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밑거름을 길러주는 교육 철학, 강남스즈키음악학원 대표 곽은수

‘스즈키 메소드’(Suzuki Method)란 1943년 스즈키 신이치(Suzuki Shinichi) 박사에 의해 창안된 영유아기에서 모국어 습득원리를 연구 분석하여 모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악기를 통해 음악적 감각, 기억력, 집중력, 인간성 등을 개발시키는 교육법이다. 강남스즈키음악학원 대표 곽은수는 그러한 스즈키 메소드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는 전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바이올린으로 인해 만난 스즈키가 또 다른 평생의 동반자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스즈키와의 첫 만남

한국스즈키협회의 첫 출발지는 ‘청주 재능교육원’이었다. 곽 대표의 동생이 해당 유치원을 다니고 있었고 이모는 그 유치원의 선생님이었다. 당시 한국에 처음으로 스즈키를 들여온 김희모 박사가 이사장으로 있었고, 김 박사의 사모가 유치원을 운영했다. 피부과 의사였던 김희모 박사는 일본의 마츠모토라는 곳을 갔다가 우연히 스즈키에 관한 것을 보고 엄청난 교육법이라고 생각되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입하게 된 것이 스즈키의 시발점이었다.
그래서인지 유치원은 1인 1학기 제도로 일본의 교육법과 같은 수업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원생과 유치원 선생님들은 바이올린이나 멜로디언 둘 중 한 가지를 필수로 배워야만 했다.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이모는 그렇게 바이올린을 가장 먼저 접하게 되었고 후에 곽 대표에서 배울 것을 권장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8살 초등학생이었다. 게다가 레슨은 무조건 원생들에 한 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이모가 저만 예외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해줬어요. 원래는 안되는 거지만요.(웃음) 다른 친구들은 이미 6~7세 때부터 배워왔고, 저는 나중에 그곳에 같이 끼어 들어간 입장이었는데 나름 6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있던 덕인지 늦게 시작한 것에 비해서 진도가 빨랐었던 모양이에요. 이모가 우리 집에 같이 살았었는데 레슨도 따라다니고, 연습도 시켜주고 엄마 역할을 해줬죠.”

한국스즈키협회 황경익 회장

그 후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즈음, 한국스즈키협회 황경익 회장이 상급반 아이들 담당 교사로 초빙되어왔고, 그렇게 황 회장과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담당 선생님이었던 황 회장은 만났던 순간부터 “전공할 거 아니면 오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렸으니 ‘전공’이라는 것이 정확히 뭔지도 몰랐지만 그렇다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그는 얼떨결에 ‘전공하겠다’라고 말해버렸다. 교육자셨던 부모님은 전공에 있어서는 조금 회의적이셨다. 세상은 넓고 할 것은 많은데 악기를 전공하게 되면 너무 한 가지에만 집중하여 자칫 편협해질 수 있다는 우려를 하셨던 것.
“네가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이미 다른 것들도 너무 잘하고 있는데, 왜 굳이 음악 쪽으로 가려고 하니. 아빠 생각에는 좋은 선택 같지는 않다고 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워낙 고집이 센 데다가 한 번 꽂히면 절대 굽히지 않는 성격이라 결국엔 허락해주셨죠.”
하지만 임시로 수업을 왔었던 황 회장이 더 이상 스즈키 청주 본부로 못 나오게 되자 그가 선생님의 자택이 있는 대전으로 레슨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일본 마츠모토에서 4년 주기로 개최되는 스즈키 월드 컨퍼런스가 열렸다.
“저랑 제 후배 한 명이랑 녹음 카세트테이프를 제출했었어요. 원래는 참관 형식으로 가는 거였지만 저희에게는 조금 특별한 기회를 주셨던 거죠. 해당 음원이 선발되면 한국 대표로 연주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거든요. 당시 제가 멘델스존 콘체르토 3악장을, 제 후배가 비오티 콘체르토 20번을 연주했는데 다른 국가의 선생님들이 ‘한국에 저런 애가 있었냐’면서 처음으로 황 선생님께 악수를 권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만 해도 한국은 정식 회원국으로 등록되어있지 않았을뿐더러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모를 때였어서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신경도 안 쓰다가 한국 학생들의 연주를 듣고는 반응이 달라진거죠.”

그 이후로 황 회장은 매 컨퍼런스 때마다 몇십 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참석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에는 도쿄의 야마모토라는 선생님의 제자들과 함께 연합으로 ‘스트링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대구, 부산, 서울의 예술의전당까지 섭렵하며 연주하고 심지어 2년 뒤 열린 시드니 월드 컨퍼런스에서 호주 아이들까지 포함해 무려 3개국이 합동으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아직 한국에는 스즈키 메소드라는 교육방식이 익숙하지 않기도 했고 이러한 형태로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스즈키는 마치 현악기 교육계의 이단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차이콥스키 콘체르토를 선생님과 제자들 모두 포함해 열댓 명이 같이 연주를 하다 보니 기존의 다른 음악가들, 교수들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꺾이지 않을 것만 같던 결심

그러는 와중에 어느덧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다. 그는 성적이나 실기나 모두 우수한 학생이었기에 명문대를 목표로 진학하려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곽 대표를 아끼던 황 회장은 중학교 시절부터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며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게 해줬다.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좀 특별했어요. 레슨하다가 같이 밥 먹고, 또 연습하며 캠프 준비를 하다 시간이 늦어지면 제자들을 다 차에 태우시고는 데려다 주시곤 했죠. 선생님 댁은 항상 제자들로 붐볐어요. 한 마디로 생활 밀착형 레슨이었어서 지금 하고는 너무 다른 형태의 수업을 하셨던 거죠. 그리고 역사 얘기를 굉장히 많이 해주셨어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요.(웃음)”
어린 나이부터 그 기나긴 역시 이야기를 매일 들으면서도 한 번도 지쳐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하지만 또래에 비해 성숙하고 역사의식도 있던 곽 대표는 오히려 그게 그저 재밌고 신기했다. 황 회장은 그에게 스즈키 교육에 대한 중요성,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본인의 교육 방향성, 그리고 컨퍼런스에서 연주의 기회를 주며 배경 지식과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든 전반적인 것들을 앉혀놓고 설명만 한 것이 아닌 다년간 직접 같이 발로 뛰며 몸소 보여준 참 스승이었다.
당시 황 회장은 목원대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는데, 스즈키의 교육법이 얼마나 가치 있고 중요한 건지에 대한 것을 지속해서 알려준 덕에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기로 했다.
“저희 집안부터 시작해서 학교와 담임선생님까지, 모든 사람이 다 뒤집어졌어요. 선생님하고는 따로 계속 배우면 되는 거고, 굳이 학교까지 쫓아서 갈 필요가 있느냐는 거죠. 하지만 저희 부모님도 워낙 제가 한번 결정하면 바꿀 수 없는 아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어서 결국엔 저를 믿어주시더라고요.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저를 졸업할 때까지 안 보셨어요. 고등학교 3년 내내 제 담임을 자처하시며 악기 공부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기에 그 실망감과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던 거죠.”
그토록 우여곡절을 치르고 대학에 입학했더니 학교는 그가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완전 딴판이었다. 학교에 실망한 것도 모자라 동기들과 엄청난 실력 차이로 인해 나오는 온갖 시기 질투에 시달렸다. 결국 음악을 관두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고 두문분출해 버렸다.
“학교에서는 이렇게 무단결석을 할 바에야 휴학을 권유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때 제 마음은 정말 확고했어요. 모든 것이 암울하고 음악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곤 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번 아웃과 그간 오롯이 혼자서 감당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한 압박감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우울증 비슷하게 왔던 것 같아요.”
황 회장은 그의 폭탄선언을 듣고는 잠시 아무 말이 없다가 몇 날 며칠에 오라는 말만 했다. 사실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그에게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부만 죽어라 파고 있는 인문계 동급생들 사이에서 음대생을 꿈꾸며 내신 관리와 실기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살아왔는데, 내가 기껏 이런 곳이나 들어오려고 그렇게 죽어라 하고 노력했나 싶은 허무함이 컸으리라.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받다

그동안 집 밖에도 안 나가고 밥도 제대로 먹지 않았다. 그러다 몇 개월 만에 만난 선생님께서는 당시 연세대 교수로 재직 중이었던 이재헌 교수에게 가볼 것을 권유했다. 이 교수는 스즈키 한국지사 자문위원이었기 때문에 캠프와 컨퍼런스에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황 선생님의 권유로 다시 바이올린을 집어 들고 졸업할 때까지 서울로 레슨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이 선생님께서는 갈 때마다 3~4시간씩 해주셨어요. 그땐 정말 저에게는 구세주와 같은 분이었죠. 완전한 우울의 늪 가운데 선생님을 만났으니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레슨 내용도 그렇지만 황 선생님하고는 또 다른 측면에서 조언해주시는 것들이 다른 세상이었어요. 주중에는 학교에 가야하니까 주말마다 서울로 차표를 끊고 다녔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저에게 ‘너는 스즈키 메소드를 가르쳐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유학을 다녀오더라도 꼭 스즈키를 통해서 기여했으면 좋겠다’라고 결정타를 날려주신 거죠.”
이 교수는 기본 베이스가 잘 되어있어야 올바른 성장으로 이어지는데 대부분 선생은 본인들이 꼭대기에 앉아서 잘하는 아이들만 골라 가르치고 싶어 하고, 그래야만 본인의 가치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는 데에 곽 대표가 황 회장의 뜻을 잘 이어서 가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지금껏 그 이유로 달려온 것은 맞지만 정작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그에게 확실한 정의를 내려준 셈이었다.

“저 역시 스즈키 메소드로 공부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이단아처럼 생각하고 특히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굉장히 폄하하곤 했는데, 도대체 이 음악의 끝은 무엇인지, 저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를 해왔길래 그 정도로 밖에 보지 않는 건지, 저는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내가 직접 유학 가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결심했죠. 다양한 경험을 한 뒤 내려다 보았을 때 스즈키 메소드라는 것을 어떠한 관점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해보고 싶었거든요.”
독일에서의 담당 교수님은 그가 궁금해했던 것들에 대해 많은 해소를 시켜주신 분이었지만 스즈키 메소드에 관해서는 잘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깨달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국에서만 있었으면 보지 못했을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에서도 스즈키 메소드와 매우 유사한 레슨 형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한스아이슬러 대학 교수님 중에 한 분이 레슨하는 형태가 스즈키 메소드와 매우 유사하더라고요. 근데 그분만이 아니라 또 다른 선생님들도 그런 식으로 수업하시는 분들이 더 계셨어요. 예를 들면 클래스마다 아이들을 앉혀놓고 본인 레슨 시간 외에는 청강하는 형태요. 스즈키 선생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도 제 레슨 시간에만 있다 나온 것이 아니라 훨씬 전부터 앉아있어야 했어요. 스즈키 선생님이 독일 베를린에 계셨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폼(form)들을 도입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베를린에도 아마 그런 스즈키의 교육 방법이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고요.”

과거의 오케스트라의 역사를 보면 만하임 악파에서 합주로 이루어지는 오케스트레이션을 통해 합주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러한 교육을 이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전에는 합주로 교육이 이루어진 경우는 없었던 것을 보면, 스즈키 박사의 수업 방식이 독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저는 독일에 가서 단순히 연주법에 대해서만 공부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스즈키 메소드와 접목시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것이 애초에 제 유학 목적이었어요.”

첫 시작, 기쁨의 순간들로 기억되길

작년 9월, 스위스 티보르 버르거 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서 만 14세 최연소 참가자로 당당히 우승을 거머쥔 신예 김서현 양도 곽 대표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 외에도 유학생들을 포함해 국제무대에서 활동하거나 다른 국가에서 연주 활동 및 오케스트라 입단 등 무수히 많은 제자들이 거쳐 갔다. 하지만 몸과 마음을 다해 기초를 닦아준 선생님들이 묻히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곽 대표는 그러한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스즈키만큼 기초를 잡아주는 곳은 없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른 선생님께 가는 것이 요점이 아니에요. 그 학생들이 그렇게 오기까지 결코 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거죠. 모든 것에는 보이지 않는 과정들이 있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저는 그 자리와 그 시간이 없었으면 아이들을 그 자리까지 갈 수 없었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요. 이번 20주년 기념음악회도 이러한 취지를 가지고 기획한 것도 있고요.”
강남스즈키음악학원은 단순한 음악 교육 기관이 아니다. 그들은 음악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고 발전하며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능력을 길러주는 교육관으로 임하고 있다.

그는 아이들에게 중요한 시기에 같이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그에게는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어떻게 더 보람 있게 해줄 수 있는지 생각했다. 이번 2월 23일(금) 롯데콘서트홀에서 있을 강남스즈키앙상블 20주년 기념음악회 역시 인생의 보물과도 같은 제자들과 한데 모여 바이올린을 통해 함께 나눴던 추억들이 위로와 기쁨의 순간들로 향유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준비했다고 말하는 곽은수 대표. 제자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떠한 위기나 힘든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스즈키에서 쌓았던 추억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그는 진정한 스즈키 전도사였다. 곽은수 대표만의 독보적인 열정으로 더 많은 아이들이 스즈키를 경험하는 그날까지! 그의 당찬 행보를 응원해본다.

글 민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