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무대를 기다리지 않고 만드는 프론티어
PROLOGUE
연습실 문이 열리자 피가로가 먼저 들어온다. 잠시 뒤 알마비바 백작이 악보를 손에 든 채 자리를 잡고, 피아노 앞에는 음악코치가 앉는다. 연출가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배우들의 동선을 다시 그려 보고, 조연출은 연습 일정을 확인하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누군가는 고음의 호흡을 가다듬고, 누군가는 대사의 억양을 맞춘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들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을 향해 시간의 성을 쌓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오페라 연습실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는 지금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안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을 바꾸려는 작은 실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들은 아직 국립예술단체의 단원도 아니고 국제 콩쿠르를 휩쓴 스타도 아니다. 대부분 음악대학을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예비 예술인들이다. 하지만 이 연습실에서만큼은 누구도 '학생'으로 불리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의 공연을 함께 만드는 제작진이며, 공연이 끝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첫 무대를 기록하게 될 예비 프로들이다.
이번 특집은 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을 달았다. '요즘 것들이 오페라하는 방법.' 혹자는 이 표현이 오페라라는 장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 앞에 '요즘 것들'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것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러 이 표현을 선택했다. 전통을 가볍게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을 이어 갈 사람들이 지금 어떤 현실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청년 성악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높은 음’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음악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해외 유학을 다녀오는 것도 아니다. 진짜 어려운 일은 졸업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무대를 만들거나 무대에 서는 일이다. 그 기회는 사실 쉽지 않다. 공연장은 존재하지만 데뷔의 문은 좁고, 실력은 충분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첫 무대가 없으니 경력을 만들 수 없고, 경력이 없으니 다시 첫 무대를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그 사이 적지 않은 청년 예술인들이 또 다른 유학을 선택하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길을 고민하거나, 오랜 시간 무대를 기다리며 알바를 전전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무작정 유예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질문해야 했다. '첫 무대는 누가 만들어 줄 것인가.' 이들에게 한숨만 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젊은 오페라인들을 위한 용기있는 프로젝트 ‘오페라 넥스트’(Opera NEXT)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 49er들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특집은 특정 사업을 소개하거나 한 사람의 성공담을 들려주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오페라계가 지금 어떤 구조적 과제를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민간 공연예술기획사가 어떤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 마련됐다.
교육에서 공연으로, 공연에서 데뷔로, 그리고 데뷔에서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 구조를 만들려는 이 실험은 단순한 프로그램을 넘어 우리 예술 생태계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방향을 묻고 있다.
결국 '요즘 것들이 오페라하는 방법'이란 전통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지금 가장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오늘도 연습실에서 묵묵히 악보를 넘기거나 연기에 뫃ㅎㄹ입하고 소리를 가다듬고 있는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들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팀. 좌로부터 송민서 최소원 최수빈 이승우 김세미 원서영 이윤지 박정환 송예진
CHAPTER 1
청년예술인들에게 첫 무대가 사라졌다.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주자들을 꾸준히 배출해 왔다. 국제 콩쿠르에서는 한국인 수상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고, 유럽 주요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도 한국 출신 연주자들의 활약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뛰어난 교육 시스템과 치열한 연습 문화는 한국 클래식의 경쟁력을 만들어 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성과 뒤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바로 '첫 무대'의 부재다.
음악대학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졸업 이후의 무대를 책임질 수는 없다. 해외 유학은 더 넓은 경험을 안겨 주지만, 귀국과 동시에 활동의 기반이 마련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많은 청년 예술인들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도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관객 앞에 설 기회를 찾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최근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는 음악대학의 구조를 바꾸고 있으며, 일부 대학은 해외 유학생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변화를 겪고 있다. 공연 시장 역시 경기 침체와 제작비 상승 등의 영향으로 신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보다 검증된 이름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오페라는 특히 많은 제작비와 인력이 필요한 장르인 만큼, 새로운 얼굴에게 주연은 물론 작은 배역조차 쉽게 맡기기 어려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청년 예술인들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대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무대가 필요하지만,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경험이 요구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성악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코치와 연출, 조연출 등 오페라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문 인력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에서는 이론과 실기를 배우지만 실제 프로덕션이 움직이는 방식은 현장에서만 익힐 수 있다. 결국 첫 현장을 경험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은 모든 직군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과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오페라계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육 프로그램 하나를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교육과 실제 제작, 공연, 그리고 이후의 활동을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청년 예술인이 '학생'에서 '프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만드는 일, 바로 그 지점에서 ‘오페라 넥스트’가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CHAPTER 2
누군가는 첫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변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주식회사 오뮤 홍아람 대표가 오페라 넥스트를 구상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무대 경험을 쌓은 홍대표는 유럽의 제작 시스템 속에서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젊은 예술인에게는 학교를 졸업한 뒤 실제 공연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역부터 시작해 조연과 주연으로 이어지는 무대 경험, 음악코치와 연출진을 보조하며 제작 과정을 익히는 시간, 선배 예술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연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공연계를 멈춰 세웠고, 어렵게 이어지던 무대마저 잇따라 취소됐다. 기존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잃어가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에게 남겨진 무대는 더욱 적었다. 실력은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고, 열정은 있었지만 첫걸음을 내디딜 발판이 부족했다. 그때부터 홍아람 대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유학을 다녀온 음악인도 힘든데, 아에 유학을 가지 않은 학생들은 어디에서 첫 무대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성악가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페라는 한 사람의 노래만으로 완성되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코치는 오페라를 해석하고 방향을 잡으며 연주까지 이어가고, 연출가는 장면을 설계하며, 조연출은 연 출을 도우며 공연의 흐름을 연결한다. 무대 뒤에는 수많은 전문 인력이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현장을 경험할 기회는 결코 많지 않다.
결국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마스터클래스가 아니라 실제 공연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이 생각은 점차 하나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청년 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강의실이 아니라 무대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확신에서 출발했다.
공공기관 취창업 워크숍 중
오늘날 예술계에는 다양한 지원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마스터클래스, 워크숍, 특강, 멘토링 등 청년 예술인을 위한 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정 기간의 교육을 마치면 그 역할이 끝난다. 실제 공연은 또 다른 세계다. 홀로 음악을 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 무대 위에서의 동선, 오케스트라와의 균형, 객석의 반응, 공연 직전의 긴장감까지 모두 몸으로 익혀야 한다.
연출 역시 대본을 분석하는 것과 배우를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음악코치 또한 연습실에서의 지도와 실제 공연을 책임지는 역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틈을 메우기 위해 오페라 넥스트는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덕션을 선택했다.
참가자들은 학생이 아니라 제작진으로 참여한다. 배역을 맡고, 연습을 거쳐, 공연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관객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멘토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선배 예술인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구조는 참가자들에게 단순한 경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공연 한 편을 끝까지 완성했다는 이력은 이후 또 다른 무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첫 번째 경력이 되기 때문이다.
오페라 넥스트를 바라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의외로 '인큐베이팅'이나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첫 직장'에 가까웠다나 할까?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해 실무를 가르치고, 병원은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통해 의사를 키우며, 법조계 역시 수습과 실무를 거쳐 전문가를 길러낸다. 하지만 예술은 종종 졸업과 동시에 완성된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어도 지속 가능한 생태계는 만들어질 수 없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단순히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이 한 편의 공연을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이들이 무대를 경험하고, 서로 협업하며, 실패와 성장을 함께 겪는 과정 자체가 미래 한국 오페라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 넥스트는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청년 예술인이 '다음 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연결하는 출발점이다.
피가로의 결혼 팀. 좌로부터 배성열 최보원 서영주 김제희 이향기 윤종현 조수연 박건영 김예림 공수진 김수연
CHAPTER 3
오페라를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문학, 연기와 미술, 무용과 무대기술이 모두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화려한 결과물 뒤에는 오랜 시간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숨어 있다. 뛰어난 성악가 한 명만으로는 좋은 오페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악코치의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고, 연출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야 하며, 조연출과 스태프의 치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결국 오페라는 개인의 재능보다 공동체의 협업이 더욱 중요한 예술이다. 오페라 넥스트는 처음부터 특정 직군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성악가만을 선발하는 오디션이었다면 또 하나의 경연대회에 머물렀을 것이다. 대신 프로젝트는 성악가 14명과 음악코치 2명, 연출 2명, 조연출 2명 등 모두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을 하나의 팀으로 구성했다. 서로 다른 전공과 역할을 가진 이들이 실제 프로덕션 안에서 함께 부딪치고 배우며 성장하는 구조를 택한 것이다.
이 점이 오페라 넥스트를 특별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교육 프로그램은 개인의 기량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실제 공연장은 철저히 협업의 공간이다. 자신의 노래만 완벽하다고 공연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 배우의 호흡을 읽어야 하고, 음악코치의 피드백을 받아들여야 하며, 연출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공연 직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더라도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움직일 수 있어야 비로소 한 편의 오페라가 완성된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함께 만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올해 참가자들이 선택한 작품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다. 서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두 오페라는 피가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익숙한 명작을 새로운 옴니버스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번 무대는 젊은 예술인들에게 다양한 배역과 장면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보다 친숙하게 오페라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한 편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참가자들은 오디션에 합격하는 순간부터 단순한 교육생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덕션 구성원이 된다. 배역을 분석하고, 음악을 맞추고, 동선을 익히며, 수없이 반복되는 리허설을 통해 공연을 완성해 간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기도 하며, 다시 타협하고 성장한다.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실제 제작 현장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멘토들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조은비, 홍형주, 박지운, 김건우, 유영광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단순히 기술을 전수하는 강사가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선배이자 동료로 참여한다. 이들은 참가자들에게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경험으로 들려준다. 젊은 예술인들에게 가장 큰 배움은 때로 한마디 조언보다 같은 공간에서 선배의 작업 방식을 직접 지켜보는 데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프로젝트를 마친 참가자들이 이후에도 오뮤의 다양한 제작에 참여할 기회를 얻고, 다른 무대로 활동을 넓혀 가며, 각자의 이름으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 그것이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진짜 목표다.
생각해 보면 예술의 역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첫 기회를 내어 주는 일에서 시작됐다. 오늘 세계적인 성악가도, 거장 연출가도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작은 배역을 맡겼고, 첫 리허설을 허락했으며, 실수할 수 있는 무대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얻은 한 번의 경험이 다음 무대를 만들고, 또 그다음 무대로 이어지면서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했다.
오페라 넥스트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그 당연하지만 잊히기 쉬운 원칙을 다시 실천하려 한다. 좋은 예술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무대를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 그리고 좋은 무대는 누군가 용기를 내어 먼저 만들어 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건우 마스터클래스
CHAPTER 4
예술은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뛰어난 성악가가 있다고 해서 오페라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연출가 한 명이 있다고 해서 새로운 관객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페라 넥스트는 공연 제작 프로젝트인 동시에 하나의 생태계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는 오랫동안 세계적인 연주자를 배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젊은 예술인이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진입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고민을 남겨두고 있었다. 뛰어난 인재는 많지만, 이들이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는 중간 단계는 충분하지 않았는 말이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 실제 공연 현장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고, 그 틈에서 적지 않은 청년 예술인들이 방향을 잃기도 했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빈 공간을 메우려 한다.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수료증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프로그램북에 실린 공연이다. 관객 앞에서 역할을 맡아 작품을 완성하고, 동료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 본 경험은 어느 이론 수업보다 값진 자산이 된다. 공연이 끝난 뒤 남는 것은 박수만이 아니다. 자신의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첫 작품, 다음 오디션에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첫 현장, 그리고 함께 작업한 동료와 선배라는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가 남는다.
그래서 오페라 넥스트는 앞서 언급했듯이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에도 오뮤가 제작하는 다양한 공연과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한 번의 공연으로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다음 무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이다. 교육은 끝났지만 관계는 계속되고, 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성장은 이어진다.
이러한 철학은 이번 무대에서 빛을 발할 계획이다. 오는 9월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울체임버홀에서 선보일 공연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조선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오늘 연습실에서 악보를 넘기고 있는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 가운데 누군가는 앞으로 국내외 무대에서 주연으로 활약할 것이고, 누군가는 뛰어난 연출가나 음악코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무도 그 미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첫 무대는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훗날 한국 오페라가 또 한 번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에는 'Opera NEXT'라는 이름이 조용히 기록될지도 모른다.
베이스 유영광 마스터클래스
EPILOGUE
오페라를 오래된 예술이라고 말한다. 18세기에 작곡된 음악, 화려한 의상,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떠올리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오페라는 언제나 가장 젊은 예술이었다.
모차르트도, 로시니도, 베르디도 처음부터 거장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첫 작품이 있었고, 첫 무대가 있었으며, 자신을 믿어 준 극장과 선배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 역시 당시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전통은 완성된 형태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음 세대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나며 이어져 왔다.
한국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한국 성악가들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작은 배역을 맡길 용기를 냈고, 누군가는 경험이 부족한 신인을 믿고 무대에 세웠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실패할 기회까지도 허락했다. 그렇게 한 번의 무대가 또 다른 무대를 만들고,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하면서 오늘의 한국 오페라가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스타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청년 예술인이 자신의 첫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뛰어난 재능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재능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무대이며, 학교를 졸업한 젊은 예술인이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다.
Opera NEXT는 그 거대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첫 무대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은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예술은 거대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의미 있는 시작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번 특집은 한 편의 공연을 기록하기 위해 기획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소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오페라의 '다음 장면'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훗날 한국 오페라의 새로운 역사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이렇게 회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오페라 넥스트는 우리에게 첫 무대를 내어주었잖아."
그 한 번의 선택이 한 명의 예술가를 만들고, 한 세대를 이어 주며, 결국 한국 오페라의 미래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글 김종섭
첫 무대를 기다리지 않고 만드는 프론티어
PROLOGUE
연습실 문이 열리자 피가로가 먼저 들어온다. 잠시 뒤 알마비바 백작이 악보를 손에 든 채 자리를 잡고, 피아노 앞에는 음악코치가 앉는다. 연출가는 무대 한가운데 서서 배우들의 동선을 다시 그려 보고, 조연출은 연습 일정을 확인하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누군가는 고음의 호흡을 가다듬고, 누군가는 대사의 억양을 맞춘다. 서로 다른 역할을 맡은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들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세비야의 이발사’’ 공연을 향해 시간의 성을 쌓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느 오페라 연습실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그러나 이 공간에는 지금 한국 클래식 음악계가 안고 있는 현실과, 그 현실을 바꾸려는 작은 실험이 동시에 담겨 있다. 이들은 아직 국립예술단체의 단원도 아니고 국제 콩쿠르를 휩쓴 스타도 아니다. 대부분 음악대학을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둔 예비 예술인들이다. 하지만 이 연습실에서만큼은 누구도 '학생'으로 불리지 않는다. 모두가 하나의 공연을 함께 만드는 제작진이며, 공연이 끝나는 순간 자신의 이름으로 첫 무대를 기록하게 될 예비 프로들이다.
이번 특집은 조금은 도발적인 제목을 달았다. '요즘 것들이 오페라하는 방법.' 혹자는 이 표현이 오페라라는 장르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수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예술 앞에 '요즘 것들'이라는 말을 붙인다는 것은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부러 이 표현을 선택했다. 전통을 가볍게 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전통을 이어 갈 사람들이 지금 어떤 현실 속에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가장 솔직하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청년 성악가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높은 음’을 내는 것이 아니다. 음악대학에 입학하는 것도, 해외 유학을 다녀오는 것도 아니다. 진짜 어려운 일은 졸업 이후 자신의 이름으로 무대를 만들거나 무대에 서는 일이다. 그 기회는 사실 쉽지 않다. 공연장은 존재하지만 데뷔의 문은 좁고, 실력은 충분하지만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까닭이다.
첫 무대가 없으니 경력을 만들 수 없고, 경력이 없으니 다시 첫 무대를 얻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그 사이 적지 않은 청년 예술인들이 또 다른 유학을 선택하거나, 생계를 위해 다른 길을 고민하거나, 오랜 시간 무대를 기다리며 알바를 전전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무작정 유예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질문해야 했다. '첫 무대는 누가 만들어 줄 것인가.' 이들에게 한숨만 쉬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젊은 오페라인들을 위한 용기있는 프로젝트 ‘오페라 넥스트’(Opera NEXT)는 바로 그 질문에서 출발한 49er들의 프로젝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특집은 특정 사업을 소개하거나 한 사람의 성공담을 들려주기 위해 기획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 오페라계가 지금 어떤 구조적 과제를 안고 있는지,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민간 공연예술기획사가 어떤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지를 기록하기 위해 마련됐다.
교육에서 공연으로, 공연에서 데뷔로, 그리고 데뷔에서 지속 가능한 활동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연결 구조를 만들려는 이 실험은 단순한 프로그램을 넘어 우리 예술 생태계가 앞으로 고민해야 할 방향을 묻고 있다.
결국 '요즘 것들이 오페라하는 방법'이란 전통을 부정하는 방식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을 이어 가기 위해 지금 가장 절실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화려한 수사가 아니라, 오늘도 연습실에서 묵묵히 악보를 넘기거나 연기에 뫃ㅎㄹ입하고 소리를 가다듬고 있는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들의 시간 속에서 조금씩 완성되고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팀. 좌로부터 송민서 최소원 최수빈 이승우 김세미 원서영 이윤지 박정환 송예진
CHAPTER 1
청년예술인들에게 첫 무대가 사라졌다.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계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연주자들을 꾸준히 배출해 왔다. 국제 콩쿠르에서는 한국인 수상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고, 유럽 주요 극장과 오케스트라에서도 한국 출신 연주자들의 활약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뛰어난 교육 시스템과 치열한 연습 문화는 한국 클래식의 경쟁력을 만들어 온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성과 뒤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현실이 존재한다. 바로 '첫 무대'의 부재다.
음악대학은 학생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제공하지만 졸업 이후의 무대를 책임질 수는 없다. 해외 유학은 더 넓은 경험을 안겨 주지만, 귀국과 동시에 활동의 기반이 마련되는 것도 아니다. 결국 많은 청년 예술인들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도 정작 자신의 이름으로 관객 앞에 설 기회를 찾지 못한 채, 긴 시간을 보내게 된다.
최근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학령인구 감소는 음악대학의 구조를 바꾸고 있으며, 일부 대학은 해외 유학생 비중이 크게 늘어나는 변화를 겪고 있다. 공연 시장 역시 경기 침체와 제작비 상승 등의 영향으로 신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기보다 검증된 이름을 선택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오페라는 특히 많은 제작비와 인력이 필요한 장르인 만큼, 새로운 얼굴에게 주연은 물론 작은 배역조차 쉽게 맡기기 어려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그 결과 청년 예술인들은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경험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대 밖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다. 역설적이게도 경험을 쌓기 위해서는 먼저 무대가 필요하지만,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경험이 요구되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성악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음악코치와 연출, 조연출 등 오페라를 구성하는 다양한 전문 인력 역시 마찬가지다. 대학에서는 이론과 실기를 배우지만 실제 프로덕션이 움직이는 방식은 현장에서만 익힐 수 있다. 결국 첫 현장을 경험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어려운 것은 모든 직군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과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오페라계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육 프로그램 하나를 더 만드는 일이 아니다. 교육과 실제 제작, 공연, 그리고 이후의 활동을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지 않을까? 청년 예술인이 '학생'에서 '프로'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만드는 일, 바로 그 지점에서 ‘오페라 넥스트’가 출발하고 있는 셈이다.
CHAPTER 2
누군가는 첫 무대를 만들어야 한다. 모든 변화는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된다. 주식회사 오뮤 홍아람 대표가 오페라 넥스트를 구상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무대 경험을 쌓은 홍대표는 유럽의 제작 시스템 속에서 한 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젊은 예술인에게는 학교를 졸업한 뒤 실제 공연 현장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과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단역부터 시작해 조연과 주연으로 이어지는 무대 경험, 음악코치와 연출진을 보조하며 제작 과정을 익히는 시간, 선배 예술가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연 한 편을 완성하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교육이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온 뒤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공연계를 멈춰 세웠고, 어렵게 이어지던 무대마저 잇따라 취소됐다. 기존 예술인들도 설 자리를 잃어가던 시기였다. 그 속에서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거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청년들에게 남겨진 무대는 더욱 적었다. 실력은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고, 열정은 있었지만 첫걸음을 내디딜 발판이 부족했다. 그때부터 홍아람 대표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유학을 다녀온 음악인도 힘든데, 아에 유학을 가지 않은 학생들은 어디에서 첫 무대를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성악가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오페라는 한 사람의 노래만으로 완성되는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음악코치는 오페라를 해석하고 방향을 잡으며 연주까지 이어가고, 연출가는 장면을 설계하며, 조연출은 연 출을 도우며 공연의 흐름을 연결한다. 무대 뒤에는 수많은 전문 인력이 존재하지만, 이들 역시 현장을 경험할 기회는 결코 많지 않다.
결국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마스터클래스가 아니라 실제 공연 제작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할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장이었다. 이 생각은 점차 하나의 확신으로 바뀌었다.
'청년 예술인에게 필요한 것은 강의실이 아니라 무대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확신에서 출발했다.
오늘날 예술계에는 다양한 지원사업과 교육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마스터클래스, 워크숍, 특강, 멘토링 등 청년 예술인을 위한 제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은 일정 기간의 교육을 마치면 그 역할이 끝난다. 실제 공연은 또 다른 세계다. 홀로 음악을 잘 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상대 배우와의 호흡, 무대 위에서의 동선, 오케스트라와의 균형, 객석의 반응, 공연 직전의 긴장감까지 모두 몸으로 익혀야 한다.
연출 역시 대본을 분석하는 것과 배우를 움직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며, 음악코치 또한 연습실에서의 지도와 실제 공연을 책임지는 역할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런 틈을 메우기 위해 오페라 넥스트는 교육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덕션을 선택했다.
참가자들은 학생이 아니라 제작진으로 참여한다. 배역을 맡고, 연습을 거쳐, 공연을 올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관객과 만난다. 이 과정에서 멘토들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선배 예술인으로 자리한다. 이러한 구조는 참가자들에게 단순한 경험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공연 한 편을 끝까지 완성했다는 이력은 이후 또 다른 무대로 이어질 수 있는 첫 번째 경력이 되기 때문이다.
오페라 넥스트를 바라보며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의외로 '인큐베이팅'이나 '아카데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첫 직장'에 가까웠다나 할까?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해 실무를 가르치고, 병원은 인턴과 레지던트 과정을 통해 의사를 키우며, 법조계 역시 수습과 실무를 거쳐 전문가를 길러낸다. 하지만 예술은 종종 졸업과 동시에 완성된 전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이 간극을 메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인재가 배출되어도 지속 가능한 생태계는 만들어질 수 없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빈틈을 메우려는 시도다.
이 프로젝트의 의미는 단순히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이 한 편의 공연을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이들이 무대를 경험하고, 서로 협업하며, 실패와 성장을 함께 겪는 과정 자체가 미래 한국 오페라의 자산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 넥스트는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나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청년 예술인이 '다음 무대'로 나아갈 수 있도록 연결하는 출발점이다.
피가로의 결혼 팀. 좌로부터 배성열 최보원 서영주 김제희 이향기 윤종현 조수연 박건영 김예림 공수진 김수연
CHAPTER 3
오페라를 흔히 '종합예술'이라고 말한다. 음악과 문학, 연기와 미술, 무용과 무대기술이 모두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화려한 결과물 뒤에는 오랜 시간 함께 호흡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 숨어 있다. 뛰어난 성악가 한 명만으로는 좋은 오페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음악코치의 섬세한 해석이 필요하고, 연출가의 상상력이 더해져야 하며, 조연출과 스태프의 치밀한 준비가 뒤따라야 한다. 결국 오페라는 개인의 재능보다 공동체의 협업이 더욱 중요한 예술이다. 오페라 넥스트는 처음부터 특정 직군만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성악가만을 선발하는 오디션이었다면 또 하나의 경연대회에 머물렀을 것이다. 대신 프로젝트는 성악가 14명과 음악코치 2명, 연출 2명, 조연출 2명 등 모두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을 하나의 팀으로 구성했다. 서로 다른 전공과 역할을 가진 이들이 실제 프로덕션 안에서 함께 부딪치고 배우며 성장하는 구조를 택한 것이다.
이 점이 오페라 넥스트를 특별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교육 프로그램은 개인의 기량 향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실제 공연장은 철저히 협업의 공간이다. 자신의 노래만 완벽하다고 공연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 배우의 호흡을 읽어야 하고, 음악코치의 피드백을 받아들여야 하며, 연출의 의도를 이해해야 한다. 공연 직전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더라도 모두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움직일 수 있어야 비로소 한 편의 오페라가 완성된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함께 만드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올해 참가자들이 선택한 작품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다. 서로 다른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두 오페라는 피가로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지닌다. 익숙한 명작을 새로운 옴니버스 형식으로 재구성한 이번 무대는 젊은 예술인들에게 다양한 배역과 장면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보다 친숙하게 오페라를 만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 중요한 것은 한 편의 공연이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이다. 참가자들은 오디션에 합격하는 순간부터 단순한 교육생이 아니라 하나의 프로덕션 구성원이 된다. 배역을 분석하고, 음악을 맞추고, 동선을 익히며, 수없이 반복되는 리허설을 통해 공연을 완성해 간다. 그 과정에서 실수도 하고, 서로의 의견이 충돌하기도 하며, 다시 타협하고 성장한다. 학교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실제 제작 현장이 그대로 펼쳐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멘토들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조은비, 홍형주, 박지운, 김건우, 유영광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은 단순히 기술을 전수하는 강사가 아니라 함께 작품을 만드는 선배이자 동료로 참여한다. 이들은 참가자들에게 정답을 알려주기보다 현장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경험으로 들려준다. 젊은 예술인들에게 가장 큰 배움은 때로 한마디 조언보다 같은 공간에서 선배의 작업 방식을 직접 지켜보는 데서 비롯되는게 아닌가.
프로젝트를 마친 참가자들이 이후에도 오뮤의 다양한 제작에 참여할 기회를 얻고, 다른 무대로 활동을 넓혀 가며, 각자의 이름으로 또 다른 작품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 그것이 이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진짜 목표다.
생각해 보면 예술의 역사는 언제나 누군가에게 첫 기회를 내어 주는 일에서 시작됐다. 오늘 세계적인 성악가도, 거장 연출가도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작은 배역을 맡겼고, 첫 리허설을 허락했으며, 실수할 수 있는 무대를 내어주었다. 그렇게 얻은 한 번의 경험이 다음 무대를 만들고, 또 그다음 무대로 이어지면서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했다.
오페라 넥스트는 거창한 구호를 내세우지 않는다. 다만 그 당연하지만 잊히기 쉬운 원칙을 다시 실천하려 한다. 좋은 예술가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무대를 통해 성장한다는 사실. 그리고 좋은 무대는 누군가 용기를 내어 먼저 만들어 줄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김건우 마스터클래스
CHAPTER 4
예술은 한 사람의 재능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 뛰어난 성악가가 있다고 해서 오페라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훌륭한 연출가 한 명이 있다고 해서 새로운 관객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이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은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 의미에서 오페라 넥스트는 공연 제작 프로젝트인 동시에 하나의 생태계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클래식 음악계는 오랫동안 세계적인 연주자를 배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젊은 예술인이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진입하는 구조를 만드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고민을 남겨두고 있었다. 뛰어난 인재는 많지만, 이들이 경험을 쌓고 성장할 수 있는 중간 단계는 충분하지 않았는 말이다. 대학에서 배운 것과 실제 공연 현장 사이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고, 그 틈에서 적지 않은 청년 예술인들이 방향을 잃기도 했다.
오페라 넥스트는 바로 그 빈 공간을 메우려 한다. 참가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수료증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이 프로그램북에 실린 공연이다. 관객 앞에서 역할을 맡아 작품을 완성하고, 동료들과 함께 무대를 만들어 본 경험은 어느 이론 수업보다 값진 자산이 된다. 공연이 끝난 뒤 남는 것은 박수만이 아니다. 자신의 이력서에 적을 수 있는 첫 작품, 다음 오디션에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첫 현장, 그리고 함께 작업한 동료와 선배라는 새로운 인적 네트워크가 남는다.
그래서 오페라 넥스트는 앞서 언급했듯이 프로젝트를 마친 이후에도 오뮤가 제작하는 다양한 공연과 새로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한 번의 공연으로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다음 무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교육 프로그램과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이다. 교육은 끝났지만 관계는 계속되고, 공연은 막을 내렸지만 성장은 이어진다.
이러한 철학은 이번 무대에서 빛을 발할 계획이다. 오는 9월 서울문화예술교육센터 서울체임버홀에서 선보일 공연은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조선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해석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오늘 연습실에서 악보를 넘기고 있는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 가운데 누군가는 앞으로 국내외 무대에서 주연으로 활약할 것이고, 누군가는 뛰어난 연출가나 음악코치로 성장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무도 그 미래를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의 시작을 가능하게 한 첫 무대는 분명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훗날 한국 오페라가 또 한 번 새로운 세대를 맞이하게 된다면,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에는 'Opera NEXT'라는 이름이 조용히 기록될지도 모른다.
베이스 유영광 마스터클래스
EPILOGUE
오페라를 오래된 예술이라고 말한다. 18세기에 작곡된 음악, 화려한 의상,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떠올리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러나 조금만 시선을 달리하면 오페라는 언제나 가장 젊은 예술이었다.
모차르트도, 로시니도, 베르디도 처음부터 거장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첫 작품이 있었고, 첫 무대가 있었으며, 자신을 믿어 준 극장과 선배들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작품들 역시 당시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전통은 완성된 형태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음 세대의 손을 거쳐 다시 태어나며 이어져 왔다.
한국 오페라도 마찬가지다.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수많은 한국 성악가들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작은 배역을 맡길 용기를 냈고, 누군가는 경험이 부족한 신인을 믿고 무대에 세웠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실패할 기회까지도 허락했다. 그렇게 한 번의 무대가 또 다른 무대를 만들고, 한 명의 예술가가 성장하면서 오늘의 한국 오페라가 만들어졌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스타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더 많은 청년 예술인이 자신의 첫 무대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뛰어난 재능은 이미 충분하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재능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무대이며, 학교를 졸업한 젊은 예술인이 자연스럽게 현장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강한 생태계다.
Opera NEXT는 그 거대한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규모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고, 누군가는 첫 무대를 기다리는 대신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스무 명의 청년 예술인은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의 첫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예술은 거대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의미 있는 시작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그래서 이번 특집은 한 편의 공연을 기록하기 위해 기획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성공담을 소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오페라의 '다음 장면'이 시작되는 순간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훗날 한국 오페라의 새로운 역사를 이야기할 때, 누군가는 이렇게 회상할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시작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오페라 넥스트는 우리에게 첫 무대를 내어주었잖아."
그 한 번의 선택이 한 명의 예술가를 만들고, 한 세대를 이어 주며, 결국 한국 오페라의 미래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고 기록할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글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