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 17일(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이승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
프로그램: 아이브스 <대답 없는 질문>, 바버 첼로 협주곡, (첼로 앙코르: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다장조 전주곡) 번스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 거슈윈 <파리의 아메리칸> (관현악 앙코르: 번스타인 <맘보>)
오로지 20세기 미국 작품들로만 꾸려진 이번 국심 연주회의 지휘자는 2024년 말코 지휘 콩쿠르 우승자로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이승원이었다. 유럽에서 태동한 클래식 음악이 이민자들로 인해 미국에서 그들만의 음악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 년뿐이 안 된다. 토착문화는 있을지언정 미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질은 서로 다른 문화를 포용적으로 수용한 개방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흑인의 영가와 재즈를 백인들이 받아들였다. 이런 상반되는 성격, 즉 혼종(Hybrid)은 역시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에서 수입한 우리나라와는 기틀과 배경이 너무나 다른 환경이어서 비교가 힘들긴 하지만, 토착문화의 존재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예술작품을 단순히 형식적 측면만으로 평가하거나 감상하는 것은 그 작품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작품이 태어난 시대와 그 안에서 벌어진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향유를 위해선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밀착감이 있어야 할 건 자명하다. 클래식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모차르트, 베토벤에 한두 곡 정도 미국 또는 유럽권 외의 작품을 삽입하는 게 보통인데 All that American이라고 하니 연주자나 듣는 자 모두 새로운 도전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올 1월 데이비드 이가 지휘한 서울시향의 거슈윈이나 국립심포니의 이탈리아 발레나 무용 음악은 한국인의 DNA에는 맞지 않았다. 스윙이든 왈츠든 직접 춰 보고 그 흐름을 타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는 정서가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걸 누군가는 그루브, 누군가는 바이브, 누군가는 스피릿이라고 부르겠지만 오늘 2부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한 번이라도 보고 알아야 하고, <파리의 미국인> 같은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 서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겉으로만 들여온 피상적인 양키(Yankee) 요소가 아닌 아메리칸 라이프에 대한 경험과 어울림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원은 놀랍도록 유연하고, 팔색조였다. 그에게 실례가 되는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경음악 악단의 콘서트마스터요, 빅밴드 리더이자 클럽 발코니의 스테이지 액터였다. 작품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스토리텔링을 장악하였다. <심포닉 댄스> 첫 비팅부터 긴장감 넘치게 마치 무대 위의 커튼을 확 제끼며 등장하는 위대한 쇼맨 같은 음악적 연출을 하더니 154마디에서는 본격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의 <폭발물 미션> 주제와 같은 긴박감을 자아내었다. 쥐었다 폈다, 늘렸다 줄였다, 위아래로 쭉쭉 올리고 내리면서 <맘보>를 비롯한 생생하게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댄스가 펼쳐졌다. 코를 살랑거리는 클라리넷과 가벼우면서 상냥한 꽃을 든 아가씨 같은 <차차차>에서는 정중히 일어나 옆의 노부인을 일으켜 세워 한 바퀴 돌리고 싶게 만들었다. 가지각색으로 흐르는 미국의 대중음악적 요소가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면서, 때로는 시니컬하면서, 때로는 센티멘털하게 조절하는 능구렁이 같은 영리함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 미국의 문화와 사회상을 묘사한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한 개인의 성공과 사랑 쟁취를 위한 그 당시의 방탕하면서 무모한 상류사회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이런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의 산물인 ‘뉴올리언스 재즈’가 영화, 뮤지컬 등의 미디어로 확장되었는데 이승원은 어디에 맞추어도 손색이 없는 프로듀서로 이것들을 혼합해 나갔다. 이승원이 몸소 미국에서 버터와 햄버거 그리고 콜라를 마시면서 ‘아메리칸 사운드’를 체득한 게 느껴졌다. 이승원이 신시내티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영화 음악·뮤지컬·팝을 포함한 대중 친화적 레퍼토리를 자매 악단인 신시내티 팝스(Cincinnati Pops)의 포디움에 서면서 미국식 사운드와 리듬을 받아들여 체화하였다. 악기와 파트별로 다른 색깔로 그려진 그래프 같은 지휘였다. 세밀하게 시간과 박을 조정하여 피아노와 포르테 그리고 완급 조절을 악보에 입각하여 구현하였다. 리허설 마크 29의 Subito con brio나 45의 Andante ma non ritmo deciso에서는 뉴올리언스의 새벽이나 태양이 뜨는 플로리다의 아침에 처량하게 <싱잉 더 레인>을 부르고 나타나는 진 켈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트럼펫의 한탄조 선율을 읊조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조를 절절하게 노래하였다. 혼자 흥에 취해 춤을 추는 게 아닌 짧은 시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강한 밀착력과 교감으로 하나가 되어 미국 음악을 제대로 선보였다.
알반 게르하르트가 협연한 바버의 첼로 협주곡은 알반 게르하르트 아니면 실연으로 듣기 힘든 작품이다. 게르하르트가 앙코르로 택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다장조의 전주곡도 박자가 일정하다기보다는 재즈식의 변칙적인 흐름이었다. 거기에 20세기 최초의 미국 현대음악 정도로 문헌으로만 접하는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까지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어 프로그램을 선곡한 지휘자 이승원과 알반 게르하르트에 의해 지경의 신선한 확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게르하르트는 2부에서는 관현악단에 들어가 단원으로서 함께하였다.
ESG 경영으로 한 장짜리 팸플릿으로 일관했던 국심이 이번에는 3번 접을 수 있는 가로형 프로그램북을 제공하였는데 1장이든 3장이든 3백 장이든 제일 중요한 건 정보의 질(Quality)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학자가 적은 해설은 식자의 현학적인 몇 줄로 관객이 그걸 읽고 작품을 파악하고 즐기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심히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스테이지 팁에서의 박수인의 ‘파리의 아메리칸’이라는 다섯 줄은 위의 글이 그대로 반복된 것뿐인데 일인 이역인지…. 종이를 줄이는 환경적 차원이 아니라 관객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회적 책임까지 포함해야 진정한 가치가 완성되는데 동일한 문장까지 재활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립심포니의 뿌리와 정체성은 콘서트, 오페라, 발레 등의 극장 오케스트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꼬리표를 국립심포니에 달게 하고 색안경을 끼고 판단할 거냐고 혹자는 못마땅해할 수 있겠지만 이건 도리어 국립심포니만의 지울 수 없는, 또한 지워서도 안 되는 기질이자 특화된 장점이다. 1월 로베르트 아바도의 취임 연주회 때 무희들의 춤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만들었던 파리 그랜드 오페라의 전형이었던 베르디의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와 솜사탕같이 달콤했던 레스피기의 《환상적인 장난감 가게》에서도 이미 입증되었다. 작년 11월의 브루크너 4번이나 올 3월의 시벨리우스 2번 같은 순수 교향곡 레퍼토리와는 다르게 오늘 2부의 만족도는 논란이 없을 거다. 그 정체성이 강점으로 작용하였으니….
평: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
2026년 5월 17일(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지휘: 이승원,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
프로그램: 아이브스 <대답 없는 질문>, 바버 첼로 협주곡, (첼로 앙코르: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다장조 전주곡) 번스타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 거슈윈 <파리의 아메리칸> (관현악 앙코르: 번스타인 <맘보>)
오로지 20세기 미국 작품들로만 꾸려진 이번 국심 연주회의 지휘자는 2024년 말코 지휘 콩쿠르 우승자로 자신의 커리어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 이승원이었다. 유럽에서 태동한 클래식 음악이 이민자들로 인해 미국에서 그들만의 음악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기 시작한 건 불과 100여 년뿐이 안 된다. 토착문화는 있을지언정 미국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질은 서로 다른 문화를 포용적으로 수용한 개방에서부터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흑인의 영가와 재즈를 백인들이 받아들였다. 이런 상반되는 성격, 즉 혼종(Hybrid)은 역시 클래식 음악의 불모지에서 수입한 우리나라와는 기틀과 배경이 너무나 다른 환경이어서 비교가 힘들긴 하지만, 토착문화의 존재와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예술작품을 단순히 형식적 측면만으로 평가하거나 감상하는 것은 그 작품이 지닌 본래의 의미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술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작품이 태어난 시대와 그 안에서 벌어진 사회적, 문화적 사건들을 이해해야 한다. 향유를 위해선 문화에 대한 이해와 밀착감이 있어야 할 건 자명하다. 클래식이라고 하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모차르트, 베토벤에 한두 곡 정도 미국 또는 유럽권 외의 작품을 삽입하는 게 보통인데 All that American이라고 하니 연주자나 듣는 자 모두 새로운 도전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올 1월 데이비드 이가 지휘한 서울시향의 거슈윈이나 국립심포니의 이탈리아 발레나 무용 음악은 한국인의 DNA에는 맞지 않았다. 스윙이든 왈츠든 직접 춰 보고 그 흐름을 타지 않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느낄 수 없는 정서가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걸 누군가는 그루브, 누군가는 바이브, 누군가는 스피릿이라고 부르겠지만 오늘 2부의 프로그램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한 번이라도 보고 알아야 하고, <파리의 미국인> 같은 “시골 영감 처음 타는 기차놀이” 서사에 대해 알아야 한다. 겉으로만 들여온 피상적인 양키(Yankee) 요소가 아닌 아메리칸 라이프에 대한 경험과 어울림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승원은 놀랍도록 유연하고, 팔색조였다. 그에게 실례가 되는 표현이 될지 모르겠지만 경음악 악단의 콘서트마스터요, 빅밴드 리더이자 클럽 발코니의 스테이지 액터였다. 작품들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스토리텔링을 장악하였다. <심포닉 댄스> 첫 비팅부터 긴장감 넘치게 마치 무대 위의 커튼을 확 제끼며 등장하는 위대한 쇼맨 같은 음악적 연출을 하더니 154마디에서는 본격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7》의 <폭발물 미션> 주제와 같은 긴박감을 자아내었다. 쥐었다 폈다, 늘렸다 줄였다, 위아래로 쭉쭉 올리고 내리면서 <맘보>를 비롯한 생생하게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댄스가 펼쳐졌다. 코를 살랑거리는 클라리넷과 가벼우면서 상냥한 꽃을 든 아가씨 같은 <차차차>에서는 정중히 일어나 옆의 노부인을 일으켜 세워 한 바퀴 돌리고 싶게 만들었다. 가지각색으로 흐르는 미국의 대중음악적 요소가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면서, 때로는 시니컬하면서, 때로는 센티멘털하게 조절하는 능구렁이 같은 영리함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1920년대 미국의 문화와 사회상을 묘사한 소설인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한 개인의 성공과 사랑 쟁취를 위한 그 당시의 방탕하면서 무모한 상류사회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 있다. 이런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의 산물인 ‘뉴올리언스 재즈’가 영화, 뮤지컬 등의 미디어로 확장되었는데 이승원은 어디에 맞추어도 손색이 없는 프로듀서로 이것들을 혼합해 나갔다. 이승원이 몸소 미국에서 버터와 햄버거 그리고 콜라를 마시면서 ‘아메리칸 사운드’를 체득한 게 느껴졌다. 이승원이 신시내티 심포니의 부지휘자로 활동하며 영화 음악·뮤지컬·팝을 포함한 대중 친화적 레퍼토리를 자매 악단인 신시내티 팝스(Cincinnati Pops)의 포디움에 서면서 미국식 사운드와 리듬을 받아들여 체화하였다. 악기와 파트별로 다른 색깔로 그려진 그래프 같은 지휘였다. 세밀하게 시간과 박을 조정하여 피아노와 포르테 그리고 완급 조절을 악보에 입각하여 구현하였다. 리허설 마크 29의 Subito con brio나 45의 Andante ma non ritmo deciso에서는 뉴올리언스의 새벽이나 태양이 뜨는 플로리다의 아침에 처량하게 <싱잉 더 레인>을 부르고 나타나는 진 켈리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트럼펫의 한탄조 선율을 읊조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와 애조를 절절하게 노래하였다. 혼자 흥에 취해 춤을 추는 게 아닌 짧은 시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강한 밀착력과 교감으로 하나가 되어 미국 음악을 제대로 선보였다.
알반 게르하르트가 협연한 바버의 첼로 협주곡은 알반 게르하르트 아니면 실연으로 듣기 힘든 작품이다. 게르하르트가 앙코르로 택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3번 다장조의 전주곡도 박자가 일정하다기보다는 재즈식의 변칙적인 흐름이었다. 거기에 20세기 최초의 미국 현대음악 정도로 문헌으로만 접하는 아이브스의 <대답 없는 질문>까지 한 자리에서 들을 수 있어 프로그램을 선곡한 지휘자 이승원과 알반 게르하르트에 의해 지경의 신선한 확장을 가져올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게르하르트는 2부에서는 관현악단에 들어가 단원으로서 함께하였다.
ESG 경영으로 한 장짜리 팸플릿으로 일관했던 국심이 이번에는 3번 접을 수 있는 가로형 프로그램북을 제공하였는데 1장이든 3장이든 3백 장이든 제일 중요한 건 정보의 질(Quality)이다. 그런 면에서 음악학자가 적은 해설은 식자의 현학적인 몇 줄로 관객이 그걸 읽고 작품을 파악하고 즐기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심히 의문이 든다. 더군다나 스테이지 팁에서의 박수인의 ‘파리의 아메리칸’이라는 다섯 줄은 위의 글이 그대로 반복된 것뿐인데 일인 이역인지…. 종이를 줄이는 환경적 차원이 아니라 관객에게 유의미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사회적 책임까지 포함해야 진정한 가치가 완성되는데 동일한 문장까지 재활용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원하든 원하지 않든 국립심포니의 뿌리와 정체성은 콘서트, 오페라, 발레 등의 극장 오케스트라이다. 언제까지 이런 꼬리표를 국립심포니에 달게 하고 색안경을 끼고 판단할 거냐고 혹자는 못마땅해할 수 있겠지만 이건 도리어 국립심포니만의 지울 수 없는, 또한 지워서도 안 되는 기질이자 특화된 장점이다. 1월 로베르트 아바도의 취임 연주회 때 무희들의 춤이 눈앞에 아른거리게 만들었던 파리 그랜드 오페라의 전형이었던 베르디의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와 솜사탕같이 달콤했던 레스피기의 《환상적인 장난감 가게》에서도 이미 입증되었다. 작년 11월의 브루크너 4번이나 올 3월의 시벨리우스 2번 같은 순수 교향곡 레퍼토리와는 다르게 오늘 2부의 만족도는 논란이 없을 거다. 그 정체성이 강점으로 작용하였으니….
평: 성용원(작곡가, 본지 상임평론가)