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지휘자 차인홍 라이트주립대 교수 특강

한국 장애인 최초 미국 음대(오하이오 주 라이트주립대)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그리고 대학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서 한국 대통령취임식 지휘도 맡았던 차인홍 교수. 그는 베토벤을 연주하든 찬송가를 연주하든 영혼을 매만지는 깊은 울림과 감성이 있어 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깊고 섬세한 지휘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대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알은 뒤 9살 때부터 재활원에 생활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기적처럼 바이올린을 접했다. 이후 그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가운데 음악인의 길로 이어졌다. 가난과 장애, 초등학교 졸업장이 그의 전부였지만 누구보다 경이롭고 기적적인 청년기를 보냈다.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으로 연주 활동을 지속했으며 미국 신시내티 대학, 뉴욕, 시립대학, 사우스케롤라이나 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83명 중 한 사람만 뽑는 어려운 심사과정을 통과해 마침내 오하이오 주 라이트주립대학의 교수가 된 그는 후학을 가르치며 전 세계에서의 무대를 통해 놀라운 사랑의 연주를 펼치고 있다. 이 글은 지난 617일 포니정홀에서 개최된 카메레타포럼에서 차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난 6월 17일 삼성동 포니정홀에서 개최했던 카메라타 인문학특강에서 차인홍 교수가 강의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과 불행을 골고루 겪는 법

저는 여러분 앞에 내놓을 만한 대단한 스토리가 있는 사람은 절대 못됩니다. 사람이란 태어날 때부터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전혀 없이 승승장구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모든 것이 갖춰진 사람이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어려움과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다 그렇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업하시는 분들도 그런 좌절과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고 그런 것이죠.
그래서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에 대한 배경을 모르는 분들은 비록 장애를 갖고 있지만 대단한 집안의 아들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부잣집 아들’ 출신이라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장애를 가졌지만 얼마나 부자였으면 미국에서 공부하고 바이올리니스트와 교수로 활동하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나 저에게는 그런 분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생을 나열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제가 사는 동안 박희정 원장님(카메레타포럼 원장)처럼 저를 사랑하고 아껴주신 분들이 굉장히 많았기에 오늘까지 견뎌왔음을 말씀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이번에 두 번째 책 ‘휠체어는 나의 날개’(미래사 CROSS)를 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어린 시절부터 미국 대학 교수가 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쓰다 보니까 많은 분들이 이 책은 한 편의 사랑 이야기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능력있는 부모님의 뒷받침, 또는 제 개인의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면 여러분 앞에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여까지 오는 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분들이 차인홍이라는 한 개인을 찾아와서 도와줄 수가 있었을까요? 제가 먼저 찾아가서 도와달라거나 또는 관심을 가져달라거나 또는 바이올린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번도... 모두 그분들이 찾아와서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9살 때 재활원에 들어갔을 때 강민자 교수님 등 당시 최고의 선생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머니나 가족 그 누구도 강민자 선생님을 만나본 적도 없으며 레슨비라며 별도의 봉투 한번 건넨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 음악가로 사는 것은 기적입니다. 어쩌면 사랑에 관한 훈훈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잘해서 오늘 여기까지 온 것이 결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의 사랑과 격려의 힘으로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저의 삶이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서재활원에서 강민자 선생님의 특별한 지도를 받았던 시절

나의 세 가지 약점

저에게는 세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런 약점이 있었기에 제 삶은 감사와 기쁨이 넘칩니다. 첫 번째 약점은 보시다시피 1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그때부터 지금까지 걷지 못하고 휠체어로 생활한다는 점입니다. 한 살 때 일어서려면 주저앉아야만 했고 일생 걷지 못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장애인이니까 불편하겠지, 하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당사자에게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어릴 때는 창피한 정도로 그쳤지만, 청소년 때 자아의식이 생기면서 가슴이 철렁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20살이 지났을 때 나의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절망뿐이었습니다. 세상을 포기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그렇다고 방황하거나 엉뚱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아 아들은 둔 저희 어머니는 그 아들은 건사할 수 없어 아홉 살 때 고아원과 같은 재활원에 저를 보냈습니다. 두 번째는 아홉살 나이에 경험할 수 없는 혹독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랐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큰 상처가 되어 지금도 그 쓴 뿌리가 가슴속 어딘가 남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감정이 들쳐 나오려는 슬픈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 순간들이 절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가 문제일 뿐이지 그 힘들었던 시기를 생각조차 하기 싫다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아홉 살 때 재활원에서 생활하기 시작했지만, 어머님께서 저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안이 너무나 가난했고 부모님은 교육을 받지 못하신 분들로 저는 6남매의 막내가 태어났는데 형님 누님 다섯 분 모두 고등학교 이상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웬만하면 그래도 교육을 받았을 테지만 워낙 형편이 좋지 않아 고등학교도 채 졸업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아이러니한 것은 만약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고 건강한 몸으로 성장했다면 저 역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겁니다. 이렇게 힘든 집안에서 언감생심 바이올린이라니요. 말도 안 되었겠죠. 꿈을 꾼다해도 100%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렇게 누추한 곳, 어쩌면 밑바닥 같은 곳일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가장 화려한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신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청년 때 스스로 질문을 하면서 제 인생을 포기하려고 했던 이유는 세 번째 제 약점에 있습니다. 저는 22살 때까지 중학교 이상 다니지 못했습니다. 교육을 전혀 못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해하지를 못합니다. 22살이면 동네 친구들이 대학을 졸업하는 나이입니다. 그때까지 저의 학력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그건 말도 안 된다며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22, 좌절감 속 희망없는 나날들

12살 때 재활원에서 조금 바이올린을 배운 것,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의가 아니고 늘 선생님께서 찾아와 주셔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중에는 동네 선생님과 유명한 분들도 계셨지만 국내 최고의 교수님들께서 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그중 결코 잊을 수 없는 분이 바로 서울대 강민지 교수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그런 분들한테 인사드릴 만큼 여력도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음대생들이 부럽지도 않았습니다. 부러워한다는 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나도 할 수 있는데, 나도 가질 수 있는데 갖지 못할 때 부러워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 친구들하고 나와 완전히 사는 게 완전히 다르지, 저 친구들은 음악가가 될 친구들이고 나는 이대로 사라질 사람일 뿐입니다. 이미 신분의 격차를 느꼈기 때문에 그 친구들과 대화하고 놀아준다고 해도 저는 한 번도 그 대열에 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좌절감 속에서 22살을 맞이한 것입니다. 돈도 없고 음악은 조금 할 줄 알지만, 학력은 보잘것없는데 무슨 희망을 갖겠습니까? 희망이라는 것도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끝이 없는 터널 속에 갇힌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었습니다. 나를 바라보는 저 많은 시선들, 저 친구들이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볼까 하고 고민하던 끝에 세상을 포기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22살이 그렇게 흐르고 있을 때 문득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무엇이라도 하고 싶어 손에 잡은 게 검정고시였습니다. 두뇌가 특출한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도 하나의 선물같은 능력이 있었습니다. 집중력이 뛰어나다는 점인데 이는 많은 분들이 동의합니다. 한 번 보거나 들은 내용은 집중하기만 하면 잊지 않는 재능입니다. 그래서 1년 만에 검정고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교과정도 마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희 장애인들끼리 베데스다 현악4중주단을 구성해서 열심히 연습하던 때였습니다. 유학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와 전혀 관계없는 서울대의 한 교수께서 유학을 준비해주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도 안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분은 신시내티 음대를 졸업하신 분인데 그 분이 저희들의 연주를 녹음한 오디션 테이프를 보낸 후, 입학허가까지 일사천리로 받아낼 뿐만 아니라 장학금까지 받아주셨습니다. 그 일을 저희와 상의한 것도 아니요 저희 부모님을 만나 상의한 적도 없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정말 이상한 것은 검정고시를 통해 겨우 고등학교 졸업을 인정받을 만큼 보잘 것없는 학력인데도 그런 걸 묻지도 따지지 않고 추진하셨다는 말입니다. 당시 고교 졸업 자격시험을 8월에 패스했는데 곧바로 유학을 떠나 미국의 가을학기부터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한 과목이라도 8월에 패스하지 못했다면 교수님이 아무리 완벽하게 유학을 준비하고 추진했어도 입학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 단원으로서 미국 유학 길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하나님의 계획된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요. 인간의 생각으로, 또 계획으로 이뤄질 수 없는 순간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유학을 떠나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경비가 문제였습니다. 신시내티까지 갈 항공료가 어디 있으며 거기서 어떻게 생활하겠습니까? 그런데 교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희와 상의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베데스다 현악4중주의 부모님들은 저희가 유학을 떠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교수님은 우리들의 유학 비용을 위해 82년 당시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이 생존해 있을 때 그분의 며느리이자 첼리스트인 아산재단 정정자 이사장님을 찾아 저를 비롯한 베데스다 현악 4중주의 어려운 형편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대담하게 항공료는 물론 2년간의 생활비를 지원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유학을 떠났는데 여기까지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가 무엇을 잘해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정규 학교 한번 다니지 못하고 재활원 운동장 이외에 학교 문턱을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이 미국 명문대학의 캠퍼스에 뚝 떨어졌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겁이 났습니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으나 그래도 다행히 하나님께서 주신 집중력 덕분에 빠른 시간 내에 영어를 배우면서 그야말로 몸이 부서져라 연습만 했습니다.

사실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을 때는 약 3년 동안 하루 10시간씩 연습했습니다. 재활원에서 에어컨이 나오는 방도 아닙니다. 재래식 화장실 바로 옆, 연탄을 보관하는 연탄광에서 연습했습니다. 여러 친구들과 합숙을 했기에 방에서 연습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 연습하고 새벽이 되면 주변의 교회에서 새벽 종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여름은 좀 낫지만 겨울에는 이불 속에서 나올 수가 없을 만큼 추웠지만 참으로 독하게 연습했습니다. 그렇게 연습했다고 해서 누가 밥해주고 따뜻한 물 한 잔 마실 수 있는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스스로 밥해 먹으면서 자취하는 그런 시절이었죠.

하루 종일 연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잠깐 쉬었다 하면 손이 굳어서 연습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이올린은 쉬면 안 돼요. 저녁 6시쯤 되면 점점 깜깜해지지 않습니까? 밖이 깜깜하면 다시 연탄광으로 방을 나가 화장실 들락거리는 시간 외에 연습만 하면서 3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선생님들이나 직원들이 보면 ‘독한 놈이다’ 할 정도로 죽어라 연습만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이런 가운데 제가 모두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나타나셨고 그 덕분에 미국 유학 생활 10년을 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학비 한 번 내본 적이 없이 장학금으로 공부했습니다.

바이올린과 현악4중주, 그리고 지휘를 공부하다

어쨌든 돈은 없었지만 굶지 않고 유학생활을 마쳤습니다. 그런데 그 후의 인생 또한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면서 미국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신시내티대학에서 바이올린 전공으로 학사를 마친 후 뉴욕시립대학에서 석사, 그리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립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할 때 바이올린이 아니라 지휘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제가 박사과정을 공부한 것은 학위를 더 받고 싶거나 지휘를 배우고 싶어서 도전한 것은 아닙니다.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였을 뿐 딱히 지휘를 전공해야겠다거나 교수가 돼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전한 것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할 수 없이 저는 박사학위를 한 것이죠. 그런데 바이올린을 더 공부하지 않고 갑자기 웬 지휘일까요? 학사 석사를 공부하다 보니 바이올린 연주가 살짝 지겹다는 생각에 더해 내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로 성공할 것도 아닌데 언제까지 바이올린을 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것을 해보자는 생각이 지휘를 전공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당장 무슨 job이 생기겠습니까? 1년간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부하는 동안 결혼해서 당시 아들 둘을 두고 있었습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나자 큰아들이 중학교 3학년이 됐습니다. 그 1년 동안 어쨌든 취업을 해야 하므로 미국의 오케스트라 여러 군데를 찾아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영주권을 취득하고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오케스트라를 찾은 것인데 오디션 하는 순간, 제 실력으로 들어갈 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게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이 다 몰려오는데 그중 기껏해야 한 명 뽑는 그런 과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수백 명이 몰려오죠. 그만큼 미국에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세 번 오디션을 치르고 그냥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실력으로는 미국의 이 경쟁을 뚫을 수 없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제가 바이올린 음악을 공부하면서 그만두어야 할 순간이라고 판단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그런 것 같았습니다. 박사학위 받고 오디션을 다 포기하고 가장이 되었는데 언제까지나 바이올린을 붙들고 있을 것인가, 현실로 돌아가자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그렇게 결심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지만 그것도 한계를 느꼈습니다. 몸이 건강해야 어디가서 막노동이라고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던 중 치기공 전문 기술자 친구가 심각하게 치기공 기술 배울 것을 제안하더군요. 그 제안을 듣는 순간 자신이 생겼습니다. 손재주는 자신 있으니 그 일이 바이올린보다 어렵습니까?
어느 기자가 언제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이었으며 마음이 아픈 시절이었느냐고 물었는데 바로 이때였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앞으로 클래식 음악은 듣지도 않을 것이며 쳐다보지도 않을 각오로 악기까지 팔고서 모은 것을 청산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모집광고, 신시내티 교수에 도전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모르지만, 그날따라 평소 클릭 한 번 안 하던 컴퓨터를 켜보았습니다. 그전까지 컴퓨터와 마주한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 괴로운 심정으로 무심코 마우스를 굴리는데 화면이 딱 멈추었습니다. 그 화면에는 온라인에서 전혀 관심이 없던 ‘대학 교수 모집 광고’가 선명하게 들어왔습니다. 오하이오주 라이트주립대학의 교수 모집 광고였습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자격요건이었습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자로서 현악4중주단 활동을 했으며 지휘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현악4중주 연주 때문에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죠? 신시내티 대학에서도 4년 동안 세계적인 연주자들로부터 사사를 받았습니다. 굉장히 오랫동안 현악4중주 활동을 펼친 것입니다. 정확히 제가 해왔던 활동과 일치하는 경력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단 한 번도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고나 어느 대학에 원서를 제출해 본 적도 없었는데 절박하니까 저도 모르게 이 광고에 이끌려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심사기간은 무려 7개월이 걸렸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1명을 선발하는데 83명이 지원했고 무려 3차례에 걸쳐 심사할 때마다 걸러내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사실 마지막까지 큰 기대는 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저만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마지막 라운드에 3명이 선발되었습니다. 파이널리스트 3명에 선정되어 비행기를 타고 심사 인터뷰를 받으러 갔습니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바이올린 연주’와 ‘현악4중주 연주’와 ‘지휘’ 등 이 세 가지 자격이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발동했습니다. 결과는 아시다시피입니다.

미국 사회는 굉장히 공평한 사회입니다. 미국 내에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누가 이 대학 좋다고 소개해준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인종차별이 있다지만 동양인이자 장애인인 제가 83명을 뚫고 홀로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국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미국화할 마음이 전혀 없는 한국인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름을 미국식으로 개명할 것을 건의했지만 저는 여전히 차인홍, ‘인홍 차’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합니다. 미국 교수로 임용된 지 24년이 흘렀지만, 시민권을 취득하지 않고 있습니다. 굳이 시민권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고 영주권을 갖고 있기에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미국은 장애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존경하는 분위기입니다.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인정하는 사회입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면서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좀 부족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그 점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살아온 나날들, 나에게는 꿈이 없었다

공평한 것은 미국이라는 사회뿐만이 아닙니다. 제가 교수가 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 또한 참 공평하다는 생각입니다. 어느 책에선가 읽은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의 인생은 행복하고 불행하고, 어둡고 밝고, 기쁘고 슬프고.. 이런 일들을 반반씩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행복 90% 불행 10%라든가, 불행 90% 행복 10%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반씩입니다. 제 인생이 딱 그렇습니다.

40대까지 저의 인생은 공부하는 삶이었지만 치과 기공을 해야 할 만큼 막막했고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교수가 되면서부터 제 인생은 끝없는 동굴이 아니라 끝을 통과하는 터널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많은 분들께 초대받고 대우받고 인정받는 등 정말 좋은 일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이런 삶의 원리를 알고 있기에 교수가 되었다고 우쭐해하거나 목에 힘을 주는 등 교만한 마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저 어느 순간도 감사한 마음을 잊은 적이 없으며 저에게 주어진 일들을 잘 감당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받아 지휘도 했고 최근에는 중국의 교장 선생님들이 저를 초청해 주시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전교생이 9명밖에 안 되는 시골 중학교에도 초대받아 갑니다. 사례비 또는 부담될 만큼 많이 지급하는 곳도 있지만 어떤 수고비도 받지 못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해도 한 번도 거절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빛을 받았지만 그 빛을 갚지 못했는데 그 빛에 대해 보답하는 길은 초심을 잃지 않고 저를 원하는 것에 사랑을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중학생이 제 강연을 들었다면서 페이스북 메시지로 연락을 해왔습니다. 사실 학교에서 강연하면 학생들이 집중하지 못하고 소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실망스럽기도 하지요. 이 학생들이 무슨 관심이 있을까 싶어 찜찜하기도 한데 언젠가 한 학생이 앞으로 살아갈 때 어려운 일들이 많을텐데 그때마다 차 교수님을 생각하면서 이겨내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스러운지 모릅니다. 이 학생이 인시 치레로 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학생들이 나오기 때문에 작은 강연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지난해 EBS 수요 명사 초대석에 출연했을 때 말미에 사회자가 제 꿈이 무엇인지 묻더군요. 잠시 멈칫했습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꿈이 없다고 답하자 사회자도 PD도 당황해했고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제가 침묵을 깨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다 듣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꿈꾸고 목표를 정했다고 그 길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꿈을 꾸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꿈을 꿨다면 그 꿈은 너무도 초라한 꿈밖에 꿀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 꿈을 꾸지 않았는데도 지금 여기까지 왔습니다.”

만약 그 방송이 기독교방송이었다면 저는 분명 하나님께 성령님께 떠밀려서 흘러왔을 뿐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꿈을 않습니다. 대신 기대는 갖습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떤 일들이 제 앞에 펼쳐질지 늘 기대하고 있습니다. 방송이 끝난 후 유튜브에 그 방송이 업로드되었는데 타이틀이 ‘차인홍 교수 나는 꿈은 없습니다.’더군요. 나중에 담당 PD가 전화로 ‘이제까지 제일 멋있는 꿈의 이야기였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인생은 분명 행복과 불행이 반반씩

저는 대통령 취임식 때 지휘하는 꿈을 꾼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 행정안전부에서 전화가 왔고 취임식 지휘 초청을 받아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 누구도 모릅니다. 어떻게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받았던 무수한 상처와 무시와 거절 등을 커버하고도 남을 만큼 화려한 무대에 서 왔습니다. 집밖에, 대문 밖에도 나가지 못했던 것이 청년 22살까지의 제 삶이었습니다. 택시는 자유롭게 타지 못하고 수백번씩 거절당하지만, 비행기는 얼마나 많이 타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비행기를 타면 항공기 사무장이 달려와 제일 먼저 저에게 인사합니다. ‘차인영 교수님 잘 모시겠습니다.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수백 명의 탑승객 중 유일하게 저에게만 인사합니다.
뒤돌아보면 세상은 각박하지 않습니다. 음악이라는 것 외에 어떤 꿈도 꿀 수 없는 휠체어 탄 초라한 소년이 이 자리까지 오기까지 수많은 분들의 사랑과 조력이 있었습니다. 만약 부모님의 뒷바라지가 엄청나고 어떤 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잘난 사람이었다면 제가 겸손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감사함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저에게는 장애와 가난 모든 것들이 약점이었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생은 불행과 행복이 반반인 것처럼 그 약점이 바로 강점이 될 수 있었습니다. 자금 성공하신 분들이라면 분명 이전에 많은 고통과 고난의 시간들을 견디셨을 겁니다.

만약에 지금까지 아무 부족함 없이 승승장구하셨다면 앞으로는 조심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것은 삶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앞으로 인생을 즐기고자 합니다. 그동안 고생한 것을 보상받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멋지게 살고 싶습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 이야기에 공감하신다면 저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도울 수 있는 환경 여건이라면 기꺼이 도와주어 그 사람의 인생을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과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제가 여기까지 잘 왔으니까요.

아내와의 만남은 운명

저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신 사람들이 참 많았지만, 그중에 아내도 있습니다. 22살 미국으로 유학 갈 때까지 저 역시 사춘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단 한 번도 내가 누구를 좋아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대전에 있는 한 여고생이 있었는데 저희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저는 스스로 너무 초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았는데 당시 고 3학생이던 한 여학생이 저를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그 여학생은 저희가 기숙하던 숙소에도 들락거렸는데 그때마다 연탄광에서 하루 종일 연습하는 제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친구를 통해 그 여학생이 저를 좋아한다고 전했을 때 저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제 마음은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더 이상 후원이 끊기고 정립회관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그 여학생과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학생은 이미 서울의 모 대학에 재학중이었습니다. 저는 아는 지인 정도로만 생각해 서울에 왔다는 것을 알렸는데 한달음에 달려와서 연주에 필요한 악보를 챙겨주거나 줄이 끊어지면 구입해주고 복사, 제본해주는 등 잔심부름을 지속하는 과정에서 저 역시 마음의 문이 열리고 정을 새록새록 쌓였습니다. 그 여학생이 졸업할 즈음 저는 유학이 결정되면서 헤어져야 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한번 가면 언제 올지 모르는 유학길이고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길이기에 ‘이별’만이 답이라고 생각해 헤어지기로 결심했습니다. 더구나 아내가 미인이기 때문에 남학생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저 때문에 좋은 남자 만날 기회를 상실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때 정립회관 관장님이 저희 둘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출국 직전에 ‘그냥 갈 거냐, 부모님께 허락을 받지 못했어도 언약식을 치르는 게 어떠냐’고 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모님 없이 급하게 언약식을 치렀는데 이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친구와 동료 앞에서 언약을 하고 곧바로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저의 의지가 아니라 사실 떠밀리다시피 하면서 비행기에 오른 후 2년 동안 한국에 오지 못했습니다. 아내와는 편지로만 왕래했는데 아내가 더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잠시 서울 다녀온다고 하고선 핸드백 하나 들고 미국으로 와버렸습니다. 장인 장모 가슴에 대못을 박은,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인연을 끊었던 가족과의 재회

양말 하나 옷 하나 제대로 챙기지 않고 날아온 아내를 저는 신시내티 대학의 기혼자들이 살 수 있는 기숙사 입주를 요청해 그냥 같이 살았습니다. 미국에까지 쫓아온 아내와 따로 살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동료 유학생들이 주선해 교회에서 눈물의 결혼식을 올려주었습니다. 다행히 한인들이 많이 와서 정말 큰 축복을 빌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주는 만큼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흑인들의 총성이 끊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야 했고 어떻게든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어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으니까요. 인연을 끊은 집에서는 한 푼도 도움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학생이라지만 집사람은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강도를 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돈을 벌어야 했기에 누구보다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인기가 많았던 아내가 모든 걸 포기하고 저를 선택했는데 끝까지 저를 도와주었으니 제가 얼마나 큰 은혜를 입었는지 아시겠죠? 그때부터 아내와 지금까지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서울 간다던 딸이 미국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딸과 절교하고 영영 인연을 끊기로 한 것입니다.
결혼 후 장인 장모님과 식사 한번 해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던 해가 2000년도인데 그때 큰 아이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의 한 기자가 장애인인 한인이 교수가 되었다는 박스기사를 실었는데 그 기사를 한국의 일간지들이 옮기면서 장인어른이 그 기사를 읽었던 모양입니다. 아내는 그래도 장모님과 연락하고 있었는데 장인어른이 그 전화번호를 알고 전화를 했던 것이죠. 그렇게 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가족들이 마침내 LA까지 오게 되었는데 공항에서 감동의 포옹을 했습니다. 기적이라고 해야겠죠. 저 역시 얼마나 감사하고 감동했겠습니까. 그 이후 누구보다 최선을 다해 효도해 드렸습니다. 저는 저희 친아버지와 외식 한 번 해보지 못했습니다. 아버지 몸이 약하신데다 제가 일찍 재활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와 그 못다 한 사랑을 장인어른께 쏟아부었습니다. 천국에 가실 때까지 여행도 많이 하면서 딸과 결혼한 것을 두고 섭섭해했던 것을 다 풀고 돌아가셨습니다.
지나고 보면 제 인생의 협력자는 한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아내까지도 협력자였습니다. 아내 역시 제가 먼저 내 인생의 반려자라며 손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내가 나 됨은 조력자와 협력자들 덕분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그분이 바로 당신의 조력자입니다. 결코 여러분 홀로 성공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그 사람을 사랑으로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글 깁종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