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끝’에서 내일의 문을 열었던 광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염된 이름, 막장(幕場)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이들에게 ‘막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이다. 갱도의 가장 깊숙한 곳, 수백, 수천미터 지하에서 아직은 길이 나 있지 않아 사람의 손으로 새 길을 뚫어야 하는 작업 현장. 그들은 자신의 일터를 막장이라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탄광 밖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이나 어떤 상황을 가리켜 ‘막장’이라 말하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말에는 추락과 파탄, 부도덕과 절망의 냄새가 배어 있다. 같은 단어인데도 한쪽에서는 삶을 일구는 일터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이 된다. 어쩌다 이토록 숭고한 노동의 언어가 모욕의 언어로 뒤바뀌었을까.
2026년 광부의 날 기념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영상을 제작하면서 처음에는 석탄을 캐는 현장을 ‘막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공연 관계자들의 여러 의견을 받아들여 그 말을 ‘탄광’ 또는 ‘갱도’로 바꾸었다. 광부들에게는 익숙하고 정확한 현장 용어지만, 오늘날 관객에게는 ‘막장 드라마’가 먼저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막돼먹은 인물과 개연성 없는 사건이 끝없이 이어지는 드라마를 우리는 ‘막장 드라마’라고 부른다. 그 표현이 너무 널리 퍼진 나머지, 정작 어둠 속에서 나라의 빛을 캐내던 막장의 본래 의미가 검댕보다 더 짙은 오해에 덮여 버렸다. 태극기가 오염된 것처럼...
그러나 탄광의 막장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흘러들어 간 삶의 폐허가 아니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이 가난의 등을 밀어내며 산업화의 가파른 비탈을 오를 때, 막장은 에너지를 캐내던 최전선이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광부가 되었고, 선발된 뒤에도 갱목 자르기와 철골 쌓기, 착암기와 콜픽을 다루는 고된 훈련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숙련된 광부들은 지하 깊숙한 갱도로 내려가 암벽을 깨고 석탄을 캐냈다.
그들이 캐 올린 ‘검은 보석’(석탄)은 공장의 용광로를 달구고, 기차를 움직이고, 도시와 농촌의 밤을 밝혔다. 조선과 자동차, 철강산업이 일어서고 경제개발의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동력이었다. 독일로 건너간 광부들은 낯선 땅의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외화를 벌어 고국의 경제를 떠받쳤다. 광부가 없었다면 ‘잘살아 보자’는 외침은 동력을 얻지 못한 채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어둠의 심장에서 캐낸 빛
막장의 풍경은 지상의 언어만으로는 다 옮기기 어렵다. 축축한 암벽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곰팡이가 가득한 갱도를 지나 착암기가 바위를 파고들 때마다 천둥 같은 굉음이 갱도 안을 휘감는다. 희미한 전구 아래 탄가루는 검은 눈처럼 날리고, 광부들의 얼굴에는 땀과 분진이 뒤섞여 거대한 가면이 얼굴을 도포하곤 한다. 천장은 낮고 공기는 무거우며, 갱목은 땅의 압력을 온몸으로 떠받친 채 마른 신음을 토한다. 그곳에서는 한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광부들은 곡괭이 끝의 감각과 동료의 숨소리를 믿고 조금씩 전진한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수백만 년 동안 땅이 품어 온 시간의 무게가 응축된 어둠이었다. 광부들은 그 검은 시간의 지층에 구멍을 내고, 지상의 아침을 밝힐 불씨를 캐냈다. 막장은 세상의 빛이 끝나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빛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가장 캄캄한 장소에서 가장 환한 미래의 연료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다.
오는 9월 11일과 19일, 2026년 광부의 날 지정을 기념해 태백과 삼척에서 각각 ‘빛을 노래하다’를 주제로 클래식 음악과 사물놀이가 어우러지는 음악회가 열린다. 이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광부들의 희생이 국가 성장에 얼마나 깊고 넓은 흔적을 남겼는지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너무 쉽게 누려 온 전깃불과 따뜻한 방, 공장의 불꽃과 도시의 야경 뒤에는 이름 없이 막장으로 내려간 이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묻혀 있었다.
막을 찢어야 다음 막이 열린다
탄광의 ‘막장’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우리 인생의 ‘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막장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석탄을 캘 수 없다. 막힌 암벽 앞에 서지 않고서는 그 너머의 새 길도 열 수 없다.
오페라와 연극도 막이 내려야 다음 막이 시작된다. 다음 세계란 가만히 기다린다고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광부가 착암기로 암벽을 뚫듯, 우리 역시 눈앞의 막을 밀어내고 찢어야 한다. 1막의 장막을 걷어야 2막의 무대가 나타난다. 새 막이 올랐다고 해서 인생이 순탄해지는 것은 아니다. 막장에서는 단단한 암반을 만나고 갱목이 뒤틀리며 예기치 않은 낙반의 위험과 맞닥뜨린다. 무대 위의 새 막에서도 사랑과 배신, 성공과 좌절, 만남과 이별이 기다린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불이 금을 시험하듯, 역경은 용감한 사람을 시험한다”고 말했다. 막장의 불빛 아래서 이 말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육체의 진실이 된다. 암벽은 광부를 가로막지만, 동시에 그의 기술과 용기와 동료애를 드러내는 시험대가 된다. 삶의 고난도 우리를 무너뜨리기만 하는 벽은 아니다. 때로 그 벽은 우리가 무엇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인지를 밝혀 주는 어두운 거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 또한 수많은 막을 통과하는 연극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오페라와 연극에는 이미 쓰인 대본이 있지만 인생에는 완성된 청사진이란 없다. 우리는 스케줄을 짜고 목표를 세우며 미래를 설계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도둑처럼 들이닥쳐 애써 그려 둔 길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너진 계획 앞에서 다시 곡괭이를 든다.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막혀 있기 때문에 길을 만들며 걷는다.
아침이면 오늘 내가 다칠지 동료가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는 험지로 도시락을 싸 들고 떠났던 광부들처럼, 우리도 불확실한 하루 속으로 출근한다. 누구도 오늘의 끝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문을 열고 나서는 까닭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방식의 삶을 견뎌 낼 수 있다.” 광부에게 그 이유는 가족이었고 동료였으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시대의 간절한 희망이었다.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
우리가 술안주로 먹는 ‘막창’ 역시 소화기관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킨다. 막장과 막창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둘 다 ‘끝’이라는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몸의 마지막 통로는 생명이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 끊임없이 비워져야 하는 자리다. 끝은 종말인 동시에 순환의 조건이다. 막힌 것이 뚫려야 몸이 살고, 닫힌 막이 열려야 다음 장면이 시작된다.
우리도 매일 저마다의 막장을 향해 내려간다. 광부처럼 아직은 빛이 닿지 않는 시간속으로 들어가 삶의 열매를 캐내고, 그 열매로 또 하루의 불빛을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노동하고 견디며 가족과 세상을 밝힐 무언가를 캐낸다. 누군가는 글을 캐고, 누군가는 음악을 캐며, 누군가는 한 끼의 밥과 아이들의 내일을 캐낸다. 그러므로 막장으로 향한다는 것은 삶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캐내는 일이다.
‘막장인생’이라는 말을 새롭게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의 추락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삶이 본래 ‘막장인생’이다. 오늘이라는 한 막이 끝나면 우리는 잠시 밤의 품에 몸을 눕힌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일어나 직장과 일터로 향해 착암기와 콜픽과 곡괭이를 들고 ‘내일’이라는 막을 뚫는다. 지금 이 순간의 막을 통과하지 않는 한, 다음이라는 기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막장인생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늘을 붙잡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함께 품은 말이다. 끝을 기억하기에 오늘을 허투루 쓰지 않고, 어둠을 알기에 한 줄기 빛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삶. 그것이 ‘막장인생’의 참뜻다.
평생 빛 한 점 없는 지하에서 새로운 길을 뚫고, 검은 석탄 속에서 나라의 내일을 캐 올린 모든 광부에게 깊은 존경을 바친다. 아울러 ‘막장’이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준 이번 음악회의 주최 측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가 무심히 누리는 오늘의 빛은 누군가 어둠 속에서 목숨을 걸고 캐낸 것이다. 그러므로 막장은 끝이 아니다. 막장은 빛이 태어나기 직전, 인간이 어둠을 향해 마지막 곡괭이를 내리치는 시작의 자리이라는 이번 공연 연출자의 변이다.
글 발행인 김종섭
- ‘끝’에서 내일의 문을 열었던 광부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오염된 이름, 막장(幕場)
탄광에서 석탄을 캐던 이들에게 ‘막장’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말이다. 갱도의 가장 깊숙한 곳, 수백, 수천미터 지하에서 아직은 길이 나 있지 않아 사람의 손으로 새 길을 뚫어야 하는 작업 현장. 그들은 자신의 일터를 막장이라 부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나 탄광 밖의 사람들이 누군가의 삶이나 어떤 상황을 가리켜 ‘막장’이라 말하며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 말에는 추락과 파탄, 부도덕과 절망의 냄새가 배어 있다. 같은 단어인데도 한쪽에서는 삶을 일구는 일터가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 내려갈 곳 없는 밑바닥이 된다. 어쩌다 이토록 숭고한 노동의 언어가 모욕의 언어로 뒤바뀌었을까.
2026년 광부의 날 기념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영상을 제작하면서 처음에는 석탄을 캐는 현장을 ‘막장’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공연 관계자들의 여러 의견을 받아들여 그 말을 ‘탄광’ 또는 ‘갱도’로 바꾸었다. 광부들에게는 익숙하고 정확한 현장 용어지만, 오늘날 관객에게는 ‘막장 드라마’가 먼저 떠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막돼먹은 인물과 개연성 없는 사건이 끝없이 이어지는 드라마를 우리는 ‘막장 드라마’라고 부른다. 그 표현이 너무 널리 퍼진 나머지, 정작 어둠 속에서 나라의 빛을 캐내던 막장의 본래 의미가 검댕보다 더 짙은 오해에 덮여 버렸다. 태극기가 오염된 것처럼...
그러나 탄광의 막장은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흘러들어 간 삶의 폐허가 아니었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이 가난의 등을 밀어내며 산업화의 가파른 비탈을 오를 때, 막장은 에너지를 캐내던 최전선이었다. 전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광부가 되었고, 선발된 뒤에도 갱목 자르기와 철골 쌓기, 착암기와 콜픽을 다루는 고된 훈련을 거쳐야 했다. 그렇게 숙련된 광부들은 지하 깊숙한 갱도로 내려가 암벽을 깨고 석탄을 캐냈다.
그들이 캐 올린 ‘검은 보석’(석탄)은 공장의 용광로를 달구고, 기차를 움직이고, 도시와 농촌의 밤을 밝혔다. 조선과 자동차, 철강산업이 일어서고 경제개발의 수레바퀴가 힘차게 돌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동력이었다. 독일로 건너간 광부들은 낯선 땅의 더 깊은 어둠 속에서 외화를 벌어 고국의 경제를 떠받쳤다. 광부가 없었다면 ‘잘살아 보자’는 외침은 동력을 얻지 못한 채 한낱 공염불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어둠의 심장에서 캐낸 빛
막장의 풍경은 지상의 언어만으로는 다 옮기기 어렵다. 축축한 암벽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고, 곰팡이가 가득한 갱도를 지나 착암기가 바위를 파고들 때마다 천둥 같은 굉음이 갱도 안을 휘감는다. 희미한 전구 아래 탄가루는 검은 눈처럼 날리고, 광부들의 얼굴에는 땀과 분진이 뒤섞여 거대한 가면이 얼굴을 도포하곤 한다. 천장은 낮고 공기는 무거우며, 갱목은 땅의 압력을 온몸으로 떠받친 채 마른 신음을 토한다. 그곳에서는 한 걸음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광부들은 곡괭이 끝의 감각과 동료의 숨소리를 믿고 조금씩 전진한다.
그 어둠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었다. 수백만 년 동안 땅이 품어 온 시간의 무게가 응축된 어둠이었다. 광부들은 그 검은 시간의 지층에 구멍을 내고, 지상의 아침을 밝힐 불씨를 캐냈다. 막장은 세상의 빛이 끝나는 곳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빛이 태어나는 곳이었다. 가장 캄캄한 장소에서 가장 환한 미래의 연료가 나왔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역설이다.
오는 9월 11일과 19일, 2026년 광부의 날 지정을 기념해 태백과 삼척에서 각각 ‘빛을 노래하다’를 주제로 클래식 음악과 사물놀이가 어우러지는 음악회가 열린다. 이 공연을 준비하는 동안 광부들의 희생이 국가 성장에 얼마나 깊고 넓은 흔적을 남겼는지 새삼 깨달았다. 우리가 너무 쉽게 누려 온 전깃불과 따뜻한 방, 공장의 불꽃과 도시의 야경 뒤에는 이름 없이 막장으로 내려간 이들의 발자국이 겹겹이 묻혀 있었다.
막을 찢어야 다음 막이 열린다
탄광의 ‘막장’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우리 인생의 ‘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막장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석탄을 캘 수 없다. 막힌 암벽 앞에 서지 않고서는 그 너머의 새 길도 열 수 없다.
오페라와 연극도 막이 내려야 다음 막이 시작된다. 다음 세계란 가만히 기다린다고 저절로 열리지 않는다. 광부가 착암기로 암벽을 뚫듯, 우리 역시 눈앞의 막을 밀어내고 찢어야 한다. 1막의 장막을 걷어야 2막의 무대가 나타난다. 새 막이 올랐다고 해서 인생이 순탄해지는 것은 아니다. 막장에서는 단단한 암반을 만나고 갱목이 뒤틀리며 예기치 않은 낙반의 위험과 맞닥뜨린다. 무대 위의 새 막에서도 사랑과 배신, 성공과 좌절, 만남과 이별이 기다린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는 “불이 금을 시험하듯, 역경은 용감한 사람을 시험한다”고 말했다. 막장의 불빛 아래서 이 말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한 육체의 진실이 된다. 암벽은 광부를 가로막지만, 동시에 그의 기술과 용기와 동료애를 드러내는 시험대가 된다. 삶의 고난도 우리를 무너뜨리기만 하는 벽은 아니다. 때로 그 벽은 우리가 무엇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인지, 무엇을 위해 다시 일어서는 사람인지를 밝혀 주는 어두운 거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여정 또한 수많은 막을 통과하는 연극과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오페라와 연극에는 이미 쓰인 대본이 있지만 인생에는 완성된 청사진이란 없다. 우리는 스케줄을 짜고 목표를 세우며 미래를 설계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은 도둑처럼 들이닥쳐 애써 그려 둔 길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너진 계획 앞에서 다시 곡괭이를 든다. 길이 있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막혀 있기 때문에 길을 만들며 걷는다.
아침이면 오늘 내가 다칠지 동료가 돌아오지 못할지 모르는 험지로 도시락을 싸 들고 떠났던 광부들처럼, 우리도 불확실한 하루 속으로 출근한다. 누구도 오늘의 끝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문을 열고 나서는 까닭은 살아야 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니체의 말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거의 모든 방식의 삶을 견뎌 낼 수 있다.” 광부에게 그 이유는 가족이었고 동료였으며,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시대의 간절한 희망이었다.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삶
우리가 술안주로 먹는 ‘막창’ 역시 소화기관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킨다. 막장과 막창은 서로 다른 말이지만, 둘 다 ‘끝’이라는 이미지와 맞닿아 있다. 그러나 몸의 마지막 통로는 생명이 끝나는 자리가 아니라 생명이 지속되기 위해 끊임없이 비워져야 하는 자리다. 끝은 종말인 동시에 순환의 조건이다. 막힌 것이 뚫려야 몸이 살고, 닫힌 막이 열려야 다음 장면이 시작된다.
우리도 매일 저마다의 막장을 향해 내려간다. 광부처럼 아직은 빛이 닿지 않는 시간속으로 들어가 삶의 열매를 캐내고, 그 열매로 또 하루의 불빛을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 노동하고 견디며 가족과 세상을 밝힐 무언가를 캐낸다. 누군가는 글을 캐고, 누군가는 음악을 캐며, 누군가는 한 끼의 밥과 아이들의 내일을 캐낸다. 그러므로 막장으로 향한다는 것은 삶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깊은 곳에서 다시 살아갈 힘을 캐내는 일이다.
‘막장인생’이라는 말을 새롭게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의 추락한 삶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삶이 본래 ‘막장인생’이다. 오늘이라는 한 막이 끝나면 우리는 잠시 밤의 품에 몸을 눕힌다. 그리고 이튿날 다시 일어나 직장과 일터로 향해 착암기와 콜픽과 곡괭이를 들고 ‘내일’이라는 막을 뚫는다. 지금 이 순간의 막을 통과하지 않는 한, 다음이라는 기회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막장인생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오늘을 붙잡으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함께 품은 말이다. 끝을 기억하기에 오늘을 허투루 쓰지 않고, 어둠을 알기에 한 줄기 빛을 더욱 귀하게 여기는 삶. 그것이 ‘막장인생’의 참뜻다.
평생 빛 한 점 없는 지하에서 새로운 길을 뚫고, 검은 석탄 속에서 나라의 내일을 캐 올린 모든 광부에게 깊은 존경을 바친다. 아울러 ‘막장’이라는 말 속에 감추어진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준 이번 음악회의 주최 측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우리가 무심히 누리는 오늘의 빛은 누군가 어둠 속에서 목숨을 걸고 캐낸 것이다. 그러므로 막장은 끝이 아니다. 막장은 빛이 태어나기 직전, 인간이 어둠을 향해 마지막 곡괭이를 내리치는 시작의 자리이라는 이번 공연 연출자의 변이다.
글 발행인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