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찾게 되는 음악, 그게 국악
다섯 살, 한글을 떼자마자 판소리를 시작해 어느덧 28년. 서의철은 무대 위에서 단 한 번도 전통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소리꾼이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공연과 방송, 강연 활동 속에서도 그가 늘 돌아오는 자리는 결국 판소리 무대였다. 전통의 깊이를 지키는 그가 올봄, 창작 초연 전석 매진의 기록을 안고 돌아오는 시(詩)네마 오페라 ‘소월’ 무대에 다시 오른다.
‘문학이 노래가 되고, 시인의 삶이 영화가 되다.’ 오는 5월 29일과 30일, 인천 문학시어터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무대 위 음악과 영상이 어우러져 시인 김소월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창극과 오페라의 크로스오버다. 시인 김소월의 이름은 누구나 알지만, 인간 김정식의 삶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그 공백을 판소리로 채워온 여정에 대해 서의철과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소월을 선택한 이유
창극과 오페라의 크로스오버, 시(詩)네마 오페라 ‘소월’(이하 소월). 서의철이 이 작품과 처음 만난 것은 우연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제작진의 진심 어린 요청이 거듭되었고, 그 간절함에 결국 마음을 열었다. 처음엔 낯선 형식의 작품이었지만, 무대를 거듭할수록 그는 김소월이라는 인물에 깊이 빠져들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같은 남자로서 너무 대단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의 생애가 너무 비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거예요. 사진도 한두 장밖에 없고, 몇백 년 전 사람도 아닌데.”
그는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 저절로 판소리와 민요의 선율이 얹힌다고 했다. ‘진달래꽃’, ‘초혼’, ‘못 잊어’ 같은 시들이 단순히 글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운율과 선율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월과의 인연은 서의철이 몸담고 있는 ‘서의철 가단’의 창작산실에까지 이어진다. 김소월과 그의 시대를 함께한 시인 7인의 시를 7명의 소리꾼이 7명의 악사와 함께 무대에 올린 작업이었다. ‘소월’이 그 모든 출발점이 되었다.
판소리로 해석한 서의철만의 소월
기록이 부족한 소월의 생애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국악인 서의철, 내가 김소월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이었다. 사료로 남아있는 단편들 사이사이, 기록되지 않은 공백들을 그는 자신의 시각으로 채워나갔다.
그 방법론은 판소리에서 차용해 왔다. 판소리에서는 춘향가 한 바탕에 등장하는 수십명의 인물들을 혼자 소화하며 이야기꾼의 시각으로 전달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구성하는 이 작업을 그대로 소월에 적용한 것이다.
“인물의 과거와 내면을 끊임없이 상상하며 이야기꾼으로서 그 삶을 전달하던 판소리의 방식을 그대로 ‘소월’에 가지고 왔어요. 판소리로 김소월을, 이 오페라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국악적 해석의 색깔이 워낙 선명한 탓에 서로의 음악적 언어를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활한 조율 끝에 결국 ‘서의철만의 소월’이 자리를 잡았다. 슬픈 대목은 판소리스럽게, 기쁜 대목은 민요스럽게. 여기서 민요란 자장가부터 노동요까지 일반인들이 삶 속에서 함께 불러온, 가볍고 흥겨운 음악이다. 판소리는 전문 예술가들이 발전시켜 온 장르로 한(恨)의 감정이 깊이 녹아 있다. 춘향가 중 이별가, 심청가 중 심청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처럼 슬픔의 표현 기법이 압도적으로 집약된 것이 판소리다. 서의철은 그 두 정서를 소월의 삶에 맞게 재배치하며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삿말의 전달성 이를테면 일제를 향한 분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등에 담긴 그 감정들이 관객에게 정확히 닿기를 그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판소리와 오페라 사이
리골레토, 왕자 호동, 사랑의 묘약 등 다른 콜라보 작품의 재연 요청은 모두 고사했다. ‘소월’만큼은 달랐다. 3년 연속, 무리한 일정임에도 스스로 애를 쓰며 무대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도 소월은 처음부터 편한 작품이 아니었다. 오페라나 뮤지컬 등 다른 무대에서 판소리로 등장할 때는 스페셜 게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 그대로 임하면 됐다. 그러나 소월은 달랐다. 주인공으로서 연기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판소리에서는 몽룡 대사 사이의 여백을 내가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몽룡이면서 춘향이고 춘향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되기도 했다가 제3자인 이야기꾼으로 순식간에 변모하며 무대를 채우니까요. 그런데 소월은 달랐어요. 100% 소월이 되어 여백을 채워야 했죠. 자연스러운 연기로 알아서 메워야 하는 공간들이 저에게 너무 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전략은 연기의 부족함을 소리의 강점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20여 년간 갈고닦은 전통 예술의 색깔로 공백을 메우는 것, 그것이 서의철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소월〉만이 가진 가장 독보적인 매력이 되었다. 판소리 소리꾼이 무대 위에서 김소월 그 자체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은 어떤 오페라에서도 만날 수 없는 장면이다.
강인함 속에 감춰진 여린 난초, 인간 김소월
3년의 공연을 거듭할수록 오페라 <소월>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어졌다. 시를 쓰지 말라는 압박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3.1운동에도 참가한 강인한 인물. 그러나 서의철이 주목하는 것은 그 이면이다.
“시를 노래 할 때 마다 김소월 시인이 단어 하나하나를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가 보이고, 그 단어에 대한 사유가 매년 달라져요. 아, 이 뒤에 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수 있겠다 싶을 때 저 스스로 탄복하게 됩니다.”
그가 그리는 소월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여린, 난초 같은 인간이다. 그 감수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극의 마지막이다. 소월이 음독하기 직전 부르는 넘버 ‘고향’, 서의철은 이 곡을 개인 음반으로 내고 싶을 정도로 아낀다.
“나라를 위해 전투적으로 죽는 게 아니에요. 삶이 지쳐서, 맨 끝에 결국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모든 소재가 있던 고향이었던 거죠.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소월의 너무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을까요.”
그 목소리로 판소리처럼 불러내는 ‘고향’을 듣는 순간, 관객은 독립운동가 김소월이 아니라 인간 김정식의 마지막 숨결과 마주하게 된다. 해당 넘버를 끝으로 공연장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희석하지 않는 소리
그는 장르 간 콜라보를 즐기는 예술가가 아니다. 경연 프로그램 ‘조선 판스타’에서 결승까지 오르며 대중과 만났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국악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노래에 국악이 잠깐 녹아든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를 바나나맛 우유와 바나나 우유에 빗댔다.
“바나나맛 우유는 노랗고 부드럽지만, 실제 바나나 우유는 흰색이고 꿀도 넣어야 해요. 사람들은 바나나맛 우유만 먹어보고 바나나 우유의 맛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원하는 건 바나나맛 우유인 거죠.”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전통의 길을 깊이 파고드는 사람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소월’에 참여한 것도 ‘국악 하는 사람 아무나’가 아니라 ‘전통 음악을 하는 서의철’을 특정한 요청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음악의 미(美)는 미(味)다
국악의 진정한 매력에 다가가는 방법을 묻자, 그는 정조 시대 실학자 홍대용의 말을 꺼냈다.
“음악의 미(美)는 맛, 미(味)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맛과 같다는 뜻이다. 특정 음식을 어릴 때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커서도 먹기 어렵듯, 국악도 처음의 경험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악의 저변 확대는 결국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공무원 연수부터 외교부 대사급 강의까지, 그가 국악 강의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국악이 삶으로부터 파생된 음악임을 강조했다. 백일잔치, 결혼식, 장례까지 인간의 생로병사가 모두 이뤄지던 ‘판’이라는 공동체 공간에서 함께 불렀던 음악이 국악이다. 또한 노래는 곧 말이기에, 경상도 억양에서 ‘밀양아리랑’이 나오고 전라도 억양에서 ‘진도아리랑’이 나오듯, 지역마다 음악이 다르다. 그것이 우리 삶의 결이 국악 속에 녹아 있는 증거다.
그가 초보자에게 권하는 첫걸음은 국립국악원 토요 상설 공연이다. 매주 토요일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는 이 공연에서 자신의 기호를 먼저 찾아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뷔페로 먹어보고, 그 맛을 알게 되면 전문점을 찾아가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음악이 국악이에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문득 찾게 되는 국악 한 곡이 생기셨으면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악인으로
인터뷰 말미, 충전 방법을 묻자 그는 노인요양원 봉사 공연의 기억을 꺼냈다. 하루 세 군데를 돌고 지쳐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총각들은 좋겠어, 항상 음악 속에서 사니까.”
그 말 한 마디가 머리를 맞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고생을 낙 삼아 살기로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지방이든 해외든, 공연이 그를 세상 곳곳으로 데려다준다. 새로운 무대에서 박수를 받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 또 다른 삶의 결을 마주한다. 한 잡지사가 붙여준 표현처럼 그것은 ‘덕업일치’다.
“공연을 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자가 동력으로 계속 에너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그 원동력은 결국 국악, 선조들로부터 핏줄처럼 이어져 내려오는 그 음악입니다.”
그의 꿈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악인이 되는 것. 삶이 다할 때까지 우리 음악을 평범하고 진실하게 전하고 싶다는 그는, 내년까지 빼곡히 채워진 공연 일정 속에서 오늘도 일본의 공연장에서 리허설을 앞두고 있었다. 28년을 판소리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 지금 이 시대의 김소월을 노래한다. 그 무대로 향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글 이지원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찾게 되는 음악, 그게 국악
다섯 살, 한글을 떼자마자 판소리를 시작해 어느덧 28년. 서의철은 무대 위에서 단 한 번도 전통의 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소리꾼이다. 국내외를 넘나드는 공연과 방송, 강연 활동 속에서도 그가 늘 돌아오는 자리는 결국 판소리 무대였다. 전통의 깊이를 지키는 그가 올봄, 창작 초연 전석 매진의 기록을 안고 돌아오는 시(詩)네마 오페라 ‘소월’ 무대에 다시 오른다.
‘문학이 노래가 되고, 시인의 삶이 영화가 되다.’ 오는 5월 29일과 30일, 인천 문학시어터에서 펼쳐지는 이번 공연은 무대 위 음악과 영상이 어우러져 시인 김소월의 일대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는 창극과 오페라의 크로스오버다. 시인 김소월의 이름은 누구나 알지만, 인간 김정식의 삶은 아직 많은 이들에게 낯설다. 그 공백을 판소리로 채워온 여정에 대해 서의철과 직접 이야기를 나눴다.
소월을 선택한 이유
창극과 오페라의 크로스오버, 시(詩)네마 오페라 ‘소월’(이하 소월). 서의철이 이 작품과 처음 만난 것은 우연한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제작진의 진심 어린 요청이 거듭되었고, 그 간절함에 결국 마음을 열었다. 처음엔 낯선 형식의 작품이었지만, 무대를 거듭할수록 그는 김소월이라는 인물에 깊이 빠져들었다.
“같은 한국 사람으로서, 같은 남자로서 너무 대단하기도 하고, 그런데 그의 생애가 너무 비참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거예요. 사진도 한두 장밖에 없고, 몇백 년 전 사람도 아닌데.”
그는 김소월의 시를 읽을 때 저절로 판소리와 민요의 선율이 얹힌다고 했다. ‘진달래꽃’, ‘초혼’, ‘못 잊어’ 같은 시들이 단순히 글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운율과 선율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소월과의 인연은 서의철이 몸담고 있는 ‘서의철 가단’의 창작산실에까지 이어진다. 김소월과 그의 시대를 함께한 시인 7인의 시를 7명의 소리꾼이 7명의 악사와 함께 무대에 올린 작업이었다. ‘소월’이 그 모든 출발점이 되었다.
판소리로 해석한 서의철만의 소월
기록이 부족한 소월의 생애에서 그가 택한 방법은 ‘국악인 서의철, 내가 김소월이었다면’이라는 질문이었다. 사료로 남아있는 단편들 사이사이, 기록되지 않은 공백들을 그는 자신의 시각으로 채워나갔다.
그 방법론은 판소리에서 차용해 왔다. 판소리에서는 춘향가 한 바탕에 등장하는 수십명의 인물들을 혼자 소화하며 이야기꾼의 시각으로 전달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전사(前史)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구성하는 이 작업을 그대로 소월에 적용한 것이다.
“인물의 과거와 내면을 끊임없이 상상하며 이야기꾼으로서 그 삶을 전달하던 판소리의 방식을 그대로 ‘소월’에 가지고 왔어요. 판소리로 김소월을, 이 오페라를 해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국악적 해석의 색깔이 워낙 선명한 탓에 서로의 음악적 언어를 맞춰가는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활한 조율 끝에 결국 ‘서의철만의 소월’이 자리를 잡았다. 슬픈 대목은 판소리스럽게, 기쁜 대목은 민요스럽게. 여기서 민요란 자장가부터 노동요까지 일반인들이 삶 속에서 함께 불러온, 가볍고 흥겨운 음악이다. 판소리는 전문 예술가들이 발전시켜 온 장르로 한(恨)의 감정이 깊이 녹아 있다. 춘향가 중 이별가, 심청가 중 심청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대목처럼 슬픔의 표현 기법이 압도적으로 집약된 것이 판소리다. 서의철은 그 두 정서를 소월의 삶에 맞게 재배치하며 악보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삿말의 전달성 이를테면 일제를 향한 분노,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등에 담긴 그 감정들이 관객에게 정확히 닿기를 그는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판소리와 오페라 사이
리골레토, 왕자 호동, 사랑의 묘약 등 다른 콜라보 작품의 재연 요청은 모두 고사했다. ‘소월’만큼은 달랐다. 3년 연속, 무리한 일정임에도 스스로 애를 쓰며 무대에 올랐다.
그런 그에게도 소월은 처음부터 편한 작품이 아니었다. 오페라나 뮤지컬 등 다른 무대에서 판소리로 등장할 때는 스페셜 게스트로서 자신의 정체성 그대로 임하면 됐다. 그러나 소월은 달랐다. 주인공으로서 연기까지 해야 했기 때문이다.
“판소리에서는 몽룡 대사 사이의 여백을 내가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몽룡이면서 춘향이고 춘향이면서 또 다른 누군가가 되기도 했다가 제3자인 이야기꾼으로 순식간에 변모하며 무대를 채우니까요. 그런데 소월은 달랐어요. 100% 소월이 되어 여백을 채워야 했죠. 자연스러운 연기로 알아서 메워야 하는 공간들이 저에게 너무 길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가 선택한 전략은 연기의 부족함을 소리의 강점으로 채우는 것이었다. 20여 년간 갈고닦은 전통 예술의 색깔로 공백을 메우는 것, 그것이 서의철다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이 바로 〈소월〉만이 가진 가장 독보적인 매력이 되었다. 판소리 소리꾼이 무대 위에서 김소월 그 자체가 되어가는 과정, 그것은 어떤 오페라에서도 만날 수 없는 장면이다.
강인함 속에 감춰진 여린 난초, 인간 김소월
3년의 공연을 거듭할수록 오페라 <소월>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어졌다. 시를 쓰지 말라는 압박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고, 3.1운동에도 참가한 강인한 인물. 그러나 서의철이 주목하는 것은 그 이면이다.
“시를 노래 할 때 마다 김소월 시인이 단어 하나하나를 왜 그렇게 선택했는지, 얼마나 고민했는지가 보이고, 그 단어에 대한 사유가 매년 달라져요. 아, 이 뒤에 또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수 있겠다 싶을 때 저 스스로 탄복하게 됩니다.”
그가 그리는 소월은 강해 보이지만 속은 굉장히 여린, 난초 같은 인간이다. 그 감수성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장면은 극의 마지막이다. 소월이 음독하기 직전 부르는 넘버 ‘고향’, 서의철은 이 곡을 개인 음반으로 내고 싶을 정도로 아낀다.
“나라를 위해 전투적으로 죽는 게 아니에요. 삶이 지쳐서, 맨 끝에 결국 내가 가고 싶었던 곳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를 쓸 수 있게 해준 모든 소재가 있던 고향이었던 거죠. 그저 편안하게 사는 것이 소월의 너무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을까요.”
그 목소리로 판소리처럼 불러내는 ‘고향’을 듣는 순간, 관객은 독립운동가 김소월이 아니라 인간 김정식의 마지막 숨결과 마주하게 된다. 해당 넘버를 끝으로 공연장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희석하지 않는 소리
그는 장르 간 콜라보를 즐기는 예술가가 아니다. 경연 프로그램 ‘조선 판스타’에서 결승까지 오르며 대중과 만났을 때 그가 느낀 것은, 사람들이 국악 자체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아는 노래에 국악이 잠깐 녹아든 것을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를 바나나맛 우유와 바나나 우유에 빗댔다.
“바나나맛 우유는 노랗고 부드럽지만, 실제 바나나 우유는 흰색이고 꿀도 넣어야 해요. 사람들은 바나나맛 우유만 먹어보고 바나나 우유의 맛을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원하는 건 바나나맛 우유인 거죠.”
새로운 길을 가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전통의 길을 깊이 파고드는 사람 또한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소월’에 참여한 것도 ‘국악 하는 사람 아무나’가 아니라 ‘전통 음악을 하는 서의철’을 특정한 요청이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밝혔다.
음악의 미(美)는 미(味)다
국악의 진정한 매력에 다가가는 방법을 묻자, 그는 정조 시대 실학자 홍대용의 말을 꺼냈다.
“음악의 미(美)는 맛, 미(味)다.”
음악의 아름다움은 맛과 같다는 뜻이다. 특정 음식을 어릴 때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커서도 먹기 어렵듯, 국악도 처음의 경험이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악의 저변 확대는 결국 교육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공무원 연수부터 외교부 대사급 강의까지, 그가 국악 강의를 마다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국악이 삶으로부터 파생된 음악임을 강조했다. 백일잔치, 결혼식, 장례까지 인간의 생로병사가 모두 이뤄지던 ‘판’이라는 공동체 공간에서 함께 불렀던 음악이 국악이다. 또한 노래는 곧 말이기에, 경상도 억양에서 ‘밀양아리랑’이 나오고 전라도 억양에서 ‘진도아리랑’이 나오듯, 지역마다 음악이 다르다. 그것이 우리 삶의 결이 국악 속에 녹아 있는 증거다.
그가 초보자에게 권하는 첫걸음은 국립국악원 토요 상설 공연이다. 매주 토요일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는 이 공연에서 자신의 기호를 먼저 찾아보라는 것이다.
“다양한 음식을 뷔페로 먹어보고, 그 맛을 알게 되면 전문점을 찾아가게 됩니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음악이 국악이에요. 슬플 때도, 기쁠 때도 문득 찾게 되는 국악 한 곡이 생기셨으면 합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악인으로
인터뷰 말미, 충전 방법을 묻자 그는 노인요양원 봉사 공연의 기억을 꺼냈다. 하루 세 군데를 돌고 지쳐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총각들은 좋겠어, 항상 음악 속에서 사니까.”
그 말 한 마디가 머리를 맞은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고생을 낙 삼아 살기로 한 것은 그 이후였다. 지방이든 해외든, 공연이 그를 세상 곳곳으로 데려다준다. 새로운 무대에서 박수를 받고 좋은 인연을 만나고 또 다른 삶의 결을 마주한다. 한 잡지사가 붙여준 표현처럼 그것은 ‘덕업일치’다.
“공연을 하며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자가 동력으로 계속 에너지를 만들어 나가고 있어요. 그 원동력은 결국 국악, 선조들로부터 핏줄처럼 이어져 내려오는 그 음악입니다.”
그의 꿈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국악인이 되는 것. 삶이 다할 때까지 우리 음악을 평범하고 진실하게 전하고 싶다는 그는, 내년까지 빼곡히 채워진 공연 일정 속에서 오늘도 일본의 공연장에서 리허설을 앞두고 있었다. 28년을 판소리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 지금 이 시대의 김소월을 노래한다. 그 무대로 향할 이유는 이미 충분히 무르익었다.
글 이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