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 오스카 요켈 &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 with 양성원

2026년 8월 7일(금) 오후 7시 30분, 평택아트센터 대공연장

지휘 오스카 요켈,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 첼리스트 양성원, 소프라노 조윤지
프로그램: 드뷔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슈만 첼로 협주곡(첼리스트 앙코르: 바흐 모음곡 1번 사장조 사라방드), 말러 교향곡 4번


① 평창에서 평택으로 이어진 여름


지난해 평창대관령음악제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개막 공연부터 7월 27일 일요일의 콘서트 10까지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7월 29일 화요일부터 8월 2일 토요일 폐막 연주회까지 이어지는 공연은 빠짐없이 관람하고 ‘월간리뷰’에 그 감상을 남긴 바 있다. 재작년에도 하루를 평창에서 보내며 음악제를 지켜봤던 터라, 올해 단 한 번도 평창을 찾지 못한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선택한 것이 평창대관령음악제 이후 고양과 평택 등지에서 이어지고 있는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의 순회 연주회였다. 프로그램은 음악제 폐막공연과 동일하게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과 슈만 첼로 협주곡 그리고 말러 교향곡 제4번. 다만 협연자가 막시밀리안 호르눙에서 음악제 예술감독인 양성원으로 바뀌었다. 지난주 조성진 피아노 독주회를 위해 찾았던 평택아트센터의 음향과 시설이 고양아람누리보다 만족스러웠던 기억도 있어, 거리가 조금 더 멀더라도 평택을 택했다. 그렇게 일주일 만에 다시 평택으로 향했다.


②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일반적인 상설 교향악단과는 성격이 다르다. 해외 유수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전문 연주자들이 수석을 맡고, 음악제 기간에 모인 유학생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단기간에 구성되는 오케스트라다. 따라서 음악제 기간 내내 함께 호흡하며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감동에 빠뜨리기도 하고, 때로는 안타까운 탄성을 자아내게 하거나 실망시키기도 했던 바로 그 연주자들이 음악제가 끝난 뒤 다시 한 무대에 서는 셈이다.

올해도 라디오 프랑스의 악장 박지윤을 비롯해 바이올린 수석 임가진, 전 서울시립교향악단 비올라 수석 헝웨이 황, 전 서울시향 첼로 수석 주연선, KBS교향악단 더블베이스 수석 이창형 등이 포진했고, 파리 오페라 클라리넷 수석 김한, 전 NHK교향악단 오보에 수석 사토키 아오야마, 라디오 프랑스 팀파니 수석 장클로드 장장브르 등 지난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면면이 악단의 중심을 이루었다.

2026년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국내외 전문 연주자들과 젊은 아카데미 단원들이 함께 구성된 형태였다. 바이올린·비올라·첼로·더블베이스에는 ‘일반 단원’과 ‘아카데미 단원’이 구분되어 참여했고, 아카데미 단원들에게는 교육과 실제 연주 경험을 동시에 제공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었다. 다만 음대 재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다 보니 전문 연주자와 젊은 단원 사이의 기량 차이가 때로는 숨기기 어려울 만큼 선명하게 드러났다는 점은 이 오케스트라가 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했다.


③ 지휘자 오스카 요켈


이번 공연에서 가장 궁금했던 인물은 지휘자 오스카 요켈(Oscar Jockel)이었다. 1995년생으로 독일 레겐스부르크 출신인 작곡가 겸 지휘자 요켈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그라츠 음악대학,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했으며, 2021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선정된 데 이어 202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카라얀 영(Young) 지휘자상을 수상했다. 작곡가이기도 한 젊은 지휘자가 드뷔시와 말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궁금했던 만큼 이번 무대는 직접 확인할 좋은 기회였다. 요켈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역시 작곡가다운 악곡에 대한 구조적 접근이었다. 작품의 형식과 구조를 명확하게 파악한 뒤 그 틀 안에서 음악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감각적인 효과에 먼저 기대기보다는 악보의 구조를 따라가면서 음악의 긴장과 이완을 구축했다.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 특히 그러했다. 첫 플루트의 네 마디가 지나간 뒤 한 마디의 쉼표, 그리고 리허설 마크 1번에 이르기 전의 긴 휴지에서 요켈은 좀처럼 서두르지 않았다. 다음 소절이 언제 이어질지 기다리게 할 정도로 시간을 충분히 늘여놓았다. 그 순간 객석의 몸이 먼저 움찔할 만큼 긴장감이 생겼다. 그 신중한 접근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그러나 단순히 느린 것이 아니라 끈덕지고 강렬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목신을 깨우고 요정들을 유혹하면서 서서히 관능의 온도를 높여가는 듯했다. 요켈이 만들어낸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은 자극적으로 노골적이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관능적이었다. 한 편의 진한 정사(情事)를 연상시키되 격렬하거나 적나라하지 않은, 은밀하고 감각적인 음악이었다.

이러한 음악 만들기 방식은 2부의 말러 교향곡 제4번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요켈에게 말러 4번은 알프스의 양떼 목장이었다. 그곳에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고, 뿔피리를 불며, 술래잡기를 했다. 오해도 갈등도, 증오와 혐오도 존재하지 않는 천국이다. 인간이 잠시 현실의 삶으로부터 벗어나 머물 수 있는 도피처이기도 하다. 요켈은 말러 4번의 소박함과 천진함을 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음형과 짧은 악구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드러내면서 거대한 오케스트라 안에 숨겨진 실내악적 대화를 부각했다. 평창에서부터 같은 곡을 맞추고 연습해왔기 때문인지 앙상블도 선명했다. 각 파트가 또렷하게 들렸고, 서로 다른 악기들이 주고받는 상호작용 역시 잘 포착됐다. 최근 들었던 말러 4번 가운데 가장 아기자기하면서도 앙상블의 치밀함이 돋보이는 연주였다. 말러의 거대한 스케일을 앞세우기보다는 작은 음형과 색채, 악기 사이의 대화를 통해 작품의 순진무구한 세계를 만들어낸 점은 젊은 지휘자의 개성이 분명하게 드러난 부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치밀함을 더욱 완성도 높은 연주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몇 가지 아쉬움이 남았다. 가장 먼저 드뷔시에서 타악기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음향 배치와 밸런스가 적절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각 파트의 인토네이션 불균형도 서로 분리되어 들리는 순간이 있었다. 말러에서는 제3악장에서 이어져야 할 목관의 선이 종종 끊어졌다. 각각의 음형은 살아 있었지만 서로 맞물려 하나의 긴 호흡으로 이어져야 할 선이 단절되면서 음악의 흐름이 부분적으로 흐트러졌다. 제4악장에서는 템포를 대비시키려는 요켈의 의도가 충분히 이해되었다. 다만 그 대비가 지나치게 급격해서 조현지와 목관이 숨가쁘게 따라와 조현지의 가사가 들리지 않고 뭉개졌다. 무엇보다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은 것은 제4악장 마지막 부분이었다. ppp를 완벽하게 구현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순이 마지막에 등장하는 140마디의 4악장 주제 모티브를 살려내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말러 4번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바순의 존재는 단순히 작은 음량으로 처리되어야 할 한 파트가 아니라, 음악이 천국의 문을 향해 사라져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귀 기울여야 할 목소리다. 계속 이어져 오던 모티브를 바순에서 놓친 것은 연주 전체의 인상을 생각하면 더욱 아쉽다.

그럼에도 이번 평택 공연은 올해 평창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상당 부분 달래주었다. 무엇보다 오스카 요켈이라는 젊은 지휘자의 음악적 언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의미 있었다. 그는 작품을 감각적으로 소비하기보다는 구조를 읽고, 그 구조 속에서 음악의 서사를 만들어가는 지휘자였다. 드뷔시에서는 신중하고 관능적인 긴 호흡을, 말러에서는 천진난만하고 실내악적인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아직 젊은 지휘자이고, 악단 역시 전문 연주자와 아카데미 단원이 함께하는 프로젝트 오케스트라라는 점에서 완성도에 편차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편차 자체가 이 오케스트라의 한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음악을 만들고 무대에 오른 젊은 연주자들에게는 하나의 학교였을 것이며, 요켈에게도 자신의 음악적 사고를 실제 오케스트라와 시험해볼 수 있는 좋은 무대였을 것이다.


④ 첼리스트 양성원의 슈만 협주곡


슈만의 첼로 협주곡은 전통적인 의미의 협주곡과는 상당히 다른 작품이다. 첼로와 관현악의 대결 구도보다는 지극히 내면적이고 서정적이며, 독주 첼로와 오케스트라가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는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독주자의 존재감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감이 관현악과 얼마나 정교하게 맞물려 하나의 음악적 흐름을 만들어내느냐에 있다. 그러나 이번 연주에서는 그 균형이 끝내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

양성원은 처음부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음악을 리드하고 이끌어가는 쪽을 택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양성원의 고질적인 취약점인 불안정한 리듬과 미세한 음정의 흔들림이 곡의 개시부터 드러났다는 것이다. 12마디의 V화음 반종지에서 현악부가 싱커페이션의 박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독주 첼로가 혼자 온음표를 박보다 먼저 끊었고, 15도 아래에 놓인 C음을 짚는 과정에서도 정확성이 흔들렸다. 결국 양성원은 지휘자인 요켈이 아니라 악장 박지윤에게 몸을 돌려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32분음표 7연음으로 상승하는 빠른 음형에서도 리듬과 음정이 동시에 안정되지 못하는 등 이런 식의 미세한 박자와 음정의 어긋남은 이후에도 곳곳에서 반복됐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독주자와 오케스트라의 관계였다. 양성원이 오케스트라에 자신을 맞추기보다 오케스트라가 시종일관 양성원을 받쳐주고 빛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슈만 협주곡에서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는 특히 치명적이다. 이 작품의 음악적 생명력은 독주자의 독백이 아니라 독주와 관현악 사이의 대화, 그리고 그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는 호흡에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휘자 요켈 역시 자신의 음악적 구상을 충분히 밀어붙이지 못했다. 치밀하고 꼼꼼한 성향의 지휘자임에도 독주자의 위상에 눌려 관현악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끌고 가는 힘이 약해졌고, 관현악단 역시 지휘자를 중심으로 움직이기보다 상당 부분 관습적인 연주에 기대는 모습을 보였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3악장 리허설 마크 R의 d단조 전체 합주였다. 요켈은 분명 이 부분이 주제의 마지막 합주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과 음 사이에 의도적으로 공간을 만들고 루바토를 주면서 팔을 들어 조절했다. 그런데 트럼펫은 그 제스처를 전혀 따라가지 않은 채 악보에 기보된 박자대로 연주했다. 연습 과정에서 그렇게 합의했을 가능성도 있고, 오케스트라의 모든 단원이 매 순간 지휘자의 손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 전체 합주가 공유하는 호흡과 통일성이다. 그 통일성이 실제 무대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면이었다. 이것을 특정 연주자 한 사람의 실수로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문제는 한 사람의 음악적 존재감이 전체 앙상블의 균형을 압도하면서 각자의 음악적 판단이 하나의 방향으로 수렴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지휘자가 의도한 루바토를 관현악이 즉각적으로 공유하지 못하고, 독주자의 미세한 리듬 변화가 오케스트라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며, 그 결과 서로 다른 음악적 시간이 동시에 흘러가는 순간들이 반복됐다. 결국 이번 연주의 아쉬움은 몇 차례의 음정이나 박자 실수에 있지 않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누가 음악을 이끌고 있는가가 아니라, 무대 위의 모든 연주자가 과연 하나의 음악적 의지를 공유하고 있었는가에 있다. 오케스트라는 양성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배경으로 물러났고, 양성원은 그만큼의 독주적 존재감을 확보했지만, 그 과정에서 슈만 협주곡 특유의 대화적 구조와 앙상블의 유기성이 약화됐다. 요켈의 세밀한 제스처도 관현악 전체에 충분히 관철되지 못했다.

슈만의 협주곡은 독주자의 내면적인 목소리가 오케스트라의 목소리 속으로 스며들고, 다시 오케스트라의 응답이 독주자의 음악을 변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핵심인데 전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음악적 완성체로 바라보았을 때 그 균형과 통일성이 약했던 점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⑤ 40도 불볕더위의 입추에 평택에서 누린 천상의 삶


올해는 정작 평창에 한 번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평창에서 함께 음악을 만들었던 이들이 다시 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 그 여름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돌려받을 수 있었다. 음악은 한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한 계절의 경험은 다른 도시로 옮겨가고, 그곳에서 새로운 관객을 만나며 또 다른 기억으로 이어진다.

평택아트센터에서 만난 오스카 요켈과 평창페스티벌오케스트라는 평창대관령음악제가 끝난 뒤에도 음악제의 경험이 어떻게 다른 도시로 옮겨가고 확장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후일담이었다. 음악제에서 함께했던 음악가와 지휘자를 다시 만나는 일은 단순히 같은 연주자를 한 번 더 만나는 것과는 달랐다. 평창에서 만들어졌던 음악적 관계와 기억이 평택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다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로웠다.

이제 ‘평택에 간다’는 말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단순히 평택아트센터라는 새로운 공연장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음악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고 먼 길을 이동한다는 의미가 생기고 있다. 좋은 공연장이 생긴다는 것은 건물 하나가 더 들어선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이 굳이 그 도시까지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긴다는 뜻이다.

부천아트센터가 문을 연 지 이제 3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사이 부천에 음악을 들으러 간 횟수가 지난 40년 동안 부천에 갔던 횟수보다 많다. 부산콘서트홀 역시 개관한 지 1년 남짓하지만 연일 매진을 이어가며 서울 중심으로 짜여 있던 한국 클래식 음악의 지도를 조금씩 바꾸고 있다. 부산은 이제 좋은 공연장이 하나 있는 도시를 넘어, 오사카와 후쿠오카를 연결하는 아시아 문화권의 새로운 축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공연장 하나가 도시의 문화적 위상을 바꾸는 장면을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평택도 그렇게 될 것이다. 머지않아 ‘평택에 클래식 음악을 들으러 간다’는 말이 낯설지 않게 들릴 것이다. 음악을 듣기 위해 서울에서 평택으로 이동하고, 좋은 공연을 보기 위해 다른 도시에서 평택을 찾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그것은 평택아트센터의 존재가 도시 안에 머물지 않고 도시 밖으로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는 뜻일 것이다.

평창에서 시작된 음악이 평택으로 이어지고, 그 음악을 따라 필자 역시 다시 평택으로 갔다. 어쩌면 좋은 공연장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고, 도시를 다시 보게 하고, 한 장소에서 끝났다고 생각했던 음악적 기억을 다른 장소에서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7일은 입추였다. 그런데 기온은 40도까지 치솟았다. 그럼에도 평택아트센터 안에서는 바깥의 기온과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흘렀다. 밖의 뜨거운 공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천상의 삶이었다. 8월 26일 수요일에 정명훈이 이끄는 KBS교향악단이 평택을 찾는다. 임윤찬의 뒤를 이어 차세대 한국 피아니스트로 급부상하고 있는 김세현과 함께하는 무대다.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 평택행이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