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진한 매력을 선물하는 성악가 테너 이재식

지난 5월 26일 라벨라오페라단이 제14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에서 '로베르토 데브뢰'를 한국 최초로 무대에 올렸다. 이로써 라벨라오페라단은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대장정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됐다. 지난 2015년 '안나 볼레나'를 시작으로 2019년 '마리아 스투아르다', 그리고 올해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8년 간 쉼 없이 달려왔다.

‘여왕 3부작’은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가 작곡한 오페라 중 영국 엘리자베스 1세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소재로 한 ‘안나 볼레나’(1830), ‘마리아 스투아르다’(1835), ‘로베르토 데브뢰’(1837)를 일컫는다. '안나 볼레나'는 엘리자베스 1세의 모친인 앤 불린이 주인공이고,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사촌지간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 1세의 삼각관계가 중심이다. 그리고 마지막 작품인 '로베르토 데브뢰'는 엘리자베스 1세가 사랑한 2대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브뢰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다. 여왕 3부작은 튜더왕조 시대의 실존 인물들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허구를 결합해 오페라에 알맞도록 구성했다. 영국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시대의 인물과 사건들을 벨칸토예술로 승화해 완성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 의미 깊은 여정에 함께한 성악가가 있다. Maria Callas 국제콩쿨 그랑프리. Marseille 국제콩쿨 2위, Gian Battista Viotti 국제콩쿨 1위,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쿨 3위 등 화려한 수상경력과, 독일 바이마르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 등으로 활동하며 실력을 인정을 받은 성악가이자, 현재 군산대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양성에 힘쓰고 있는 테너 이재식이 그 주인공이다. 무대를 앞둔 5월 중순 ‘로베르토 데브뢰’에서 로베르토 데브뢰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는 그를 만나 뜻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Q. 도니제티 여왕 3부작의 마지막이자, 국내 초연인 ‘로베르토 데브뢰’에 많은 관심이 쏠렸습니다. 국내 초연작인 만큼 기대와 부담감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대장정의 종점에 함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기뻤습니다. 특히 단장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2019년 한국에 들어오면서 라벨라오페라단 이강호 단장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인연으로 오페라페스티벌에 합류하게 되었고, 단장님께서는 ‘도니제티의 여왕 3부작’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안나 볼레나’ ‘마리아 스투아르다’ 이번에 한 ‘로베르토 데브뢰’까지 세 작품을 정말 다 하게 되었네요.(웃음) 뜻깊은 여정에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해외에서도 여왕 3부작 모든 무대에 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이로써 기록 하나는 쓰게 된 것 같습니다. 국내 싱어 중에서는 제가 유일하고요.

Q. 오페라 무대로 관객분들을 만나고 있고 군산대학교에서는 후학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가지고 계신 음악적 철학은 무엇인가요?

개인적으로 제가 인복이 정말 많다고 생각하는데요. 먼저 제가 노래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야 했을 때 마다 학부, 석사, 최고연주자 과정을 거치면서 만난 스승님들께서 그 시기에 제게 꼭 필요했던 음악적인 부분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저는 스승님들께 ‘스승과 제자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많이 배웠습니다. ‘노래보다는 인성과 사람이 먼저다’라는 것을 몸소 배웠습니다. 음악적인 스킬은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다 보면 익혀지는 부분이 많지만, 올바른 인성은 아무에게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저의 스승님들께서 몸소 보여주신 것처럼 학생들을 배려하고, 잘 따라올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기다려주는 선생님이 되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진정으로 함께 하는 음악’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에는 교감과 배려가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노래하다 보면, 대부분의 솔리스트들이 자신의 것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 것에만 집중하면 파트너들과 소통이 어려워집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내 길만 가다보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없습니다. 음악은 ‘배려’를 바탕으로 ‘타인과 합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학생들에게도 피아노, 오케스트라 악보를 함께 공부하게 합니다. 내 순서가 아니더라도 가만히 악보를 보면서 남들이 어떻게 연주하는지 파악하는 거죠. 그러다 보면 다른 성악가, 피아니스트, 오케스트라가 언제 시작하고, 끝내고 어떻게 연주하는지 하는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이제 내가 어떻게 연주해야 할지를 알게 되고, 비로소 상대에 대한 배려를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함께’가 되는 것이죠. 솔리스트, 합창, 오케스트라의 차이는 담당하는 비중이 다를 뿐이지,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연주할 때 쓰이는 에너지는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개인 적으로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배려와 교감’을 배우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 로베르토 데브뢰의 연습현장이 그런 교감과 배려가 있는 분위기라서 더욱 행복하게 연습에 임하고 있습니다.

Q. 파란만장한 삶을 산 로베르토 데브뢰는 깊은 내면 연기를 요구합니다. 어떻게 준비하셨는지요.

어느 작품이든 똑같지만, 초연이다 보니 같이 출연하는 선생님들과 극이 원하는 게 무엇이었는지를 함께 연구하며 준비했습니다. 로베르토 데브뢰는 극의 줄거리가 뚝뚝 끊어지는 느낌을 받은 부분들이 있었어요. 장면과 장면 사이의 줄거리를 많이 뛰어넘어서 처음에 공부할 때는 대본가가 불친절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대본 연구를 정말 디테일하게 했습니다. 감정 라인 연결을 잘할 수 있도록 자신의 배역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과 앞뒤를 함께 맞추며 연습했습니다. 이번 작품은 많이 공연되는 유명한 작품에 비해서 대본, 디테일 회의를 많이 했습니다. 공부하면 할수록 할 것이 많아진다는 말이 있잖아요? 하나하나 세세하게 파고들다 보니 기존의 작품들보다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또한 연기를 위해 언어적으로도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200-300년 전 오페라인 이번 작품에는 사극톤(?)이 많습니다. 오페라에서도 역사물일수록 옛 문법, 고(古)어가 많은데요, 이 작품에서는 유난히 기존의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단어나 문법을 많이 접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표현을 위해서 대사가 지닌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하려고 언어적 측면에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Q. 이번 오페라를 준비하시면서 특별히 더 신경 쓰고 준비하고 있는 부분이 있으시다면, 무엇일까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대사의 톤과 언어적인 측면에 많은 신경을 썼습니다. 번역, 출판된 대본에는 의역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자료들을 직접 찾아보고 그중에서 가장 객관적인 버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찾으며 생각했습니다. 특히 김숙영 연출 선생님이 정말 많이 고민하고 배려해 주셨습니다. 주역선생님들도 문법이나 상황적으로 뉘앙스와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지만, 특히 김숙영 연출 선생님께서 본인을 스스로 낮추시면서 성악가 개개인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주역들의 생각을 이끌어내 주셨어요.

보스의 스타일에 따라 회사 분위기가 달라지 듯, 모두가 합심하여 극의 흐름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큰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Q. 김숙영 연출은 꼼꼼한 연출을 하시면서도 A, B팀의 개성을 살려서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싶다고 전했습니다. 이재식 님의 데브뢰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의 목소리는 각자의 성격과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성격은 모두 다르잖아요? 어떤 배우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배역의 성격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스겟 소리로 제 지인들은 제가 화내는 노래할 때 되게 좋다고 합니다. 제가 화를 잘 내는 건 아니고요. 감정을 쏟아내는 연기를 할 때, 제 매력이 발산되는 듯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저의 개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네요. 연출 선생님도 저의 감정분출이 강해질 때 느껴지는 저의 에너지가 매력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같은 배역을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다르게 표현했는지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되겠지만, 저의 공연에서는 ‘자신의 감정에 매우 솔직한 로베트로’를 기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Q. 도니제티의 오페라는 아름다운 음악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번 오페라를 준비하시면서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은 어떤 것이었나요? 곡과 매력 포인트를 소개해 주세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모든 곡이 좋지만, 애착이 가는 곡을 하나 뽑자면 2막의 3중창입니다. 로베르토는 정치적, 사회적 관계나 득실을 뒤로하고 결국은 사랑을 찾아가겠다고 결정하는 부분이에요. 결정을 내린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엘리자벳여왕에게 차라리 죽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스로 역적이 되면서, 사랑을 선택하겠다고 하는 이 곡이 로베르토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오로지 사랑 하나면 족하다는 로베르토의 인간적인 매력이 느껴졌고 그 부분이 가장 멋있는 것 같았어요.

Q. 라벨라 오페라단은 로베르토 데브뢰 개막공연을 1만 8천 원에 판매하는 엄청난 세일을 진행했고, 3분 만에 전석 매진되었습니다. 파격 세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떠셨는지요?

이강호 단장님의 결정은 일명 ‘사장님이 미쳤어요’였죠. 결정이 정말 파격적이었어요. 그동안 아무도 못 했던 것이라서 정말 존경스러웠습니다. 단장님의 결정을 듣고서는 이 기회를 통해서 오페라를 한 사람이라도 더 보면 더 좋겠다는 마음이 첫 번째, 과연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두 번째로 들었습니다. 쉬운 결정이 아니셨겠지만, 이 파격세일이 오페라의 저변확대를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페라가 우리말이 아니다 보니 알아듣기 어렵고, 그러다 보니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관객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오페라는 저변확대가 많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기반이 따라줘야 하고요.

독일, 이태리, 프랑스도 오페라 연주에서 자막을 사용합니다. 국가는 든든하게 지원을 해주고 있고요. 안정적이니 관객들이 많이 보러 올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는 것이죠. 반면 대한민국은 사회적 기반 형성이 어렵습니다. 민간오페라 단장님들이 많은 손해를 떠안고 가시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강호 단장님이 정말 엄청난 결정을 하신 거예요.

Q. 로베르토 데브뢰를 보러 오시는 분들에게 관람 포인트를 짚어주신다면?

관람 포인트는 제가 죽는 장면입니다.(웃음) 제가 제일 늦게 나오는데, 제일 빨리 죽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멋지게 죽습니다. 마지막에 장렬하게 아리아 부르고 죽으러 가는데요, 그 장면에서 그림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어떻게 죽는지, 현장에서 만나보시죠.

Q.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에게 마지막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오페라는 어렵다, 비싸다’라는 편견이 없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오페라를 자막 없이는 보는 것이 힘들겠지만, 보다 보면 사람 사는 것이 다 똑같다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오페라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문화의 차이에 따라 표현이 다를 뿐이죠. 서로가 공감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우리는 처절한 운명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보면,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오페라도 똑같습니다. 정적이고, 언어의 장벽이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인성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모습을 반영해 주는 것이 오페라입니다. 오페라가 가진 그 진한 매력을 만나고 가시길 바랍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오페라를 위해, 책임과 열정을 다하는 그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 전심을 다 한 로베르토 데브뢰의 모습이 녹아있었다. 어렵고 길다는 편견에 가려져 있는 오페라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녹아져 있다. 인간의 감정, 사랑, 욕구를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선물 상자에 담아 선물하는 오페라. 그 선물을 조심스레 열어보자.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울림이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그 선물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테너 이재식.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사랑’을 노래로 삶으로 보여주는 그가 있기에 대한민국 오페라의 저변은 계속해서 확대될 것이다. 그의 ‘로베르토 데브뢰’가, 다음 역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글 허소원

테너 이재식 프로필

학력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학사졸업
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 석사졸업
드레스덴 국립음대 오페라 마이스터과정 졸업

수상경력
2011 플라시도 도밍고 국제콩쿨 3위
2010 빌헬름 스텐함머 국제콩쿨 1위&청중상
2010 비욧티 국제콩쿨 1위
2009 마르세이유 국제콩쿨 2위
2009 마리아 칼라스 국제콩쿨 그랑프리
2008 세종음악콩쿨 대상

출연경력
오페라 마술피리, 돈 죠반니, 후궁탈출, 사랑의 묘약, 리타, 마리아 스투아르다, 안나 볼레나, 로베르토 데베뢰, 루크레치아 보르자, 라 트라비아타, 가면무도회, 오텔로, 팔스타프, 도둑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베르테르, 박쥐, 장미의 기사, 캐시미어 21편의 오페라에 400회 이상 주역 출연.
다수의 독창회를 비롯, 뉴욕 카네기홀, 베를린 필하모니와 콘서트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상트 페터스부륵, 아테네, 싱가포르, 카타르, 체코, 스웨덴, 체코, 크로아티아, 불가리아에서 오라토리오와 갈라 콘서트 등 100회 이상 솔리스트 출연.

현) 국립군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