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19일(수)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리스트 '2개의 차르다시', 교향시 '전주곡', '순례의 해 2권 중 5번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 '노르마의 회상', '카바티나 마이어베어 오페라 악마 로베르 중에서', '순례의 해 3권 중 4번 에스테 별장의 분수', '사랑의 죽음 바그너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 '돈 후앙의 회상', 앙코르: '슈만 헌정', '로맨스 마단조‘
2023년 ‘여름음악축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한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Seoul Art Center International Music Festival)는 2024년부터 ‘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며 규모와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음악제는 8월 18일 화요일부터 23일 일요일까지 엿새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세계적인 해외 아티스트들과 공모를 통해 선발된 국내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16개의 음악회를 선보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주요 콘서트를 선별해 관람하고 ‘월간리뷰’에 그 감상을 남겨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① 피아노의 메카, 예술의전당
2025년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2005년생 캐나다 피아니스트 케빈 첸(Kevin Chen, 陳禹同). 전날 이승원이 이끄는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던 그는 작은 체구에서 오는 박력과 파워보다는 재간둥이 같은 기량과 섬세함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고도의 테크닉과 강한 정신적 집중력을 요구하는 리스트만으로 구성된 독주회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리스트를 중심으로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연주자는 적지 않다. 불과 한 달 전 선율은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완주했고, 선우예권은 5월 7일 데카 레이블을 통해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편곡한 11곡을 담은 앨범 ‘리스트’를 발표하고 전국 투어에 나섰다. 5월 27일에는 에바 게보르기안이 ‘혼례’와 ‘단테 소나타’ 등을 들려줬다. 이처럼 독주회에서 리스트만을 만나는 일은 이제 특별하지 않다. 더구나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의 특징은 피아니스트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재직 시 기획했던 음악제답게 대관령이나 통영 등 다른 음악제에 비해 피아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해에는 롱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2007년생 김세현, 중국적인 풍모와 압도적인 기량을 동시에 보여준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장 하오첸, 그리고 글렌 굴드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캐나다의 얀 리시에츠키를 통해 서로 전혀 다른 개성과 정체성을 가진 젊은 피아니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는 그 계보를 케빈 첸이 잇는다. 여기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로코피예프 연주자 신창용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베조드 압두라이모프까지 가세한다. 예술의전당의 ‘2026 SAC 월드스타시리즈 - Piano Special’ 역시 언급한 에바 게보르기안은 물론 노대가 존 오코너와 3년 전 한국에 와서 “음악은 언어요, 순수한 소리의 집합이요 소리 이전에는 침묵이 있었고 빛이 있기 전 침묵이 있었으니 우리 같이 2분 정도 침묵으로 내면의 고요를 누리자”라고 연주회 시작 바로 전에 객석까지 불을 끄며 경건한 예배를 했던 알렉산더 가지예프까지 초대하며 그야말로 피아노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② 우리가 알던 중국은 이미 사라졌다
작년 장 하오첸의 연주는 필자에게 꽤 큰 충격이었다. 랑랑이나 유자 왕으로 대표되는 중국계 피아니스트들의 과감한 모션과 화려한 쇼맨십, 서커스를 연상시킬 정도의 기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서양 클래식 음악을 중국보다 조금 일찍 받아들이고 활성화한 만큼,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우리가 한 단계 앞서 있다는 막연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장 하오첸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깨졌다. 중국 출신 젊은 음악가들의 수준을 더 이상 과거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 클래식계가 중국의 빠른 성장을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도 생겼다. 그리고 케빈 첸의 이번 연주는 그 생각을 더욱 굳혀 놓았다. 케빈 첸의 방식은 랑랑, 유자 왕과는 상당히 달랐다. 과장된 몸짓이나 외적인 화려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입퇴장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허리를 숙이는 정도로 인사를 대신하며 전후반 각각 45분의 리스트를 완주했다. 그 긴 시간 동안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화려함보다는 안정감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얼마나 어려운 것을 쉽게 들리게 만드는가’였다.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음악을 듣는 방식에서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 악보와 건반을 직접 경험해 보면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 성부의 균형, 빠른 패시지 속에서의 음형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케빈 첸은 그런 고난도의 요소들을 과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음악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고도의 테크닉이 오히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전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③ 기교를 넘어 자신의 언어로 — 올 라운더 리스트 케빈 첸
짧은 ‘차르다시’로 문을 연 뒤에는 곡마다 음색을 달리하며 리스트 특유의 시적 감정을 풀어냈다. 특히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이번 연주에서 가장 뛰어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단순히 아름다운 음색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장과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조절하며 시의 정서를 피아노 위에 옮겨놓았다. 2부의 ‘에스테 별장의 분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물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화려한 음형이 단순한 속주로 들리지 않았다. 빛과 물, 공간의 울림이 변화하는 듯한 음향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리스트의 후기 작품이 가진 섬세함을 충분히 살려냈다. 반면 ‘노르마’와 ‘돈 후앙’에서는 전혀 다른 케빈 첸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건반 위에서 오페라를 구현하는 연주자가 됐다. 등장인물과 장면을 입체적으로 살려내면서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존재해야 할 공간을 두 손으로 만들어냈다. 화려한 기교는 목적이 아니라 극적 표현을 위한 수단이었다. 직접 편곡한 교향시 ‘전주곡’ 역시 같은 맥락에서 흥미로웠다. 리스트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리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능력까지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이번 리사이틀에서 케빈 첸이 보여준 것은 ‘리스트를 잘 치는 젊은 피아니스트’ 이상의 것이었다.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눈부신 성장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안정적인 테크닉, 작품의 성격에 따라 음색과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섬세함, 긴 프로그램을 끝까지 지탱하는 집중력, 그리고 오페라와 교향시를 피아노라는 한정된 매체 안에서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전개력까지 갖춘 ‘올 라운더 리스트’였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2026년 8월 19일(수) 오후 7시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프로그램: 리스트 '2개의 차르다시', 교향시 '전주곡', '순례의 해 2권 중 5번 페트라르카의 소네트 104번, '노르마의 회상', '카바티나 마이어베어 오페라 악마 로베르 중에서', '순례의 해 3권 중 4번 에스테 별장의 분수', '사랑의 죽음 바그너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에서', '돈 후앙의 회상', 앙코르: '슈만 헌정', '로맨스 마단조‘
2023년 ‘여름음악축제’라는 이름으로 처음 시작한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Seoul Art Center International Music Festival)는 2024년부터 ‘국제음악제’로 이름을 바꾸며 규모와 위상을 한 단계 높였다. 올해로 4회째를 맞은 이 음악제는 8월 18일 화요일부터 23일 일요일까지 엿새 동안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세계적인 해외 아티스트들과 공모를 통해 선발된 국내 연주자들이 함께하는 16개의 음악회를 선보인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주요 콘서트를 선별해 관람하고 ‘월간리뷰’에 그 감상을 남겨 독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① 피아노의 메카, 예술의전당
2025년 제19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2005년생 캐나다 피아니스트 케빈 첸(Kevin Chen, 陳禹同). 전날 이승원이 이끄는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라벨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했던 그는 작은 체구에서 오는 박력과 파워보다는 재간둥이 같은 기량과 섬세함을 부각시켰다. 그래서 더욱 궁금했다. 고도의 테크닉과 강한 정신적 집중력을 요구하는 리스트만으로 구성된 독주회에서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요즘 젊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리스트를 중심으로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는 연주자는 적지 않다. 불과 한 달 전 선율은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완주했고, 선우예권은 5월 7일 데카 레이블을 통해 프란츠 리스트가 작곡·편곡한 11곡을 담은 앨범 ‘리스트’를 발표하고 전국 투어에 나섰다. 5월 27일에는 에바 게보르기안이 ‘혼례’와 ‘단테 소나타’ 등을 들려줬다. 이처럼 독주회에서 리스트만을 만나는 일은 이제 특별하지 않다. 더구나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의 특징은 피아니스트가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재직 시 기획했던 음악제답게 대관령이나 통영 등 다른 음악제에 비해 피아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지난해에는 롱티보 콩쿠르 우승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2007년생 김세현, 중국적인 풍모와 압도적인 기량을 동시에 보여준 2009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 장 하오첸, 그리고 글렌 굴드의 모습이 투영된 듯한 캐나다의 얀 리시에츠키를 통해 서로 전혀 다른 개성과 정체성을 가진 젊은 피아니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는 그 계보를 케빈 첸이 잇는다. 여기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로코피예프 연주자 신창용과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베조드 압두라이모프까지 가세한다. 예술의전당의 ‘2026 SAC 월드스타시리즈 - Piano Special’ 역시 언급한 에바 게보르기안은 물론 노대가 존 오코너와 3년 전 한국에 와서 “음악은 언어요, 순수한 소리의 집합이요 소리 이전에는 침묵이 있었고 빛이 있기 전 침묵이 있었으니 우리 같이 2분 정도 침묵으로 내면의 고요를 누리자”라고 연주회 시작 바로 전에 객석까지 불을 끄며 경건한 예배를 했던 알렉산더 가지예프까지 초대하며 그야말로 피아노의 향연을 펼치고 있다.
② 우리가 알던 중국은 이미 사라졌다
작년 장 하오첸의 연주는 필자에게 꽤 큰 충격이었다. 랑랑이나 유자 왕으로 대표되는 중국계 피아니스트들의 과감한 모션과 화려한 쇼맨십, 서커스를 연상시킬 정도의 기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한편으로는 한국이 서양 클래식 음악을 중국보다 조금 일찍 받아들이고 활성화한 만큼,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는 우리가 한 단계 앞서 있다는 막연한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장 하오첸을 직접 경험하면서 그 생각은 깨졌다. 중국 출신 젊은 음악가들의 수준을 더 이상 과거의 기준으로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 클래식계가 중국의 빠른 성장을 더 이상 남의 일처럼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위기감도 생겼다. 그리고 케빈 첸의 이번 연주는 그 생각을 더욱 굳혀 놓았다. 케빈 첸의 방식은 랑랑, 유자 왕과는 상당히 달랐다. 과장된 몸짓이나 외적인 화려함에 의존하지 않는다. 입퇴장조차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허리를 숙이는 정도로 인사를 대신하며 전후반 각각 45분의 리스트를 완주했다. 그 긴 시간 동안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화려함보다는 안정감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얼마나 어려운 것을 쉽게 들리게 만드는가’였다. 피아노를 직접 연주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음악을 듣는 방식에서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 악보와 건반을 직접 경험해 보면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 성부의 균형, 빠른 패시지 속에서의 음형 유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케빈 첸은 그런 고난도의 요소들을 과시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음악의 흐름 안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고도의 테크닉이 오히려 들리지 않을 정도로 전개를 안정적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③ 기교를 넘어 자신의 언어로 — 올 라운더 리스트 케빈 첸
짧은 ‘차르다시’로 문을 연 뒤에는 곡마다 음색을 달리하며 리스트 특유의 시적 감정을 풀어냈다. 특히 ‘페트라르카 소네트’는 이번 연주에서 가장 뛰어난 순간 가운데 하나였다. 단순히 아름다운 음색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장과 감정의 변화를 섬세하게 조절하며 시의 정서를 피아노 위에 옮겨놓았다. 2부의 ‘에스테 별장의 분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물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화려한 음형이 단순한 속주로 들리지 않았다. 빛과 물, 공간의 울림이 변화하는 듯한 음향적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리스트의 후기 작품이 가진 섬세함을 충분히 살려냈다. 반면 ‘노르마’와 ‘돈 후앙’에서는 전혀 다른 케빈 첸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건반 위에서 오페라를 구현하는 연주자가 됐다. 등장인물과 장면을 입체적으로 살려내면서 오케스트라와 성악이 존재해야 할 공간을 두 손으로 만들어냈다. 화려한 기교는 목적이 아니라 극적 표현을 위한 수단이었다. 직접 편곡한 교향시 ‘전주곡’ 역시 같은 맥락에서 흥미로웠다. 리스트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리스트를 자신의 언어로 다시 구성하는 능력까지 보여준 것이다. 결국 이번 리사이틀에서 케빈 첸이 보여준 것은 ‘리스트를 잘 치는 젊은 피아니스트’ 이상의 것이었다.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출신 젊은 피아니스트들의 눈부신 성장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새로운 흐름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안정적인 테크닉, 작품의 성격에 따라 음색과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섬세함, 긴 프로그램을 끝까지 지탱하는 집중력, 그리고 오페라와 교향시를 피아노라는 한정된 매체 안에서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전개력까지 갖춘 ‘올 라운더 리스트’였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