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8월 8일(금)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아드리랑 페뤼숑,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① 비바 바그너! 한국에서 만난 ‘니벨룽의 반지’
바그너의 실연이 주는 가치는 형언할 수 없다. 바그너를 한국에서 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고 감사하다.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애쓴 수많은 음악인과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세워지기 전의 바그너는 평생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낭인처럼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서는 무려 164회의 리허설을 거쳐야 했고, 그마저도 반대파의 방해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일에는 창작 당시의 작곡가와 제작자든, 후대의 기획자든 각고의 노력과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갖은 방해와 악평으로 소정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유·무형의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바그너 악극의 본고장도 아닌 이역만리 한국에서, 나흘에 걸쳐 상연되는 20시간에 육박하는 ‘니벨룽의 반지’를 약 4시간의 콘체르탄테 형식으로라도 감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요 기적이다. 20~30여 년 전 독일 유학 시절, 학교 전공 지도교수가 개설한 ‘니벨룽의 반지’ 분석 수업을 멋도 모르고 수강한 덕분에 열일곱 살 때 바그너라는 거대한 우주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소년 루트비히 왕자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 되었던 것처럼, 10대 필자 역시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를 돌아다니며 값싼 오페라극장 꼭대기 좌석에 앉아 단돈 5마르크, 당시 우리 돈으로 2,500원쯤을 내고 바그너를 보았다. 그렇게 바그너와 인연을 맺은 뒤 한국에 돌아와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고, 이번에는 드디어 ‘니벨룽의 반지’ 링 사이클을 접하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다. 마치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떨리고 설레었다. 바이로이트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직접 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국에서 ‘링’을 이런 방식으로라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려했던 연주력과 성악은 기우에 불과했다. 필자 같은 ‘찐 바그네리안’은 물론이고, 바그너라는 악극의 거대한 무게에 눌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우리 한국 관객들도 친절한 자막과 상세한 설명 덕분에 ‘니벨룽의 반지’의 진면목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니벨룽의 반지’야말로 19세기의 오픈월드 ‘젤다의 전설’이자, 20세기 ‘반지의 제왕’이며, 21세기 스페이스 오디세이인 ‘스타워즈’에 해당하는, 엔터테인먼트의 결정체이자 최고봉이요 공연을 보는 내내 ‘비바 바그너!’를 외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지 않았기에 공연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아트앤아티스트가 직접 제작했다는 하이라이트 편집에 감탄하고,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또 아쉬워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약 4시간 동안 중세 게르만 및 북유럽 신화의 세계를 따라갈 수 있었다.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성악을 중심으로 편집되었고, 특히 이중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악절과 장면의 구분도 유도동기를 통해 비교적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바그너의 작품에서 시대적 한계이자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될 수 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장광설을 과감하게 덜어내면서 전체적으로 상당히 콤팩트한 구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적 우주가 축소되거나 가벼워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핵심적인 순간들을 압축해 보여줌으로써 ‘니벨룽의 반지’가 지닌 서사와 음악의 힘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었다.
② 바그너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 경험과 숙련이 갈라놓은 무대의 온도
이번 공연의 출연진을 바라보며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차이는 단순히 성악적 기량의 우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그너를 실제 무대에서 경험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간극이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악보에 적힌 음표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긴 호흡의 프레이징, 독일어 텍스트의 밀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 인물의 심리적 진행,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음악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어떻게 위치시키느냐가 동시에 요구된다. 결국 바그너에서는 ‘잘 부르는 것’과 ‘바그너를 부르는 것’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알베리히와 하겐을 맡은 사무엘 윤이었다. 그는 단순히 바그너를 잘 부르는 성악가가 아니라 바그너의 음악극적 문법을 체화한 가수였다. 음성의 질감과 언어의 무게, 프레이즈의 방향성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욕망과 악의가 몸짓 하나에도 스며들었다. 특히 바그너의 악역은 단순한 악인으로 처리해서는 극적 생명력을 얻기 어렵다. 사무엘 윤은 소리와 연기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행위로 만들어냈다. 출연진 가운데 바그너 가수로서의 경험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명불허전이었다.
도너와 군터를 맡은 김기훈 역시 인상적이었다. 하이 바리톤 특유의 밝은 배음과 탄력 있는 음색에 힘과 드라마를 실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성종적 장점을 바그너적 발성의 방향으로 연결하려는 감각이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한번 절감한 것은 성악에서 타고난 목소리만으로는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기훈의 가창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기본기의 힘이 있었다. 정확한 호흡과 발성, 성구의 균형, 음정의 안정성, 그리고 그 모든 기술을 음악적 표현으로 전환하는 숙련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성악가라도 결국 성장은 지루하고 고된 반복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루의 연습을 건너뛰지 않는 습관, 기본기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과정, 그리고 그 축적된 기술을 무대 위에서 본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숙달. 그것이야말로 성악가의 성장에 가장 확실한 자양분이라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여러 차례 무대에서 만났던 김승직과 박승주를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다. 보탄 역의 최인식 역시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음색을 바탕으로 신들의 왕이자 계약의 신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칙을 어겨 파멸하면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가족까지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넣어 괴로워하는 아버지라는 이중, 삼중적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보탄은 단순히 신들의 왕이라는 위엄만으로 완성되는 역할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만든 질서와 계약에 속박되어 몰락을 향해 가는 비극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권위와 인간적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최인식의 음성에는 그 층위를 향한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아트앤아티스트 소속 성악가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점이다. 프로덕션이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낯선 레퍼토리를 실제 무대에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오페라 가수에게 실전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특히 바그너처럼 단순한 레퍼토리 확장의 차원을 넘어 발성, 언어, 연기, 체력, 음악적 사고방식 자체를 요구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경험하는 것은 향후 성악가들의 성장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번 공연이 완성도 높은 바그너 공연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완성도만을 기준으로 이 시도를 평가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오히려 이번 무대는 바그너라는 낯선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성악가들에게 일종의 도약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 당장은 미숙한 부분이 눈에 띄더라도, 이러한 경험이 축적된다면 언젠가 이들이 전혀 다른 바그너 가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이 프로덕션의 성장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만 그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이번 공연의 문제점을 유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브륀힐데 역의 이명주와 지크프리트 역의 김재형에게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로 ‘바그너적 사고’의 부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이미 자신의 영역을 확립한 정상급 성악가이며, 무엇보다 천성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다. 그러나 토스카와 카바라도시의 문법을 바그너의 세계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 효과를 분리해서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성악선 자체가 오케스트라와 텍스트, 인물의 심리와 거대한 극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이명주는 적어도 그 차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바그너의 세계에 어떻게든 동화되려는 시도가 보였다. 아직 완전히 체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방향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김재형에게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지크프리트는 ‘순수한 바보’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원초적 인간이며, 자신의 힘과 본능에 이끌려 세계를 헤쳐 나가는 존재다. 그런데 김재형이 보여준 지크프리트는 지나치게 이지적이었다. 지크프리트 특유의 야생성과 천진난만한 폭발력이 사라지고, 악보를 정확히 소화하는 데 집중한 지성적인 가수의 모습이 전면에 나왔다. 더욱 아쉬웠던 것은 보면대에 악보를 놓고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결과 무대 위에서 인물이 사라져 버렸다. 노래는 있었지만 극적 행위가 부족했다. 그 문제는 ‘지크프리트’ 1막 3장, 대장간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지크프리트가 노퉁을 다시 벼리고, 곧 용을 죽이러 갈 것이라는 흥분을 폭발시키는 동시에 미메가 그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장면이다. 지크프리트의 천진난만한 야성과 미메의 교활하고 병적인 욕망이 충돌하고. 음악적 긴장 역시 그 두 인물의 상반된 에너지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는 그 극적 대비가 거의 사라졌다. 지크프리트의 흥분도, 미메의 탐욕도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악단 내 타악기 주자가 극도로 조심스럽게 망치를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는 거 뿐이었다.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극에서 대장간의 망치 소리가 단순한 효과음으로 축소되는 순간, 장면의 핵심적인 극적 에너지 역시 함께 증발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고 지그프리트를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이 노퉁을 단련하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장면에서는 망치질 하나까지도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음악과 극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행위가 된다. 지크프리트가 노퉁을 벼리는 것은 칼을 만드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행위다. 그런 맥락에서 그 장면의 물리적 에너지와 음악적 에너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관련 공연 영상을 충분히 연구하고 참고했더라면 이번 무대의 장면 구성 역시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크린데 역의 김은희는 이번 공연에서 인물 구축의 실패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었다. 무대 위에 등장한 흰색 드레스부터 캐릭터의 본질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훈딩에게 강제로 결혼 당해 숲속에서 억압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자, 어린 시절 헤어진 쌍둥이 오빠와 재회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동시에 발견하는 지크린데의 정서가 외형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특히 지크문트와의 재회 이후 이어지는 감정의 폭발이 아쉬웠다. 이 장면에서 지크린데는 단순히 사랑에 빠진 여성이 아니다. 억압된 삶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고, 동시에 사회적·도덕적 금기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해방이 물리적으로 형상화되는 노퉁이 나무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은 환희와 경악, 해방감이 충분한 에너지로 폭발하지 않았다. 관객이 함께 숨을 멈추고 있다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야 할 장면이 지나치게 미온적으로 처리되면서, 바그너가 설계한 극적 감흥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성악적으로 음을 내는 것과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결국 이번 공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가창력’과 ‘레퍼토리 적합성’, 그리고 ‘무대 경험’이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바그너를 부르기 위해서는 좋은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바그너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자신의 성악적 신체에 다시 입력하고,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설계하며, 동시에 인물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 윤과 다른 출연진 사이의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바그너는 새로운 레퍼토리가 아니라 이미 수많은 무대를 통해 축적된 경험의 일부다. 반면 다른 가수들에게 바그너는 아직 탐색해야 할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③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아드리앙 페뤼숑이 지휘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이것부터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전문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들이 평소 손에 익혀 연주하던 레퍼토리도 아니다. 새로 공부하고, 새로 익히고, 새로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한 편의 오페라 갈라조차 아니고 무려 네 개의 작품에서 발췌한 음악을 가지고 4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버텨야 한다. 현악기 주자들의 팔에는 건초염이 올 것이고, 목관악기 주자들의 입술은 부르틀 것이며, 금관악기 주자들의 체력은 진작에 바닥났을 것이다. 바그너는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것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인 작곡가다. 악기가 낼 수 있는 음량과 음역, 음색과 표현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모든 파트에서 개인 연습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고 초견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악보를 읽는 것과 바그너를 연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연의 지휘자가 페뤼숑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서너 차례 접한 페뤼숑의 지휘에 대한 인상은 프랑스인답게 프랑스 레퍼토리나 림스키코르사코프, 프로코피예프 같은 색채적이고 리드미컬한 작품을 주로 내세우려는 듯했지만, 정작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악은 무미건조하고 밋밋했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타악기 주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타점이 명확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타점이 불분명했다. 리듬을 타지 못하고 음악을 앞으로 몰아붙이는 순간이 잦았으며, 그가 지휘봉을 휘두를 때마다 목관과 금관에서 실수가 잦아지고 음들이 흔들렸다. 어느 순간에는 음들이 슝슝 빠져나가며 공중에 흩날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대책 없이 빠른 템포와 무엇이든 그저 설렁설렁하게 넘기는 게 그동안 접했던 페뤼숑이었기에 바그너를 한다고 했을 때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4시간이 넘는 바그너를 과연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카리스마는 차치하고서라도 스태미너와 지속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혹시 외국인 지휘자의 한국에서의 업적 쌓기 정도로 소비되는 공연은 아닐까하는 의심과 선입견은 ‘라인의 황금’ 콘트라베이스가 첫 음 E♭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울려 퍼지게 하였을 때 소멸되었다. 페뤼숑은 소절 하나하나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작품에 파고든 매니아였고, 바그너의 음악이 어디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필자와 같은 바그너 키즈였으며 극장 지휘자였다. 기승전결이 있었다. 전체를 보고 있었다. 1막 4장이라는 압축된 구조 안에서 물가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지하로 공간이 이동하고, 라인강과 발할라와 니벨하임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물의 요정과 난쟁이, 신과 거인, 신과 난쟁이라는 캐릭터의 대비도 분명한 프롤로그인 ‘라인의 황금’에서는 페뤼숑의 극적 감각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거대한 이야기를 세팅하는 데 가까웠다. ‘발퀴레’에 들어서자 촘촘하게 얽힌 인물 관계와 긴장, 음악과 극의 호흡,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의 압력. 페뤼숑은 그것들을 하나씩 끌어올리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잃지 않았다. 계속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효과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지 않았고, 반대로 전체적인 그림만 바라보다가 순간순간의 긴장을 놓치지도 않았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그림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금관을 자제시킨 점이 흥미로웠다. 금관의 포르테를 가급적 줄이면서 전체 악단과의 소리 균형을 맞추었다. 그래서 ‘발퀴레’ 마지막에서 “오직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만이 그 불길을 뚫고 그녀를 깨울 수 있다”라는 다음 영웅의 출현을 암시하는 보탄의 대사 후 작렬하는 트럼펫과 트롬본의 지크프리드 주제가 억제되어 강렬한 면은 좀 떨어졌지만 ‘장송곡’에서는 장엄하고 숭고했다.
부천필하모닉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쉬움도 컸다. 개인의 기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고, 단기간의 연습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조직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바그너는 음표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끝나는 음악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극을 이해하고, 그 극의 호흡을 오케스트라가 함께 가져가야 한다. 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한 음도 틀리지 않으며, 악보에 적힌 것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번 공연에서 발생한 개별적인 실수나 잘못을 굳이 하나하나 꼬집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극을 따라가던 관객을 갑작스럽게 보탄의 창에 찔린 듯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말 그대로 '대참사'에 가까운 순간들이 있었던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④ 바그너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
음정과 앙상블, 캐릭터의 체화, 독일어 텍스트의 전달, 무대적 행위, 오케스트라의 기량과 성숙도 등 여러 지점에서 미숙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미숙함은 동시에 앞으로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21세기의 오페라하우스가 과거의 걸작을 어떤 방식으로 현재화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모든 미학적·연출적 담론에 앞서 관객에게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음악적 만족과 극적 설득력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와 야심을 가진 프로덕션이라도 무대 위에서 음악과 인물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의도는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동시에 관객에게 오페라를 보는 즐거움이 완성된 명작을 감상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프로덕션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만의 문법을 찾아가는 과정, 낯선 레퍼토리에 도전한 성악가들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작품을 조금씩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오페라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바그너는 완성된 도착점이라기보다 하나의 출발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이번 무대의 경험이 다음 무대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성장으로 증명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바그너는 가수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쉽게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가수, 이전과 같은 음악 애호가로 돌아가기 어렵다. 이번 공연이 이들에게 바로 그런 통과의례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극장, 다른 프로덕션에서 이들이 다시 바그너를 부르고 들을 때, 이번 무대에서 드러났던 미숙함이 얼마나 극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또한 관객으로서 기다려볼 만한 일일 것이다.
바그너를 한국에서 듣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거대한 ‘링’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해준 모든 음악인과 제작진에게 다시 한번 깊은 경의를 표한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2026년 8월 8일(금)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아드리랑 페뤼숑,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① 비바 바그너! 한국에서 만난 ‘니벨룽의 반지’
바그너의 실연이 주는 가치는 형언할 수 없다. 바그너를 한국에서 들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이고 감사하다.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애쓴 수많은 음악인과 관계자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이 세워지기 전의 바그너는 평생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낭인처럼 유럽을 떠돌아다녔다. ‘탄호이저’의 파리 초연을 위해서는 무려 164회의 리허설을 거쳐야 했고, 그마저도 반대파의 방해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한 편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리는 일에는 창작 당시의 작곡가와 제작자든, 후대의 기획자든 각고의 노력과 엄청난 준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갖은 방해와 악평으로 소정의 결과를 얻지 못하고, 유·무형의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마당에 바그너 악극의 본고장도 아닌 이역만리 한국에서, 나흘에 걸쳐 상연되는 20시간에 육박하는 ‘니벨룽의 반지’를 약 4시간의 콘체르탄테 형식으로라도 감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요 기적이다. 20~30여 년 전 독일 유학 시절, 학교 전공 지도교수가 개설한 ‘니벨룽의 반지’ 분석 수업을 멋도 모르고 수강한 덕분에 열일곱 살 때 바그너라는 거대한 우주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소년 루트비히 왕자가 바그너의 열렬한 팬이 되었던 것처럼, 10대 필자 역시 독일·스위스·오스트리아를 돌아다니며 값싼 오페라극장 꼭대기 좌석에 앉아 단돈 5마르크, 당시 우리 돈으로 2,500원쯤을 내고 바그너를 보았다. 그렇게 바그너와 인연을 맺은 뒤 한국에 돌아와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의 ‘탄호이저’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관람했고, 이번에는 드디어 ‘니벨룽의 반지’ 링 사이클을 접하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다. 마치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떨리고 설레었다. 바이로이트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직접 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한국에서 ‘링’을 이런 방식으로라도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려했던 연주력과 성악은 기우에 불과했다. 필자 같은 ‘찐 바그네리안’은 물론이고, 바그너라는 악극의 거대한 무게에 눌려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우리 한국 관객들도 친절한 자막과 상세한 설명 덕분에 ‘니벨룽의 반지’의 진면목을 충분히 맛볼 수 있었다. ‘니벨룽의 반지’야말로 19세기의 오픈월드 ‘젤다의 전설’이자, 20세기 ‘반지의 제왕’이며, 21세기 스페이스 오디세이인 ‘스타워즈’에 해당하는, 엔터테인먼트의 결정체이자 최고봉이요 공연을 보는 내내 ‘비바 바그너!’를 외치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프로그램북을 구입하지 않았기에 공연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 마음속으로 그려가며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면서 아트앤아티스트가 직접 제작했다는 하이라이트 편집에 감탄하고, 때로는 탄식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또 아쉬워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약 4시간 동안 중세 게르만 및 북유럽 신화의 세계를 따라갈 수 있었다. 콘서트 오페라 형식이다 보니 아무래도 성악을 중심으로 편집되었고, 특히 이중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악절과 장면의 구분도 유도동기를 통해 비교적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바그너의 작품에서 시대적 한계이자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될 수 있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장광설을 과감하게 덜어내면서 전체적으로 상당히 콤팩트한 구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적 우주가 축소되거나 가벼워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핵심적인 순간들을 압축해 보여줌으로써 ‘니벨룽의 반지’가 지닌 서사와 음악의 힘을 한 번에 체험할 수 있었다.
② 바그너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 경험과 숙련이 갈라놓은 무대의 온도
이번 공연의 출연진을 바라보며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차이는 단순히 성악적 기량의 우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그너를 실제 무대에서 경험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생각보다 훨씬 깊은 간극이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악보에 적힌 음표를 정확히 재현하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긴 호흡의 프레이징, 독일어 텍스트의 밀도, 오케스트라와의 관계, 인물의 심리적 진행, 그리고 무엇보다 거대한 음악적 구조 속에서 자신의 몸과 목소리를 어떻게 위치시키느냐가 동시에 요구된다. 결국 바그너에서는 ‘잘 부르는 것’과 ‘바그너를 부르는 것’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준 사람이 알베리히와 하겐을 맡은 사무엘 윤이었다. 그는 단순히 바그너를 잘 부르는 성악가가 아니라 바그너의 음악극적 문법을 체화한 가수였다. 음성의 질감과 언어의 무게, 프레이즈의 방향성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욕망과 악의가 몸짓 하나에도 스며들었다. 특히 바그너의 악역은 단순한 악인으로 처리해서는 극적 생명력을 얻기 어렵다. 사무엘 윤은 소리와 연기를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행위로 만들어냈다. 출연진 가운데 바그너 가수로서의 경험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명불허전이었다.
도너와 군터를 맡은 김기훈 역시 인상적이었다. 하이 바리톤 특유의 밝은 배음과 탄력 있는 음색에 힘과 드라마를 실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성종적 장점을 바그너적 발성의 방향으로 연결하려는 감각이 있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다시 한번 절감한 것은 성악에서 타고난 목소리만으로는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기훈의 가창에는 오랜 시간 축적된 기본기의 힘이 있었다. 정확한 호흡과 발성, 성구의 균형, 음정의 안정성, 그리고 그 모든 기술을 음악적 표현으로 전환하는 숙련이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성악가라도 결국 성장은 지루하고 고된 반복훈련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루의 연습을 건너뛰지 않는 습관, 기본기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는 과정, 그리고 그 축적된 기술을 무대 위에서 본능처럼 사용할 수 있게 만드는 숙달. 그것이야말로 성악가의 성장에 가장 확실한 자양분이라는 오래된 진리를 다시 확인하게 했다. 여러 차례 무대에서 만났던 김승직과 박승주를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다. 보탄 역의 최인식 역시 부드러우면서도 근엄한 음색을 바탕으로 신들의 왕이자 계약의 신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칙을 어겨 파멸하면서 그걸 극복하기 위해 내세운 가족까지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넣어 괴로워하는 아버지라는 이중, 삼중적 면모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보탄은 단순히 신들의 왕이라는 위엄만으로 완성되는 역할이 아니다.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만든 질서와 계약에 속박되어 몰락을 향해 가는 비극적 인물이라는 점에서, 권위와 인간적 연약함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최인식의 음성에는 그 층위를 향한 가능성이 있었다.
이번 공연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아트앤아티스트 소속 성악가들이 상당수 참여했다는 점이다. 프로덕션이 공연을 직접 기획하고 제작하면서 소속 아티스트들에게 낯선 레퍼토리를 실제 무대에서 경험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다. 오페라 가수에게 실전만큼 좋은 교육은 없다. 특히 바그너처럼 단순한 레퍼토리 확장의 차원을 넘어 발성, 언어, 연기, 체력, 음악적 사고방식 자체를 요구하는 작곡가의 작품을 실제 무대에서 경험하는 것은 향후 성악가들의 성장에 중요한 자산이 될 수 있다. 물론 이번 공연이 완성도 높은 바그너 공연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완성도만을 기준으로 이 시도를 평가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오히려 이번 무대는 바그너라는 낯선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성악가들에게 일종의 도약대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금 당장은 미숙한 부분이 눈에 띄더라도, 이러한 경험이 축적된다면 언젠가 이들이 전혀 다른 바그너 가수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이 프로덕션의 성장 과정에서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다만 그 성장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과 이번 공연의 문제점을 유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브륀힐데 역의 이명주와 지크프리트 역의 김재형에게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바로 ‘바그너적 사고’의 부족이었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이미 자신의 영역을 확립한 정상급 성악가이며, 무엇보다 천성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가수들이다. 그러나 토스카와 카바라도시의 문법을 바그너의 세계에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다.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아름다운 선율과 극적 효과를 분리해서 접근할 수 있는 음악이 아니다. 성악선 자체가 오케스트라와 텍스트, 인물의 심리와 거대한 극적 구조 속에서 작동한다. 이명주는 적어도 그 차이를 감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기존 스타일을 그대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바그너의 세계에 어떻게든 동화되려는 시도가 보였다. 아직 완전히 체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방향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있었다. 김재형에게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났다. 지크프리트는 ‘순수한 바보’이자 두려움을 모르는 원초적 인간이며, 자신의 힘과 본능에 이끌려 세계를 헤쳐 나가는 존재다. 그런데 김재형이 보여준 지크프리트는 지나치게 이지적이었다. 지크프리트 특유의 야생성과 천진난만한 폭발력이 사라지고, 악보를 정확히 소화하는 데 집중한 지성적인 가수의 모습이 전면에 나왔다. 더욱 아쉬웠던 것은 보면대에 악보를 놓고 노래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결과 무대 위에서 인물이 사라져 버렸다. 노래는 있었지만 극적 행위가 부족했다. 그 문제는 ‘지크프리트’ 1막 3장, 대장간 장면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지크프리트가 노퉁을 다시 벼리고, 곧 용을 죽이러 갈 것이라는 흥분을 폭발시키는 동시에 미메가 그를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장면이다. 지크프리트의 천진난만한 야성과 미메의 교활하고 병적인 욕망이 충돌하고. 음악적 긴장 역시 그 두 인물의 상반된 에너지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이번 무대에서는 그 극적 대비가 거의 사라졌다. 지크프리트의 흥분도, 미메의 탐욕도 충분히 살아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악단 내 타악기 주자가 극도로 조심스럽게 망치를 두드리며 리듬을 맞추는 거 뿐이었다. 바그너의 거대한 음악극에서 대장간의 망치 소리가 단순한 효과음으로 축소되는 순간, 장면의 핵심적인 극적 에너지 역시 함께 증발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제임스 레바인이 지휘하고 지그프리트를 지그프리트 예루살렘이 노퉁을 단련하는 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장면에서는 망치질 하나까지도 단순한 동작이 아니라 음악과 극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행위가 된다. 지크프리트가 노퉁을 벼리는 것은 칼을 만드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행위다. 그런 맥락에서 그 장면의 물리적 에너지와 음악적 에너지는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관련 공연 영상을 충분히 연구하고 참고했더라면 이번 무대의 장면 구성 역시 상당히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한 사람을 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지크린데 역의 김은희는 이번 공연에서 인물 구축의 실패가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주었다. 무대 위에 등장한 흰색 드레스부터 캐릭터의 본질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훈딩에게 강제로 결혼 당해 숲속에서 억압된 삶을 살아가는 여성이자, 어린 시절 헤어진 쌍둥이 오빠와 재회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동시에 발견하는 지크린데의 정서가 외형적으로도, 연기적으로도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다. 특히 지크문트와의 재회 이후 이어지는 감정의 폭발이 아쉬웠다. 이 장면에서 지크린데는 단순히 사랑에 빠진 여성이 아니다. 억압된 삶 속에서 자신이 잃어버렸던 기억과 정체성을 되찾고, 동시에 사회적·도덕적 금기를 넘어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해방이 물리적으로 형상화되는 노퉁이 나무에서 뽑혀 나오는 순간은 환희와 경악, 해방감이 충분한 에너지로 폭발하지 않았다. 관객이 함께 숨을 멈추고 있다가 마침내 터져 나오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해야 할 장면이 지나치게 미온적으로 처리되면서, 바그너가 설계한 극적 감흥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성악적으로 음을 내는 것과 인물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드러난 순간이었다.
결국 이번 공연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가창력’과 ‘레퍼토리 적합성’, 그리고 ‘무대 경험’이 서로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사실이다. 바그너를 부르기 위해서는 좋은 목소리만으로는 부족하다. 바그너 언어를 이해하고, 그 언어를 자신의 성악적 신체에 다시 입력하고, 오케스트라의 거대한 음향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설계하며, 동시에 인물을 몸으로 살아내야 한다. 그래서 사무엘 윤과 다른 출연진 사이의 차이가 더욱 크게 느껴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에게 바그너는 새로운 레퍼토리가 아니라 이미 수많은 무대를 통해 축적된 경험의 일부다. 반면 다른 가수들에게 바그너는 아직 탐색해야 할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③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과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아드리앙 페뤼숑이 지휘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는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이것부터 인정하고 시작해야 한다. 전문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들이 평소 손에 익혀 연주하던 레퍼토리도 아니다. 새로 공부하고, 새로 익히고, 새로 몸에 집어넣어야 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한 편의 오페라 갈라조차 아니고 무려 네 개의 작품에서 발췌한 음악을 가지고 4시간에 가까운 시간을 버텨야 한다. 현악기 주자들의 팔에는 건초염이 올 것이고, 목관악기 주자들의 입술은 부르틀 것이며, 금관악기 주자들의 체력은 진작에 바닥났을 것이다. 바그너는 오케스트레이션이라는 것 자체를 끝까지 밀어붙인 작곡가다. 악기가 낼 수 있는 음량과 음역, 음색과 표현의 가능성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모든 파트에서 개인 연습은 당연히 전제되어야 하고 초견은 애초에 가당치도 않다. 악보를 읽는 것과 바그너를 연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공연의 지휘자가 페뤼숑이라는 사실은 솔직히 걱정스러웠다. 지금까지 서너 차례 접한 페뤼숑의 지휘에 대한 인상은 프랑스인답게 프랑스 레퍼토리나 림스키코르사코프, 프로코피예프 같은 색채적이고 리드미컬한 작품을 주로 내세우려는 듯했지만, 정작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악은 무미건조하고 밋밋했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타악기 주자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타점이 명확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타점이 불분명했다. 리듬을 타지 못하고 음악을 앞으로 몰아붙이는 순간이 잦았으며, 그가 지휘봉을 휘두를 때마다 목관과 금관에서 실수가 잦아지고 음들이 흔들렸다. 어느 순간에는 음들이 슝슝 빠져나가며 공중에 흩날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대책 없이 빠른 템포와 무엇이든 그저 설렁설렁하게 넘기는 게 그동안 접했던 페뤼숑이었기에 바그너를 한다고 했을 때 의심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4시간이 넘는 바그너를 과연 끝까지 끌고 갈 수 있을까. 카리스마는 차치하고서라도 스태미너와 지속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혹시 외국인 지휘자의 한국에서의 업적 쌓기 정도로 소비되는 공연은 아닐까하는 의심과 선입견은 ‘라인의 황금’ 콘트라베이스가 첫 음 E♭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울려 퍼지게 하였을 때 소멸되었다. 페뤼숑은 소절 하나하나를 외우고 있을 정도로 작품에 파고든 매니아였고, 바그너의 음악이 어디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필자와 같은 바그너 키즈였으며 극장 지휘자였다. 기승전결이 있었다. 전체를 보고 있었다. 1막 4장이라는 압축된 구조 안에서 물가에서 천상으로, 천상에서 지하로 공간이 이동하고, 라인강과 발할라와 니벨하임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고 물의 요정과 난쟁이, 신과 거인, 신과 난쟁이라는 캐릭터의 대비도 분명한 프롤로그인 ‘라인의 황금’에서는 페뤼숑의 극적 감각이 본격적으로 폭발하기보다는 앞으로 펼쳐질 거대한 이야기를 세팅하는 데 가까웠다. ‘발퀴레’에 들어서자 촘촘하게 얽힌 인물 관계와 긴장, 음악과 극의 호흡,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의 압력. 페뤼숑은 그것들을 하나씩 끌어올리면서도 전체적인 호흡을 잃지 않았다. 계속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한순간의 폭발적인 효과를 위해 전체를 희생하지 않았고, 반대로 전체적인 그림만 바라보다가 순간순간의 긴장을 놓치지도 않았다. 거대한 그림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그림을 이루는 선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금관을 자제시킨 점이 흥미로웠다. 금관의 포르테를 가급적 줄이면서 전체 악단과의 소리 균형을 맞추었다. 그래서 ‘발퀴레’ 마지막에서 “오직 두려움을 모르는 영웅만이 그 불길을 뚫고 그녀를 깨울 수 있다”라는 다음 영웅의 출현을 암시하는 보탄의 대사 후 작렬하는 트럼펫과 트롬본의 지크프리드 주제가 억제되어 강렬한 면은 좀 떨어졌지만 ‘장송곡’에서는 장엄하고 숭고했다.
부천필하모닉이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아쉬움도 컸다. 개인의 기량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고, 단기간의 연습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조직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한계가 있었다. 바그너는 음표만 정확하게 연주한다고 끝나는 음악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극을 이해하고, 그 극의 호흡을 오케스트라가 함께 가져가야 한다. 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한 음도 틀리지 않으며, 악보에 적힌 것을 완벽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이번 공연에서 발생한 개별적인 실수나 잘못을 굳이 하나하나 꼬집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극을 따라가던 관객을 갑작스럽게 보탄의 창에 찔린 듯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말 그대로 '대참사'에 가까운 순간들이 있었던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④ 바그너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
음정과 앙상블, 캐릭터의 체화, 독일어 텍스트의 전달, 무대적 행위, 오케스트라의 기량과 성숙도 등 여러 지점에서 미숙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 미숙함은 동시에 앞으로의 성장을 위해 무엇을 보완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었다.
21세기의 오페라하우스가 과거의 걸작을 어떤 방식으로 현재화해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그 모든 미학적·연출적 담론에 앞서 관객에게 도달해야 하는 것은 결국 음악적 만족과 극적 설득력이다. 아무리 훌륭한 의도와 야심을 가진 프로덕션이라도 무대 위에서 음악과 인물이 살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 의도는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동시에 관객에게 오페라를 보는 즐거움이 완성된 명작을 감상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프로덕션이 시행착오를 거치며 자신만의 문법을 찾아가는 과정, 낯선 레퍼토리에 도전한 성악가들이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작품을 조금씩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 역시 오페라가 주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바그너는 완성된 도착점이라기보다 하나의 출발점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무엇보다 기대되는 것은 이번 무대의 경험이 다음 무대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성장으로 증명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바그너는 가수에게도, 듣는 이에게도 쉽게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그 문을 통과한 사람은 이전과 같은 가수, 이전과 같은 음악 애호가로 돌아가기 어렵다. 이번 공연이 이들에게 바로 그런 통과의례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다른 극장, 다른 프로덕션에서 이들이 다시 바그너를 부르고 들을 때, 이번 무대에서 드러났던 미숙함이 얼마나 극복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또한 관객으로서 기다려볼 만한 일일 것이다.
바그너를 한국에서 듣는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특별한 경험이었다. 거대한 ‘링’을 한국에서 만날 수 있게 해준 모든 음악인과 제작진에게 다시 한번 깊은 경의를 표한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