁에 맡기고 자신을 키우기 위해 일생 일만 해야 했던 엄마를 기억하고, 아버지 없이 고되게 살다 남의 식모살이 끝에 그 집의 첩으로 살면서도 눈치껏 자신에게 맛있을 것을 해주었던 엄마를 기억해 낸다. 엄마의 사랑이 필요할 때 엄마는 늘 남의 집에 묶여있기에 엄마에 대한 사랑이 실망으로 바뀌고 못된 행동으로 그토록 함부로 대했던 순간들이 모두 가슴속에 못이 되었다.
복자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딸을 위해 저승에서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깨기로 한다. 딸에게 ‘엄마는 괜찮다, 미안해할 것 없다’는 의사 표현으로 딸을 구하기로 한다. 영화는 그 규칙을 어기면 저승에서 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상실한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선택한다. 복자는 자신이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기록했던 일기장을 딸이 읽도록 하면서 아, 우리 엄마가 그때 그래서 이랬구나, 엄마는 계속 나를 사랑하고 있었구나, 절절히 깨달으며 비로소 자신의 엄마를 모두 용서하게 된다.


이해하고 용서해야 서로 행복, 해원상생(解冤相生)

연극 ‘수상한 흥신소’의 핵심 내용도 살아남은 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이미 죽은 엄마 아빠가 귀신들의 소원을 듣고 해결해 주는 흥신소를 찾아와 딸을 만나게 해달라고 의뢰하는 내용이다. 중간에 배꼽을 빼는 코믹한 내용이 주를 이룰 듯하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려는 부모의 심중을 헤아리는 순간, 눈물콧물을 쏙 때는 연극이다.
알뜰하게 살림을 꾸리는 엄마는 딸이 고등학생이 되자 다른 아이가 입던 교복을 구해온다. 엄마는 그 교복이 새것이라지만 교복에 붙은 이름표를 발견하고 교복을 집어던진다. 그 모습을 본 아빠는 딸에게 새것을 사주겠다며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던 중 그만 교통사고로 차가 전복되면서 딸만 살아남는다. 그깟 교복이 뭐라고 부모를 잃을 만큼 귀중한 것이었을까? 딸 지연은 청년이 되었으면서도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죽을 결심을 하고 마지막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이 모습을 저승에서 지켜보던 부모는 흥신소 오상우를 찾아가 딸에게 엄마아빠는 잘 지내고 있으니 자살 따위는 하지 말라고 전하도록 한다. 연극은 그렇게 서로를 용서하고 딸 지연은 오랜 죄책감에서 해방되면서 끝난다. 3일의 휴가와 수상한 흥신소의 공통점은 죽은자와 산 자라 할지라도 그때 왜 그랬을까를 이해하고 서로를 용서했기에 모두가 고통에서 해방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해원상생이다.

지휘자 최재혁이 그려낸 ‘로맨틱’ 음악

지난 3월 15일 대전시향의 디스커버리 시리즈2의 일환으로 마에스트로 최재혁이 지휘한 ‘화이트데이콘서트’를 감상하면서 이런저런 망상에 휩싸였다. 엘가는 서른두 살 때 여덟 살 연상의 여인을 만난다. 자신에게 피아노를 배우러 온 캐럴라인 앨리스 로버츠에게 푹 빠져 결혼에 이르게 된다. 엘가의 아내 사랑은 지극했다. 이 아내를 위해 작곡한 사랑의 고백이 바로 ‘사랑의 인사 작품 12’이다. 최재혁은 이 곡을 첫 곡으로 선곡해 이날 공연을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로 이끌어갔다. 이어 연주한 멘델스존 ‘한여름 밤의 꿈, 작품 61’처럼 사랑이 아름답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랑이 그저 순조롭기만 하다면 그지없이 밋밋하기만 하다. 모리스 라벨이 바로크 작곡가 쿠프랭을 추모하기 위해 작곡을 시작했던 ‘쿠프랭의 무덤’에 어머니에 대한 슬픔을 담기 위해 불길하고 우울한 내면의 기운을 채색한 3악장 미뉴에트처럼 우울한 순간을 피할 수 없다.
또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이 결혼이나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이코프스키가 죽은 모차르트의 작곡 스타일을 끌어들여 첼로협주곡으로 승화한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작품 33’ 등 때로는 정호승의 시 ‘수선화’처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격리될 때가 있다.
사랑이란 라흐마니노프의 14개의 로망스, 작품 34 중 제14번 ‘보칼리제’처럼 아름다운 향기와 같다. 사랑을 이루는 모자이크 무늬에서 질투는 뺄 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이다.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제2번 중 ‘몬테규가와 캐플릿가’와 멘델스존이 스코틀랜드 여행 중 메리 여왕이 살았던 궁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 ‘스코틀랜드’는 그런 질투의 감정과 이를 승화하는 멜로디가 녹아있다. 특히 멘델스존은 메리 여왕의 남편이었던 헨리 스튜어트의 질투를 받아 결국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처형당했던 비극에 영감을 받아 음표를 찍어 내려가다가 종곡에서는 이를 해결시키려 노력한다.

다시 사랑하는 연인들이 많았으면

최재혁은 이번 공연의 피날레로 오프닝곡으로 선택한 작곡가 엘가의 ‘수수께끼 변주곡, 작품 36’을 선택했다. 사랑이란 수수께끼와 같다. 이 곡은 다양한 사람들의 성격에 따른 작품을 자유롭게 표현한 14개의 변주곡으로 이뤄졌다. 그중 가장 자주 연주되는 주제곡과 1번 7, 8, 9번 등을 선곡해 사람의, 아니 사랑의 다양성을 선보이고 있다. 모든 사랑은 제각각 다른 색을 띄고 있다. 엘가는 평생 아내를 사랑했다. 그러나 어찌 의견 차이로 속상할 일이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상대방이 제 나름의 고유한 영혼을 나타내기 때문에 모든 존재를 신성시했던 인디언처럼 배우자를 그렇게 배려해 주었기에 이 부부가 말년까지 행복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상대방의 고유성을 인정해 줄 때 비로소 모든 일을 용서할 수 있다.
최재혁의 지휘를 보면서 내내 생각했다. 컴퓨터 첫 화면을 장식하는 기사들이 한때 이별을 생각했지만, 서로를 인정하면서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기사들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불륜과 성격 차이로 결별, 이혼하는 내용들이 엘가의 님로드 아래 흐르는 깊고 슬픈 강물을 덮었으면…

글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