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엄정행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경남 양산시에 있는 엄정행 뮤지엄을 찾았다. 1시간 정도만 인터뷰하려고 찾았다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3시간 30분까지 이어졌다.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야말로 시간이 사막의 물처럼 쉬이 증발했다.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방송용 가곡 음반 한 장 없던 시절, 엄 선생님은 서라벌레코드사를 찾아가 우리 가곡집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문화공보부 심의필이 있어야 레코드 출반을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같은 전문가도 작곡가, 작사가를 찾지 못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인데 일개 무명 성악가로는 택도 없다는 비웃음... 엄 선생님은 그 비웃음을 뒤로 하고 3개월간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우리 가곡 작곡가와 작사자를 찾아내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내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뛰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거의 모든 이들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제 마지막 한 곡만 남았다. 아무리 찾아도 뱃노래의 작사가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작곡가 조두남 선생님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작사가 ‘석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선생님, 저 엄정행입니다. 선생님의 ‘뱃노래’ 작사자가 누구인지 찾다 찾다 전화를 했습니다.”
“아, 이 사람아. 석호는 조두남 호야, 바로 나라고!”
“네? 이런... 아니 그냥 조두남으로 하지 않고 왜 석호라고 하셔서 헷갈리게 하세요.”
“껄껄껄, 작곡가가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좀 그렇잖나?”
작곡가와 작사가 등 저작권 소유자들로부터 모든 허락을 받아낸 그는 일일이 사인받은 목록을 들고 서라벌레코사드를 다시 찾았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우리 가곡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장되니까요. 자, 작업합시다.”
이제는 성악가들을 찾아야 할 차례다. 기라성 같은 성악가들을 모두 섭외해서 힘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안 될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정도 있었겠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긴장감’ 때문이다. 난생처음 녹음용 마이크 앞에 서자 평소에 잘 나던 목소리들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어떻게 해 그럴 때는 내가 대신 불러야지. 그래서 제 노래만 30여 곡이에요. 내가 잘 부른다고 나댄 게 아니라니까요...”
엄정행 선생님의 가곡사에 따른 비사(祕史)가 어디 한두 가지일까? 그런데 엄 선생님의 이야기가 재미있던 것은 성악가로 전국 TV에 알려지기 전에 겪었던 고생담이다.
초창기 성악가로 밥 벌어먹기 힘드니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서너 가지는 된다. 코스모스악기사 회장님과도 인연이 있어 신세계백화점에서 악기사를 운영했다. 직원을 예닐곱 거느린 양장점도 하고 이화여대 앞에서 120석 가까운 커피샵도 차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음악 선생님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음악이 생활화된 분이시라, 사업 체질에는 맞지 않을 텐데 어떡하겠는가?
그런데 참 인생은 얄궂기도 해요. 악기사는 구경만 하는 고객이 많았고, 양장점은 경영난에 아주 힘들었어요. 커피숍은 오픈하자마자 매일 시위 때문에 아예 장사가 안되었고, 두 번째 차렸을 때는 주방장들의 좀도둑 때문에 접었습니다. 사람이 돈을 쫓아갈 수는 없더라고요. 돈이 사람을 쫓아와야 돈을 번다는 진리를 그때 깨달았죠.”
왜 유학을 떠나자마자 돌아왔는지, 왜 한국인은 한국인에 맞는 가곡을 불러야 하는지, 시를 공부하지 않고 가곡을 부르는 것은 노래 흉내만 내는 일이라는 등, 음악가의 인생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금쪽같은 어록도 풀어주셨다. 엄정행 선생님의 이야기는 한 톨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재미있으면서 진지하고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이 참 많았다. 이번 호는 지난 호에 이은 2편으로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넘친다.
도리를 중요시하다
엄정행 교수는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라 트라비아타’만 15회 이상 출연했을 정도로 오페라에 만이 출연했다. 그런 만큼 오페라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다. 신세계백화점의 악기사를 한창 운영했을 때 김자경오페라단측이 조연을 부탁했다.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수락해서 열심히 노래 불렀다. 그런데 당시 주역을 맡았던 성악가가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오페라단 관계자들의 빈축을 사곤 했다. 엄 교수는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목소리가 주연급 이상이라는 호평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아예 알프레도를 맡으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엄 교수는 주저 없이 거절했다. 주역을 맡으면 연습할 시간이 많이 소요될 텐데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페라단 측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좋은 역할을 주는데도 왜 안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푸치니 ‘나비부인’의 고로 역을 맡았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연기도 잘하는 데다 빠른 박자의 노래를 물 흐르듯 소화해 내자 ‘핑커톤’ 역할까지 계속 요구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엄정행 교수는 도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투란도트의 ‘핑, 퐁, 팡’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다음의 공연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배역인데 당시 윤치호, 최성태 등과 함께 참으로 열심히 노래하고 연기했다. 열정을 다하는 모습에 홍연택 선생님이 ‘저 친구들은 이태리에 팔아먹자’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홍 선생님의 칭찬과는 달리 테너 엄정행을 ‘나비부인’에서 배역을 거절한 걸 두고 오페라단 측은 여전히 고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엄 교수의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주역 성악가가 조금 부족해도 그 자리를 내가 대신 하는 것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일로 오페라단 측은 저를 다시는 무대에 세우지 않겠다고 했어요. 제가 뭐라고 답했겠어요. 저는 저대로 ‘어디서든 오페라 주역을 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태도가 당시로서는 당돌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엄정행 교수는 이후 국립극장에서 소프라노 김희정, 이훈 등과 함께 출연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오페라 무대의 단골 주역이 됨은 물론이다. 엄정행 교수는 이렇듯 ‘도리’를 중요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당돌하게 보여도 실제 엄 교수의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한 예로 스승님을 본인이 재직했던 청주여자사범대학에 추천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스승이 경희대를 그만두고 특별히 할 일이 없자, 청주여자사범대학교로 모신 것이다. 그러자 제자가 스승을 그런 자리에 모셨다고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엄 교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해 결정해 나갔다.

오페라 춘희 소프라노 박순복과 함께

가곡의밤
왼쪽 박수길 엄정행 박인수 이규도 김태현 윤치호
공연과 관련한 에피소드
엄정행 교수는 전국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지방공연을 가장 많이 펼친 성악가 중 한 명이다. 본인의 단독 공연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물론 임원식, 김남윤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함께 울산, 부산 등 먼 곳까지 순회공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분들과 공연하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당시 경희대에는 오케스트라 악기가 부족했다. 제대로 악기를 갖춰야겠다고 마음먹은 엄 교수는 악기 구입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동문들을 찾아 지방공연을 강행했다. 울산 공연도 그중 하나였다. 울산은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연주단 전체가 묵을 수 있는 여관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있다 해도 한방에 두 사람씩 자야 하는 2인실뿐이었다.
부족한 숙소를 채우기 위해 공연을 마치면 동문들의 집에서 민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주 뒤풀이가 끝나자 거나하게 취한 단원들은 사보타지(sabotage)를 일으켰다. 동문들의 주택에서 민박하지 않겠다며 무조건 여관을 찾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엄 교수는 울산 외곽까지 샅샅이 뒤져 진을 다 배고서야 여관방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악기 살 돈을 마련했지만, 막상 악기 구입을 요청하자 학교 측은 예산이 없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었다. 그동안 지방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이 있으니 당연히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했지만 돈이 없다는 말에 화가 치민 엄 교수는 강하게 반발했던 일도 있었다.
악기 구입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목련화’는 칸타타 중에 삽입된 곡으로 그 칸타타 스코어는 100페이지 이상의 오케스트라 악보로 돼 있었다. 반주는 풀 오케스트라가 해야 한다. 그런데 연습 중에 어이없는 악기를 발견했다. 챔버용 팀파니였다. 누가 봐도 풀 오케스트라용 팀파니가 있어야 하는데, 기껏 구입했다는 악기는 오케스트라용이 아니라 챔버용이었던 것이다. 엄 교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악기사 영업사원에게 그 연휴를 물어보았다.
“분명 풀오케스트라용을 구입하라고 예산을 지원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물어보았죠. 예상하던 대로 그 돈이 어디론가 새었던 것입니다. 그 즉시 학교 총무과에 가서 ‘어떻게 악기도 보지 않고 돈을 지급했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학교가 이래도 되겠냐고 다그쳤죠. 그러니 다른 교수들이 보기에는 내가 미운털이었겠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래도 마,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일했어요.”
개런티로 인한 갈등과 에피소드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공연도 지방공연을 참 많이 다녔다. 전남대 강당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할 때는 원 캐스팅으로 엄정행 교수 혼자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오페라단장은 공연 전까지 출연료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공연 시작 직전에서야 ‘서울에 돌아가서 주겠다’고 미뤘다. 엄 교수는 이번 기회에 출연료를 뒤로 미루거나 떼먹은 관행을 고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출연료를 주지 않으면 공연을 못 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이미 분장을 마친 상태였지만 콜드크림을 톡톡 찍어서 한쪽 눈 분장을 쓰윽 닦아버렸지. 공연 40분 전이에요. 그러고 한참 후에 어디서 돈을 구해왔는지 헐레벌떡 달려와서 돈을 쥐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쪽 눈 분장을 한 뒤 공연을 겨우 펼친 적도 있어요. 덕분에 제시간에 공연하지 못하고 40분이 지나고서야 개막했는데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네요.”
그러나 그 일이 쿨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단장은 공연이 끝난 후 서울로 상경할 때 다른 가수는 본인의 차에 태웠지만 미운털 박힌 엄정행 교수는 터벅터벅 기차를 타고 올라 와야 했다.
부산에서의 공연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데 부산의 모 방송국 프로듀서로 오페라도 자주 공연했던 친구가 있었다. 속초에서 KBS ‘가곡의 밤’ 공연을 끝내고 이튿날 ‘라 트라비아타’ 부산 공연을 위해 출발했다. 당시 연출은 오현명 선생님이었다. 오현명 선생님과 작업을 많이 했던 터라 동선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 어떤 공연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포니를 몰고 울진을 지나던 중 갑자기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는 바람에 울진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버스 종점 부근의 여관방 하나를 겨우 찾아 하룻밤 눈을 붙였다.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결국 이튿날 낮 공연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지쳐있던 터라 같은 배역의 성악가에게 대타를 부탁했다. 문제의 그 부산 모 방송국 프로듀서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가기만 하면 소리가 뒤집어지는 등 민망한 일이 생기자 오현명 선생님은 객석에서 쉬고 있는 나를 무조건 무대로 올라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분장도 안 한 상태에서 무대로 뛰어올랐는데 그 모습을 본 객석은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되었죠.”
이런저런 고생 끝에 공연을 무사히 마쳤지만 이 공연 역시 출연료를 주지 않았다. 엄 교수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오페라 공연에 대해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나운영지휘 메시아
소프라노채리숙 알토김청자 테너엄정행 바리톤윤치호
무대 매너에 대한 가르침
엄정행 교수는 성악가가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일종의 사기라고 말한다. 물론 돈으로 사기를 치는 일은 아니지만 티켓을 구입해서 오는 분들에게 노래를 대충 부르는 행위는 사기와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날 주어진 노래가 뒤집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 물론 노래만 열심히 부르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무대 매너도 아예 몸에 배도록 연습할 것을 주문한다.
“무대에 오를 때는 기본적으로 매너가 있어야 해요. 무대에서 인사하는 법, 내가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지 등을 무대에 관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 상수에서 나갈 때 별생각 없이 아무 발이나 툭 내밀면 안 됩니다. 오른발을 먼저 내디뎌야 해요. 그래야 객석에서 볼 때 내 몸이 청중들에게 보이는 법입니다. 왼발을 먼저 앞으로 뻗으면 청중들에게 등을 보이는 꼴이 되죠. 어쨌든 출발은 무대를 보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객석을 등지고 나가면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데도,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면 대부분 성악가들이 바닥에 정해진 자기 자리만 바라보고 입장한다. 객석에서는 박수를 치는데 정작 본인은 객석을 바라보지 않는 꼴이 되기 때문에 중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나아가 청중은 성악가를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보면서 ‘저 분은 노래에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고 오해할 수 있다. 클래식 문화가 생활화된 외국의 성악가들이야 이런 매너가 습관이겠지만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연출자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한다.
“인사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발레의 기본자세처럼 다리를 붙이고 엉덩이만 빼면 자연스러운 인사가 돼요. 무대 위에 서면 객석이 보이지 않는데 그럴수록 불안한 자세를 보여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래를 부를 때 제스처 역시 신경을 써야 하고요. 손가락 세 개를 붙여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면 좋습니다.”
또 노래가 끝난 뒤에는 객석이 노래의 여운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마지막 자세를 30초 가량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아니스트를 소개하고 인사시킬 때도 피아니스트를 바라보고 인사할 것을 요구할 게 아니라 서로 보지 않고도 고개만 살짝 흔들고 같이 인사하면 좋다. 서로 믿음을 갖고 무대에 서야 한다. 인사가 끝난 후에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퇴장할 때도 몸이 객석을 향하도록 무대 바깥쪽 발을 먼저 떼어야 객석과의 호흡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많은 성악가들이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퇴장시 걸음걸이와 노래할 때의 자신감 있는 제스처, 다른 연주자와 인사하는 법 등 모든 것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따뜻한 아랫목에 있다가도 부모님이 오시면 윗목으로 옮겨야 하고, 부모님이 밥뚜껑을 열어야 자녀들이 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동양적 장유유서(長幼有序)가 DNA에 녹아있기 때문에 서양식 사고방식과 매너를 몸에 익히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차피 서양음악을 할라치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게 엄 교수의 조언이다.
성악은 곧 호흡
엄정행 교수는 바이올린의 활은 인간에게 무엇인지 대뜸 묻더니 ‘활은 곧 호흡’이라고 강조한다. 바이올린의 브릿지는 얼굴의 광대뼈, 잇몸뼈, 입천장뼈, 뇌를 받치고 있는 뼈 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뼈들이 진동하면서 소리가 커진다고 말한다. 소리를 내는 매개체로서 바이올린의 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곧 ‘호흡’이라는 것.
“호흡을 해야 노래가 되는데, 여기서 호흡이란 밖에 있는 공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을 열면 호흡은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진짜 노래하는 사람은 입만 크게 열면 호흡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지요. 성악가라면 그런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바이올린의 브릿지가 넘어지면 소리가 나지 않는데 그 브릿지가 바로 목젖 부위라고 할 수 있다. 옥타브를 올리려면 목젖 부위를 수축하면 되는데 이때 활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것처럼, 호흡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결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성악가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호흡이다.
세상에 언어가 다양한 것은 발음이 혀와 구강구조가 인종마다 사람마다 다른 이유이다. 성대는 색깔이 없지만 울림은 색깔이 보이는 법이다. 성대를 통해 혀와 구강에 의해 발음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강구조와 혀의 차이로 인해 언어가 나라마다 그렇게 많은 것이다. 원래 혀에 힘을 주면 발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미국 태생의 성악가들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미국인들은 발음 자체가 혀에 힘을 주어 굴리게끔 돼 있는 까닭이다. 이는 독일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태리인들과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혀가 잘 펴지는 발음이기 때문에 소리가 투명하다. 노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민족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성악가들이 소리에만 인생을 걸기 때문에 무대에서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은 잘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특별히 지도해 주는 스승들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뒤늦게야 더 즐겁고 감동적으로 노래 부르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이런 경험은 이태리 성악가들이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월간리뷰는 엄정행 교수에게 본지가 주최하는 포럼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그간 노래인생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들려줄 것을 건의했다.

독창회후 사인회

음악평론가 이상만과
가곡은 곧 시, 시를 이해하고 노래해야
요즘 유튜브 등을 보면 가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엄 교수는 가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면서도 방송이나 실생활에서 자주 들을 수 없는 데에는 성악가들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노래가사가 마음속 깊이 들리지 않으면 듣는 이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사가 들리지 않으니 감동의 파도를 일으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엄 교수는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집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한다. 시낭송만 해도 감동하면 앙코르를 외치는데 하물며 선율이 있는 시노래를 잘 부르면 그 누가 가만히 듣기만 하겠는가.
“노래하는 사람들은 ‘시’보다 더 감동적인 ‘음률’을 구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 내용보다 소리에만 치중할 때 감동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시 내용을 내 것으로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노래를 불러야 해요.”
특히 성악가는 객석과 협조하지 않으면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 ‘아 목동아’를 그냥 부른다고 청중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성악가들이 우리 곡의 가사에 담긴 감동을 객석에 전달해 줘야 하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청중은 ‘무관심’으로 끝난다. 멜로디만 따라서 부르는 게 아니라 가사를 대여섯 번 이상 깊이 음미하고 노래를 불어야 청중의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 ‘내 나이 80이 될 때까지 55년 동안 성악가의 길을 걸으면서’ 처절하게 느낀 점이라고 고백하는 엄 교수다.
가곡을 작곡하는 작곡자들도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결코 마음 편안하게 살아온 민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가곡에는 그런 슬픔이 배어있지만 요즘 작곡가들은 그런 감정이 메말라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왜 지금도 ‘가고파’와 같은 곡이 사랑받고 있는가, 그 곡들에는 우리 민족의 정한과 녹아있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작곡가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은 감성을 알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아이들이 가곡을 많이 부르지만, 외국에서 서양 노래만 배우면 우리 감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귀국해도 가곡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아요. 그동안 엄정행콩쿠르에서 대상 받은 친구들이 17명인데 다들 대가처럼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도 유학을 다녀오면 우리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는 거예요.”
외국 것만 부르다가 나이 들어서 다시 가곡을 부르려면 이미 늦은 나이가 돼버린다. 엄정행 교수는 그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번 호는 여기까지이다. 다음 호에는 왜 직접 본인의 이름을 걸고 콩쿠르를 개최했는지를 설명하고, ‘소리에 인생을 걸지 말고 왜 노래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지’ 등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내용을 정리할 계획이다.
한숙현 (월간리뷰 이사, 음악감독)
존경하는 엄정행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경남 양산시에 있는 엄정행 뮤지엄을 찾았다. 1시간 정도만 인터뷰하려고 찾았다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 3시간 30분까지 이어졌다.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그야말로 시간이 사막의 물처럼 쉬이 증발했다.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방송용 가곡 음반 한 장 없던 시절, 엄 선생님은 서라벌레코드사를 찾아가 우리 가곡집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그 당시에는 문화공보부 심의필이 있어야 레코드 출반을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 같은 전문가도 작곡가, 작사가를 찾지 못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인데 일개 무명 성악가로는 택도 없다는 비웃음... 엄 선생님은 그 비웃음을 뒤로 하고 3개월간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우리 가곡 작곡가와 작사자를 찾아내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내겠다는 단단한 각오로 뛰었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거의 모든 이들의 허락을 받아냈다. 이제 마지막 한 곡만 남았다. 아무리 찾아도 뱃노래의 작사가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작곡가 조두남 선생님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작사가 ‘석호’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선생님, 저 엄정행입니다. 선생님의 ‘뱃노래’ 작사자가 누구인지 찾다 찾다 전화를 했습니다.”
“아, 이 사람아. 석호는 조두남 호야, 바로 나라고!”
“네? 이런... 아니 그냥 조두남으로 하지 않고 왜 석호라고 하셔서 헷갈리게 하세요.”
“껄껄껄, 작곡가가 북 치고 장구 치는 건 좀 그렇잖나?”
작곡가와 작사가 등 저작권 소유자들로부터 모든 허락을 받아낸 그는 일일이 사인받은 목록을 들고 서라벌레코사드를 다시 찾았다. 모두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떻게 이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녔어요?”
“우리 가곡을 이렇게 하지 않으면 영원히 사장되니까요. 자, 작업합시다.”
이제는 성악가들을 찾아야 할 차례다. 기라성 같은 성악가들을 모두 섭외해서 힘든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게 뜻대로 안 될 일이었다. 이런저런 사정도 있었겠지만 가장 어려웠던 점은 ‘긴장감’ 때문이다. 난생처음 녹음용 마이크 앞에 서자 평소에 잘 나던 목소리들도 제 컨디션을 찾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다.
“어떻게 해 그럴 때는 내가 대신 불러야지. 그래서 제 노래만 30여 곡이에요. 내가 잘 부른다고 나댄 게 아니라니까요...”
엄정행 선생님의 가곡사에 따른 비사(祕史)가 어디 한두 가지일까? 그런데 엄 선생님의 이야기가 재미있던 것은 성악가로 전국 TV에 알려지기 전에 겪었던 고생담이다.
초창기 성악가로 밥 벌어먹기 힘드니 뭐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사업이 서너 가지는 된다. 코스모스악기사 회장님과도 인연이 있어 신세계백화점에서 악기사를 운영했다. 직원을 예닐곱 거느린 양장점도 하고 이화여대 앞에서 120석 가까운 커피샵도 차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음악 선생님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음악이 생활화된 분이시라, 사업 체질에는 맞지 않을 텐데 어떡하겠는가?
그런데 참 인생은 얄궂기도 해요. 악기사는 구경만 하는 고객이 많았고, 양장점은 경영난에 아주 힘들었어요. 커피숍은 오픈하자마자 매일 시위 때문에 아예 장사가 안되었고, 두 번째 차렸을 때는 주방장들의 좀도둑 때문에 접었습니다. 사람이 돈을 쫓아갈 수는 없더라고요. 돈이 사람을 쫓아와야 돈을 번다는 진리를 그때 깨달았죠.”
왜 유학을 떠나자마자 돌아왔는지, 왜 한국인은 한국인에 맞는 가곡을 불러야 하는지, 시를 공부하지 않고 가곡을 부르는 것은 노래 흉내만 내는 일이라는 등, 음악가의 인생에 눈이 번쩍 뜨이는 금쪽같은 어록도 풀어주셨다. 엄정행 선생님의 이야기는 한 톨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재미있으면서 진지하고 음악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내용이 참 많았다. 이번 호는 지난 호에 이은 2편으로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넘친다.
도리를 중요시하다
엄정행 교수는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라 트라비아타’만 15회 이상 출연했을 정도로 오페라에 만이 출연했다. 그런 만큼 오페라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다. 신세계백화점의 악기사를 한창 운영했을 때 김자경오페라단측이 조연을 부탁했다.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 수락해서 열심히 노래 불렀다. 그런데 당시 주역을 맡았던 성악가가 박자를 제대로 맞추지 못해 오페라단 관계자들의 빈축을 사곤 했다. 엄 교수는 오페라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목소리가 주연급 이상이라는 호평이 이어지는가 싶더니, 아예 알프레도를 맡으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엄 교수는 주저 없이 거절했다. 주역을 맡으면 연습할 시간이 많이 소요될 텐데 사업을 하는 입장에서는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페라단 측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좋은 역할을 주는데도 왜 안 하느냐는 반응이었다. 푸치니 ‘나비부인’의 고로 역을 맡았을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연기도 잘하는 데다 빠른 박자의 노래를 물 흐르듯 소화해 내자 ‘핑커톤’ 역할까지 계속 요구했지만 끝내 거절했다. 엄정행 교수는 도리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투란도트의 ‘핑, 퐁, 팡’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그다음의 공연이었다. 굉장히 어려운 배역인데 당시 윤치호, 최성태 등과 함께 참으로 열심히 노래하고 연기했다. 열정을 다하는 모습에 홍연택 선생님이 ‘저 친구들은 이태리에 팔아먹자’고 농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홍 선생님의 칭찬과는 달리 테너 엄정행을 ‘나비부인’에서 배역을 거절한 걸 두고 오페라단 측은 여전히 고까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엄 교수의 생각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주역 성악가가 조금 부족해도 그 자리를 내가 대신 하는 것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일로 오페라단 측은 저를 다시는 무대에 세우지 않겠다고 했어요. 제가 뭐라고 답했겠어요. 저는 저대로 ‘어디서든 오페라 주역을 할 테니 지켜봐 주세요’,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그런 태도가 당시로서는 당돌해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엄정행 교수는 이후 국립극장에서 소프라노 김희정, 이훈 등과 함께 출연한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을 맡아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오페라 무대의 단골 주역이 됨은 물론이다. 엄정행 교수는 이렇듯 ‘도리’를 중요시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금 당돌하게 보여도 실제 엄 교수의 행동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그 한 예로 스승님을 본인이 재직했던 청주여자사범대학에 추천한 일을 꼽을 수 있다. 스승이 경희대를 그만두고 특별히 할 일이 없자, 청주여자사범대학교로 모신 것이다. 그러자 제자가 스승을 그런 자리에 모셨다고 비난이 빗발쳤다. 그러나 엄 교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잘 판단해 결정해 나갔다.
왼쪽 박수길 엄정행 박인수 이규도 김태현 윤치호
공연과 관련한 에피소드
엄정행 교수는 전국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지방공연을 가장 많이 펼친 성악가 중 한 명이다. 본인의 단독 공연뿐만 아니라 학생들을 물론 임원식, 김남윤 등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과 함께 울산, 부산 등 먼 곳까지 순회공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분들과 공연하면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다. 당시 경희대에는 오케스트라 악기가 부족했다. 제대로 악기를 갖춰야겠다고 마음먹은 엄 교수는 악기 구입 비용을 충원하기 위해 동문들을 찾아 지방공연을 강행했다. 울산 공연도 그중 하나였다. 울산은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에 연주단 전체가 묵을 수 있는 여관은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있다 해도 한방에 두 사람씩 자야 하는 2인실뿐이었다.
부족한 숙소를 채우기 위해 공연을 마치면 동문들의 집에서 민박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러나 연주 뒤풀이가 끝나자 거나하게 취한 단원들은 사보타지(sabotage)를 일으켰다. 동문들의 주택에서 민박하지 않겠다며 무조건 여관을 찾아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엄 교수는 울산 외곽까지 샅샅이 뒤져 진을 다 배고서야 여관방에 집어넣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악기 살 돈을 마련했지만, 막상 악기 구입을 요청하자 학교 측은 예산이 없다며 거절했던 일이 있었다. 그동안 지방 공연에서 벌어들인 돈이 있으니 당연히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했지만 돈이 없다는 말에 화가 치민 엄 교수는 강하게 반발했던 일도 있었다.
악기 구입에 관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목련화’는 칸타타 중에 삽입된 곡으로 그 칸타타 스코어는 100페이지 이상의 오케스트라 악보로 돼 있었다. 반주는 풀 오케스트라가 해야 한다. 그런데 연습 중에 어이없는 악기를 발견했다. 챔버용 팀파니였다. 누가 봐도 풀 오케스트라용 팀파니가 있어야 하는데, 기껏 구입했다는 악기는 오케스트라용이 아니라 챔버용이었던 것이다. 엄 교수는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악기사 영업사원에게 그 연휴를 물어보았다.
“분명 풀오케스트라용을 구입하라고 예산을 지원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물어보았죠. 예상하던 대로 그 돈이 어디론가 새었던 것입니다. 그 즉시 학교 총무과에 가서 ‘어떻게 악기도 보지 않고 돈을 지급했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학교가 이래도 되겠냐고 다그쳤죠. 그러니 다른 교수들이 보기에는 내가 미운털이었겠죠.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래도 마,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원칙대로 일했어요.”
개런티로 인한 갈등과 에피소드
가곡뿐만 아니라 오페라 공연도 지방공연을 참 많이 다녔다. 전남대 강당에서 ‘라 트라비아타’를 공연할 때는 원 캐스팅으로 엄정행 교수 혼자 주연을 맡았다. 그런데 당시 오페라단장은 공연 전까지 출연료를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선 공연 시작 직전에서야 ‘서울에 돌아가서 주겠다’고 미뤘다. 엄 교수는 이번 기회에 출연료를 뒤로 미루거나 떼먹은 관행을 고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출연료를 주지 않으면 공연을 못 하겠다고 선언해 버렸어요. 이미 분장을 마친 상태였지만 콜드크림을 톡톡 찍어서 한쪽 눈 분장을 쓰윽 닦아버렸지. 공연 40분 전이에요. 그러고 한참 후에 어디서 돈을 구해왔는지 헐레벌떡 달려와서 돈을 쥐어주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한쪽 눈 분장을 한 뒤 공연을 겨우 펼친 적도 있어요. 덕분에 제시간에 공연하지 못하고 40분이 지나고서야 개막했는데 아스라한 추억이 되었네요.”
그러나 그 일이 쿨하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단장은 공연이 끝난 후 서울로 상경할 때 다른 가수는 본인의 차에 태웠지만 미운털 박힌 엄정행 교수는 터벅터벅 기차를 타고 올라 와야 했다.
부산에서의 공연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서울대 성악과 출신인데 부산의 모 방송국 프로듀서로 오페라도 자주 공연했던 친구가 있었다. 속초에서 KBS ‘가곡의 밤’ 공연을 끝내고 이튿날 ‘라 트라비아타’ 부산 공연을 위해 출발했다. 당시 연출은 오현명 선생님이었다. 오현명 선생님과 작업을 많이 했던 터라 동선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 어떤 공연이든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포니를 몰고 울진을 지나던 중 갑자기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리는 바람에 울진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버스 종점 부근의 여관방 하나를 겨우 찾아 하룻밤 눈을 붙였다.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결국 이튿날 낮 공연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지쳐있던 터라 같은 배역의 성악가에게 대타를 부탁했다. 문제의 그 부산 모 방송국 프로듀서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가기만 하면 소리가 뒤집어지는 등 민망한 일이 생기자 오현명 선생님은 객석에서 쉬고 있는 나를 무조건 무대로 올라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분장도 안 한 상태에서 무대로 뛰어올랐는데 그 모습을 본 객석은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되었죠.”
이런저런 고생 끝에 공연을 무사히 마쳤지만 이 공연 역시 출연료를 주지 않았다. 엄 교수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오페라 공연에 대해 점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소프라노채리숙 알토김청자 테너엄정행 바리톤윤치호
무대 매너에 대한 가르침
엄정행 교수는 성악가가 무대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그것이 일종의 사기라고 말한다. 물론 돈으로 사기를 치는 일은 아니지만 티켓을 구입해서 오는 분들에게 노래를 대충 부르는 행위는 사기와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날 주어진 노래가 뒤집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열심히 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 물론 노래만 열심히 부르면 되는 것은 아니다. 무대 매너도 아예 몸에 배도록 연습할 것을 주문한다.
“무대에 오를 때는 기본적으로 매너가 있어야 해요. 무대에서 인사하는 법, 내가 어느 위치에 서야 하는지 등을 무대에 관한 것들을 알아야 합니다. 무대 상수에서 나갈 때 별생각 없이 아무 발이나 툭 내밀면 안 됩니다. 오른발을 먼저 내디뎌야 해요. 그래야 객석에서 볼 때 내 몸이 청중들에게 보이는 법입니다. 왼발을 먼저 앞으로 뻗으면 청중들에게 등을 보이는 꼴이 되죠. 어쨌든 출발은 무대를 보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객석을 등지고 나가면 도살장에 들어가는 소처럼 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데도,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면 대부분 성악가들이 바닥에 정해진 자기 자리만 바라보고 입장한다. 객석에서는 박수를 치는데 정작 본인은 객석을 바라보지 않는 꼴이 되기 때문에 중에 대한 예의에도 어긋난다는 것이다. 나아가 청중은 성악가를 불안한 모습으로 지켜보면서 ‘저 분은 노래에 자신감이 없는 것 같다’고 오해할 수 있다. 클래식 문화가 생활화된 외국의 성악가들이야 이런 매너가 습관이겠지만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연출자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한다.
“인사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발레의 기본자세처럼 다리를 붙이고 엉덩이만 빼면 자연스러운 인사가 돼요. 무대 위에 서면 객석이 보이지 않는데 그럴수록 불안한 자세를 보여 줘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래를 부를 때 제스처 역시 신경을 써야 하고요. 손가락 세 개를 붙여서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면 좋습니다.”
또 노래가 끝난 뒤에는 객석이 노래의 여운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마지막 자세를 30초 가량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피아니스트를 소개하고 인사시킬 때도 피아니스트를 바라보고 인사할 것을 요구할 게 아니라 서로 보지 않고도 고개만 살짝 흔들고 같이 인사하면 좋다. 서로 믿음을 갖고 무대에 서야 한다. 인사가 끝난 후에도 긴장을 놓으면 안 된다. 퇴장할 때도 몸이 객석을 향하도록 무대 바깥쪽 발을 먼저 떼어야 객석과의 호흡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많은 성악가들이 노래만 잘 부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퇴장시 걸음걸이와 노래할 때의 자신감 있는 제스처, 다른 연주자와 인사하는 법 등 모든 것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따뜻한 아랫목에 있다가도 부모님이 오시면 윗목으로 옮겨야 하고, 부모님이 밥뚜껑을 열어야 자녀들이 숟가락을 들어야 하는 것처럼 동양적 장유유서(長幼有序)가 DNA에 녹아있기 때문에 서양식 사고방식과 매너를 몸에 익히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어차피 서양음악을 할라치면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게 엄 교수의 조언이다.
성악은 곧 호흡
엄정행 교수는 바이올린의 활은 인간에게 무엇인지 대뜸 묻더니 ‘활은 곧 호흡’이라고 강조한다. 바이올린의 브릿지는 얼굴의 광대뼈, 잇몸뼈, 입천장뼈, 뇌를 받치고 있는 뼈 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뼈들이 진동하면서 소리가 커진다고 말한다. 소리를 내는 매개체로서 바이올린의 활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곧 ‘호흡’이라는 것.
“호흡을 해야 노래가 되는데, 여기서 호흡이란 밖에 있는 공기를 안으로 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입을 열면 호흡은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돼 있습니다. 진짜 노래하는 사람은 입만 크게 열면 호흡이 들어온다는 걸 알고 있지요. 성악가라면 그런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바이올린의 브릿지가 넘어지면 소리가 나지 않는데 그 브릿지가 바로 목젖 부위라고 할 수 있다. 옥타브를 올리려면 목젖 부위를 수축하면 되는데 이때 활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소리가 듣기 싫어지는 것처럼, 호흡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면 결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다. 그래서 성악가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호흡이다.
세상에 언어가 다양한 것은 발음이 혀와 구강구조가 인종마다 사람마다 다른 이유이다. 성대는 색깔이 없지만 울림은 색깔이 보이는 법이다. 성대를 통해 혀와 구강에 의해 발음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구강구조와 혀의 차이로 인해 언어가 나라마다 그렇게 많은 것이다. 원래 혀에 힘을 주면 발음이 발생하지 않는다. 미국 태생의 성악가들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미국인들은 발음 자체가 혀에 힘을 주어 굴리게끔 돼 있는 까닭이다. 이는 독일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태리인들과 우리나라 성악가들은 혀가 잘 펴지는 발음이기 때문에 소리가 투명하다. 노래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민족이다.
“여하튼 우리나라 성악가들이 소리에만 인생을 걸기 때문에 무대에서 필요한 부수적인 것들은 잘 모른다는 게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그 문제를 특별히 지도해 주는 스승들도 많지 않은 것 같아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뒤늦게야 더 즐겁고 감동적으로 노래 부르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입니다. 이런 경험은 이태리 성악가들이 가르쳐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처한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해요.”
그래서 월간리뷰는 엄정행 교수에게 본지가 주최하는 포럼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그간 노래인생에서 터득한 노하우를 후학들에게 들려줄 것을 건의했다.
가곡은 곧 시, 시를 이해하고 노래해야
요즘 유튜브 등을 보면 가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엄 교수는 가곡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면서도 방송이나 실생활에서 자주 들을 수 없는 데에는 성악가들의 책임도 크다고 말한다. 노래가사가 마음속 깊이 들리지 않으면 듣는 이들의 가슴에 와닿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가사가 들리지 않으니 감동의 파도를 일으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엄 교수는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시집을 많이 읽을 것을 권한다. 시낭송만 해도 감동하면 앙코르를 외치는데 하물며 선율이 있는 시노래를 잘 부르면 그 누가 가만히 듣기만 하겠는가.
“노래하는 사람들은 ‘시’보다 더 감동적인 ‘음률’을 구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시 내용보다 소리에만 치중할 때 감동은 사라집니다. 그래서 시 내용을 내 것으로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노래를 불러야 해요.”
특히 성악가는 객석과 협조하지 않으면 절대 감동을 줄 수 없다. ‘아 목동아’를 그냥 부른다고 청중이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성악가들이 우리 곡의 가사에 담긴 감동을 객석에 전달해 줘야 하는데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청중은 ‘무관심’으로 끝난다. 멜로디만 따라서 부르는 게 아니라 가사를 대여섯 번 이상 깊이 음미하고 노래를 불어야 청중의 가슴이 뜨거워진다는 것, ‘내 나이 80이 될 때까지 55년 동안 성악가의 길을 걸으면서’ 처절하게 느낀 점이라고 고백하는 엄 교수다.
가곡을 작곡하는 작곡자들도 생각해야 하는 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결코 마음 편안하게 살아온 민족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 가곡에는 그런 슬픔이 배어있지만 요즘 작곡가들은 그런 감정이 메말라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왜 지금도 ‘가고파’와 같은 곡이 사랑받고 있는가, 그 곡들에는 우리 민족의 정한과 녹아있는 까닭이다. 그러기에 작곡가 스스로가 겪어보지 않은 감성을 알기 위해서라도 더욱더 시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아이들이 가곡을 많이 부르지만, 외국에서 서양 노래만 배우면 우리 감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귀국해도 가곡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아요. 그동안 엄정행콩쿠르에서 대상 받은 친구들이 17명인데 다들 대가처럼 노래를 잘 부른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도 유학을 다녀오면 우리 것을 다 잊어버리고 오는 거예요.”
외국 것만 부르다가 나이 들어서 다시 가곡을 부르려면 이미 늦은 나이가 돼버린다. 엄정행 교수는 그 점이 참으로 안타깝다.
이번 호는 여기까지이다. 다음 호에는 왜 직접 본인의 이름을 걸고 콩쿠르를 개최했는지를 설명하고, ‘소리에 인생을 걸지 말고 왜 노래에 인생을 걸어야 하는지’ 등 후학들에게 남기고 싶은 내용을 정리할 계획이다.
한숙현 (월간리뷰 이사, 음악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