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0일(목)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프로그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제1번 g단조, BWV 1001,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제2번 a단조, BWV 1003,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파르티타 제2번 d단조, BWV 1004
① 정통 클래식 공연의 진수
무반주로 펼쳐진 한수진의 시간은 신의 음성과 숨결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었던, 오직 음악만이 우선시된 무대였다. 이렇게 학술적이고 진중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무대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자 감사한 일이다. 불이 꺼진 객석에 오직 무대만을 비추는 조명, 숨을 죽인 채 소리에만 집중하는 관객.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상태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연주가 시작되면 일체의 대화와 잡담이 허용되지 않는 정통 클래식 공연의 진수를 오롯이 누리는 시간이었다. 정신을 집중시키고 귀와 온몸으로 듣는 감상의 예술, 그것이 음악이다.
② 파르티타 2번 4악장 ‘지그’와 한수진의 정체성
여리고 유연한 도입과 활과 현의 마찰로 빚어지는 소리의 공명.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특히 파르티타의 근간이 무곡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듯, 우아함과 춤으로서의 움직임이 크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장음(Long Tone)에서는 다소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는데, 이는 한수진 특유의 활을 길게 잡고 크게 사용하는 보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크고 강하며 건강한 소리였고, 다이내믹의 폭 또한 넓었다. 1부의 양 푸가에서는 집요함과 끈덕짐이 살아 있었다. 거미줄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실타래를 풀어가듯, 어느 한 성부에 머무르지 않고 주제를 끊임없이 부각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단조 소나타의 종악장 Allegro에서는 알레그로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Presto에 육박하는 템포를 택했고, 그 속에서 만들어낸 다이내믹의 극적인 대조는 듣는 이의 긴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무엇보다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르티타 2번 제4악장 ‘지그’였다. 지그가 영국에서 유래한 빠르고 대위법적인 구조의 춤곡이며, 그 안에서 주제와 응답이 교차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날 한수진의 해석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1부에서 들려준 푸가의 요소와도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성장하고 지금까지 영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과도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혈통과 국적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 그녀가 성장하며 체득한 영국적 감수성이 바흐의 지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빠르고 흥겨운 흐름 속에서도 대위적인 구조를 놓치지 않는 그녀의 해석은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 오늘 한수진이 들려준 바흐는 과거의 박제된 바흐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수진이라는 연주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다시 채색한, 지극히 그녀만의 바흐였다.
③ 한수진의 바흐, 과거가 아닌 그녀만의 시간
그런 점에서 2부의 선택은 오히려 여러 가지 질문을 남긴다.
왜 보면대를 두고 악보를 보며 연주했을까?
필자는 3년 전인 2023년 2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아드리엘 김이 지휘하고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연주한 막스 리히터의 ‘레볼루션’에서 그의 ‘비발디 사계 리컴포즈드’를 처음 들었다. 그때 선보인 음악에서 한수진의 방향성과 음악적 성격에 깊게 동화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1년 뒤인 2024년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그녀의 연주를 찾았을 때, ‘사계’ 가운데 겨울을 제외한 9곡만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적잖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번 공연에서도 2부에 놓인 보면대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남았다. 물론 연주자가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수진이라는 연주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정확한 음표의 재현을 넘어, 악보 너머에서 음악을 자신의 언어로 완전히 소화해 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욕심일 수 있겠지만,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작품만을 선택한 것 역시 개인적으로는 다소 찜찜한 여운으로 남았다.
올해 2월에는 불가리아 출신의 스베틀린 루세브가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을 연주했다. 금호문화재단의 ‘스페이스’ 시리즈에서는 음악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공간’을 금호아트홀로 옮겨놓는 큐레이션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교수 김다미가 5월 7일 바흐 소나타 3번 다장조와 파르티타 2번을 연주했다. 그리고 한수진의 무대가 있은 지 사흘 뒤에는 아우구스트 하델리히 역시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회에서 바흐 파르티타 2번을 연주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수진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연주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의무가 아니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어떤 작품을 제외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연주자의 예술적 판단이다. 전곡 연주가 반드시 부분 연주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날의 한수진이 보여준 바흐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들은 바흐가 너무나 선명했기에, 더 듣고 싶었다. 한수진만의 색깔로 채색된 바흐를 한 곡 더, 한 악장 더,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 작품 전체로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날 공연의 아쉬움은 연주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매우 훌륭했기에 더 욕심이 났고, 아주 깊었기에 그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무반주 바이올린이라는 가장 적나라한 형식 안에서 한수진이 보여준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음악가가 평생 축적해 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과거의 바흐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한수진의 바흐였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2026년 9월 10일(목)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프로그램: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제1번 g단조, BWV 1001,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소나타 제2번 a단조, BWV 1003,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파르티타 제2번 d단조, BWV 1004
① 정통 클래식 공연의 진수
무반주로 펼쳐진 한수진의 시간은 신의 음성과 숨결을 조금이라도 가까이에서 호흡할 수 있었던, 오직 음악만이 우선시된 무대였다. 이렇게 학술적이고 진중한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무대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자 감사한 일이다. 불이 꺼진 객석에 오직 무대만을 비추는 조명, 숨을 죽인 채 소리에만 집중하는 관객. 무대와 객석이 분리된 상태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연주가 시작되면 일체의 대화와 잡담이 허용되지 않는 정통 클래식 공연의 진수를 오롯이 누리는 시간이었다. 정신을 집중시키고 귀와 온몸으로 듣는 감상의 예술, 그것이 음악이다.
② 파르티타 2번 4악장 ‘지그’와 한수진의 정체성
여리고 유연한 도입과 활과 현의 마찰로 빚어지는 소리의 공명.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특히 파르티타의 근간이 무곡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듯, 우아함과 춤으로서의 움직임이 크고 선명하게 드러났다. 장음(Long Tone)에서는 다소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는데, 이는 한수진 특유의 활을 길게 잡고 크게 사용하는 보잉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크고 강하며 건강한 소리였고, 다이내믹의 폭 또한 넓었다. 1부의 양 푸가에서는 집요함과 끈덕짐이 살아 있었다. 거미줄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실타래를 풀어가듯, 어느 한 성부에 머무르지 않고 주제를 끊임없이 부각시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가단조 소나타의 종악장 Allegro에서는 알레그로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Presto에 육박하는 템포를 택했고, 그 속에서 만들어낸 다이내믹의 극적인 대조는 듣는 이의 긴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무엇보다 이날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파르티타 2번 제4악장 ‘지그’였다. 지그가 영국에서 유래한 빠르고 대위법적인 구조의 춤곡이며, 그 안에서 주제와 응답이 교차한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날 한수진의 해석은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1부에서 들려준 푸가의 요소와도 맞닿아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영국으로 이주해 성장하고 지금까지 영국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과도 자연스럽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혈통과 국적이라는 단순한 구분을 넘어, 그녀가 성장하며 체득한 영국적 감수성이 바흐의 지그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고 해야 할까. 빠르고 흥겨운 흐름 속에서도 대위적인 구조를 놓치지 않는 그녀의 해석은 이날 공연의 백미였다. 오늘 한수진이 들려준 바흐는 과거의 박제된 바흐가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한수진이라는 연주자가 자신의 경험과 감각으로 다시 채색한, 지극히 그녀만의 바흐였다.
③ 한수진의 바흐, 과거가 아닌 그녀만의 시간
그런 점에서 2부의 선택은 오히려 여러 가지 질문을 남긴다.
왜 보면대를 두고 악보를 보며 연주했을까?
필자는 3년 전인 2023년 2월 롯데콘서트홀에서 아드리엘 김이 지휘하고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이 연주한 막스 리히터의 ‘레볼루션’에서 그의 ‘비발디 사계 리컴포즈드’를 처음 들었다. 그때 선보인 음악에서 한수진의 방향성과 음악적 성격에 깊게 동화되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1년 뒤인 2024년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그녀의 연주를 찾았을 때, ‘사계’ 가운데 겨울을 제외한 9곡만 연주하는 것을 보고 개인적으로 적잖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번 공연에서도 2부에 놓인 보면대는 또 하나의 의문으로 남았다. 물론 연주자가 악보를 보며 연주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수진이라는 연주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단순히 정확한 음표의 재현을 넘어, 악보 너머에서 음악을 자신의 언어로 완전히 소화해 내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욕심일 수 있겠지만,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작품 가운데 절반에 해당하는 작품만을 선택한 것 역시 개인적으로는 다소 찜찜한 여운으로 남았다.
올해 2월에는 불가리아 출신의 스베틀린 루세브가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전곡을 연주했다. 금호문화재단의 ‘스페이스’ 시리즈에서는 음악가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공간’을 금호아트홀로 옮겨놓는 큐레이션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교수 김다미가 5월 7일 바흐 소나타 3번 다장조와 파르티타 2번을 연주했다. 그리고 한수진의 무대가 있은 지 사흘 뒤에는 아우구스트 하델리히 역시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회에서 바흐 파르티타 2번을 연주했다.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수진이라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연주자에게 요구할 수 있는 객관적인 의무가 아니다. 어떤 작품을 선택하고 어떤 작품을 제외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연주자의 예술적 판단이다. 전곡 연주가 반드시 부분 연주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날의 한수진이 보여준 바흐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들은 바흐가 너무나 선명했기에, 더 듣고 싶었다. 한수진만의 색깔로 채색된 바흐를 한 곡 더, 한 악장 더, 그리고 가능하다면 한 작품 전체로 듣고 싶었다. 그래서 이날 공연의 아쉬움은 연주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매우 훌륭했기에 더 욕심이 났고, 아주 깊었기에 그 끝까지 가보고 싶었다.
무반주 바이올린이라는 가장 적나라한 형식 안에서 한수진이 보여준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음악가가 평생 축적해 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끝에서 우리가 만난 것은 과거의 바흐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한수진의 바흐였다.
評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