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얼마나 알았을까?
아는 듯하지만 정작 그를 그려보려니
밑그림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빗금을 그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쓴 시를 읽어본다
‘생육’과 ‘곡비’ 속에 내 모습을 투영되고
그녀의 품에 안긴 듯 슬픈 포옹이 느껍다.
지난 4월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회장 이경숙)의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오랜만에 무대 위에서 손영미 작가를 만났다. 이날은 소프라노로 무대에 서는 날이다. 그의 시를 읽고 언젠가는 작가로서 그녀를 만나야겠다 싶었는데 늘 바쁜 일정에 밀려 잊곤 했다. 이날은 더는 미룰 수 없어 내심 꼭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다 막상 그를 알기 위해 글을 쓰려니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미쳐, 그가 쓴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시마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서사(徐事)의 내용들이 함초롬하게 젖어 있었다. ‘생육’이 그렇고 ‘곡비’가 그랬다. 나의 손은 그녀를 알고 싶은 욕심에 겨워 한 편의 글을 써 내려갔다.
손영미, 각종 문학상 휩쓴 감동의 시인
그녀를 알고자 시를 더 찾아냈다. 일전에 ‘노래가 자살한다면’이라는 시를 읽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어 그 시를 주제로 인터뷰의 대문을 열었다. 얼마나 노래를 좋아했기에 이런 시가 음유시인처럼 절로 나올까? 손영미에게 ‘인생이란 시로 묻고 노래로 답하는 그 무엇’이다. 팍팍한 일상을 노래로 힐링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태교 때부터가 아닐까요? 부모님이 워낙 음악을 좋아하셨으니까요. 어머니가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의 노래를 들으시고 저를 ‘미미’라 불렀답니다. 늘 그렇게 노래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며, 저도 그 감성을 물려받은 듯해요.”
어린 시절 노래를 듣기 위해 아버지의 축음기를 혹사시킨 끝에 고장 내는가 하면 학창 시절에는 방송반을 하면서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대학에서 과외 활동과 방송일, 학생회 활동을 하는 등 일상이 분주해지면서 노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십 년 전 지병을 앓던 동생이 하늘나라로 가면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그때 노래는 다시 손영미에게 다가왔고 지금은 시와 더불어 성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노래가 자살한다면’은 손영미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성 슈테판 성당 광장을 거닐며 쓴 시로 2021년 계간 미네르바 가을호의 연재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그의 시는 보통 시가 아니다. 1년여 전 ‘생육’ ‘곡비’ ‘가시꽃’ 등으로 한용운 문학상 특별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2022년, (구)샘터문학인 샘문그룹 주최 공모전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쓸 시기는 때마침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시던 시기로 많이 힘들었어요. 치매까지 앓고 계셨으니까요. 매일 울면서 광주를 한 달에 서너 번 오갔던 시기라 그런 시가 나왔던 것 같아요. ‘생육’과 ‘가시꽃’ ‘곡비’ 세 편을 응모해 한용운문학상 특별창작상을 받게 되었지요. ‘생육’은 치매와 노환의 족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그린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보루인 한 평 남짓 침상에서 인간의 존엄도 인격도 사라진 채,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삶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듬해 5월 어머님이 소천하신 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계속 써 내려갔다. ‘고고학적인 하루’ ‘해남의 시간’ ‘종점’등을 작시, 2023에는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를 찾는 문단은 계속 이어졌다. 한용운 문학상에 이어 열린시학에 등단, 동서문학상을 수상한다. 2020년 코로나로 모든 활동이 멈춰지자, 그동안 써두었던 시를 정리해 대학원 교수의 추천으로 열린시학에 출품했는데 그게 등단 작품이 되었다.
“당시 10여 편을 응모해 엄격한 심사를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동서문학상은 커피 회사로도 유명하지요. 주식회사 동서식품에서 후원하며 문학인을 양성하는 취지로 세운 문학상입니다. 제가 응모하던 2020년에도 시 장르만 9,800명이 응모했습니다. 장르는 시, 소설, 수필, 동화도 있지만 저는 시로 응모해 겨우 10위권 턱걸이 입선으로 상을 받았지요. 전국에서 15,000명 중 10위권이면 못쓰는 편은 아니었죠?(웃음) 당시 신달자 시인님이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수상작은 ‘사랑을 위한 비유법’이에요. 코로나로 두문불출했던 시기인데 집에서 나뒹굴다 보니 사랑이 고팠나 봐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일구는 작가
시는 늘 열린 시각으로 세상과 교감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과 비애에 대해 슬픔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손영미에게는 긍정의 태도와 웃음이 선천적인 것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은 슬픈 강이 내면에 흐를지라도.
“피아노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힘이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노래하는 것보다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특히 피아노는 건반 88개와 3개의 페달을 중심으로 7옥타브와 낮은음 단3도 등을 모두 소화해냅니다. 인간의 오감 중 예민한 귀에 주파수를 조절하며 감정을 건드리는 온갖 소리를 연출하지요. 최저음에서 최고음까지 조화를 이루며 풍부한 사운드를 연출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와 주파수를 적절히 맞추는 일이 참 중요하지요. 20대 중반에 충만한 감성과 자신감으로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결행했답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주파수를 서로 맞추는 일이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이혼이 큰 흠인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아이를 낳고 주저 없이 이혼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작가 생활을 해야 했기에 몇 년 동안 집에도 회사에도 이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때는 나 스스로와도 조율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죠. 뭔가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많이 울었습니다. 결혼 전까지 실패라는 것을 몰랐으니,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물론 그 이후 겸손을 배웠지만요.”
손영미의 시에 흐르는 비애가 무경험적 상상이 아님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시에 천착하는 만큼 인간관계를 더 깊이 고민하고 슬럼프 극복비법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일상과 비일상의 균형감을 찾고 타인과의 주파수를 잘 조절해 상대와 가장 원만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사회생활도 늘 고비가 있기 마련이고요. 사람으로 인한 상처를 견디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씩 낮추고, 나 자신을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으로 일궈나가고 있지요.”
동생을 잃고부터 노래로서 그 아픔을 승화하기 시작
성악을 프로처럼 전공하지 않더라도 ‘시가 곧 가곡이 된다’는 점에서 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가곡 또한 좋아한다. 그렇다고 직접 노래 부르는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손영미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까?
“앞서 언급하듯이 2013년 동생을 지병으로 보내고부터예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으로 우린 각별하고 단란한 자매였는데 너무도 사랑한 동생이었기에 시만으로는 그 사랑과 슬픔을 모두 표현할 수 없어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이에요. 첫 기일 때 카치니의 ‘아메 마리아’를 노래했습니다. 발성도 제대로 안 되던 때에 헨델의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손영미는 나중에 우리 가곡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중 황진이의 시, 김성태 작곡, 김억 번안의 ‘꿈’을 사랑한다. 몽환적이면서도 인간의 갈망과 좌절, 인생의 회한이 적절히 배어난 최고의 시이자 노래이다. 그는 고매한 정서적 품격이 묻어난 김효근의 ‘눈’도 사랑한다. 고요한 사색이 없이는 그런 시가 나올 수 없고, 그런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또 그의 노래 중 터키의 혁명시인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을 번안한 가곡 ‘가장 아름다운 노래’도 애창한다. 이 시대에 가난하고 고뇌하는 예술가들과 함께 공유하며 용기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손영미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창작가곡의 좋은 소재가 될 법도 한데 어떤 일인지 그의 시는 아직 가곡으로 탄생하지 않고 있다. 아직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릴 때 아빠에게 자주 듣던 ‘게으른 천재’라는 별명때문일까?
“아직은 무릎을 칠 만한 노래 가사를 쓰지 못했습니다. 노래 가사로 하기에는 어둡고 무겁기 때문인지 모르죠(웃음) 먹물이 조금 빠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극작, 소설, 시, 칼럼을 왕래하다 보니 시들이 좀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요. 삶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 예쁜 가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혹 나의 시상과 맞는 멋진 작곡가를 만나면 일찍 탄생할 수도 있겠고요.”
손 작가는 아마추어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창작 가곡을 접할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화성이 잘 맞지 않고 자음과 모음 발음이 부적합한 어휘들이 많다. 그런 시의 문제점을 깨달을 때마다 가곡의 가사로 쓸만한 시를 짓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물론 소망하는 일이니 언젠가는 꼭 쓰게 되리라고 기대하긴 한다.
다양한 가곡단체 임원과 기획자로 활동
손 작가는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벨리비타 등에서 연주이사 및 운영이사, 홍보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로서도 바쁠 터인데 언제 또 이런 임원으로 활동할까?
“노래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곡 전도사가 되었네요. 강의와 진행도 맡고, 가곡 해설집도 출간했습니다. 서울예가와 벨라비타는 모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단체입니다. 서울예가는 제 가곡 해설책, ‘마음을 적시는 아름다운 명곡 30선’ 출간기념 콘서트에서 만난 이경숙 회장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작했는데 이 회장님의 진취적이고 빠른 추진력, 기획력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서울예가 활동으로 배우는 점도 참 많고요.”
벨라비타 문화예술원 성악최고위과정과의 인연은 2012년~2013년 KTU(강태욱)성악최고위과정을 다닐 때 찾아왔다. 당시 손영미는 명사 초청작가로 5기를 수료했는데, 8기로 등록한 임규관 대표(현 벨라비타 원장)를 비롯, 7기 수강생들과 동문들이 의기투합해 지난 2018년 임규관 원장 주측으로 만든 벨라티바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손영미의 가곡 활동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카리아앙상블을 창단하고 창단음악회 기획자로도 나서고 있다.
“제가 합류하고 있는 가곡단체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한국가곡포럼 집행이사, 한국가곡보존회, 서울예술가곡협회 연주이사, 예가 소속 '블리스 중창단' 등에서도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모두 회원들이 100여 명 이상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창단한 '카리아 앙상블'은 소규모 유럽 연수팀입니다. 이 단체를 주체적으로 이끌고 물심양면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프로그램을 기획해주는 조력자일 뿐이죠. 연주자 7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만 빼고 모두 프로 전공자분들입니다. 친화력과 결속력도 좋고요, 각자 재능기부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우리 이웃 중 취약 계층인 노약자, 어린이, 재소자 등과 함께 소규모 기업들에게도 찾아가 노래를 전할 것입니다.”
시와 노래를 융합해 더 큰 사랑의 화학작용 일으켜
손영미의 작가적 기질은 여고 때부터 드러났다. ‘젊은 베르테르를 위한 연가’를 써내 청소년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감상문 수준이었다지만, 국어 선생님은 손영미의 문학적 재능을 간파하고 문학상에 적극 추천, 결국 1등상을 받으며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원의 상금과 5만원권 상품권을 받는가 하면 학교장상인 문화예술공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졸업할 때 답사를 쓰고 직접 낭독해 후배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감정의 연금술사였던 손영미다. 이제 그는 시와 노래를 융합해 듣는이, 읽는이들에게 더 큰 사랑의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가시 꽃(손영미)
당신이 내게 준 것은 꽃입니까
가시입니까
당신은 꽃이 가시로 바뀌었다고 하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가시로만 보였습니다
손을 조금만 부주의해도
금방 가시에 찔리고 마는
선인장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습니다
고개 숙여 유심히 살펴보지만
우리의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한 달에 한 번 물을 주고
난 무작정 기다립니다
두 달째 당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방어기제로 창백하게 가시를 세웠습니다
세 달째 오지 않자
꽃을 피워냅니다
이때 꽃은 애증일까요 분노일까요
백색 꽃이 환멸의 시간을 견딥니다
세상이 온통 가시에 찔린 채,
꽃내음이 진동합니다
아무리 안쓰러워도 만질 수가 없습니다
나도 이미 참혹을 삼킨 가시투성입니다.

글 김종섭
‘그녀를 얼마나 알았을까?
아는 듯하지만 정작 그를 그려보려니
밑그림은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빗금을 그을지 모르겠다.’
그녀가 쓴 시를 읽어본다
‘생육’과 ‘곡비’ 속에 내 모습을 투영되고
그녀의 품에 안긴 듯 슬픈 포옹이 느껍다.
지난 4월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회장 이경숙)의 음악회를 진행하면서 오랜만에 무대 위에서 손영미 작가를 만났다. 이날은 소프라노로 무대에 서는 날이다. 그의 시를 읽고 언젠가는 작가로서 그녀를 만나야겠다 싶었는데 늘 바쁜 일정에 밀려 잊곤 했다. 이날은 더는 미룰 수 없어 내심 꼭 인터뷰를 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러다 막상 그를 알기 위해 글을 쓰려니 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미쳐, 그가 쓴 시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시마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서사(徐事)의 내용들이 함초롬하게 젖어 있었다. ‘생육’이 그렇고 ‘곡비’가 그랬다. 나의 손은 그녀를 알고 싶은 욕심에 겨워 한 편의 글을 써 내려갔다.
손영미, 각종 문학상 휩쓴 감동의 시인
그녀를 알고자 시를 더 찾아냈다. 일전에 ‘노래가 자살한다면’이라는 시를 읽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어 그 시를 주제로 인터뷰의 대문을 열었다. 얼마나 노래를 좋아했기에 이런 시가 음유시인처럼 절로 나올까? 손영미에게 ‘인생이란 시로 묻고 노래로 답하는 그 무엇’이다. 팍팍한 일상을 노래로 힐링한다는 것이다.
“노래를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는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태교 때부터가 아닐까요? 부모님이 워낙 음악을 좋아하셨으니까요. 어머니가 오페라 라보엠의 미미의 노래를 들으시고 저를 ‘미미’라 불렀답니다. 늘 그렇게 노래가 있는 환경에서 자라며, 저도 그 감성을 물려받은 듯해요.”
어린 시절 노래를 듣기 위해 아버지의 축음기를 혹사시킨 끝에 고장 내는가 하면 학창 시절에는 방송반을 하면서 음악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이후 대학에서 과외 활동과 방송일, 학생회 활동을 하는 등 일상이 분주해지면서 노래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십 년 전 지병을 앓던 동생이 하늘나라로 가면서 그 슬픔을 감당할 수 없었는데 그때 노래는 다시 손영미에게 다가왔고 지금은 시와 더불어 성악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노래가 자살한다면’은 손영미가 오스트리아 비엔나 성 슈테판 성당 광장을 거닐며 쓴 시로 2021년 계간 미네르바 가을호의 연재에 게재되었다. 그런데 그의 시는 보통 시가 아니다. 1년여 전 ‘생육’ ‘곡비’ ‘가시꽃’ 등으로 한용운 문학상 특별창작상을 받기도 했다.
“2022년, (구)샘터문학인 샘문그룹 주최 공모전이 있었습니다. 이 작품을 쓸 시기는 때마침 엄마가 요양병원에 계시던 시기로 많이 힘들었어요. 치매까지 앓고 계셨으니까요. 매일 울면서 광주를 한 달에 서너 번 오갔던 시기라 그런 시가 나왔던 것 같아요. ‘생육’과 ‘가시꽃’ ‘곡비’ 세 편을 응모해 한용운문학상 특별창작상을 받게 되었지요. ‘생육’은 치매와 노환의 족쇄 속에서 살아야 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그린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보루인 한 평 남짓 침상에서 인간의 존엄도 인격도 사라진 채, 요양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인간의 삶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이듬해 5월 어머님이 소천하신 후 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기리는 시를 계속 써 내려갔다. ‘고고학적인 하루’ ‘해남의 시간’ ‘종점’등을 작시, 2023에는 한국문학상을 수상했다. 그의 시를 찾는 문단은 계속 이어졌다. 한용운 문학상에 이어 열린시학에 등단, 동서문학상을 수상한다. 2020년 코로나로 모든 활동이 멈춰지자, 그동안 써두었던 시를 정리해 대학원 교수의 추천으로 열린시학에 출품했는데 그게 등단 작품이 되었다.
“당시 10여 편을 응모해 엄격한 심사를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동서문학상은 커피 회사로도 유명하지요. 주식회사 동서식품에서 후원하며 문학인을 양성하는 취지로 세운 문학상입니다. 제가 응모하던 2020년에도 시 장르만 9,800명이 응모했습니다. 장르는 시, 소설, 수필, 동화도 있지만 저는 시로 응모해 겨우 10위권 턱걸이 입선으로 상을 받았지요. 전국에서 15,000명 중 10위권이면 못쓰는 편은 아니었죠?(웃음) 당시 신달자 시인님이 심사위원장이었는데 수상작은 ‘사랑을 위한 비유법’이에요. 코로나로 두문불출했던 시기인데 집에서 나뒹굴다 보니 사랑이 고팠나 봐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일구는 작가
시는 늘 열린 시각으로 세상과 교감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순과 비애에 대해 슬픔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손영미에게는 긍정의 태도와 웃음이 선천적인 것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은 슬픈 강이 내면에 흐를지라도.
“피아노 음악을 참 좋아합니다. 모든 소리를 아우르는 힘이 느껴지잖아요. 그래서 노래하는 것보다 피아노 소리를 듣기 위해 노래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특히 피아노는 건반 88개와 3개의 페달을 중심으로 7옥타브와 낮은음 단3도 등을 모두 소화해냅니다. 인간의 오감 중 예민한 귀에 주파수를 조절하며 감정을 건드리는 온갖 소리를 연출하지요. 최저음에서 최고음까지 조화를 이루며 풍부한 사운드를 연출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와 주파수를 적절히 맞추는 일이 참 중요하지요. 20대 중반에 충만한 감성과 자신감으로 부모님이 반대하는 결혼을 결행했답니다. 그러나 누군가와 주파수를 서로 맞추는 일이란 만만치 않았습니다. 당시 이혼이 큰 흠인 것처럼 생각되었는데 아이를 낳고 주저 없이 이혼했습니다. 여성으로서 작가 생활을 해야 했기에 몇 년 동안 집에도 회사에도 이혼 사실을 알리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때는 나 스스로와도 조율을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죠. 뭔가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어 많이 울었습니다. 결혼 전까지 실패라는 것을 몰랐으니, 저 자신에 대한 실망감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죠. 물론 그 이후 겸손을 배웠지만요.”
손영미의 시에 흐르는 비애가 무경험적 상상이 아님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시에 천착하는 만큼 인간관계를 더 깊이 고민하고 슬럼프 극복비법을 깨우치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일상과 비일상의 균형감을 찾고 타인과의 주파수를 잘 조절해 상대와 가장 원만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사회생활도 늘 고비가 있기 마련이고요. 사람으로 인한 상처를 견디면서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씩 낮추고, 나 자신을 보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으로 일궈나가고 있지요.”
동생을 잃고부터 노래로서 그 아픔을 승화하기 시작
성악을 프로처럼 전공하지 않더라도 ‘시가 곧 가곡이 된다’는 점에서 시를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가곡 또한 좋아한다. 그렇다고 직접 노래 부르는 분은 그리 많지 않다. 손영미는 어떤 계기로 언제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까?
“앞서 언급하듯이 2013년 동생을 지병으로 보내고부터예요.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으로 우린 각별하고 단란한 자매였는데 너무도 사랑한 동생이었기에 시만으로는 그 사랑과 슬픔을 모두 표현할 수 없어 직접 노래를 부른 것이에요. 첫 기일 때 카치니의 ‘아메 마리아’를 노래했습니다. 발성도 제대로 안 되던 때에 헨델의 리날도 중 ‘울게 하소서’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나 손영미는 나중에 우리 가곡을 더 사랑하게 된다. 그중 황진이의 시, 김성태 작곡, 김억 번안의 ‘꿈’을 사랑한다. 몽환적이면서도 인간의 갈망과 좌절, 인생의 회한이 적절히 배어난 최고의 시이자 노래이다. 그는 고매한 정서적 품격이 묻어난 김효근의 ‘눈’도 사랑한다. 고요한 사색이 없이는 그런 시가 나올 수 없고, 그런 노래를 들을 수 없다. 또 그의 노래 중 터키의 혁명시인인 나짐 히크메트의 ‘진정한 여행’을 번안한 가곡 ‘가장 아름다운 노래’도 애창한다. 이 시대에 가난하고 고뇌하는 예술가들과 함께 공유하며 용기를 주고 싶은 작품이다.
손영미는 작가라는 점에서 그의 시는 창작가곡의 좋은 소재가 될 법도 한데 어떤 일인지 그의 시는 아직 가곡으로 탄생하지 않고 있다. 아직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릴 때 아빠에게 자주 듣던 ‘게으른 천재’라는 별명때문일까?
“아직은 무릎을 칠 만한 노래 가사를 쓰지 못했습니다. 노래 가사로 하기에는 어둡고 무겁기 때문인지 모르죠(웃음) 먹물이 조금 빠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극작, 소설, 시, 칼럼을 왕래하다 보니 시들이 좀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요. 삶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면 예쁜 가사가 나오지 않을까요? 혹 나의 시상과 맞는 멋진 작곡가를 만나면 일찍 탄생할 수도 있겠고요.”
손 작가는 아마추어 성악가로 활동하면서 창작 가곡을 접할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화성이 잘 맞지 않고 자음과 모음 발음이 부적합한 어휘들이 많다. 그런 시의 문제점을 깨달을 때마다 가곡의 가사로 쓸만한 시를 짓는 게 결코 쉽지 않은 일로 보인다. 물론 소망하는 일이니 언젠가는 꼭 쓰게 되리라고 기대하긴 한다.
다양한 가곡단체 임원과 기획자로 활동
손 작가는 아마추어 성악가로서 서울우리예술가곡협회, 벨리비타 등에서 연주이사 및 운영이사, 홍보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가로서도 바쁠 터인데 언제 또 이런 임원으로 활동할까?
“노래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어느새 우리가곡 전도사가 되었네요. 강의와 진행도 맡고, 가곡 해설집도 출간했습니다. 서울예가와 벨라비타는 모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단체입니다. 서울예가는 제 가곡 해설책, ‘마음을 적시는 아름다운 명곡 30선’ 출간기념 콘서트에서 만난 이경숙 회장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시작했는데 이 회장님의 진취적이고 빠른 추진력, 기획력에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서울예가 활동으로 배우는 점도 참 많고요.”
벨라비타 문화예술원 성악최고위과정과의 인연은 2012년~2013년 KTU(강태욱)성악최고위과정을 다닐 때 찾아왔다. 당시 손영미는 명사 초청작가로 5기를 수료했는데, 8기로 등록한 임규관 대표(현 벨라비타 원장)를 비롯, 7기 수강생들과 동문들이 의기투합해 지난 2018년 임규관 원장 주측으로 만든 벨라티바에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손영미의 가곡 활동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카리아앙상블을 창단하고 창단음악회 기획자로도 나서고 있다.
“제가 합류하고 있는 가곡단체는 그 외에도 많습니다. 한국가곡포럼 집행이사, 한국가곡보존회, 서울예술가곡협회 연주이사, 예가 소속 '블리스 중창단' 등에서도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모두 회원들이 100여 명 이상입니다. 그에 비하면 이번에 창단한 '카리아 앙상블'은 소규모 유럽 연수팀입니다. 이 단체를 주체적으로 이끌고 물심양면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는 작가로서 프로그램을 기획해주는 조력자일 뿐이죠. 연주자 7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만 빼고 모두 프로 전공자분들입니다. 친화력과 결속력도 좋고요, 각자 재능기부로 찾아가는 음악회를 개최할 계획입니다. 우리 이웃 중 취약 계층인 노약자, 어린이, 재소자 등과 함께 소규모 기업들에게도 찾아가 노래를 전할 것입니다.”
시와 노래를 융합해 더 큰 사랑의 화학작용 일으켜
손영미의 작가적 기질은 여고 때부터 드러났다. ‘젊은 베르테르를 위한 연가’를 써내 청소년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감상문 수준이었다지만, 국어 선생님은 손영미의 문학적 재능을 간파하고 문학상에 적극 추천, 결국 1등상을 받으며 당시로서는 거금인 10만원의 상금과 5만원권 상품권을 받는가 하면 학교장상인 문화예술공헌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졸업할 때 답사를 쓰고 직접 낭독해 후배들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던 감정의 연금술사였던 손영미다. 이제 그는 시와 노래를 융합해 듣는이, 읽는이들에게 더 큰 사랑의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가시 꽃(손영미)
당신이 내게 준 것은 꽃입니까
가시입니까
당신은 꽃이 가시로 바뀌었다고 하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가시로만 보였습니다
손을 조금만 부주의해도
금방 가시에 찔리고 마는
선인장이 당신과 나 사이에 있습니다
고개 숙여 유심히 살펴보지만
우리의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당신은 한 달에 한 번 물을 주고
난 무작정 기다립니다
두 달째 당신이 오지 않았습니다
방어기제로 창백하게 가시를 세웠습니다
세 달째 오지 않자
꽃을 피워냅니다
이때 꽃은 애증일까요 분노일까요
백색 꽃이 환멸의 시간을 견딥니다
세상이 온통 가시에 찔린 채,
꽃내음이 진동합니다
아무리 안쓰러워도 만질 수가 없습니다
나도 이미 참혹을 삼킨 가시투성입니다.
글 김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