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거래가 불가능한 음악
어느 봄날 오후, 햇살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그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하나가 귀에 걸렸다. 바로 내가 몇 년 전에 만든 곡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신기했지만,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 음악이 어떻게 정산되고 있을까? 나는 그 사용료를 받고는 있는 것일까?"
의아한 것은, 정산서라는 이름의 파일이 매달 이메일로 도착하긴 하지만, 그 안의 숫자들이 내 음악의 모든 사용을 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스트리밍 횟수, 다운로드 수, 방송 송출 횟수… 그래프와 표는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지만, 거기서 '내 권리'가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음악의 직거래는 왜 어려울까?
농산물은 요즘 '직거래 장터'가 인기다. 농부가 키운 채소를 바로 소비자에게 팔아 유통 비용을 줄이고 신선함을 보장한다. 농산물 직거래는 쉬운데, 음악 직거래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생각해보았다. 창작자가 만든 곡을 청취자에게 바로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중간에 유통사, 플랫폼, 관리 단체 등 여러 단계가 끼어 있어 직거래 구조가 성립하기 힘들다.
최근 몇몇 AI 음악 사이트들이 생기면서 창작자가 직접 곡을 올리고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기술 덕분에 간단한 업로드로 문턱이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클래식 음악 쪽은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어, 25년 전 졸업 연주로 만든 곡들, 그 곡을 연주한 나의 기록들, 지금은 기억에서도 사라진 '사장된 음악'들이다. 아마 그때부터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수집했다면 지금쯤 엄청난 아카이브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음악은 존재하지만,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셈이다.
변화된 음악 소비, 그러나 여전한 창작자의 현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음악에 돈을 내고 들어?’ 하는 말을 하곤 했었다. MP3 파일을 공짜로 받으면 되는데, 누가 돈 주고 음악 듣겠느냐는 비아냥이다. 옛 시절에는 음악이 인터넷 구석구석 떠돌았고, 복제와 공유가 너무나 쉬웠다. 물론 지금도 창작자는 늘 불법 복제와 싸워야 하지만, 그때는 대다수 창작자들이 어쩔 수 없는 식으로 마냥 체념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일반화되면서 매달 구독료를 내고 원하는 음악을 무제한으로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겉보기에는 음악의 유통 구조가 정착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현대적인 음악 유통 구조속에서도 창작자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플랫폼은 수익 구조의 최상단에 있고, 유통사는 그 아래에, 그리고 그 아래에서 창작자는 늘 가장 작은 조각을 받는다. 그 작은 조각마저도 복잡한 계약과 수수료, 분배 구조 속에서 더 잘게 쪼개진다. 음원 등록조차 창작자의 몫이 아니다.
복잡한 등록 절차와 주도권 상실과 회복 방법
음악을 유통하려면 까다로운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규격에 맞춘 음원 파일, 정형화된 메타데이터, ISRC 코드 발급, 권리자와 기여자 정보 입력 등... 이 과정은 간단해 보이지만, 창작자 입장에서는 거의 '행정 업무'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창작자가 직접 하지 못하고, 결국 유통사에 맡긴다. 유통사는 편리함을 제공하는 대신 일정 비율의 수익을 가져간다. 그것이 20%일 수도 있고, 많게는 40%일 수도 있다. 이 구조에서는 창작자가 주도권을 갖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내 음악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이유다.
이런 구조 속에서 창작자들도 변화한다.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곡을 한 번 쓰려면 일정 금액 이상을 내야 한다는 조건을 달게 된다. 예컨대, 어떤 뮤지컬 작곡가는 "제 곡을 공연에 쓰시려면 최소 곡당 50만 원 이상의 라이선스비를 내야 한다"라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는다. 이것이 한탕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음악의 자유로운 순환이 막히고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선순환 구조는 멀어지고, 창작 환경은 더 경직된다.
진정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위해
최근 국정기획위원회 국민보고대회에서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진심이 되려면, 먼저 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바로 세워주셔야 할 기준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자신의 음악 사용 내역을 정확히 알고, 재창작자와 쉽게 소통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투명하게 받는 구조 없이는 '자유로운 창작'은 그저 구호에 불과하다.
배고픈 예술가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창작은 노동이고,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따른다. 정부 지원금에 기대어 연명하는,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린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의 음악과 이름으로 당당히 서 있는 창작자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 창작자의 기준이 명확해야 창작물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기술은 이미 그 길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저작권협회는 오랜 시간 우리나라 음악 저작권 관리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덕분에 많은 창작자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지킬 수 있었고, 복잡한 유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다만,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과 새로운 음악 소비 방식에 발맞춰 창작자들이 보다 직관적이고 투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보완책이 함께 마련된다면, 창작과 유통이 기술을 만나 모두에게 더 건강한 구조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글 한숙현(본지 이사, 경기대 교수)
직거래가 불가능한 음악
어느 봄날 오후, 햇살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앉아 있었다. 그때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하나가 귀에 걸렸다. 바로 내가 몇 년 전에 만든 곡이었다. 반가우면서도 신기했지만, 그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 음악이 어떻게 정산되고 있을까? 나는 그 사용료를 받고는 있는 것일까?"
의아한 것은, 정산서라는 이름의 파일이 매달 이메일로 도착하긴 하지만, 그 안의 숫자들이 내 음악의 모든 사용을 담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스트리밍 횟수, 다운로드 수, 방송 송출 횟수… 그래프와 표는 복잡하게 나열되어 있지만, 거기서 '내 권리'가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지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음악의 직거래는 왜 어려울까?
농산물은 요즘 '직거래 장터'가 인기다. 농부가 키운 채소를 바로 소비자에게 팔아 유통 비용을 줄이고 신선함을 보장한다. 농산물 직거래는 쉬운데, 음악 직거래는 왜 이렇게 어려운지 생각해보았다. 창작자가 만든 곡을 청취자에게 바로 전달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중간에 유통사, 플랫폼, 관리 단체 등 여러 단계가 끼어 있어 직거래 구조가 성립하기 힘들다.
최근 몇몇 AI 음악 사이트들이 생기면서 창작자가 직접 곡을 올리고 판매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기술 덕분에 간단한 업로드로 문턱이 조금 낮아졌지만, 여전히 클래식 음악 쪽은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어, 25년 전 졸업 연주로 만든 곡들, 그 곡을 연주한 나의 기록들, 지금은 기억에서도 사라진 '사장된 음악'들이다. 아마 그때부터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수집했다면 지금쯤 엄청난 아카이브가 되어 있지 않았을까? 음악은 존재하지만, 세상과 연결되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는 셈이다.
변화된 음악 소비, 그러나 여전한 창작자의 현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가 음악에 돈을 내고 들어?’ 하는 말을 하곤 했었다. MP3 파일을 공짜로 받으면 되는데, 누가 돈 주고 음악 듣겠느냐는 비아냥이다. 옛 시절에는 음악이 인터넷 구석구석 떠돌았고, 복제와 공유가 너무나 쉬웠다. 물론 지금도 창작자는 늘 불법 복제와 싸워야 하지만, 그때는 대다수 창작자들이 어쩔 수 없는 식으로 마냥 체념하고 말았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었다. 스트리밍 서비스가 일반화되면서 매달 구독료를 내고 원하는 음악을 무제한으로 듣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겉보기에는 음악의 유통 구조가 정착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런 현대적인 음악 유통 구조속에서도 창작자의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고 있다. 플랫폼은 수익 구조의 최상단에 있고, 유통사는 그 아래에, 그리고 그 아래에서 창작자는 늘 가장 작은 조각을 받는다. 그 작은 조각마저도 복잡한 계약과 수수료, 분배 구조 속에서 더 잘게 쪼개진다. 음원 등록조차 창작자의 몫이 아니다.
복잡한 등록 절차와 주도권 상실과 회복 방법
음악을 유통하려면 까다로운 등록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규격에 맞춘 음원 파일, 정형화된 메타데이터, ISRC 코드 발급, 권리자와 기여자 정보 입력 등... 이 과정은 간단해 보이지만, 창작자 입장에서는 거의 '행정 업무'에 가깝다. 그래서 많은 창작자가 직접 하지 못하고, 결국 유통사에 맡긴다. 유통사는 편리함을 제공하는 대신 일정 비율의 수익을 가져간다. 그것이 20%일 수도 있고, 많게는 40%일 수도 있다. 이 구조에서는 창작자가 주도권을 갖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내 음악이 어디에서, 어떻게 쓰이는지'조차 파악하기 힘든 이유다.
이런 구조 속에서 창작자들도 변화한다.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곡을 한 번 쓰려면 일정 금액 이상을 내야 한다는 조건을 달게 된다. 예컨대, 어떤 뮤지컬 작곡가는 "제 곡을 공연에 쓰시려면 최소 곡당 50만 원 이상의 라이선스비를 내야 한다"라는 조항을 계약서에 넣는다. 이것이 한탕주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권리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선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음악의 자유로운 순환이 막히고 진입 장벽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결국 선순환 구조는 멀어지고, 창작 환경은 더 경직된다.
진정한 '자유로운 창작 환경'을 위해
최근 국정기획위원회 국민보고대회에서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약속이 진심이 되려면, 먼저 정책을 만드는 분들이 바로 세워주셔야 할 기준이 있다. 이것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라고 생각한다. 창작자가 자신의 음악 사용 내역을 정확히 알고, 재창작자와 쉽게 소통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투명하게 받는 구조 없이는 '자유로운 창작'은 그저 구호에 불과하다.
배고픈 예술가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 '예술가는 배고파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창작은 노동이고, 노동에는 정당한 대가가 따른다. 정부 지원금에 기대어 연명하는, '먹고사는 문제에 매달린 예술가'가 아니라 자신의 음악과 이름으로 당당히 서 있는 창작자가 표준이 되어야 한다. 창작자의 기준이 명확해야 창작물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기술은 이미 그 길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길을 선택할 의지가 있느냐는 것이다.
한국저작권협회는 오랜 시간 우리나라 음악 저작권 관리의 중심 역할을 해왔다. 덕분에 많은 창작자들이 기본적인 권리를 지킬 수 있었고, 복잡한 유통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대신 처리해 주었다. 다만,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과 새로운 음악 소비 방식에 발맞춰 창작자들이 보다 직관적이고 투명하게 자신의 권리를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는 보완책이 함께 마련된다면, 창작과 유통이 기술을 만나 모두에게 더 건강한 구조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글 한숙현(본지 이사, 경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