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세, TV 출연 즐기는 강남 지식인 유시민 작가가 3월 18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한 장의 벤 다이어그램을 펼쳤다. 이 다이어그램에 유시민 작가는 현재의 뉴이재명 그룹을 3개로 나누며 A는 가치 지향형, B는 이익 지향형, C는 가치-이익을 둘 다 중시하는 A와 B의 교집합이라 설명하였다. 음악가인 필자는 이걸 보면서 클래식 음악의 순혈주의와 우월성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현대음악의 교조성이 떠올랐다.
유시민 작가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가치를 중시하는 A그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이재명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진보 진영의 코어 지지층이다. 이른바 ‘적통’이다. 이걸 그대로 클래식 음악계에 적용하면 예원학교-서울예고-서울대 라인의 성골이다. 여기에 필자 같은 선화 출신들이 소장파로 비벼보려고 하지만 세력과 쪽수에서 밀리고 단합도 되지 않는 오합지졸이다. B그룹은 출세나 선거 출마를 위해 대통령 주변에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로 그려진다. 제대로 된 ‘족보’가 없는 뜨내기 기회주의자들로 비하되는 셈이다. 이건 또 예중-예고도 나오지 않고 서울대나 in 서울 음악대학은커녕 지방대 나와 활동하려는 사람들인 셈이다. C그룹은 이도 저도 아닌 좋게 표현하면 중도고, 뜨내기, 돈키호테다. 그나마 필자같이 선화예중을 나오고 선화예고 1학년 재학 중에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로 유학 간 사람은 지지세와 동문, 학벌이 없다 뿐이지 음악적 순수성과 학문성은 보장과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자들이 애매하다.
여기에 도덕적, 학문적 우월주의와 순수성을 들이대면 음악의 서열화가 이루어진다. 유 작가의 분류대로라면 A그룹은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치(올바름)에 기반을 두고, B그룹은 이익에 중점을 두는데 20세기 초반 이후 클래식 음악 작곡과 창작을 예술성과 대중성, 고결함과 진정성에 두거나 상업적이고 통속적인 것으로 분류한 거와 마찬가지다. 20세기. 미적 판단은 시들어가고 도리어 전 시대에 추구되었던 모든 것들이 부정되고 외면당하며 ‘아름다움’은 기피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전 시대에 부정의 대명사로 거부당했던 키치로 치부되고 전락하여진다.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는 작품은 의도되지 않고 가질 필요도 없고 어떤 순간이나 시간에 관련된 음악의 창작과 청취를 특징으로 한다. 아름다움(미적 판단)과 적합성(기능적 판단) 대신에 타당성(Stimmigkeit)과 진정성(Authentizitaet)이 요구되었는데 이 용어들은 아도르노로부터 유래한다. 아도르노는 음악의 내용을 만드는 역사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미치는 역사라고 한다. 작품이 타당하려면 음악적 관습에 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음악이라야 타당한 음악이다. 이런 음악인 진실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시도된 음악의 여러 양식은 음악의 개념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으며 음악의 범주는 확장하는데 이바지하였으나 보편성이 상실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전문가들의 범주 안에서만 논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서 불편하여서 그러는 것이 아닌, 그냥 듣기 싫은 것으로 이런 아도르노의 사상을 환경과 풍토가 너무나 다른 우리나라 창작 클래식 음악계에서 현대음악의 절대적이고 교조적인 이상과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임으로, 안 그래도 적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고사 직전에 있으며 음악시장의 모든 주도권을 상실한 실정에 있다. 관객이 외면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꼬리표가 붙는다. 첫째는 과거의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도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어서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항변이다. 실로 소가 웃을 말이다. 베토벤 이후 쇼팽, 바그너, 베르디, 멘델스존 등 지금 우리가 명작으로 칭송하는 작품들의 대부분은 당대에도 정당한 평가와 사랑을 받았다. 백번 양보해서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쓰인 1926년도의 작품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망설여진다. 그럼 1926년보다 100년 전의 1826년엔 어떤 곡들이 발표되었을까? 죽기 5개월 전에 베토벤은 현악사중주 16번을 남겼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1926년에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지금과 똑같이 소용되었다.
또 하나의 궤변은 대중은 지식인들과 달리 음악에 무지하기 때문에 새로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음악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위대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예술 형태는 창조의 순간에 종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지금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을 부활시키려고 하면 앞날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고 전혀 신선하지 못한 낡고 구태의연한 유물로만 취급받는다. 1960~90년대까지는 음악 역사상 가장 개화되고 계몽된 시기로 숭고한 현대음악을 보호하고 전파할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며, 아방가르드 음악을 위한 폐쇄적인 보호 장벽이 관대한 후원에 힘입어 굳건하였고 여기에 속한 이들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옥상옥으로 군림하며 고담준론만 내뱉으며 끼리끼리 청류로서 자처했다. 반 심미성을 지향하며 인습 타파적이며 인지 가능한 화성과 선율의 방향성이 없기에 비사회적이자 인간이라면 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방식에도 역행하는 행위이다. 아도르노는 20세기 중반 분노에 가득 차서 “가치 있는 모든 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중적이지 않다.”라고 소리치며 현대음악을 아는 자기들은 A요, 그런 고상하고 위대한 예술을 모르는 자들은 B라고 격하했다.
12음기법을 발명하고 100년간 독일 음악의 우위를 예견한 쇤베르크, 몇 년만 지나면 식당의 종업원도 자신의 곡을 흥얼거리게 될 거라고 했던 20세기 초반 쇤베르크의 발언은 지금 들어서 어떤 결과가 있는지 다들 잘 안다. 나눔과 갈라치기, 철저한 배타성에서 오는 몇몇 우월감으로 인해 클래식 현대음악은 죽었다. 당신이 만약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의 애청곡을 하나씩만 꼽아보라.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 죽었다.
글: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주평론가)
유명세, TV 출연 즐기는 강남 지식인 유시민 작가가 3월 18일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한 장의 벤 다이어그램을 펼쳤다. 이 다이어그램에 유시민 작가는 현재의 뉴이재명 그룹을 3개로 나누며 A는 가치 지향형, B는 이익 지향형, C는 가치-이익을 둘 다 중시하는 A와 B의 교집합이라 설명하였다. 음악가인 필자는 이걸 보면서 클래식 음악의 순혈주의와 우월성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현대음악의 교조성이 떠올랐다.
유시민 작가의 정의(定義)에 따르면, 가치를 중시하는 A그룹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부터 이재명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진보 진영의 코어 지지층이다. 이른바 ‘적통’이다. 이걸 그대로 클래식 음악계에 적용하면 예원학교-서울예고-서울대 라인의 성골이다. 여기에 필자 같은 선화 출신들이 소장파로 비벼보려고 하지만 세력과 쪽수에서 밀리고 단합도 되지 않는 오합지졸이다. B그룹은 출세나 선거 출마를 위해 대통령 주변에 새롭게 모여든 사람들로 그려진다. 제대로 된 ‘족보’가 없는 뜨내기 기회주의자들로 비하되는 셈이다. 이건 또 예중-예고도 나오지 않고 서울대나 in 서울 음악대학은커녕 지방대 나와 활동하려는 사람들인 셈이다. C그룹은 이도 저도 아닌 좋게 표현하면 중도고, 뜨내기, 돈키호테다. 그나마 필자같이 선화예중을 나오고 선화예고 1학년 재학 중에 클래식 음악의 본고장인 독일로 유학 간 사람은 지지세와 동문, 학벌이 없다 뿐이지 음악적 순수성과 학문성은 보장과 인정을 받고 있는데 그러지도 못하는 자들이 애매하다.
여기에 도덕적, 학문적 우월주의와 순수성을 들이대면 음악의 서열화가 이루어진다. 유 작가의 분류대로라면 A그룹은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치(올바름)에 기반을 두고, B그룹은 이익에 중점을 두는데 20세기 초반 이후 클래식 음악 작곡과 창작을 예술성과 대중성, 고결함과 진정성에 두거나 상업적이고 통속적인 것으로 분류한 거와 마찬가지다. 20세기. 미적 판단은 시들어가고 도리어 전 시대에 추구되었던 모든 것들이 부정되고 외면당하며 ‘아름다움’은 기피의 대상이 되고 심지어 전 시대에 부정의 대명사로 거부당했던 키치로 치부되고 전락하여진다. 시대를 초월하여 살아남는 작품은 의도되지 않고 가질 필요도 없고 어떤 순간이나 시간에 관련된 음악의 창작과 청취를 특징으로 한다. 아름다움(미적 판단)과 적합성(기능적 판단) 대신에 타당성(Stimmigkeit)과 진정성(Authentizitaet)이 요구되었는데 이 용어들은 아도르노로부터 유래한다. 아도르노는 음악의 내용을 만드는 역사란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미치는 역사라고 한다. 작품이 타당하려면 음악적 관습에 저항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더라도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음악이라야 타당한 음악이다. 이런 음악인 진실되기 때문이다.
20세기에 시도된 음악의 여러 양식은 음악의 개념 그 자체를 모호하게 만들었으며 음악의 범주는 확장하는데 이바지하였으나 보편성이 상실되어 사회적 영향력을 거의 상실한 전문가들의 범주 안에서만 논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음악을 싫어하는 이유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세상의 진실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래서 불편하여서 그러는 것이 아닌, 그냥 듣기 싫은 것으로 이런 아도르노의 사상을 환경과 풍토가 너무나 다른 우리나라 창작 클래식 음악계에서 현대음악의 절대적이고 교조적인 이상과 미적 판단의 기준으로 받아들임으로, 안 그래도 적은 국내 음악 애호가들에게도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고사 직전에 있으며 음악시장의 모든 주도권을 상실한 실정에 있다. 관객이 외면하는 음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꼬리표가 붙는다. 첫째는 과거의 모든 위대한 작곡가들도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어서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항변이다. 실로 소가 웃을 말이다. 베토벤 이후 쇼팽, 바그너, 베르디, 멘델스존 등 지금 우리가 명작으로 칭송하는 작품들의 대부분은 당대에도 정당한 평가와 사랑을 받았다. 백번 양보해서 대부분의 음악 애호가는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쓰인 1926년도의 작품 중 대표작을 꼽으라면 망설여진다. 그럼 1926년보다 100년 전의 1826년엔 어떤 곡들이 발표되었을까? 죽기 5개월 전에 베토벤은 현악사중주 16번을 남겼고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는 1926년에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지금과 똑같이 소용되었다.
또 하나의 궤변은 대중은 지식인들과 달리 음악에 무지하기 때문에 새로운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고 신음악은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존재하며 그 자체로 위대하다는 주장이다. 모든 예술 형태는 창조의 순간에 종말을 맞이한다. 그래서 지금 19세기의 낭만주의 음악을 부활시키려고 하면 앞날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고 전혀 신선하지 못한 낡고 구태의연한 유물로만 취급받는다. 1960~90년대까지는 음악 역사상 가장 개화되고 계몽된 시기로 숭고한 현대음악을 보호하고 전파할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며, 아방가르드 음악을 위한 폐쇄적인 보호 장벽이 관대한 후원에 힘입어 굳건하였고 여기에 속한 이들은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옥상옥으로 군림하며 고담준론만 내뱉으며 끼리끼리 청류로서 자처했다. 반 심미성을 지향하며 인습 타파적이며 인지 가능한 화성과 선율의 방향성이 없기에 비사회적이자 인간이라면 소리를 듣고 처리하는 방식에도 역행하는 행위이다. 아도르노는 20세기 중반 분노에 가득 차서 “가치 있는 모든 음악은 근본적으로 대중적이지 않다.”라고 소리치며 현대음악을 아는 자기들은 A요, 그런 고상하고 위대한 예술을 모르는 자들은 B라고 격하했다.
12음기법을 발명하고 100년간 독일 음악의 우위를 예견한 쇤베르크, 몇 년만 지나면 식당의 종업원도 자신의 곡을 흥얼거리게 될 거라고 했던 20세기 초반 쇤베르크의 발언은 지금 들어서 어떤 결과가 있는지 다들 잘 안다. 나눔과 갈라치기, 철저한 배타성에서 오는 몇몇 우월감으로 인해 클래식 현대음악은 죽었다. 당신이 만약 클래식 음악 애호가라면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의 애청곡을 하나씩만 꼽아보라. 소멸할지언정 개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 죽었다.
글: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주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