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은 1990년대 독일 유학 시절, 베를린에서 귄터 반트의 지휘로 들은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실연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학창 시절 쾰른 음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전파했던 피에르로랑 에마르 역시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서 만났다.
에마르는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로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과 함께 리게티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여 1994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표한 음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57년 프랑스 출신의 그는 이번에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제3번으로 방한했고, 1969년생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수산나 맬키는 2009년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서울시향 포디엄에 다시 섰다.
①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에마르의 버르토크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년의 버르토크가 지닌 평온함과 투명함을 부각시키며, 프랑스 음악, 특히 라벨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색채감이 인상적이었다. 부드러운 터치 속에서 리코르단차와 노스탤지어가 꿈결처럼 펼쳐졌다.
루마니아 민속음악의 한 형태인 도이나(Doina)의 깊은 서정성과 모차르트적인 고전적 균형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1악장은 순수하고 담백했다. 이어지는 2악장 아다지오 렐리지오소(Adagio religioso)의 도입부는 경건한 울림으로 신비롭고도 평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1악장 말미에서 밤의 도래를 암시하던 모티브가 2악장에서 새소리로 이어지는 연결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버르토크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채보한 새소리를 활용한 중간부(55~88마디)는 그 앞뒤의 음악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3악장에서는 C♯ 에올리안 선법을 바탕으로 한 옥타브 카논과 푸가가긴장감을 형성한 322~344마디의 푸가 재현부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앙코르로 연주한 쇤베르크의 ‘6개의 작은 피아노 소품’ 은 필자의 얼굴에 절로 미소를 띠게 했다. 독일 유학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순간이었다. 교과서에서만 접하고, 연구실 피아노 앞에서 무조음악을 분석하기 위해 악보를 뜯어보며 공부했던 작품을 30년 만에 다시 전문 연주자의 손끝으로 듣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20세기 무조음악과 이후의 12음기법은 음들 사이의 위계와 기능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쇤베르크는 이러한 새로운 음악 언어가 미래 독일 음악의 우위를 이끌 것이라 확신했고, 언젠가는 식당 종업원마저 자신의 음악을 흥얼거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 예언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에마르는 쇤베르크를 단순한 음렬의 조직이나 지적 구조물로 접근하지 않았다. 마치 쇼팽이나 드뷔시를 연주하듯 숨결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어쩌면 쇤베르크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인간의 언어로 되돌려 놓으려는 따뜻한 배려이자 현대음악과 청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화해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②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호른 주제는 장엄하기보다는 선율적이고 부드러웠다. 승리의 팡파르라기보다 숲속에 메아리치는 전원적인 울림에 가까웠다. 호른 수석 김형주가 서울시향 입단 이전 경기필하모닉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어왔던, 음을 또박또박 끊지 않고 긴 호흡으로 슬러를 이어가는 특유의 연주는 첫 여덟 마디만으로도 앞으로 한 시간 동안 펼쳐질 슈베르트의 방향성을 예감하게 했다. 점4분음표의 부점 리듬 역시 트롬본이 호른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끌기보다 짧고 명료하게 처리했다. 칼 뵘식의 장중하고 묵직한 해석에 익숙한 귀에는 오히려 매우 투명하게 들렸다. 서주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점 리듬도 발랄하고 선명했다.
선명한 리듬감과 각 성부의 유기적인 결합은 수산나 맬키 해석의 핵심이었다. 카라얀, 번스타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보여주었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장엄함과 장대한 호흡 대신, 맬키는 투명함과 기민함, 그리고 감각적인 생동감을 선택했다.
플루트와 오보에의 칸타빌레는 특히 아름다웠고, 목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호흡하며 다른 악기군과 자연스럽게 리토르넬로를 주고받았다. 현악기는 비단결처럼 균일한 음색을 유지했고, 금관, 특히 트롬본은 마지막 투티에서도 과장하거나 소리를 내지르지 않았다. 팀파니 역시 율동감을 잃지 않으면서 전체 균형을 지탱했다. 이 모든 요소가 서로를 압도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슈베르트를 완성했다.
③ 슈베르트를 위한 변호
언어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지만 음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을 반복과 변형 속에서 드러낸다. 같은 선율과 리듬이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감정의 심화이며 시간의 확장이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덜 반복되거나 한 번이라도 더 반복되었다면 슈베르트가 의도한 감정의 농도와 시간의 흐름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깊은 고독과 집착, 그리고 끝내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만 말 없는 서사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천상의 길이(Himmlische Laenge)이며, 끝없이 자신을 확장하는 무한(Infinity)의 음악이고 마침내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여정이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은 1990년대 독일 유학 시절, 베를린에서 귄터 반트의 지휘로 들은 이후 30여 년 만에 다시 실연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마찬가지로 학창 시절 쾰른 음대 피아노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음악을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전파했던 피에르로랑 에마르 역시 오랜만에 한국 무대에서 만났다.
에마르는 피에르 불레즈의 지휘로 앙상블 앵테르콩탱포랭(Ensemble InterContemporain)과 함께 리게티의 피아노 협주곡을 녹음하여 1994년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발표한 음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57년 프랑스 출신의 그는 이번에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제3번으로 방한했고, 1969년생 핀란드 출신의 지휘자 수산나 맬키는 2009년 서울시향 ‘아르스 노바’ 시리즈 이후 오랜만에 서울시향 포디엄에 다시 섰다.
①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 제3번
에마르의 버르토크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연주가 아니었다. 오히려 말년의 버르토크가 지닌 평온함과 투명함을 부각시키며, 프랑스 음악, 특히 라벨을 연상시키는 유려한 색채감이 인상적이었다. 부드러운 터치 속에서 리코르단차와 노스탤지어가 꿈결처럼 펼쳐졌다.
루마니아 민속음악의 한 형태인 도이나(Doina)의 깊은 서정성과 모차르트적인 고전적 균형이 자연스럽게 결합된 1악장은 순수하고 담백했다. 이어지는 2악장 아다지오 렐리지오소(Adagio religioso)의 도입부는 경건한 울림으로 신비롭고도 평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1악장 말미에서 밤의 도래를 암시하던 모티브가 2악장에서 새소리로 이어지는 연결은 매우 자연스러웠고, 버르토크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애슈빌에서 채보한 새소리를 활용한 중간부(55~88마디)는 그 앞뒤의 음악과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3악장에서는 C♯ 에올리안 선법을 바탕으로 한 옥타브 카논과 푸가가긴장감을 형성한 322~344마디의 푸가 재현부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앙코르로 연주한 쇤베르크의 ‘6개의 작은 피아노 소품’ 은 필자의 얼굴에 절로 미소를 띠게 했다. 독일 유학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순간이었다. 교과서에서만 접하고, 연구실 피아노 앞에서 무조음악을 분석하기 위해 악보를 뜯어보며 공부했던 작품을 30년 만에 다시 전문 연주자의 손끝으로 듣게 될 줄은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20세기 무조음악과 이후의 12음기법은 음들 사이의 위계와 기능을 해체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였다. 쇤베르크는 이러한 새로운 음악 언어가 미래 독일 음악의 우위를 이끌 것이라 확신했고, 언젠가는 식당 종업원마저 자신의 음악을 흥얼거리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그 예언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러나 에마르는 쇤베르크를 단순한 음렬의 조직이나 지적 구조물로 접근하지 않았다. 마치 쇼팽이나 드뷔시를 연주하듯 숨결과 감정을 불어넣었다. 그것은 어쩌면 쇤베르크 자신의 의도와는 거리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인간의 언어로 되돌려 놓으려는 따뜻한 배려이자 현대음악과 청중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화해의 손길처럼 느껴졌다.
② 슈베르트 교향곡 제9번
호른 주제는 장엄하기보다는 선율적이고 부드러웠다. 승리의 팡파르라기보다 숲속에 메아리치는 전원적인 울림에 가까웠다. 호른 수석 김형주가 서울시향 입단 이전 경기필하모닉에서 활동하던 시절부터 익숙하게 들어왔던, 음을 또박또박 끊지 않고 긴 호흡으로 슬러를 이어가는 특유의 연주는 첫 여덟 마디만으로도 앞으로 한 시간 동안 펼쳐질 슈베르트의 방향성을 예감하게 했다. 점4분음표의 부점 리듬 역시 트롬본이 호른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끌기보다 짧고 명료하게 처리했다. 칼 뵘식의 장중하고 묵직한 해석에 익숙한 귀에는 오히려 매우 투명하게 들렸다. 서주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부점 리듬도 발랄하고 선명했다.
선명한 리듬감과 각 성부의 유기적인 결합은 수산나 맬키 해석의 핵심이었다. 카라얀, 번스타인,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보여주었던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장엄함과 장대한 호흡 대신, 맬키는 투명함과 기민함, 그리고 감각적인 생동감을 선택했다.
플루트와 오보에의 칸타빌레는 특히 아름다웠고, 목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처럼 호흡하며 다른 악기군과 자연스럽게 리토르넬로를 주고받았다. 현악기는 비단결처럼 균일한 음색을 유지했고, 금관, 특히 트롬본은 마지막 투티에서도 과장하거나 소리를 내지르지 않았다. 팀파니 역시 율동감을 잃지 않으면서 전체 균형을 지탱했다. 이 모든 요소가 서로를 압도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슈베르트를 완성했다.
③ 슈베르트를 위한 변호
언어는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지만 음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과 시간을 반복과 변형 속에서 드러낸다. 같은 선율과 리듬이 되풀이되더라도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감정의 심화이며 시간의 확장이다. 만약 한 번이라도 덜 반복되거나 한 번이라도 더 반복되었다면 슈베르트가 의도한 감정의 농도와 시간의 흐름은 지금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깊은 고독과 집착, 그리고 끝내 형언할 수 없는 해방감은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만 말 없는 서사로 완성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천상의 길이(Himmlische Laenge)이며, 끝없이 자신을 확장하는 무한(Infinity)의 음악이고 마침내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여정이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