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솔 바이올린 리사이틀

2026년 9월 19일(토) 오후 2시, 예술의전당 IBK기업은행챔버홀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
프로그램: 스트라빈스키 ‘이탈리안 모음곡’, 슈만 바이올린 소나타 1번 가단조, Op. 105, 프로코피예프 ‘5개의 멜로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 Op. 18 (앙코르: 사라사테 ‘서주와 타란텔라’)
 
① 실내악의 숨, 독주자의 목소리

 

히브리어로 ‘숨’을 뜻하는 아벨 콰르텟은 2025년 7월 4일 출발해 2026년 2월 7일,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 연주를 완주했다. 그 사이 비올라의 박하문은 서울시립교향악단 부수석으로 발탁되었고, 30대의 나이에 멘델스존에 이어 베토벤까지 전곡을 완주한 아벨의 향후 행보가 궁금하던 차였다. 그러던 중 아벨의 멤버 윤은솔이 바이올린 독주회를 연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연장을 찾았다. 실내악단의 일원으로만 접해왔던 윤은솔을 독주자로서는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피아노에는 일리야 라쉬코프스키가 앉았다.

 

② 충돌과 조화 사이

 

첫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이탈리아 모음곡’이었다. 흥미로운 작품이다. 18세기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을 모방하여 발레를 위해 쓴 ‘풀치넬라’에서 발췌한 것으로, 스트라빈스키의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말하자면 과거의 음악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다시 해석한 일종의 리메이크다. 여기서 연주자는 묘한 문제에 직면한다. 18세기의 양식에 맞춰 연주해야 할까, 아니면 스트라빈스키가 그것을 재해석한 20세기의 시각에 맞춰야 할까. 사실 어느 쪽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2026년의 성용원이 1926년 쇤베르크의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을 그대로 쇤베르크의 음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시대의 양식을 택하느냐보다 그걸 연주하는 사람들 사이의 일관성과 통일성이다. 한 사람은 고전적으로, 다른 한 사람은 현대적으로 접근한다면 그것은 시대적 양식과 감각의 교차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갈 길을 가는 것에 가까워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날 윤은솔과 라쉬코프스키의 조합은 상호 보완적이라기보다는 각자의 성격이 지나치게 선명한 편이었다. 두 사람 모두 독자적인 방향성을 강하게 드러냈다. 라쉬코프스키의 피아노는 음량과 타건이 강하고, 때로는 마치 밀레니엄심포니와 함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을 완파하듯 건반을 사정없이 수직으로 내리꽂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차라리 김다솔이나 윤흥천과 같은 보다 섬세한 타건을 가진 피아니스트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특히 스트라빈스키에서는 이러한 성향이 더욱 두드러졌다. ‘Gavotte con variazioni’의 첫 번째 변주에서는 음정 컨트롤이 흔들렸고, 무엇보다 실내악적인 대화가 중요한 ‘Finale’에서는 두 사람이 하나의 음악적 호흡을 만들어내기보다 각자의 길을 가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반면 슈만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짧은 동기의 응축과 발전을 통해 음악이 전개되는 1악장에서는 바이올린과 피아노가 동등한 파트너로 자리 잡았다.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표현을 추구하는 피아노와, 응집성과 논리적인 전개를 선명하게 드러내면서도 실내악적인 균형을 중시하는 바이올린이라는 윤은솔의 성격이 오히려 이 작품에서는 서로 충돌하기보다 하나의 긴장으로 기능했다. 슈트라우스의 2악장에서도 이러한 상성이 비교적 조화롭게 펼쳐졌다. 두 사람의 음악적 성격이 완전히 같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서로 다른 방향성이 작품 안에서 일정한 흐름을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스트라빈스키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프로코피예프의 ‘5개의 멜로디’에서는 상황이 또 달라졌다. 원곡 자체가 성악을 위한 작품인 만큼 피아노가 성악적 반주의 역할을 맡으며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고, 그 결과 윤은솔의 선율성이 한층 부각되었다. 특히 Con sordino, 즉 약음기를 사용한 연주는 음량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고 음색을 가늘고 투명하게 만들어 인간의 목소리를 모방하는 듯한 내성적이고 부드러운 성격을 강화했다. 윤은솔의 바이올린은 이 작품에서 은은하면서도 섬세한 선율을 만들어 내었지만, 매끄러운 면은 덜 하였다.

 

③ 함께 숨 쉬는 음악에서, 자신의 호흡으로

 

결국 이날의 윤은솔은 아벨 콰르텟에서 보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으면서도, 독주자가 지녀야 할 성격을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냈다. 그녀에게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화려한 독주적 과시보다는 선율을 정확하게 세우고 음악의 구조를 논리적으로 드러내려는 태도였다. 이는 아벨에서 보여준 실내악적 감각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독주회라는 무대에서는 그 장점이 때로는 상대방과의 적극적인 충돌과 대비를 통해 더욱 확장될 필요도 있어 보였다. 앙코르는 사라사테의 ‘서주와 타란텔라’였다. 다만 이날의 앙코르는 말 그대로 앙코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쉬코프스키는 초견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 사람 사이에 충분한 준비와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공연 직전에 한두 번 맞춰보고 무대에 올라온 듯한 인상마저 있었다. 물론 청중에게는 그나마 익숙한 곡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앙코르의 목적이자 의미인지도 모른다. 필자처럼 공연의 세부적인 음악적 호흡까지 까다롭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크게 거슬리지 않았을 부분이다. 아벨 콰르텟의 윤은솔을 독주자로 처음 만난 이날의 무대는, 그녀가 실내악적 감각을 바탕으로 어떤 독주자로 성장해 갈지를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윤은솔이 아벨이라는 이름 안에서 보여주었던 ‘함께 숨 쉬는’ 음악을 넘어, 자신의 이름으로 얼마나 강한 호흡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