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단에서 무대로, 다시 노래하는 인생
성악가에게 독창회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세계에 대한 고백이며,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시간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이는 기록이다. 특히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음악인에게 독창회란 삶의 이력서이자 인생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오는 7월 21일 오후 6시 서울 로데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는 메조소프라노 박은미의 제3회 독창회가 열린다. 이번 공연은 ‘정년퇴임 기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단순히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는 송별 음악회가 아니다. 1988년 첫 교단에 선 이후 38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음악을 호흡하며 살아온 한 교사가 이제는 또 다른 음악 인생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무대에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를 비롯해 우리 가곡, 그리고 작곡가 신동수의 작품들까지 폭넓게 노래한다. 특히 피아니스트인 큰딸 최다연, 바이올리니스트인 둘째 딸 최승연과 함께 꾸미는 트리오 무대는 가족이 함께 만들어 온 음악의 시간을 관객들과 나누는 특별한 순서가 된다. 이에 더해 소프라노 이영주, 테너 김명제, 바리톤 한경석, 카운터테너 허영우 등 오랜 음악적 동료들이 함께하며 축제의 무대를 완성한다.
이번 월간리뷰는 정년을 앞두고도 새로운 꿈을 준비하는 메조소프라노 박은미를 만나 교직과 음악, 가족과 사랑,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음악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독창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 많은 세월동안 독창회를 세 번밖에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하죠. 그러나 독창회가 음악활동의 척도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서 왔고 합창과 오케스트라, 각종 연주회와 앙상블 공연을 통해 노래하는 삶을 이어왔기에 세 번째 독창회라는 말이 의외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은미는 독창회란 횟수를 늘리는 공연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성장시킨 뒤 비로소 관객과 약속하는 무대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첫 독창회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이후에도 2년에 한 번씩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듯 무대를 준비해 왔다.
첫 번째 독창회는 2022년 10월 16일 윤봉길기념관에서 열었다. 돌이켜보면 그 공연은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 왔던 꿈을 처음 현실로 옮긴 시험적인 무대였다. 그는 독창보다 합창을 더 좋아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가는 합창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지탱해 준 가장 큰 힘이었다. 합창을 즐겼던 시간 속에서 한번쯤 멜로디를 홀로 완벽하게 부를 수 싶다는 생각으로 일단 공연 날짜부터 잡았다.
첫 독창회를 준비하면서 독창회는 철저히 혼자 하는 무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리허설도 공연과 똑같이 진행했다. 앙코르곡까지 포함해 준비한 모든 곡을 리허설에서도 그대로 불렀고, 공연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집중력으로 무대를 이어 갔다. 공연곡과 앙코르를 합하면 모두 서른두 곡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지만 한 곡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공연을 마치고 난 뒤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박은미를 소개할 때마다 ‘얼마 전 독창회를 한 박은미 선생님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전문 성악계에서는 독창회가 흔한 일이겠지만, 아마추어 음악인의 세계에서는 개인 독창회를 연다는 사실 자체가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그 순간 그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2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독창회를 열자!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한 약속이었고, 앞으로도 음악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약속은 2024년 8월 17일 모차르트홀에서 실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공연이 독창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두 번째 공연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뜻깊었던 것은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 이어 자신이 직접 작시와 작곡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적 한국어판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Ⅱ’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을 세상에 처음 소개했다는 점이었다. 리스트의 ‘로망스’ 선율 위에 자신의 시를 얹어 ‘그대만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노래한 그 작품은 단순히 한 곡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음악세계를 예고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준 스승들과 음악인들,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씩 돌아보았고, 그 이야기는 2024년 월간리뷰 8월호 프리뷰 기사에도 소개되었다. 음악은 결코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응원, 그리고 인연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2년이 흘렀다. 이번 세 번째 독창회는 이전의 공연들과는 성격부터 다르다. 1988년 9월 1일 한강중학교에서 시작한 교직 생활이 오는 2026년 8월 31일 서일중학교에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38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가르치며 살아온 세월의 종점에서 열리는 공연인 만큼 이번 독창회에는 ‘정년퇴임 기념 음악회’라는 부제가 붙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두고 은퇴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지 음악을 떠나는 것은 아니기 않은가? 오히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간과 여건 때문에 하지 못했던 더 많은 음악을 시작하는 출발선이라고 본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도 ‘축제’였다. 혼자 빛나는 독창회가 아니라 오래도록 함께 음악을 해 온 친구들과 동료, 제자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즐기는 음악회, 무대 위와 객석이 따로 나뉘는 공연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축하하는 잔치 같은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두 딸이 같은 무대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은 이번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번 독창회는 한 사람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음악 공동체가 함께 완성하는 인생의 축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돌이켜보면 그의 음악은 언제나 경쟁보다 나눔에 가까웠다. 혼자 노래하는 시간보다 함께 화음을 만드는 시간이 더 많았고, 박수를 받는 기쁨보다 누군가와 음악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기쁨이 더 컸다. 그래서 이번 독창회 역시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는 무대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무대를 준비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나이에 새로운 곡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고요.”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배우고 싶은 곡은 오히려 더 많아졌고, 새로운 합창과 새로운 앙상블, 새로운 글쓰기와 새로운 음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웃는다.
결국 이번 독창회는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공연인 동시에 앞으로의 시간을 시작하는 공연이다. 누군가는 정년을 은퇴라고 말하지만, 박은미에게 정년은 또 하나의 입학식이며, 교단에서 내려와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이다. 38년 동안 학생들과 사람을 사랑하며 걸어온 교육자의 삶이 이제는 음악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하는 첫 페이지가 되는 까닭이다.
음악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
독창회가 자신의 음악을 증명하는 자리라면,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시간은 단연 합창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을 이루는 가장 단단한 뿌리는 ‘합창’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교내 합창대회에서 우승하며 학교 대표로 교육청 대회에 참가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합창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단순한 음악활동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그래서 그는 지금도 자신의 음악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합창을 떠올린다.
서울오라토리오싱어즈에서 최병철 지휘자와 함께한 시간, 이요훈 지휘자의 그린체리티합창단, 그리고 최태원 지휘자의 W-콘서트콰이어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해마다 이어지는 정기연주회와 자선음악회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그 무대들은 독창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그의 음악을 성장시켜 준 학교였다. 혼자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합창을 통해 배웠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노래만이 그의 음악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악기를 접했던 그는 첼로를 가장 오래 연주해 왔고, 최근에는 피아노를 연습하는 시간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첼로주자로서 수내오케스트라를 거쳐 현재는 마이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무대에도 서고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시간은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감각을 더욱 넓혀 주고, 성악과 기악이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귀한 경험이기도 하지요.”
독창 활동도 꾸준히 이어졌다. 서울대 동문들로 구성된 ‘에세뉴 앙상블’ 공연에 세 차례 참여했고, 우리가곡연구회와 손월드클래식이 주관하는 연주회에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학교에서는 축제 음악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공연을 만들었고, 교육청 지원사업인 협종 지도교사로서 뮤지컬을 지도하기도 했다. 또한 음악 교원학습공동체를 운영하며 교사들과 함께 배우는 시간을 이어왔고, 자유학기 프로그램으로는 ‘뮤직 인사이드-S’라는 강좌를 직접 개설했다. 음악을 단순히 예술 교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교과와 연결하여 역사 속 사건들의 배경을 음악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수업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음악을 통해 역사와 사람을 이해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교사라는 직업의 보람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이번 독창회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무대 위에 두 딸이 함께 서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인 큰딸 최다연과 바이올리니스트인 둘째 딸 최승연은 어릴 적부터 엄마와 함께 음악을 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박은미는 두 딸을 음악가로 소개하기에 앞서 한 사람의 딸로서, 또 한 사람의 인생으로 먼저 이야기한다.
큰딸 다연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 그는 웃으며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선 화학의 신”이라고 딸을 소개하지만, 그 안에는 엄마만이 품을 수 있는 자랑과 애정이 함께 담겨 있다. 뉴욕에서 생활하던 시절, 테크닉 하나만을 위해 아이를 몰아붙이는 중국 학부모들과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다연은 쇼팽의 녹턴을 여유롭게 연주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기술보다 음악을 먼저 이해하는 아이였고, 그것이 엄마에게는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잊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오래 기다렸던 백건우 피아노 독주회를 다녀왔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다연이 집에서 들려준 베토벤 ‘템페스트’ 소나타는 그 아쉬움을 단숨에 위로해 주었다.
공연장의 감동과는 또 다른,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지금 세 여자가 함께 트리오를 연주할 수 있는 것도 다연의 포용력 있는 피아노 실력과 절대음감에서 비롯되는 섬세한 조율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승연의 이야기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진다. 승연은 성장 속도가 또래보다 많이 느렸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늘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늘 행복을 잃지 않았던 아이였다. 언니를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고, 엄마가 늘 곁에서 방향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연의 인생을 바꾼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피아노 건반조차 힘이 없어 제대로 누르지 못하던 아이가 1/16 크기의 작은 바이올린을 손에 쥐면서 삶에 대한 의욕과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예원학교를 목표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레슨을 받았지만, 어느 날 ‘전공을 준비하는 뛰어난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가족 모두에게 너무도 큰 상처였지만 그 좌절은 또 다른 음악을 낳았다. 진로를 접는 대신 가족끼리 연주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둘째의 바이올린과 큰딸의 피아노, 그리고 자신의 첼로가 더해진 가족 트리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섯 차례의 가족음악회를 열었고, 문화센터와 백화점, 교회 등 어디든 무대가 있는 곳이면 기꺼이 찾아가 연주했다. 전공자의 길은 아니었지만 음악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었고, 서로를 위로하는 가장 따뜻한 언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세 모녀는 오래 고민했던 ‘맘 앤 시스터즈’ 대신 ‘소리우리끼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나려 한다. 이름처럼, 우리끼리 만들어 온 소리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이번 독창회에서 세 모녀가 함께 연주하는 무대는 단순한 가족 출연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가정 안에서 함께 쌓아 온 음악의 시간이 객석 앞에서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박은미에게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공연 이전에, 엄마로 살아온 시간을 노래하는 가장 따뜻한 악장이기도 하다.
곡마다 스며 있는 나의 삶, 나의 음악
세 번째 독창회를 준비하면서 박은미가 가장 오래 고민한 것은 어떤 곡을 부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였다. 그에게 프로그램은 단순히 유명한 곡들을 나열하는 순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하나의 서사이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관객과 함께 다시 걸어보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무대의 1부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채웠다.
첫 곡은 메조소프라노의 중저음이 지닌 깊은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Vergin, tutto amor이다. 이어지는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은 아름답고 대중적인 선율 때문에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곡이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멜로디지만,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어지는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가운데 네 번째 곡 ‘Standchen’은 흔히 ‘세레나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신에게는 세레나데라는 유명세보다 독일가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독일가곡 특유의 시적 감성과 섬세한 언어의 흐름은 언제 불러도 새로운 감동을 준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 가운데 ‘뱃노래’ 역시 오래도록 사랑해 온 곡이다. 가사와 멜로디가 모두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작품이라 지금도 자주 흥얼거리곤 한다. 노래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진실하게 전달된다고 믿기에, 이번 독창회에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들을 먼저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단순히 민요를 편곡한 작품이 아니라 교단에서 수없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음악이다. 사회 교과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을 설명할 때도, 우리 민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도, 식민지 시대와 한국 가족문화의 이야기를 풀어갈 때도 이 노래는 언제나 좋은 예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에게 역사를 설명하던 노래를 이제는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들려준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김효근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무엇보다 가사 전달에 초점을 맞췄다. 좋은 시는 혼자보다 함께 부를 때 더욱 깊이 전달될 수 있기에 테너 김명제와의 이중창을 선택했다. 1부의 마지막 두 곡은 프랑스어 작품이다. 에릭 사티의 ‘Je te veux’는 진솔한 사랑의 고백과 반복되는 확인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상하게도 이 곡은 오래전부터 ‘내가 아주 잘 부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자기 자신을 향한 노래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제2막에 등장하는 카르멘의 ‘집시의 노래’다. 메조소프라노가 가장 빛나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인 ‘카르멘’에서 이 아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곡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율 속에서도 속도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극적인 긴장감, 그리고 몸짓과 표정까지 함께 표현해야 완성되는 드라마틱한 음악이라는 점 때문이다.
두 딸과 함께 꾸미는 트리오는 브람스의 왈츠. 세 악기가 서로 호흡을 맞추기에 가장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연주회에서는 튜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앞으로 새롭게 마련한 음악 공간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된다면 가장 먼저 연주하고 싶은 곡이기도 하다. 세 악기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화성이 너무도 아름다워 연습하는 시간 자체가 힐링이라고 말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Andante con moto’는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나 광고 음악을 통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친숙한 작품. 하지만 직접 연주해 보면 결코 쉽지 않은 곡이다. 세 악기의 개성이 모두 살아나면서도 슈베르트 특유의 유려한 진행과 예기치 않은 변화가 계속 이어지는데 특히 자신은 악보보다 소리를 먼저 듣고 음을 찾아가는 버릇이 있어 연습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쩌면 그러기에 가족과 함께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무척한지 모른다.
이번 독창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오랜 시간 음악으로 인연을 맺어 온 동료들이다. 소프라노 이영주는 자신의 성악 스승이자 에세뉴앙상블 멤버이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함께 연주하면서 언제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곡을 추천해 주었고, 다양한 음악 활동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준 지인이다. 테너 김명제와는 우리가곡사랑회 연주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언제나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면서도 막상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독일에서 잠시 귀국하는 바리톤 한경석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손세창 감독의 추천으로 한국가곡 ‘보리밭’ 연주 영상을 처음 접했는데,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먼저 반했고, 그보다 더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려 이번 무대를 함께하게 되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W-콘서트콰이어를 지휘하는 테너 한태원이 바로 한경석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번 공연은 엄마와 두 딸이 함께하는 무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어가는 음악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허영우가 있다. 그는 전공자가 아니지만 웬만한 전공자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보기 드문 카운터테너로 동문합창단에서 처음 만나 에세뉴앙상블 공연과 원불교 교당 행사 등에서 자주 함께 연주해 온 소중한 음악 동료다. 비올라 연주 또한 수준급인 그는 이번 공연에서 ‘넬라 판타지아’는 카운터테너 발성으로, 김소월 시와 신동수 곡 ‘왕십리’는 바리톤 발성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두 가지 색깔을 보여주는 특별한 무대가 되며, 관객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을 선물할 것이다.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는 동안 박은미는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좋아하는 곡입니다.”,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작품입니다.”, “연습하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화려한 기교나 어려운 테크닉보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음악을 관객과 나누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이번 독창회의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세 번째 독창회는 레퍼토리의 나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랑해 온 음악의 연대기이며, 그 음악을 함께 만들어 준 가족과 동료들에게 보내는 가장 따뜻한 감사의 편지이기도 하다.
창작 한국가곡에 바치는 오마주, 신동수의 음악
이번 독창회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유난히 작곡가 한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작곡가 신동수이다. 박은미는 이번 무대를 준비하며 아예 ‘신동수 곡, 내가 최고야!’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코너를 구성했다. 그만큼 신동수의 음악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기악과 성악을 함께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악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브람스 등 이미 거대한 산맥과 같은 작곡가들이 존재한다. 물론 지금도 훌륭한 작품은 계속 탄생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큰 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작품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시대에 살아 있는 작곡가들이 만들어 가는 창작 한국가곡으로 향했다.
그 가운데서도 신동수의 음악은 특별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클래식 음악의 깊이를 잃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율을 만들어 내는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인들이 사랑하는 훌륭한 곡을 꾸준히 작곡해 온 국보급 작곡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존경 이상의 신뢰가 담겨 있다. 더욱 뜻깊은 것은 우리나라 남성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부르고 싶어 하는 「산아」의 시를 쓴 신홍철 선생이 바로 신동수 작곡가의 부친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족 안에서 시와 음악이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수많은 성악가들의 무대로 이어진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번 독창회에서는 신동수의 작품 여섯 곡이 소개된다. 각각의 작품은 모두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직하게 그려 낸다는 점에서는 하나로 이어진다.
‘내 님을 위해서라면’은 오페라 ‘몽월’ 3막에서 갈등의 절정을 이루는 문희의 아리아이다. 김유신의 명으로 불길 속에 뛰어들기 직전, 사랑하는 김춘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처절한 심정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내 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을 수 있네, 내 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웃을 수 있네.’라는 가사는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이 곡을 통해 오페라 아리아가 가진 드라마틱한 힘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왕십리’는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대학 시절 아직 가곡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소월의 시를 찾아 작곡했던 작품을 최근 다시 손질해 새롭게 발표한 곡이다. 도입부에는 현대적인 화성이 더해졌고, 주선율에는 우리의 굿거리장단을 응용하여 한국적인 리듬감을 살렸다. 비가 오는 왕십리를 배경으로 한 그리움과 기다림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낸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 가곡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명곡 ‘산아’ 역시 이번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은 1983년 MBC 대학가곡제 대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국내외 수많은 성악가들이 애창하는 대표적인 창작가곡이 되었다. 특히 바리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도전해 보고 싶은 곡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페라 아리아에 버금가는 스케일과 극적인 표현력을 요구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박은미는 이 곡이 단순한 가곡이 아니라 우리 창작가곡의 수준을 세계에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당신의 무덤가에’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다. 시집 ‘접시꽃 당신’에 수록된 이 시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한 줄 한 줄 배어 있으며, 신동수는 이를 느린 12/8박자의 깊은 선율로 풀어냈다. 노래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마음속에 남는다.
분위기는 다시 ‘내가 너에게’에서 따뜻하게 바뀐다. 신동수가 직접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작품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에게 고백하는 마음을 담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친숙한 선율과 반복되는 리듬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다. 마지막 곡 ‘마지막 사랑’은 원래 남성합창곡 ‘아버지, 사랑해요’에서 출발했다. 러시아 민요를 유난히 좋아했던 선친을 회고하며 만든 선율 위에 새로운 가사를 입혀, 마지막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의 비통한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러시아풍의 애잔한 선율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박은미는 여섯 곡 모두를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 한국인의 정서,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품격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창작 한국가곡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단을 떠나 더 넓은 노래의 바다를 향한 항해
38년 동안 아침이면 학교로 출근하던 삶도 이제 두 달여 뒤면 끝난다. 박은미는 이제 ‘학교를 정규적으로 나가지 않을 뿐이지 음악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바빠질 것 같다.”라고 예견한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설렘이 가득 차있다.
가장 먼저 오래 준비해 온 ’여인의 사랑과 생애Ⅱ‘를 완성해야 한다. 슈만의 연가곡에서 출발했지만 현대 한국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담아 새롭게 쓰고 있는 이 연가곡은 그가 가장 애정을 쏟고 있는 작업이다. 언젠가는 여덟 곡 전곡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합창도 계속된다. W-콘서트콰이어 정기연주회 연습은 여전히 그의 일정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마이오케스트라와의 정기연주회도 준비해야 하고, 세 모녀가 함께하는 ‘소리우리끼리’의 제6회 연주회도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 음악해 온 사람들과 다시 모여 영산아트홀 공연도 기획할 생각이다.
물론 앞으로의 계획은 음악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좋은 아내로, 좋은 곁지기로 살아가는 일, 언젠가는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는 일도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표이다. 틈이 나면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며 심신의 활력을 유지하고 싶다. 글도 계속 쓰고, 오래 좋아했던 수채화도 다시 그리고 싶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웃는 얼굴로 마주 앉아 정답게 식사하는 시간을 자주 만들고 싶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걷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끝내는 음악을 이야기한다. 앞으로 꼭 도전하고 싶은 작품을 묻자 망설임 없이 드보르자크의 ’둠키 트리오‘를 손꼽은 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전곡도 세 모녀가 함께 연주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이다. 첼리스트로서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과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에 도전하고 싶다. 성악곡 역시 아직 배우고 싶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 정년은 배움을 멈추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그는 믿는다.
인터뷰를 마치며 문득 첫 질문이 떠올랐다. 왜 이제 세 번째 독창회인가. 그러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그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이었다. 38년의 교직 생활, 수십 년의 합창 인생, 가족과 함께 만든 음악, 제자들과 나눈 수업,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싶은 수많은 작품들. 그 모든 시간이 쌓여 비로소 세 번째 독창회가 탄생한 것이다.
누군가는 정년을 은퇴라고 말하지만, 박은미에게 정년은 또 하나의 프롤로그이다. 교단이라는 무대를 내려와 이제는 인생이라는 더 큰 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독창회는 지나온 세월을 기념하는 음악회인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음악 인생을 알리는 첫 공연이다.
무대의 막은 오르내리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박은미의 노래 역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글 김종섭
교단에서 무대로, 다시 노래하는 인생
성악가에게 독창회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세계에 대한 고백이며,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시간을 관객 앞에 펼쳐 보이는 기록이다. 특히 평생 교육자의 길을 걸어온 음악인에게 독창회란 삶의 이력서이자 인생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오는 7월 21일 오후 6시 서울 로데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는 메조소프라노 박은미의 제3회 독창회가 열린다. 이번 공연은 ‘정년퇴임 기념‘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단순히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는 송별 음악회가 아니다. 1988년 첫 교단에 선 이후 38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음악을 호흡하며 살아온 한 교사가 이제는 또 다른 음악 인생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이 무대에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가곡과 오페라 아리아를 비롯해 우리 가곡, 그리고 작곡가 신동수의 작품들까지 폭넓게 노래한다. 특히 피아니스트인 큰딸 최다연, 바이올리니스트인 둘째 딸 최승연과 함께 꾸미는 트리오 무대는 가족이 함께 만들어 온 음악의 시간을 관객들과 나누는 특별한 순서가 된다. 이에 더해 소프라노 이영주, 테너 김명제, 바리톤 한경석, 카운터테너 허영우 등 오랜 음악적 동료들이 함께하며 축제의 무대를 완성한다.
이번 월간리뷰는 정년을 앞두고도 새로운 꿈을 준비하는 메조소프라노 박은미를 만나 교직과 음악, 가족과 사랑,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음악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독창회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 많은 세월동안 독창회를 세 번밖에 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곤 하죠. 그러나 독창회가 음악활동의 척도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요? 수십 년 동안 무대에 서 왔고 합창과 오케스트라, 각종 연주회와 앙상블 공연을 통해 노래하는 삶을 이어왔기에 세 번째 독창회라는 말이 의외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박은미는 독창회란 횟수를 늘리는 공연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성장시킨 뒤 비로소 관객과 약속하는 무대라고 정의한다. 그래서 첫 독창회까지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이후에도 2년에 한 번씩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듯 무대를 준비해 왔다.
첫 번째 독창회는 2022년 10월 16일 윤봉길기념관에서 열었다. 돌이켜보면 그 공연은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 왔던 꿈을 처음 현실로 옮긴 시험적인 무대였다. 그는 독창보다 합창을 더 좋아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가는 합창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 인생을 지탱해 준 가장 큰 힘이었다. 합창을 즐겼던 시간 속에서 한번쯤 멜로디를 홀로 완벽하게 부를 수 싶다는 생각으로 일단 공연 날짜부터 잡았다.
첫 독창회를 준비하면서 독창회는 철저히 혼자 하는 무대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리허설도 공연과 똑같이 진행했다. 앙코르곡까지 포함해 준비한 모든 곡을 리허설에서도 그대로 불렀고, 공연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집중력으로 무대를 이어 갔다. 공연곡과 앙코르를 합하면 모두 서른두 곡에 이르는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쉽지 않았지만 한 곡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마음 하나로 끝까지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공연을 마치고 난 뒤 뜻밖의 변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박은미를 소개할 때마다 ‘얼마 전 독창회를 한 박은미 선생님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전문 성악계에서는 독창회가 흔한 일이겠지만, 아마추어 음악인의 세계에서는 개인 독창회를 연다는 사실 자체가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그 순간 그는 새로운 결심을 했다. 2년에 한 번씩은 반드시 독창회를 열자! 그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성장시키기 위한 약속이었고, 앞으로도 음악을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 약속은 2024년 8월 17일 모차르트홀에서 실행할 수 있었다. 첫 번째 공연이 독창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대한 도전이었다면 두 번째 공연은 자신의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는 회고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뜻깊었던 것은 슈만의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에 이어 자신이 직접 작시와 작곡을 진행하고 있는 현대적 한국어판 연가곡 ‘여인의 사랑과 생애Ⅱ’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을 세상에 처음 소개했다는 점이었다. 리스트의 ‘로망스’ 선율 위에 자신의 시를 얹어 ‘그대만을 사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노래한 그 작품은 단순히 한 곡을 발표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자신이 걸어갈 음악세계를 예고하는 첫걸음이었다.
그 공연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음악세계에 영향을 준 스승들과 음악인들, 그리고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씩 돌아보았고, 그 이야기는 2024년 월간리뷰 8월호 프리뷰 기사에도 소개되었다. 음악은 결코 혼자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응원, 그리고 인연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다시 2년이 흘렀다. 이번 세 번째 독창회는 이전의 공연들과는 성격부터 다르다. 1988년 9월 1일 한강중학교에서 시작한 교직 생활이 오는 2026년 8월 31일 서일중학교에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38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가르치며 살아온 세월의 종점에서 열리는 공연인 만큼 이번 독창회에는 ‘정년퇴임 기념 음악회’라는 부제가 붙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을 두고 은퇴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를 떠나는 것이지 음악을 떠나는 것은 아니기 않은가? 오히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시간과 여건 때문에 하지 못했던 더 많은 음악을 시작하는 출발선이라고 본다.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도 ‘축제’였다. 혼자 빛나는 독창회가 아니라 오래도록 함께 음악을 해 온 친구들과 동료, 제자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즐기는 음악회, 무대 위와 객석이 따로 나뉘는 공연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함께 축하하는 잔치 같은 무대를 만들고 싶었다. 무엇보다 두 딸이 같은 무대에서 연주한다는 사실은 이번 공연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이번 독창회는 한 사람의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아니라 가족과 친구, 음악 공동체가 함께 완성하는 인생의 축제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다.
돌이켜보면 그의 음악은 언제나 경쟁보다 나눔에 가까웠다. 혼자 노래하는 시간보다 함께 화음을 만드는 시간이 더 많았고, 박수를 받는 기쁨보다 누군가와 음악을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기쁨이 더 컸다. 그래서 이번 독창회 역시 자신의 기량을 과시하는 무대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로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무대를 준비하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이 나이에 새로운 곡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고요.”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배우고 싶은 곡은 오히려 더 많아졌고, 새로운 합창과 새로운 앙상블, 새로운 글쓰기와 새로운 음악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는 웃는다.
결국 이번 독창회는 지난 시간을 정리하는 공연인 동시에 앞으로의 시간을 시작하는 공연이다. 누군가는 정년을 은퇴라고 말하지만, 박은미에게 정년은 또 하나의 입학식이며, 교단에서 내려와 더 넓은 음악의 세계로 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이다. 38년 동안 학생들과 사람을 사랑하며 걸어온 교육자의 삶이 이제는 음악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하는 첫 페이지가 되는 까닭이다.
음악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만드는 것
독창회가 자신의 음악을 증명하는 자리라면, 지금의 자신을 만드는 시간은 단연 합창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열 살 무렵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음악을 이루는 가장 단단한 뿌리는 ‘합창’이라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교내 합창대회에서 우승하며 학교 대표로 교육청 대회에 참가했던 학창 시절의 기억은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된 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합창을 통해 사람을 만나고,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단순한 음악활동이 아니라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고, 그래서 그는 지금도 자신의 음악 인생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합창을 떠올린다.
서울오라토리오싱어즈에서 최병철 지휘자와 함께한 시간, 이요훈 지휘자의 그린체리티합창단, 그리고 최태원 지휘자의 W-콘서트콰이어는 그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해마다 이어지는 정기연주회와 자선음악회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고, 그 무대들은 독창회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그의 음악을 성장시켜 준 학교였다. 혼자 노래를 잘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하나가 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합창을 통해 배웠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고 한다.
노래만이 그의 음악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여러 악기를 접했던 그는 첼로를 가장 오래 연주해 왔고, 최근에는 피아노를 연습하는 시간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첼로주자로서 수내오케스트라를 거쳐 현재는 마이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무대에도 서고 있다.
“악기를 연주하는 시간은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감각을 더욱 넓혀 주고, 성악과 기악이 서로를 이해하게 만드는 귀한 경험이기도 하지요.”
독창 활동도 꾸준히 이어졌다. 서울대 동문들로 구성된 ‘에세뉴 앙상블’ 공연에 세 차례 참여했고, 우리가곡연구회와 손월드클래식이 주관하는 연주회에도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학교에서는 축제 음악감독을 맡아 학생들과 공연을 만들었고, 교육청 지원사업인 협종 지도교사로서 뮤지컬을 지도하기도 했다. 또한 음악 교원학습공동체를 운영하며 교사들과 함께 배우는 시간을 이어왔고, 자유학기 프로그램으로는 ‘뮤직 인사이드-S’라는 강좌를 직접 개설했다. 음악을 단순히 예술 교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교과와 연결하여 역사 속 사건들의 배경을 음악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수업이었다. 그는 학생들이 음악을 통해 역사와 사람을 이해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교사라는 직업의 보람을 새삼 느꼈다고 한다.
이번 독창회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무대 위에 두 딸이 함께 서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인 큰딸 최다연과 바이올리니스트인 둘째 딸 최승연은 어릴 적부터 엄마와 함께 음악을 하며 성장해 왔다. 그러나 박은미는 두 딸을 음악가로 소개하기에 앞서 한 사람의 딸로서, 또 한 사람의 인생으로 먼저 이야기한다.
큰딸 다연은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 그는 웃으며 “저출산 문제 해결에 앞장선 화학의 신”이라고 딸을 소개하지만, 그 안에는 엄마만이 품을 수 있는 자랑과 애정이 함께 담겨 있다. 뉴욕에서 생활하던 시절, 테크닉 하나만을 위해 아이를 몰아붙이는 중국 학부모들과 그 아이들 사이에서도 다연은 쇼팽의 녹턴을 여유롭게 연주하는 아이였다고 한다. 기술보다 음악을 먼저 이해하는 아이였고, 그것이 엄마에게는 더없이 자랑스러웠다. 무엇보다 잊지 못하는 기억이 하나 있다. 오래 기다렸던 백건우 피아노 독주회를 다녀왔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쉬움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던 어느 날, 다연이 집에서 들려준 베토벤 ‘템페스트’ 소나타는 그 아쉬움을 단숨에 위로해 주었다.
공연장의 감동과는 또 다른, 가족만이 줄 수 있는 위안이었다. 지금 세 여자가 함께 트리오를 연주할 수 있는 것도 다연의 포용력 있는 피아노 실력과 절대음감에서 비롯되는 섬세한 조율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둘째 승연의 이야기에 이르자 그의 목소리는 한층 부드러워진다. 승연은 성장 속도가 또래보다 많이 느렸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늘 작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러나 늘 행복을 잃지 않았던 아이였다. 언니를 바라보는 기쁨이 있었고, 엄마가 늘 곁에서 방향을 잡아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승연의 인생을 바꾼 것은 바이올린이었다.
피아노 건반조차 힘이 없어 제대로 누르지 못하던 아이가 1/16 크기의 작은 바이올린을 손에 쥐면서 삶에 대한 의욕과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 후 예원학교를 목표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누구보다 열심히 레슨을 받았지만, 어느 날 ‘전공을 준비하는 뛰어난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가족 모두에게 너무도 큰 상처였지만 그 좌절은 또 다른 음악을 낳았다. 진로를 접는 대신 가족끼리 연주회를 열기로 한 것이다. 둘째의 바이올린과 큰딸의 피아노, 그리고 자신의 첼로가 더해진 가족 트리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섯 차례의 가족음악회를 열었고, 문화센터와 백화점, 교회 등 어디든 무대가 있는 곳이면 기꺼이 찾아가 연주했다. 전공자의 길은 아니었지만 음악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주었고, 서로를 위로하는 가장 따뜻한 언어가 되었다. 그래서 이제 이 세 모녀는 오래 고민했던 ‘맘 앤 시스터즈’ 대신 ‘소리우리끼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객들을 만나려 한다. 이름처럼, 우리끼리 만들어 온 소리를 이제는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서이다.
이번 독창회에서 세 모녀가 함께 연주하는 무대는 단순한 가족 출연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 가정 안에서 함께 쌓아 온 음악의 시간이 객석 앞에서 비로소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박은미에게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공연 이전에, 엄마로 살아온 시간을 노래하는 가장 따뜻한 악장이기도 하다.
곡마다 스며 있는 나의 삶, 나의 음악
세 번째 독창회를 준비하면서 박은미가 가장 오래 고민한 것은 어떤 곡을 부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것인가였다. 그에게 프로그램은 단순히 유명한 곡들을 나열하는 순서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음악으로 풀어내는 하나의 서사이며,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관객과 함께 다시 걸어보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무대의 1부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로 채웠다.
첫 곡은 메조소프라노의 중저음이 지닌 깊은 매력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Vergin, tutto amor이다. 이어지는 마르티니의 ‘사랑의 기쁨(Plaisir d’amour)’은 아름답고 대중적인 선율 때문에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곡이다.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멜로디지만, 노래를 부를 때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대를 초월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어지는 슈베르트의 백조의 노래 가운데 네 번째 곡 ‘Standchen’은 흔히 ‘세레나데’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신에게는 세레나데라는 유명세보다 독일가곡이라는 장르 자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독일가곡 특유의 시적 감성과 섬세한 언어의 흐름은 언제 불러도 새로운 감동을 준다.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 가운데 ‘뱃노래’ 역시 오래도록 사랑해 온 곡이다. 가사와 멜로디가 모두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는 작품이라 지금도 자주 흥얼거리곤 한다. 노래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진실하게 전달된다고 믿기에, 이번 독창회에서도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들을 먼저 관객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단순히 민요를 편곡한 작품이 아니라 교단에서 수없이 학생들에게 들려주었던 음악이다. 사회 교과 시간에 동학농민운동을 설명할 때도, 우리 민요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도, 식민지 시대와 한국 가족문화의 이야기를 풀어갈 때도 이 노래는 언제나 좋은 예가 되어 주었다. 학생들에게 역사를 설명하던 노래를 이제는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들려준다는 사실이 자신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김효근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는 무엇보다 가사 전달에 초점을 맞췄다. 좋은 시는 혼자보다 함께 부를 때 더욱 깊이 전달될 수 있기에 테너 김명제와의 이중창을 선택했다. 1부의 마지막 두 곡은 프랑스어 작품이다. 에릭 사티의 ‘Je te veux’는 진솔한 사랑의 고백과 반복되는 확인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상하게도 이 곡은 오래전부터 ‘내가 아주 잘 부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지금까지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사랑하며 살아온 자기 자신을 향한 노래일 수도 있다. 마지막은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제2막에 등장하는 카르멘의 ‘집시의 노래’다. 메조소프라노가 가장 빛나는 오페라 가운데 하나인 ‘카르멘’에서 이 아리아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히 유명한 곡이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되는 선율 속에서도 속도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극적인 긴장감, 그리고 몸짓과 표정까지 함께 표현해야 완성되는 드라마틱한 음악이라는 점 때문이다.
두 딸과 함께 꾸미는 트리오는 브람스의 왈츠. 세 악기가 서로 호흡을 맞추기에 가장 편안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다. 연주회에서는 튜닝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앞으로 새롭게 마련한 음악 공간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게 된다면 가장 먼저 연주하고 싶은 곡이기도 하다. 세 악기의 선율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화성이 너무도 아름다워 연습하는 시간 자체가 힐링이라고 말한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Andante con moto’는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나 광고 음악을 통해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는 친숙한 작품. 하지만 직접 연주해 보면 결코 쉽지 않은 곡이다. 세 악기의 개성이 모두 살아나면서도 슈베르트 특유의 유려한 진행과 예기치 않은 변화가 계속 이어지는데 특히 자신은 악보보다 소리를 먼저 듣고 음을 찾아가는 버릇이 있어 연습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쩌면 그러기에 가족과 함께 무대에 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무척한지 모른다.
이번 독창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것은 오랜 시간 음악으로 인연을 맺어 온 동료들이다. 소프라노 이영주는 자신의 성악 스승이자 에세뉴앙상블 멤버이다. 2021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함께 연주하면서 언제나 자신에게 어울리는 곡을 추천해 주었고, 다양한 음악 활동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여준 지인이다. 테너 김명제와는 우리가곡사랑회 연주를 통해 친분을 쌓았다. 언제나 밝고 즐거운 모습으로 사람을 대하면서도 막상 무대에서는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번 공연을 위해 독일에서 잠시 귀국하는 바리톤 한경석과의 인연도 특별하다. 손세창 감독의 추천으로 한국가곡 ‘보리밭’ 연주 영상을 처음 접했는데, 깊고 울림 있는 목소리에 먼저 반했고, 그보다 더 따뜻한 인간적인 매력에 이끌려 이번 무대를 함께하게 되었다. 더욱 의미 있는 것은 W-콘서트콰이어를 지휘하는 테너 한태원이 바로 한경석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이번 공연은 엄마와 두 딸이 함께하는 무대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이어가는 음악의 의미도 담고 있다.
그리고 허영우가 있다. 그는 전공자가 아니지만 웬만한 전공자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춘 보기 드문 카운터테너로 동문합창단에서 처음 만나 에세뉴앙상블 공연과 원불교 교당 행사 등에서 자주 함께 연주해 온 소중한 음악 동료다. 비올라 연주 또한 수준급인 그는 이번 공연에서 ‘넬라 판타지아’는 카운터테너 발성으로, 김소월 시와 신동수 곡 ‘왕십리’는 바리톤 발성으로 들려줄 예정이다. 하나의 목소리가 두 가지 색깔을 보여주는 특별한 무대가 되며, 관객들에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추억을 선물할 것이다.
프로그램 하나하나를 이야기하는 동안 박은미는 여러 차례 같은 말을 반복했다. “좋아하는 곡입니다.”,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입니다.”, “감정이입이 잘 되는 작품입니다.”, “연습하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화려한 기교나 어려운 테크닉보다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음악을 관객과 나누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이번 독창회의 프로그램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세 번째 독창회는 레퍼토리의 나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사랑해 온 음악의 연대기이며, 그 음악을 함께 만들어 준 가족과 동료들에게 보내는 가장 따뜻한 감사의 편지이기도 하다.
창작 한국가곡에 바치는 오마주, 신동수의 음악
이번 독창회 프로그램을 들여다보면 유난히 작곡가 한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바로 작곡가 신동수이다. 박은미는 이번 무대를 준비하며 아예 ‘신동수 곡, 내가 최고야!’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코너를 구성했다. 그만큼 신동수의 음악은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기악과 성악을 함께 공부하며 자연스럽게 음악의 흐름을 바라보게 되었다. 기악에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 슈베르트와 브람스 등 이미 거대한 산맥과 같은 작곡가들이 존재한다. 물론 지금도 훌륭한 작품은 계속 탄생하지만 클래식 음악의 큰 줄기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작품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우리 시대에 살아 있는 작곡가들이 만들어 가는 창작 한국가곡으로 향했다.
그 가운데서도 신동수의 음악은 특별했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면서도 클래식 음악의 깊이를 잃지 않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선율을 만들어 내는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그는 ‘세인들이 사랑하는 훌륭한 곡을 꾸준히 작곡해 온 국보급 작곡자’라고 표현한다. 이는 단순한 존경 이상의 신뢰가 담겨 있다. 더욱 뜻깊은 것은 우리나라 남성 성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부르고 싶어 하는 「산아」의 시를 쓴 신홍철 선생이 바로 신동수 작곡가의 부친이라는 사실이다. 한 가족 안에서 시와 음악이 이어지고, 그것이 다시 수많은 성악가들의 무대로 이어진다는 사실 또한 그에게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번 독창회에서는 신동수의 작품 여섯 곡이 소개된다. 각각의 작품은 모두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정직하게 그려 낸다는 점에서는 하나로 이어진다.
‘내 님을 위해서라면’은 오페라 ‘몽월’ 3막에서 갈등의 절정을 이루는 문희의 아리아이다. 김유신의 명으로 불길 속에 뛰어들기 직전, 사랑하는 김춘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조차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처절한 심정을 노래하는 작품이다. ‘내 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죽을 수 있네, 내 님을 위해서라면 나는 웃을 수 있네.’라는 가사는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를 극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이 곡을 통해 오페라 아리아가 가진 드라마틱한 힘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어지는 ‘왕십리’는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이다. 대학 시절 아직 가곡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소월의 시를 찾아 작곡했던 작품을 최근 다시 손질해 새롭게 발표한 곡이다. 도입부에는 현대적인 화성이 더해졌고, 주선율에는 우리의 굿거리장단을 응용하여 한국적인 리듬감을 살렸다. 비가 오는 왕십리를 배경으로 한 그리움과 기다림은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한국인의 정서를 담아낸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 가곡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명곡 ‘산아’ 역시 이번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은 1983년 MBC 대학가곡제 대상을 수상하며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국내외 수많은 성악가들이 애창하는 대표적인 창작가곡이 되었다. 특히 바리톤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도전해 보고 싶은 곡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페라 아리아에 버금가는 스케일과 극적인 표현력을 요구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박은미는 이 곡이 단순한 가곡이 아니라 우리 창작가곡의 수준을 세계에 보여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도종환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당신의 무덤가에’는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사람의 애절한 마음을 노래한다. 시집 ‘접시꽃 당신’에 수록된 이 시는 아내를 향한 그리움이 한 줄 한 줄 배어 있으며, 신동수는 이를 느린 12/8박자의 깊은 선율로 풀어냈다. 노래는 화려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 오래 마음속에 남는다.
분위기는 다시 ‘내가 너에게’에서 따뜻하게 바뀐다. 신동수가 직접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작품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연인에게 고백하는 마음을 담았다. 어디선가 들어 본 듯 친숙한 선율과 반복되는 리듬은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다. 마지막 곡 ‘마지막 사랑’은 원래 남성합창곡 ‘아버지, 사랑해요’에서 출발했다. 러시아 민요를 유난히 좋아했던 선친을 회고하며 만든 선율 위에 새로운 가사를 입혀, 마지막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의 비통한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러시아풍의 애잔한 선율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박은미는 여섯 곡 모두를 자신의 ‘베스트’라고 말한다. 우리말이 지닌 아름다움, 한국인의 정서, 그리고 클래식 음악의 품격을 함께 담아내고 있는 까닭이다. 그는 이번 공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창작 한국가곡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교단을 떠나 더 넓은 노래의 바다를 향한 항해
38년 동안 아침이면 학교로 출근하던 삶도 이제 두 달여 뒤면 끝난다. 박은미는 이제 ‘학교를 정규적으로 나가지 않을 뿐이지 음악의 인생은 지금보다 더 바빠질 것 같다.”라고 예견한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앞둔 설렘이 가득 차있다.
가장 먼저 오래 준비해 온 ’여인의 사랑과 생애Ⅱ‘를 완성해야 한다. 슈만의 연가곡에서 출발했지만 현대 한국 여성의 삶과 사랑을 담아 새롭게 쓰고 있는 이 연가곡은 그가 가장 애정을 쏟고 있는 작업이다. 언젠가는 여덟 곡 전곡을 무대에 올릴 계획이다.
합창도 계속된다. W-콘서트콰이어 정기연주회 연습은 여전히 그의 일정표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마이오케스트라와의 정기연주회도 준비해야 하고, 세 모녀가 함께하는 ‘소리우리끼리’의 제6회 연주회도 기다리고 있다. 오랫동안 함께 음악해 온 사람들과 다시 모여 영산아트홀 공연도 기획할 생각이다.
물론 앞으로의 계획은 음악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좋은 아내로, 좋은 곁지기로 살아가는 일, 언젠가는 손주들에게 자랑스러운 할머니가 되는 일도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목표이다. 틈이 나면 여행도 다니고, 운동도 하며 심신의 활력을 유지하고 싶다. 글도 계속 쓰고, 오래 좋아했던 수채화도 다시 그리고 싶다. 무엇보다 친구들과 웃는 얼굴로 마주 앉아 정답게 식사하는 시간을 자주 만들고 싶다. 평생 앞만 보고 달려왔기에 이제는 사람들과 함께 천천히 걷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끝내는 음악을 이야기한다. 앞으로 꼭 도전하고 싶은 작품을 묻자 망설임 없이 드보르자크의 ’둠키 트리오‘를 손꼽은 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전곡도 세 모녀가 함께 연주해 보고 싶은 버킷리스트이다. 첼리스트로서는 오펜바흐의 ’자클린의 눈물‘과 브루흐의 ’콜 니드라이‘에 도전하고 싶다. 성악곡 역시 아직 배우고 싶은 작품들이 너무 많다. 정년은 배움을 멈추는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제대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그는 믿는다.
인터뷰를 마치며 문득 첫 질문이 떠올랐다. 왜 이제 세 번째 독창회인가. 그러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니 그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횟수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시간이었다. 38년의 교직 생활, 수십 년의 합창 인생, 가족과 함께 만든 음악, 제자들과 나눈 수업, 그리고 여전히 배우고 싶은 수많은 작품들. 그 모든 시간이 쌓여 비로소 세 번째 독창회가 탄생한 것이다.
누군가는 정년을 은퇴라고 말하지만, 박은미에게 정년은 또 하나의 프롤로그이다. 교단이라는 무대를 내려와 이제는 인생이라는 더 큰 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번 독창회는 지나온 세월을 기념하는 음악회인 동시에 앞으로 펼쳐질 제2의 음악 인생을 알리는 첫 공연이다.
무대의 막은 오르내리지만, 음악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박은미의 노래 역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지도 모른다.
글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